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1:22) 요셉의 믿음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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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믿음
2002년 5월 5일 44강
본문 말씀 :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생명이 없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생명이 있는 존재만 사람다움으로 인정해서 천국에서 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인간들의 살과 피를 통해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씀도 됩니다. 이 점이 성경 해석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의 의의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서에서는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이로서 믿음이란 그 내용에 있어 인간의 행함이 빠져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영생을 주는 것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셔야 오늘 본문도 같이 이해가 됩니다.
여기에 보면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통 흔히들 믿음이라고 한다면 "이것 주시옵소서. 저것 달란 말입니다"하고 강하게 자기 주장에 대해 성취욕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엉뚱하게도 자기 해골에 대해서 명하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헌신하는 것이 아마 믿음일거야"라는 정신으로 성경을 들여다 보면, 오늘 본문과 같은 대목은 이해도 안되고 거기에다 그냥 무심하게 넘어가 버리기 일 수 있습니다.
어제 제가 어떤 책을 구입해서 읽었는데 책 제목이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 간의 여행'이라는 책입니다. 한겨레신문사 기자가 한국에 있는 각가지 깨달음을 수행하는 단체나 참선, 의식혁명, 원불교의 마음 공부, 마음 나누기 수련, 천주교의 영신 수련 및, 달라이 라마의 티벳 불교, 태백시의 예수원 기도원 등에서 함께 수련에 참여한 자신의 직접 경험을 기록한 책입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 책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자신에 대해서 알아서 뭘 어떻하겠다는 말입니까! 번뇌나 고통을 어떻게 없앨 수 있으며 마음의 평정은 어떤 방법으로 가질 수 있느냐 대해서 각가지 지혜들이 등장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그 어떤 단체에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이들은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놀랍게도 생명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만으로 주어질 뿐입니다. 인간이 자아를 찾았다고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영성훈련이라든지, 참선 같은 것은 인간들이 믿음이 없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정말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이들을 보고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22의 말씀처럼, '해골에 대해서 명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생각하기를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할 것입니다. 자아가 중요하지 해골이 뭐가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상식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이처럼 보통 사람들이 너나 할 것만이 다 알고 있는 상식선이라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즉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아서 찾는 이가 적다는 말씀은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특이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알기 위해 이웃에게, 혹은 동료에서, 가족들로부터 파악하려고 합니다.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한 주변 환경으로 여깁니다. 즉 내가 어느 수준의 존재인가를 가름하기 위해서 시도해보는 관계입니다. "나는 어느 정도의 인물인데?"을 확인하기 위해 동창회도 나가고 사람들을 사귀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누군지 몰라 답답해서 타인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임 중의 하나가 교회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특히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상식화된 행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그것이 그 사회에서 특이한 것이 되어서 엄청난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 요한 같은 분들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 교회 다닌다고 해서 누가 돌을 던져 죽일려고 달려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는 그저 한낱 상징적 인물에 불과합니다.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있으나마나 하다 이 말입니다. 이미 상식화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요즘 특이한 신앙으로 분류되는 자들은 오로지 복음만을 외치는 자입니다. 즉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 구원받는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도 비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라"만 들어 있는 사람에게는 "믿으라"가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믿으라"가 들어 있는 사람에게는 "하라"가 시시해져 버립니다. 저는 그 책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워했습니다. 깨달아서 뭘 한 건데요? 얼마나 답답하면 그런 것을 찾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굼뱅이가 제 자리를 구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데 왜 자신이 만들어내려고 합니까?
요셉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죽으면 해골이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해골에서 손을 떼지 않습니다. "내 죽고 난 뒤에 내 해골을 가지고 나서야 그래야 하나님 약속의 세상에 도달할 수 있느니라"하고 말입니다. 해골을 들고 가야합니다. 출애굽기 13:19에 보면,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필히 요셉의 해골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약 때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출애굽 할 때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의 땅이란 지리적 공간적 땅이 아닙니다. 그 땅은 없습니다. 그 땅은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그 당시 현재 그 땅은 네피림이라는 장대같이 키가 큰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생기는가요? 그것은 약속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끌림을 당할 때 그 때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약속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요? 놀랍게도 그 땅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졸지에 저주가 흐르는 땅이 됩니다.
