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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11: 23-26) 모세 어머니의 믿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1: 23-26) 모세 어머니의 믿음

정인순 2010. 9. 5. 11:52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45강-히11장,23-26(모세,어머니의,믿음)-heb020512.mp3

 

 

모세 어머니의 믿음

 

2002년 5월 12일 45강

 

본문 말씀 : 히 11:23-26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오늘은 야외에 나왔습니다. 날씨가 매우 화창합니다. 아까 불렀던 찬송가 78장에 보니,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많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라는 가사가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라면 이 아름다운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었기에 아름답다고 말들 합니다. 바깥에 나와 대 자연을 보니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세계가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자연만 만들어 놓고서 아예 손을 떼고 말았습니까? 이 아름다운 세계에서 왜 불의와 사기와 도적과 폭력과 살인이 일어 납니까?

 

집안에서 남에게 사기를 당했다든지 큰 우환이 생기고 난 뒤에 이 대자연을 보십시오. 과연 그래도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가사가 절로 나게 됩니까? 도리어 하나님에게 원망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세계에 왜 아름답지 못한 것이 함께 있는 겁니까? "이 대 자연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해서는 아니됩니다. 자칫하면 그냥 성의없이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됩니다.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 있으려면 '왜 이 세상에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는가?'도 같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파견 시켰습니다.

 

세상의 실상이 어떠하며 이 악한 세상의 힘이 긍극적으로 무엇을 겨냥하면서 활동하느냐를 나타내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름답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지 못한 또 다른 권세자가 이미 이 세상을 선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와 보니 우리가 점찍은 야외 예배 장소에 다른 천막들이 벌써 쳐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세력에 의해 선점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가까스로 모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미 세상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세력에 예수님을 배척해버렸습니다. 이 세상 밖으로 내몰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입니다.

 

과연 이 아름답지 못한 세력에 대해서 그냥 방관만 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목숨은 잃었지만 악의 무리가 최고의 무기로 삼는 죽음 속에서도 너끈하게 부활하심으로 그들은 이제 닭 쫓는 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뜻에 의해서 그들은 제거되고 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세상을 분리하려 오신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와 아름답지 못한 자의 분리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시지만 모세 당시에는 모세가 이 일을 담당해야 했습니다. 이것도 또한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흔히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벌리시는 아름다운 심판도 있다는 것을 놓치시면 안됩니다. 이 '아름다운 심판'까지 우리가 범위를 넓혀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봅시다.

 

저는 사람을 볼 때 다음과 같은 인식으로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재벌이라면, "저 사람은 과연 옳게 세상을 보고 있을까?"를 먼저 마음 속으로 묻는 버릇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재능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고 학식이 뛰어난 사람을 보게 되면, "저 사람은 과연 옳은 진리를 알고 있을까? 세상을 제대로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을 먼저 고려해 봅니다.

 

누가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감탄하면, "과연 저 여인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아는 분일까?"를 먼저 걱정하게 됩니다. 어떤 가족이 넓은 평수에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저 가족은 과연 복음을 알까?"가 궁금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 현실이란 하나님께서 아름다움을 위하여 만드셨고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심판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이나 진리를 모르는 자는 결국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쌍한 자를 부러워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세상을 분리하려 오셨습니다. 아름다운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으로 말입니다. 이 현실감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처신했습니다.

 

24-26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권력자의 일원이 되는 것을 거절하고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력을 더 큰 보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고 있기에 이런 쪽으로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만이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모세 어머니의 믿음이 나옵니다.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겠다"는 말씀을 본인들이 잘 믿는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막상 모세를 믿으라면 거부합니다. 이것은 옳지 않는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예수님 속에서 이미 모세의 속성이 다 포함된 예수님 상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재물을 거절하고 권력을 거절하니까 신앙인들에게 너무나도 큰 심적 부담을 준다고 여기고 반면에 예수님에 대해서 그냥 믿기만 하면 되니 전혀 심적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모세는 그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구세주입니다. 모세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세가 취한 태도를 그 당시 사회에게 옳은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원이고 뭐고 되지 못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분리를 이미 알았습니다. 따라서 기쁘게 세상을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코 억지로 세상의 재물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보면 '좋아하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과연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분리하심'이 곧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벌리시는 아름다운 진리임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니,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임금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을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니,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현실에 상관두지 않고 일관성있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을 그녀는 존중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목숨 부지와 무관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연관짓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그 당시 정치 상황에서는, 히브리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절대로 남자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막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강제로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 어머니의 믿음이 이러한 죽음의 힘 조차도 억압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15에 보면, 하나님께서 산파들에게 은혜를 주어서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를 살려내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모세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무려 석달을 감추어놓고 키웠습니다.

