복음과 믿음
(히 11:24-26) 모세의 고난 본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46강-히11장,24-26(모세의,고난)-heb020519.mp3
|
이근호
모세의 고난
2002년 5월 19일 46강
본문 말씀 :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함'의 차이점은 고난에 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에는 고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할 때부터 고난이 찾아들었습니다. 보통 말들 하기를, 하나님의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그 때부터 슬픔은 끝나고 기쁨과 행복만이 찾아든다고 합니다. 모세는 진짜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 진짜 하나님께서 믿음 좋은 모세에게 고난을 주시는 겁니다. 여기서 평소에 생각하는 하나님과 핀트가 어긋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보고, 성경을 많이 보시고 설교를 자주 들으셔야 됩니다 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러하지 않으면 상식적인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에 남아서 축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잘못된 하나님을 가지고 참된 하나님이라고 우기고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고통과 고난을 배제하고 좁은 길을 철회시킨 다음 남은 여러 요소들을 한데 뽑아서 만든 하나님은 참되게 살아계신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자면 이렇게 됩니다. 세상 일이 자기 뜻대로 잘된다 싶으면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다가 뭔가 일이 꼬이고 잘 안된다 싶으면 그 하나님은 자신의 분풀이의 대상으로 바뀝니다. 졸지의 변질자로 전락합니다. 바로 이런 자들에게 종교 기업가들과 사기꾼들이 붙기 시작합니다. "내 시킨대로 하시면 전에 잘 나가던 것처럼 원상회복 될 것입니다"라는 달콤은 말을 가지고 붙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좋으신 분이 당신의 태도가 불량해서 그래서 사업이 잘 되는 겁니다"라고 협박 반, 회유 반으로 나갑니다.
관심사가 자기에게 쏠리니까 이런 현상이 생깁니다. "나는 죽어도 손해보고는 못참는 인간이야 기어이 원상복귀 하고야 말리라"라고 오기를 부립니다. 진짜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시면 여러분의 고통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의 고통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고통만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의 고통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진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산 채로 태우는 제사를 드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하는 자식을 내다 버리는 아픔이 지금 하나님의 심정이요 아픔인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런 분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면서 총동원되는 아픔이 이런 아픔입니다.
자신의 고통 문제 해결하려고 신을 찾고 종교를 찾으면 오늘 절이나 가까운 교회에 나가시면 됩니다. 우리는 "정말 나같이 나쁜 인간을 구원하시면서 주님이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를 생각하면서 교회 나오셔야 합니다.
흔히 성령, 성령이라고 하면서 짜릿한 것, 뜨거운 것, 희안한 것, 신비적인 것을 연상하기 쉬운데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께서는 탄식하는 분으로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보고 가슴앓이 하시는 그 탄식과 더불어 성령이 임함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못난 놈, 나는 그토록 너를 사랑하건만 너는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느냐?"하시면서 탄식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고통을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책입니다. 뚜껑이 펼치는 순간에 그속에서 주님의 탄식과 한숨소리가 나오고 채찍 맞는 소리가 나오고, 신음소리와 아픔 소리도 나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고난 받는 소리도 나오지요. 우리는 이런 소리가 싫어서 성경 뚜껑을 꽉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세의 고통은 같이 동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당하는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시켜 붙여준 그 백성들입니다.
26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이라고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능욕이란 능멸하다, 이유없이 무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면서 무엇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하느냐? 그만두지 말이야" 모세도 할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했느냐?" 라고 말입니다.
출애굽기 3:7에 보니, 애굽에서 하나님 백성이 고통 중에 부르짖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애굽이 아닌 나라로 이동시키는 과업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애굽이란 나라에 학대받고 어려운 생활을 한다고해서 하나님께서 그 애굽 나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나라에서 행복하고 성공하고 출세토록 하기 위해 모세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고통 자체를 면제해 주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까지 데려 오라고 모세를 파견시킨 겁니다. 사람이 교회다니고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단도 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곳까지 인도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애굽같이 이 세상 자체에서 성공하고 생존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곳에서 빼내어 져서 하나님 손수 마련하신 나라에 도착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보내시고, 모세도 보내시고, 성령님도 보내신 것입니다. 목사가 되어 보면, 교인들이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을 보게 되면 은근히 부화가 나요. "당신들이 정말 예수님을 사랑 안하고 밉고 안좋아하고 관심조차도 없습니까? 나 목사는 어디 예수님이 좋아서 이 짓하고 있는 줄 아닙니까? 예라 모르겠다, 나도 예수 버린다. 단지 교인들만 어떻게든 끌어 모으자. 교인 장사만 되면 그만이다."하는 식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우리의 실상이요 본색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벌리시는 작업에 감탄하고 감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싫어하는 사람을 예수 좋아하는 사람으로 바꾸시는 놀라운 일을 실행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목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네가 바뀌고 어떻게 내가 바뀌느냐" 말입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주식해서 집 한 채 날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심판받을 때 자기가 장만한 집 한 채 들고 심판받습니까? "좋은 집 가졌구나 천국가거라, 어 좁은 집에 사네 지옥가거라"하십니까?