일반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일단 자기 소유화 시키고 그 소유된 것을 키워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후예들이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도시를 형성하고 그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성곽을 세우고 그 성곽을 보다 튼튼히 하는 방식해서 자손들을 그 안에 번식시키는 방식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바로 저주의 자손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거의 모든 자들이 다 이런 방식을 축으로해서 생활 설계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과연 이 삶의 방식 외에는 전혀 없는 겁니까?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보여줍니다.
가인의 후예와 다른 방식입니다. 떠나는 방식의 삶입니다. 세상 형편을 고발하면서 말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 당시에 온 세상의 저주의 물로 덮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믿음입니까?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계속 키우려는 것이 믿음입니까 아니면 다른 곳에 가서 또 사는 것이 믿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했다는 그 세계가 정말 그리워할 정도로 좋습니까? 씨가 다르다든지 다른 종족이라는 말이 쓸데 없는 말이 아닙니다. 영생으로 가는 길이 분명 영생으로 통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왜 찾는 이가 그토록 적은 것입니까? 이 점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보지 말고 말입니다. 장난 삼아 성경을 보면 안됩니다.
요셉은 말하기를, 내가 죽거들랑 내 해골을 지정된 장소에다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49: 30-33에 보면, 지정된 장소의 내력이 나옵니다.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여기에 보면 마지막에 야곱이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는 왜 열조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까?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부활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2:31-33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 선조들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이 내려 주신 약속 안에다 자기 몸을 합류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월드컵 16강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몸의 하나님의 약속의 광주리 안에 참여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그 약속의 광주리가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여 하는 방식이 바로 막벨라 굴 속에 자신의 시신을 합치는 것입니다. 창세기 2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그 굴을 삽니다. 먼 미래를 위한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 사는 겁니다.
비록 지금은 자신의 신세가 이 가나안 땅에서 떠돌이 신세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을 약속의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식까지 대대로 묻힐 곳이라는 겁니다. 약속에 의해 묻힌 자만이 부활이 주어집니다. 영광된 부활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부활에 전부를 바친 자에 한해서 전부의 부활로 주어집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씀하셨지만 구약에서는 희미하게 부활에 대해서 소개하는데 어떤 식이냐 하면, 약속의 땅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곳이 바로 약속의 땅이라는 겁니다.
이 약속의 땅을 언급하므로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몰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나 이삭도 죽음 가운데 부활을 내다보면서 막벨라 굴에 장사됩니다. 이들은 모두 약속의 땅에서 활약하다가 약속의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약속의 땅에서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약속의 땅이 아닌 애굽 땅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 왕의 허락을 받아 아버지의 뼈를 지정된 장소에 안장시킵니다. 이제는 요셉 차례입니다. 요셉의 해골은 요셉 개인의 구원을 위해 장만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과연 이 백성들이 꾸준히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부터 부활의 혜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애굽으로부터 집단적 탈출이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그 일을 성사시킵니다. 모세 개인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올 때 그들이 느낀 것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의 짙은 그림자와 힘을 경험했습니다.
설교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 자는 생명이 있고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다면 진정 우리가 속해 있는 현 세상에 안겨다 주는 죽음의 공포를 진하게 느껴야 합니다. 깊은 좌절과 실패를 느껴야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그만큼 좋아지는 것입니다.
"집에 있는 통장에 돈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겠느냐"하는 식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자식의 도움을 믿으면서 마음 든든해 하는 것은 결코 죽음의 경험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죽음의 세력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진하게 느껴야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의 현장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란, 죽음으로 포위된 공간입니다. 흔히 광야를 이 세상과 비유하는데 말로만 그렇다고 수긍해서는 아니됩니다. 이 세상은 숨통이라도 터져있지 않습니까? 환풍기가 돌아가니 죽음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닿지 않습니다.
특히 눈부신 과학 문명의 발달과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가진 자에게 있어 죽음의 공포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합니다. 우리가 환각속에 그것을 못느꼈을 뿐입니다. 광야라는 죽음의 공간 안에서는 그 어떤 신분적 차이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동일한 공포, 똑같은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심지어 모세까지도 말입니다.