 

하지만 한계에 이르러자 모세의 어머니는 갈대 상자 안에 아기를 담아서 갈대가 무성한 강으로 띄어 보냅니다. 그리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가 보려고 몰래 갔습니다. 바로의 딸이 이 상자를 발견하자 지켜보던 누이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제가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유모를 구해드릴까요?" 했습니다.

 

그래서 친모인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 유모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그 친모가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바로의 딸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즉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모세가 곧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자입니다.

 

애굽이라는 현실 나라에서 구원받아야겠다고 모세의 말을 추종하는 자는 모세와 같은 운명, 물에서 건짐을 받는 무리들이 됩니다. 죽음에서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 아름다운 세계에서 아름답지 못하 것이 있다는 것은 곧 저주이요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답지 못한 세력들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죽음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운명이 그러했고 예수님의 운명도 그런 식으로 공격받았습니다.

 

따라서 여러분, 죽는다는 것은 곧 패배도 아니요 비진리도 아닙니다. 도리어 죽음에서도 빠져나오게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진리 말입니다. 모세의 이 당당함과 모세 어머니의 자유함을 우리도 갖고 있습니까?

 

죽는 것이 무서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못보고 있는 자가 되어 있는 무서운 일입니다. 자연 안에서의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을 논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벌리시는 아름다운 심판을 바라보고 하나님에 대해서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분리를 기뻐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도 그러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으로 기뻐하며 살아야 할까요? 만약 예배당 앞에 노래방이 있어 예배 마치면 곧바로 노래방에 가서 실컷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기뻐하며 예배 참석하게 될까요? 구원자를 알게 된 것을 실컷 노래하고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세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만 찾는 잘못된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모세의 기쁨처럼 이 세상에서 분리되는 기쁨이 계속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5. 모세 어머니의 믿음(히 1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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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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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워라 ♬

오늘은 우리가 야외에 나왔는데, 날씨가 매우 화창합니다. 아까 불렀던 찬송가 78장 가사를 보니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많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죠.

기독교 신자라면 당연히 이 세계를 하나님께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이것이 중요한데,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오늘 이렇게 모처럼 바깥에 나와서 대자연을 보니, 과연 그런 것만 같은데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상 이 아름다운 자연세계를 보면, 그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자연만 만들어 놓고서 아예 손을 떼고 말았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아름다운 세계에서 왜 사기를 치는 놈들이 있고, 도둑질을 하는 놈들이 있고, 살인까지 하는 놈들이 있느냐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가 개인적으로 사기나 강도를 당하고 나서 이 대자연을 바라보게 된다면, 과연 그래도 “주님이 만든 세계가 참 아름답습니다” 라고 하는 찬송이 저절로 나오느냐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을 원망을 하게 됩니까? 과연 어느 쪽이냐는 말이죠. 자기 아이가 중병에 걸려서 고통스러워한다면, 그래도 과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하면, 그 돌아가는 것도 아름다워야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조금만 들여다보면 아름답지가 못한데, 집집마다 우환거리가 없는 집이 없고, 병에 걸리지 않은 집이 없고, 그렇게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 집이 없다는 말이죠. 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눈물을 흘려야하고, 고생을 해야하고, 뼈마디가 쑤셔야 하느냐는 겁니다. 왜 아름다운 세계에 아름답지 못한 것이 이렇게 늘려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사람들은 대자연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수긍을 하더라도, 실제생활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더라는 겁니다. 자기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아름다운 세상이 아닌 힘든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라는 것과, “실제로는 이 세상은 아름답지 않더라” 라는 것을, 둘 다 똑바로 바라보면서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우리는 왜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라고 하는, 그 내력과 이유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파견, 그리고 배척받으심 !!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왜 힘이 듭니까? 왜 고통스러운 겁니까? 바로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말고 따로 누가 오셨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파견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아들을 파견하셨는지, 그렇게 해서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니라 험한 꼴을 당하게 하셨는데, 바로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만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야말로 비참하리만큼 힘든 인생을 사셨는데, 하나님이 되시는 그 아들조차도 이 땅에서 고생을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가지고 오신 그분이, 이 세상의 악한 사람들에게 의해서 배척을 받고 결국 자기의 생명까지 빼앗기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라는 겁니다.