마지막 심판 받을 때는 있는 집도 날려야 합니다. 학벌이나 재산이고 소용없고 벌거숭이 된 채로 받는 겁니다. 이 점을 모세가 미리 알았던 것입니다. 애굽의 속성은 치장과 소유의 과다로 경쟁하는 세계입니다. 이런 세계 속에서 생활하던 자들이 지금 모세에 이끌려 하나님 발 앞에까지 이동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몰랐던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일입니다.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자신의 면류관조차 벗어서 하나님께서 바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되기의 첫 번 장면은 자신에게 일어난 신상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르짖고 원망하는 그런 식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대들고 따지는 겁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모든 만사가 다 주님의 뜻대로 되어졌나이다"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영광돌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광야라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선택과목이 아닙니다. 반드시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미 압니다.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같이 따라오는 백성들은 그런 인생의 목적이나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나중에 좋은 나라에 가고 나중에 잘 사는 것이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이 차이가 바로 고난을 유발시킨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자의 현실성 있는 다급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내 식솔들이 그날 그날 양식 챙기고 버텨내느냐에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했습니다. 모세의 마음가짐은 하나님쪽으로 떠나겠다는 마음가짐이고, 백성들의 마음 가짐은 여차하고 도로 애굽으로 귀환하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민수기 14:3에 보면,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빠져 나가자고 종교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종교란 생존 문제를 보다 손쉽게 해결해 보자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좀 더 여유있게 살고자 신을 찾고 부처를 찾는 겁니다. 그런데 난데 없이 모세가 등장해서 "어이, 여기서 나가자. 나가는 것이 해결책이다"라고 나와 버리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래 한 번 비교해 봐? 지금 여기 생활보다 더 나으면 나갈것이고 만약에 도중이라도 더 못하고 되면 두말 없이 도로 들어와야지"라고 마음먹을 것입니다. 일종의 흥정이요 거래입니다. "에프터 서비스가 괜찮아?"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드시 이 '광야'라는 장치는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꿈을 잃게 만드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저런 점을 못 느끼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소위 '긍정적인 의식', '적극적 사고 방식', 그리고 세상을 볼 때 좋은 것만 골라서 뽑아 보는 것으로 습관 때문에 정작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아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뛰어남을 잘남과 훌륭함과 정당함으로 버티려고 자의식를 키워온 효과입니다. 과연 모세가 당한 고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민수기 14:9-10보면,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볼 때에 모세,아론 편에 서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성경 해석이 전혀 안됩니다. 우리는 모세의 보고 손을 들고 때려 죽이려고 하는 그런 무리 속의 일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의 분노에 동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왜 우리 하나님이 무서운 심판주이신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의 본심도 또한 이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극도의 미움과 반감과 원한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비로소 십자가의 의의가 심판의 의미임을 성령 안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정말 예수 한 번 사랑해 볼려고 그토록 오랫동안 노력했고 하나님 사랑해 보려고 그렇게 애썼지만 하나님은 도대체 나에게 돌아온 것이 뭐가 있는가? 정말 하나님이 밉다. 에라 모세야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나는 훌륭하고 나는 착실하며 최고의 신앙이라고 자처했는데 그런데 이 나 같이 말도 안되는 인간을 위하여 아브라함 자기 아들을 죽이듯이 하나님께서 귀한 아들을 내 앞에서 죽도록 하셨구나"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오늘 민수기를 통해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밝혀집니다. 흔히 불교에서 "욕심을 버리라"고 강요하지만,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들 불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우리도 욕심을 버리고 싶어요. 남이 안 가르쳐주어도 우리 양심이 이런 정도는 압니다. 욕심이 해롭다는 것, 욕심이 나를 파괴시킨다는 것 잘 압니다. 하지만 자꾸 생기는 것을 어떻하란 말입니까? 문제는 욕심이 왜 생기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욕심이란 잘못된 방향에 의해 끌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기존의 있는 세력에서 안떨어지니까 생기는 것이 욕망이요 욕심입니다. 예를 들면 고무줄을 아무리 늘어봤자 놓는 순간이 총알같이 도로 원위치합니다. 이처럼 욕망이란 누군가에 의해서 우리가 완벽하게 붙잡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저지르고 안저지르고 할 입장이 못됩니다. 그저 날마다 욕심 낼 수 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욕망이란 강력한 고무줄입니다. 내가 일부러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짓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이 당연한 현실을 왜 우리가 부인합니까?