이 죽음 속에서 그들은 일관되어 목소리를 높이면서 원망했는데 그 원망한 내용이 민수기 11:18에 나와 있습니다.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 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여기에 보면 그들이 말하기를, '애굽에 있을 때가 재미있었다'는 겁니다. 교회에 가서 말씀 들을 때보다 필드에 있을 때가 재미있다는 말을 곧 잘 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 소리가 우리들마다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극한 어려움이 닥치면 염치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래도 이 세상이 광야가 아닙니까? 우리 속은 어떤 뱀들이 우굴거리고 있는가를 토해내게 하는 현장이 바로 인간의 한평생입니다. "아휴, 예수를 모를 때가 그 때가 더 좋았는데"하는 본심이 튀어나오는 그 시점이 바로 죽음이 공포를 극한으로 느끼는 순간입니다. 이런 기능이 바로 광야 기능입니다.
민수기 14:1-3에 버면,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뭔지를 알아야 생명이 뭔지를 압니다. 생명, 생명하니까 시장 난전에 막재어놓은 물건 팔 듯이 헐값으로 내놓은 줄로 아십니까? 예수님의 귀한 목숨을 내장되어 있는 것이 생명이요 영생입니다. 예수님의 한숨과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시장에서 함부로 돈 주고 살 물건이 아닙니다. 이렇게해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10번씩이나 원망했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애굽이나 이스라엘이나 모두가 애굽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40년간 연장시킵니다. 왜냐하면 이들을 다 죽이는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진짜배기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철저히 알려주게 됩니다.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무서운 죽음을 모르는 자가 무슨 부활을 논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기를 향한 저주를 모르는 자가 어찌 천국 복락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요셉이 말합니다. "나를 이곳 애굽 땅에 그냥 놔두지 말고 우리 조장이 묻힌 그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저주와 죽음의 강도를 파악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교회는 노닥거리는 데가 아닙니다. "나는 지난 한 주를 살면서 이런 죽음의 강도를 느꼈다"는 것을 고백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모르는 불신자들의 집단인 교회는 그저 자신들의 자유스러움이 좋아서 교회 다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교회란 곧 애굽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진정한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광야에서 죽은 자들이 모두 지옥갔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천국에 갔습니다. 어쨋든 하나님은 그들의 자신의 실상을 알게 하기 위해서 약속의 땅을 정탐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탐의 결과, 거의 모든 자들이 죽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유다 지파의 갈렙과 요셉 지파의 여호수아 만이 놀랍게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즉 우리들이 간직하고 있는 요셉의 해골을 이 광야에 묻힐 해골이 아니라 저 약속의 땅에 묻힐 해골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저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여호수아 24:32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상을 상속받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진정 하늘나라의 상속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요셉의 해골같은 십자가의 피와 살이 지닌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피와 살은 진정 우리가 당해야 될 저주로 인해 생겨난 일입니다. 우리들의 남은 생애를 예수님의 이 피와 살을 증거하는데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기이하고 기이합니다. 상식적으로 봤던 성경 해석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해서 성경을 보았습니다.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 부활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가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4. 요셉의 믿음(히 11:22)
--------------------------------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
예수님의 피와 살에 관한 것 !!
예수님께서는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생명이 없는 존재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생명이 있는 존재만 사람다움으로 인정해서 천국에서 살게 하시겠다는 말이죠. 그래서 기독교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피와 살에 관한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자기의 살과 피를 통해서 스스로 구원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성경해석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 인간의 행함과 종교적 열성은 전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지, 왜 예수님의 살과 피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지, 그것만이 진짜 사람이 되게 하는 요건인지, 그것부터 먼저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힘으로 천국에 가려는 자들은 당연히 이런 것을 엄청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지금까지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다 해왔는데, 그러니 앞으로의 남은 생애도, 또한 천국에 가는 것도 역시 자기의 힘으로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열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가득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너의 살과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다” 라고 하니, 자기의 살과 피를 인정하려는 그 전제부터 왕창 다 깨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로마서에서는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하는데, 즉 믿음은 그 내용에 있어서 인간의 행함이 빠져야 한다는 겁니다. 정말로 영생을 주는 것만 믿어야 하는데, 그래야 그것을 진정한 ‘믿음’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성경은 인간이 자기 정성으로 신에게 바치면서 열심을 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데, 오로지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서, 그래서 자기에게 일어난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안 되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가 왜 중요한지,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봐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단정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여기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22절뿐인데 말이죠.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
여기에 보면, 뒷부분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했다” 라고 하는데, 아니 여기서 ‘해골’이 왜 나오느냐는 겁니다. 해골이 말이죠. 흔히 믿음이라고 하면 “하나님, 이것을 주옵소서. 저것을 달란 말입니다” 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자기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대단한 믿음이 아니냐는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엉뚱하게도 자기 해골에 대해서 명령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과연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헌신하는 것이 믿음일 것이야” 라고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면, 오늘 본문과 같은 대목은 전혀 이해가 되지를 않는데, 그러면 그만 무심하게 넘어가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 간의 여행 !!