뭔가 선점한 놈이 있는데 !!

그렇다면 아름다운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에서, 뭔가 아름답지 못한 무리가 있음을 우리는 감 잡을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악마가 선점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모이려고 한 장소가 여기가 아닌데, 거기는 누가 벌써 텐트를 치고 선점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척을 받아서 이리로 왔다는 말이죠(ㅋㅋ).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배척을 받아서 그만 바깥으로 쫓겨나고 말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이 세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을 하고 바깥으로 추방을 시켜버렸는지, 그것까지도 우리가 알아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그 계획을 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 “오늘 날씨가 참 좋구나.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이야” 라고 한다면, 그러면 태풍이 불고 비바람이 몰아치면 어떻게 합니까? “태풍이 참 아름답구나. 하나님이 잘 만드셨구나” 라고 할 겁니까? 뭔가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도,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고 엉뚱한 놈이 만들었지만, 그것도 함께 어울려서 이 세상이 형성되고 있음을, 우리가 거기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어진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주여, 주여!” 라고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알 수 없는 죄악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고, 또한 그런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을, 그것까지도 통 채로 우리가 알 수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물론 위로도 받고 말이죠. 하지만 과연 교회가 옳습니까? 교회를 세워놓으면, 과연 그렇게 교회를 세워놓은 것으로 옳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교회가 과연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그것을 우리가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만약에 1,000명의 교인들이 모인다고 하면, 과연 진리만을 전하느냐는 겁니다. 진리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야말로 구원의 복음만을 전하고 있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사람을 볼 때 다음과 같이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재벌이라면, “저 사람은 과연 옳게 이 세상을 보고 있을까?” 라는 것을 먼저 마음속으로 묻는다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재능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과연 옳은 진리를 알고 있을까? 세상을 제대로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라는 것을 먼저 고려해 본다는 겁니다.

그리고 누가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감탄을 하면, “과연 저 여인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까?” 라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어떤 가족이 100평도 더 넘는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저 가족은 과연 복음을 알까?” 라는 것이 궁금해진다는 말이죠

아름다움과 더러움, 그리고 심판 !!

왜 그렇게 묻는고 하면, 이게 중요한데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어떻게 됩니까?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그만 더러운 것이 개입되었다면, 우리가 보기에도 안타까운데, 하나님은 오죽 하시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두고, 더러운 것은 빼내신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돈을 벌려고 오셨습니까? 건강을 챙기려고 오셨습니까? 아니면 교회부흥을 위해서 오셨습니까? 전혀 그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두고, 아름답지 못한 것을 빼내서 분리시키는, 그런 ‘심판주’로 오셨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서 벌어지는 심판이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오셔도 별 수 없네. 마귀에게 진 것이 아닌가? 십자가에 죽고 말이야” 라고, 그렇게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남들이 보기에는 패배한 것 같지만, 그렇게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부활의 세계가 이루어지고, 그 부활의 세계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런 새로운 심판의 기준이 정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이 아름답다” 라고 하는 것과, 또한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 라고 하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알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계획전부를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을 알면 세상을 아는 것이 되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비록 돈이 없어도 남들에게 기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했는데, 그러니 돈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 모세 !!