성경에서 "인간이 죄인이다"나오면 우리는 "아멘. 옳소이다"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세요. 자꾸 아닌 것으로 여기지 마시고 말입니다. 고무줄이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일을 발생시키게 되면 감추었던 욕망은 또다시 발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지 못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배워야 하고 이 세상에서 절실하게 느껴야 합니다. "내가 안되는구나 안되는구나, 주님이 되는구나 주님이 되는구나"하고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놔 주세요. 그러면 주님이 와서 우리 자신을 가지고 가실 겁니다. 자신이 자신을 안 놓으면 마귀의 노리게 감이 됩니다.
평생을 두고 농락당할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니까 주님 오셨구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민수기 11:5에 보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놓고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하나님에 대해서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본심이 드러날 때 하나님의 심판도 함께 나타납니다. 우리가 별로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음을 알려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무서운 분이고 심판주로 나타나십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지적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죽은 것이 아니라 다윗이 도리어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비로소 아는 순간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기쁜 순간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계시다는 것과 계속 간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각가지 사건을 일으켜 나갑니다. 마치 옛날 광야 때처럼 말입니다.
광야는 통과하는 곳이 아닙니다. 애굽 지나서 광야 지나서 천국, 이것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군에 제대하듯이 제대 하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못들어감을 확실히 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수용하는 자만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광야라는 곳은 시간 보낸다고 졸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 곳은 애굽이 아니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모세처럼 앞서 우리를 찾아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점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놓쳐 버리고 애굽에서 조작해낸 하나님을 찾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아무 것도 얻을 자격도 없음을 절감하면서 우리 원망속에서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그 은혜를 함께 공유하는 저희들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6. 모세의 고난(히 11:24-26)
--------------------------------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찾아드는 ‘고난’ !!
오늘 본문에 모세의 믿음에 대해서 나오는데, 즉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좋아했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함’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고난’에 있다는 겁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에는 고난이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할 때부터 고난이 찾아들었다는 말이죠.
흔히 사람들이 ‘좋으신 하나님’ 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과 함께 하면 그때부터 슬픔은 끝나고 기쁨과 행복만이 찾아든다” 라는 겁니다. 모세는 진짜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런데 진짜 하나님께서 믿음이 좋은 모세에게 무엇을 하십니까? 고난을 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평소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핀트가 서로 어긋나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평소에 여러분에게, “성경을 많이 보시고 설교를 자주 들으셔야 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식적인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에 남아서 계속해서 축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잘못된 하나님을 가지고 참된 하나님이라고 우기면서 정당화를 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의 고통과 고난을 배제하고 좁은 길을 철회시킨 다음에, 그 남은 요소들을 한 군데로 모아서 하나님을 만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 뜻대로 잘된다 싶으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다가도, 뭔가 꼬이고 잘 풀리지 않는다 싶으면, 그 하나님은 자신의 분풀이 대상으로 바뀌고 마는데, 즉 졸지의 변질자로 전락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자들에게는 종교 사기꾼들이 붙기 시작합니다. “지금 많이 힘드시죠?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원상회복이 될 것입니다” 라는 하면서, 아주 달콤한 말로서 속삭인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원래 좋으신 분인데, 당신 태도가 불량해서 사업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경을 좀 써세요” 라고 하면서 협박 반, 회유 반으로 나간다는 겁니다.
관심이 자기에게 쏠리니까 이런 현상이 생기는데, 그래서 “나는 죽어도 손해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인간이야. 기어이 원상복귀를 하고야 말리라” 라고 하면서 오기를 부린다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누구인가?” 라고 하면서, 거기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마귀가 달라붙어서 그런 자들의 영혼을 유린한다는 말이죠.
성경을 보시면, 거기에 여러분의 고통이 나오는 것이 아닌데, 예수님의 고통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고통만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의 고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아들을 산 채로 태우는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이 평소에 그 자식을 미워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닌데, 아브라함이 자기의 전부와 바꾸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자식인데, 그러면 왜 그런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자식을 내다버리는 아픔, 그게 지금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분이 진짜 하나님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함에 있어서, 거기에 동원되는 아픔이 바로 이런 아픔이라는 말이죠.
자신의 고통문제를 해결하려고 신을 찾고 종교를 찾으려면, 오늘 같은 사월초파일에는 가까운 절에 가면 됩니다. 여기 갓바위에 가면 되는데, 사실은 갓바위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어요. 가까운 교회에 나가면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믿음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면서 주님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라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셔야 한다는 겁니다.
성령은 ‘탄식하는 분’ !!
흔히들 성령이라고 하면, 짜릿한 것, 뜨거운 것, 희한한 것, 신비적인 것을 연상하기 쉬운데, 하지만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은 ‘탄식하는 분’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보고 가슴앓이를 하시는 그 탄식과 더불어서 성령이 임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다시 말해서, “이 못난 놈아, 나는 그토록 너를 사랑하건만 너는 아직도 이 세상을 사랑하느냐?” 라고 하시면서 탄식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고통을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책인데, 여기에 온 우주의 비밀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의 뚜껑이 펼치는 순간 그 속에서 주님의 탄식과 한숨소리가 나오고, 채찍을 맞는 고통의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죠. 물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고난받는 소리도 나오는데, 우리는 이러한 소리가 듣기 싫어서 성경 뚜껑을 꽉 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즘은 지퍼까지 달아서 말이죠(ㅋㅋ).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 !!
모세의 고통은 자기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같이 동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당하는 고통인데, 하나님께서 붙여준 그 백성들로 인해서 말이죠. 그것을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 ‘능욕’ 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존심을 철저하게 유린을 당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야말로 난데없이 짓밟히는 것인데, 누구 때문에 말이죠? 자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 주님께서 우리 때문에 당했던 고난인데 말이죠.
그러면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면서 무엇 때문에 사서 고생을 하는가? 왜 그들을 광야로 데리고 나가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가? 그만두지 말이야” 라고 말이죠. 그러면 모세도 할 말이 있는데, “내가 하고 싶어했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다른 나라로 가자 !!
출애굽기 3장 7절에 보니,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라고 하는데, 애굽에서 자기 백성이 고통 중에 부르짖고 있음을 하나님께서는 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애굽이 아닌 다른 나라로 이동을 시키신다는 것이죠.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학대를 받고 어려운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 애굽에서 잘 살도록 해주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출 3: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행복하고 성공하고 출세를 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모세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고통 자체를 면제해주려고 모세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있는 곳까지 데려오라고 모세를 파견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장 12절에서,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출 3: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 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데, “사람이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죠. 다른 엉뚱한 소리는 하지 말고 한 마디로 대답을 해달라는 것인데, 그래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곳까지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라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애굽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생존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빼내서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엉뚱한 나라에 도착토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도 보내시고, 예수님도 보내시고, 성령님도 보내셨다는 겁니다.
목사가 되어서 교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보게 되면 은근히 부화가 나는데, “당신들이 정말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관심조차도 없는 것은 아닙니까? 나 목사는 어디 예수님이 좋아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라고 하는 마음이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나도 예수를 버린다. 교인들만 어떻게든 끌어 모으자. 장사만 되면 그만이다” 라는 식으로 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사실은 이게 우리의 실상이고 본색인데, 그러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벌이시는 작업에 감탄하고 감격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싫어하는 사람을 예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그러한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에 말이죠.