제가 지금 돈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말이죠. 모세가 돈이 아닌 진리를 찾아서 자기가 살던 집에서 떠났다는 겁니다. 장차 심판을 받기 이전에 미리 이 세상에서 분리된 생활을 했는데, 왜 그러합니까? 모세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 것만 안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세상이 어떻게 심판을 받는지, 그것도 알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진리인데,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걱정할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모세가 애굽의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의 자리, 즉 애굽왕자를 거절한 것이, 그게 억지로 한 것인가요? “하나님을 괜히 믿었어. 저 좋은 자리를 거절하려고 하니 너무나 아깝구나. 그래도 천국에 가려면 할 수 없잖아” 라고 하는 마음으로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26절에 보면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라고 하는데, 자기에는 뭔가 더 큰 것이 있기에, 그래서 기쁘게 포기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세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 것인데, 이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믿음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러니 우리도 모세처럼 사태를 제대로 파악해서, 뭔가의 지배를 받는 것에서는 벗어나자는 것인데, 알 수 없는 공포에서 말이죠. 어깨를 좀 펴고 살자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 초반부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작전은 이 세상을 분리하는 것이고, 그래서 구원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말이죠.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25절입니다.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의 인생에는 ‘분리’가 담겨있어 !!

여기에 보면,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라고 하는데, 모세가 그렇다는 겁니다. 전혀 억지가 아니라는 말이죠. 모세가 태어날 때 주어진 환경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로 만든 환경과의 분리인데, 이것이 모세의 인생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구세주는 누구입니까? 바로 모세인데, 그리고 오늘날 구세주는 예수님이고 말이죠. 즉 오늘날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모세의 일생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모세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흔히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맞는 말이고 매우 간단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구원을 해준다고 하니까, 믿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모세를 믿으세요.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을 하겠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모세는 애굽의 왕자가 되는 자리를 거부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자리가 좋은데, 그래서 저는 그런 모세는 싫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아닌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라고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예수님 속에 모세가 들어있어 !!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는 것 가운데는, 그 ‘예수’ 안에는 과거 모세의 속성도 같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세를 믿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구나” 라고 하면서, 그래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해줘야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예수님은 믿겠는데, 노아처럼 산다는 것은 곤란합니다. 예수님은 믿겠는데, 아브라함처럼 산다는 것은 곤란합니다. 예수님은 믿겠는데, 다윗처럼 산다는 것은 곤란합니다” 라고 나온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모세가 구원자이었고, 오늘날은 예수님이 구원자인데, 그러니 그 예수님 속에는 모세가 들어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즉 “예수, 모세”, “모세, 예수” 라고, 그렇게 되어야 제대로 성경말씀을 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모세’ 라고 하는 이름 자체가 “물에서 건져내었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면 물에서 왜 건지는 겁니까? 그것은 물에서 건지지를 않으면 죽어야만 하는 인물이 바로 모세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인생이었다는 것이죠.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고 말이죠.

그 당시의 나라 분위기가 어떠했는고 하니, 애굽이 볼 때 히브리인들의 세력이 너무나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내아이를 낳으면 무조건 죽였다는 겁니다. 계집아이는 살려두고 말이죠. 그것이 그 당시의 법이었는데, 그러니 어떤 집에서 사내아이를 낳아서 숨긴다고 하면, 그것은 들키면 집안이 다 몰살을 당할 각오를 하고 그렇게 해야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산파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산파는 왕의 말을 듣지 않고 사내아이를 살려준다는 겁니다. “가서 보니 이미 아이를 낳았습니다” 라는 식으로 거짓말을 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점점 더 히브리인들이 강성해지는데, 그러니 점점 더 감시는 심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바로 왕이 신하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는데, 사내아이들은 다 죽이라고 말이죠.

(출 1: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출 1:21)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출 1:22)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믿음으로 !!