이 일은 목사가 설교를 잘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닌데, 물론 장로님의 기도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정말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네가 바뀌고, 어떻게 내가 바뀌는지, 그것을 같이 관람해보자”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를 하기를, “목사님, 주식을 해서 집 한 채를 날렸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화가 난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때, 어디 자기가 장만한 집을 한 채 들고 심판을 받습니까? “너는 정말 좋은 집을 가졌구나. 천국에 가거라. 너는 좁은 집에 사는구나. 지옥에 가거라” 라고 하시느냐는 말이죠.
시내산에서 만나자 !!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는 있는 집도 날려야 하는데, 학벌이나 재산과 같은 것은 소용이 없고, 그야말로 벌거숭이가 된 채로 받는다는 겁니다. 이러한 점을 모세가 미리 알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애굽의 속성은 치장과 소유로 경쟁하는 세계입니다. 즉 “누가 누가 잘하나?” 라는 것이죠. 이러한 세계에서 살던 자들이 지금 모세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발 앞에까지, 즉 시내산까지 옮겨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시내산에서 무엇을 합니까? 방금 본 출애굽기 3장 12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죠. 그 뒤에 이것이 계속해서 오는데, 즉 몰랐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겁니다. 정말 희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없이 태어난 인간인데, 그런데 나중에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이 되어있더라는 말이죠. 그리고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던지는데, 이게 마지막 최종장면이라는 겁니다.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그런데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하는고 하니까, 자기 신상 때문에 하나님에게 부르짖는데, 출발은 항상 그렇다는 말이죠.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대드는데, 그런데 마지막에는 면류관도 반납하면서,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광야는 필수적인데, 선택과목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모세는 이미 아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말이죠. 그래서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확정되었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하지만 같이 따라오는 백성들은 인생의 목적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현실적인 문제인 생존이 중요한데, 즉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겁니다.
그 차이로 인해서 고난이 유발되는데,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앞으로 좋은 나라에 가서 살고, 그리고 생명수가 흐르는 곳에서 헤엄을 치고 하는, 그런 것은 나중의 문제라는 말이죠. 지금 당장에 다급한 문제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내 식구들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가?” 라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습니까?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했는데, 즉 모세의 마음가짐은 완전하게 떠나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반면에 백성들의 마음가짐은 애굽보다 더 좋은 곳을 찾아서 모세를 따라왔는데, 그렇게 극대 극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때 그들의 주장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민수기 14장에 나오는데, 1절에서 3절입니다.
(민 14: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민 14: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민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
여기 3절에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라고 하는데, 하지만 사람들은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들어가려고 종교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은 현재의 생존문제를 더 손쉽게 해결해보려고 매달리는 것인데, 즉 조금이라도 더 풍요롭게 살고자 신을 찾고 부처를 찾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난데없이 모세가 등장해서 “어이, 여기서 나가자. 나가는 게 해결책이다” 라고 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래, 한 번 비교해 봐? 지금 여기 생활보다 더 나으면 나갈 것이고, 만약에 더 못하다고 여겨진다면 도중이라도 다시 돌아와야지” 라고, 그렇게 마음을 먹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일종의 흥정이고 거래인데, “애프터서비스가 괜찮아?”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광야는, 꿈을 잃게 만드는 영역 !!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이 ‘광야’ 라는 장치는,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꿈을 잃게 만드는 영역이라는 겁니다. 마치 사우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넣어놓은 것처럼, 그렇게 해서 힘을 완전히 쫙 빼버린다는 것이죠. 그것이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고 말이죠.
물론 여기에 대해서 “모세는 그렇게 고생했지만, 우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세처럼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사실은 그런 고생과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느끼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소위 긍정적인 의식, 적극적인 사고방식, 그렇게 이 세상을 볼 때 좋은 것만 골라서 보는 습관 때문에, 그만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아는 것을 포기해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기의 잘남과 훌륭함과 정당함으로 버티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숨쉬고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짓밟히고 있다는 것을, 자기 욕심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과연 우리가 얼마나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고 살아가는데, 남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권력도 그렇게 되어있는데, 그래서 가진 자는 계속해서 가지고, 없는 자는 계속해서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애굽 당시도 그러했고, 지금도 역시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러면 과연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서, 여기서 민수기 14장 9절과 10절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게 무슨 장면인고 하면,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데,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자 여호수아가 나서서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민 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민 14: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모세와 아론을 죽여라 !!
여기 10절에 보면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모세나 아론 편에 서서 “저 나쁜 놈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성경해석이 전혀 불가능하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세와 아론을 보고 때려죽이려고 하는, 그렇게 분노한 무리 속의 일원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도 이들의 분노에 공감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래야 하나님이 무서운 심판주임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본심도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이죠. 어떤 분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너무 신앙이 없는 것 같아” 라고 하시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극도의 미움과 반감과 원한을 가져보라는 겁니다. 그래야 비로소 십자가와 심판의 의미를 알게 되는데, 물론 성령 안에서 말이죠.
그러니 “나는 정말 예수를 한 번 사랑해보려고 그토록 오랫동안 노력했고, 하나님을 사랑해 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지만,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했지만, 하나님은 도대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는가? 정말로 하나님이 밉다. 에라이 모세야, 너 죽고 나 죽자!” 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들 때 비로소 성경말씀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야 “나는 훌륭하고, 나는 착실하며, 나는 최고의 신앙인이라고 자처했는데, 그런데 나 같이 말도 안 되는 놈을 위해서,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이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귀한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버리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에라이 모세야, 너 죽고 나 죽자!” 라고 할 때 비로소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욕심을 버려라 !!
이 민수기 14장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밝혀집니다. 흔히 불교에서 “욕심을 버려라” 라고 강요하지만, 그런데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어디서 나옵니까? 사실 불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도 욕심을 버리고 싶은데, 부처가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우리 양심도 그 정도는 안다는 겁니다. 욕심이 해롭다는 것, 욕심이 자기 자신을 파괴시킨다는 것을 잘 안다는 말이죠.
하지만 자꾸만 생기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러니 욕심이 왜 생기는지를 알아야만 하는데, 도대체 욕심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더 가지는 것이 욕심인가요? 성경에서 말하는 욕심이란, 잘못된 방향에 의해서 끌어가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즉 기존의 있는 세력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니까, 생기는 것이 욕망이고 욕심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고무줄을 아무리 늘어봤자, 놓는 순간에 총알같이 원위치를 하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죠. 이처럼 욕망이란 누군가에 의해서 완벽하게 붙잡혀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러니 자기가 저지르고 말고 할 입장이 전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날마다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있는데, 그러니 “죄를 내가 짓는다. 욕심을 내가 낸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아무리 전도를 하고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해도 자기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죠.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할 때는 은혜를 받았을지 몰라도, 내려오면 마치 여름철에 에프킬러를 뿌린 것처럼 그만 다 날아가고 없다는 겁니다. 물론 뿌릴 당시에는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3분만 지나면 어디선가 모기가 다시 등장한다는 말이죠.
욕망은, 고무줄과 같아서 !!
욕망은 그야말로 저쪽에서 강력하게 잡아당기는 고무줄과도 같은 것인데, 자기가 일부러 만든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가 죄를 지은 결과로 인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당연한 현실을 어떻게 우리 자신이 스스로 거부하고 부인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성경에서 “인간은 죄인이다” 라고 나오면, 여러분은 “아멘. 옳소이다” 라고 하면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는 죄인이 아냐.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새 사람이 될 거야” 라고 하면서, 자꾸 죄인이 아니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것은 회개가 아니고 반성이라는 겁니다.
욕망의 고무줄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데, 새로운 사건을 발생시키게 되면, 감추었던 욕망은 또 다시 발작하게 된다는 말이죠. 반야심경을 외우고 금강경을 외운다고 해서, 그게 해결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아하, 나는 나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구나” 라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광야에서 배워야 하고, 이 세상에서 절실하게 느껴야 합니다. “나는 안 되는구나. 역시 안 되는구나. 주님만 되는구나. 오직 주님이 되는구나” 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놔주세요. 너무 힘들게 하지 마세요. 그러면 주님이 가지고 가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놓아주지 않으면 그만 마귀의 노리게 감이 되고 마는데, 자기가 6명을 전도하면, 옆에서는 12명을 전도하고, 자기가 십일조를 하면 옆에서는 십이조를 하고 말이죠. 그러면 도저히 거기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데, 마귀에게 평생을 두고 농락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내가 부족하니까 주님이 오셨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 믿음에서 나온 열매들이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형제우애와 같은 것들인데, 그런 것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또한 그게 성령의 열매라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애굽에 있을 때처럼 해달라” 라는 것인데, 그러면 애굽에서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민수기 11장 5절에 보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라고 한다는 말이죠.