그런 가운데 어느 레위 집안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물론 그것을 바로 왕의 신하들이 다 감시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도 그들의 눈을 피해서 석 달을 숨기고 숨겼는데, 그런데 이제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니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모세의 어머니의 입장이 한 번 되어보자는 겁니다. 이 아이 때문에 온 집안이 다 죽을 판인데,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23절에서 ‘믿음으로’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죽은 일이 있어도, 우리는 그 하나님을 도저히 버리지 못하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믿음의 집안에서 구세주가 태어났다는 말이죠. 여러분, 구세주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건져내는 것인데, 하지만 아무나 건져냅니까? 그야말로 남다른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이렇게 야외에 나와서까지 믿어야 하느냐는 말이죠. 혹시나 싶어서 보험에 드는 차원에서 믿는 겁니까? 하지만 구원자의 집안에서는, 즉 모세의 집안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는데, “나를 구원하든지, 아니면 죽든지, 둘 중에 하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대충 산다는 것은 없었는데, 바로 그러한 엄마의 결단이 담겨있는 아이가 바로 모세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석 달을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어서 아이를 보내기로 하는데, 그래서 바구니에 담아서 아이를 나일강에 띄우는데, 이왕이면 그 당시의 최고의 집안인 바로 왕, 즉 왕족에 집어넣기로 계획을 세운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주가 목욕을 하려고 나온 그 시점을 골라서 아이를 띄워보내는데, 그러자 공주가 발견해서 키우려고 한다는 겁니다.

(출 2:1)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출 2:2)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출 2:3)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출 2:4)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그것을 모세의 누이가 지켜보고 있다가 그 아이의 유모로 모세의 어머니를 소개하게 되는데, 그것을 공주가 허락함으로서 모세는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의 이름은 공주가 짓는데, 물에서 건졌다고 해서 ‘모세’ 라고 한다는 겁니다.

(출 2: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물에서 건져낼 자, ‘모세’ !!

그런데 그의 이름이 ‘모세’ 라는 것이, 이것은 그의 앞길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단순히 자기가 물에서 건져내어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히브리 민족의 운명이 그에게 걸려있다는 겁니다. 60만명의 엄청난 무리의 운명이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모세를 지도자로 여기고 따라오는 사람들에게도 함께 적용되어지는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 60만명도 같이 물에서 건져냄을 당하게 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세가 훌륭한 지도자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름답지 못한 세계에서 아름다운 자기 백성을 만들어서라도 건져내는 것, 그게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고,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모세를 통해서 미리 알려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만 좋아할 문제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바쳐서 아이를 구하는 것,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모성애’ 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성경말씀을 오해한 것이고, 모성애가 아니고 믿음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태파악인데, 즉 현실파악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얼마나 행복한지,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왜 이 세상은 아름답지 못한지,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지, 그 전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하, 내가 믿어야 될 분은 한 분뿐이구나. 내가 노무현도 알고 김대중도 알지만, 물론 권력이 좋은 것도 알고 돈이 좋은 것도 알지만,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분이 중요하다” 라고 하게 된다면, 그래야 자유로운 사람이고 당당해질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가 이렇게 야유예배를 드리면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있으면 안 되고, 교회가 무엇 때문에 있어야 합니까? 야외에서 모이든 골방에서 모이든 간에, 오직 구원자만을, 예수님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사태파악을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23절과 24절을 보겠습니다.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역시, 믿음으로 !!

여기 23절에 보면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배짱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23절 앞에 보면, ‘믿음으로’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죠. 믿음이 아니면 그런 배짱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죠.

여러분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차버릴 수 있습니까? 모세 어머니의 믿음이 그대로 모세에게 이어졌는데, 그래서 24절에 보면,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세도 그런 ‘믿음으로’ 성장을 하였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25절과 26절을 보겠습니다.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조금 전에 장로님이 광고를 하시기를, 우리교회 바로 앞에 누가 노래방을 하려고 살펴보고 갔다고 했는데, 그래서 제가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1차로 교회에 왔다가 2차로 노래방에 간다고 하면, 그러면 “교회에 나오는 재미가 좋을까? 노래방에 가는 재미가 좋을까?” 라고 말이죠(ㅋㅋ).

오늘날 사람들이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데,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말이죠. 말씀을 듣는 재미, 형제를 만난다는 재미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라고 하는,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교회 바로 앞에 노래방이 들어오든지, 룸살롱이 들어오든지, 우리의 낙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과거에는 모세를 보내어주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그 기쁨인데, 왜 보내주시는 겁니까? 그것은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아름다운, 즉 천국에 들어가라고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이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의 모습이 이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도 닮아있지는 않습니까? 거절한 것은 거절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건져내었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1 오후 4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