(민 11:4)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민 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애굽은 잊어라 !!
그러니 그들은 애굽에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지금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놓고, 그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자기들을 이 꼴로 만든 하나님에 대해서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데, 그래서 “애굽에 있던 것을 내놔라” 라고 하는데, 하지만 모세는 뭐라고 합니까? “애굽은 잊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데, 즉 극도의 상황에 처해서 인간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자기 본색이 드러나게 될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기도원에 가서 소나무를 붙들고 기도해도, 그런 것은 본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하늘나라만 이야기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될 때, 물론 자주 있을 수 없지만, 그럴 때 은근히 화가 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당신처럼 될까 싶어서 겁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정말 자기의 본심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자기는 자기만을 좋아한다는 것이 드러날 때,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데, 그야말로 무서운 심판주로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의 행위로 따진다면 처벌받을 수밖에 없음을 처음부터 일깨워주시는데, 즉 “너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모세가 아는데, 그러니 모세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백성들이 자기 주제도 파악하지를 못하면서 달려드니 말이죠.
그것은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나단 선지자가 지적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다윗은 확신했는데, 그래서 “제가 죽을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서 다윗은 죽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살았는데, 그것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에 제일 기쁜 순간은 언제인고 하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구나. 그리고 그분이 계속해서 나에게 간여하고 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인데,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이것보다도 더 큰 행복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각가지 사건을 일으켜 나가시는데, 즉 우리 속에 잠재되어있는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을 마구 들추어내신다는 겁니다. 마치 옛날의 광야 시절처럼 말이죠. 주식을 해서 집을 날리게 만들고, 교통사고가 나게 하고, 또한 부부싸움을 하게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광야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합니까? 고기가 없다고 하면서 돌아가자고 한다는 말이죠. 양식이 없다고 해서 양식을 주니, 이번에는 고기타령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낸다는 말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목사님, 이 광야를 과연 우리가 언제 통과할까요?” 라고 하신다면, 죄송하지만 광야는 통과하는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민수기 14장에 나오는데, 34절입니다.
(민 14:34)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천국은 들어가지 못한다 !!
여기 34절에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들은 40일 동안이나 정탐을 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를 못했는데, 그래서 그만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해서 40년 동안 뺑뺑이를 도는 곳이 바로 광야라는 겁니다.
그러니 “애굽을 떠나서 광야를 지나서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이, 그게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군에서 제대를 하듯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광야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천국은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만이 들어가게 하실 수 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공간이 광야이고, 또한 이 세상이라는 것이죠.
제가 장로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간호하는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이죠. 물론 본인이 들었으면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르겠는데, 아픈 것이 고통스러워서 빨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에 와있는 입장에서는 광야생활을 일찍 끝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방향이 저기 애굽 쪽이 아니라 이쪽이라는 말이죠.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 이 광야에서 오래 버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40년, 50년을 살아도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애굽에서 자꾸만 잡아당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정작 본인도 역시 괴롭다는 겁니다.
광야에서 오래 버틸 이유는 없어 !!
이 ‘광야’ 라는 곳은 시간을 보낸다고 졸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데, 즉 “우리가 살 곳은 애굽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되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세처럼 앞서서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것을 우리가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는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죄인인 이상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무엇을 해도 은혜라는 말이죠. ‘의’ 라는 것은 자기 행동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면에 ‘은혜’ 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날마다 용서해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은혜라는 말이죠.
따라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은혜를 받아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자기 행동이 옳다든지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죄인으로 남아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만 넘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놓쳐버리고 애굽에서 조작해낸 가짜 하나님을 쥐고 있으면서, 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야말로 아무 것도 얻을 자격도 없음을 절감하면서, 우리의 원망 속에서도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그 은혜를 함께 공유하는 저희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12 오후 6시에 마침. - 녹취 구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히브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히 11:29-31) 라합의 믿음 (0) | 2010.09.05 |
|---|---|
| (히 11:27-29) 모세와 유월절 (0) | 2010.09.05 |
| (히 11: 23-26) 모세 어머니의 믿음 (0) | 2010.09.05 |
| (히 11:22) 요셉의 믿음 (0) | 2010.09.05 |
| (히 11:20-21) 언약적인 축복 (0) | 2010.09.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