어제 제가 어떤 책을 구입해서 읽었는데, 제목이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 간의 여행’ 이라는 책입니다. 한겨레 신문사 기자가 한국에 있는 수행단체를 직접 찾아가서, 종교가 무엇이면 인간들이 왜 종교를 찾는지, 그 내막을 적나라하게 밝혀놓았다는 겁니다. 원불교의 마음공부, 천주교의 영성수련, 달라이 라마의 티벳불교 수행, 태백시의 예수원 기도원 등등, 거기에 가서 자기가 직접 가서 체험하고 경험한 것을 기록해놓은 책이라는 겁니다. 제가 정말로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는데 말이죠.
진리가 무엇이며, 깨달음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번뇌와 고통을 줄일 수 있는지, 또한 어떻게 하면 기쁨과 희락과 안정감을 유지할 수가 있는지, 그것을 ‘평상심’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각종 지혜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배를 보면서 수행하는 것도 있고, 10미터를 한 시간동안 자기 발만 보면서 걸어가면서 수행하는 것도 있고, 물론 침묵수행은 기본이고 말이죠.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그 어떤 단체에서도 ‘하나님의 언약’ 이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이들은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말이죠. 물론 그런 것은 귀담아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모든 욕심을 다 끊고 일체의 변화를 초월해서, 자기가 어떻게 수행해서 나가는지, 거기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 놀랍게도 생명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만으로 주어질 뿐입니다. 인간이 자아를 찾았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러한 영성훈련이나 참선과 같은 것은 인간들이 믿음이 없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인데,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오지 않는데,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른다는 말이죠
해골에 대해서 명하는 것이, 곧 믿음 !!
이런 사람들을 보고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22절의 말씀처럼, “해골에 대해서 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들아 뭐라고 하겠습니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라고 하겠지요. 자아가 중요한 것이지, 해골이 무엇이 중요하냐는 겁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것이 상식화가 되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진리가 이처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상식선에 놓여있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즉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아서 찾는 이가 적다” 라는 말씀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특이한데, 상식이 아니라, 특이해야만 믿음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것을 이웃에서, 혹은 동료에서, 혹은 가족들로부터 파악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한 주변환경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즉 이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웃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느 수준의 존재인가?” 라는 것을 가름하기 위해서 시도해보는, 그러한 ‘관계’ 라는 말이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동창회도 나가고, 사람들도 사귀는 겁니다. 즉 자기가 진정 누군지 몰라서 답답하기 때문에 이웃을 만난다는 말이죠. 같이 골프를 치면, 자기가 골프를 칠만한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인데, 그러면서 동료의식을 느끼고 말이죠.
이미 ‘특이성’을 상실한 교회 !!
바로 이런 모임 중의 하나가 교회입니다. 요즘은 교회를 다니는 것은 특이한 것이 아닌데, 이미 상식화가 된 행동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그것이 그 사회에서 특이한 것이 되어서 엄청난 수난을 겪어야만 했는데, 베드로와 사도요한과 같은 분들은 순교를 당했다는 말이죠. 그러나 지금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누가 돌을 던지던지 죽이려고 달려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즘은 하나님이나 예수는 그저 상징적인 인물에 불과한 추상적인 개념인데, 즉 있으나마나 하다는 겁니다. 이미 상식화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거기서 특이한 신앙으로 분류되는 자들이 있는데, 오직 복음만 외치는 자라는 말이죠. 즉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 비상식적인데, 그래서 교회에 가면 목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세요” 라고 하는데, 즉 “전도를 해보세요. 기쁨이 생길 겁니다. 기도를 해보세요. 환희를 느낄 겁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언제나 ‘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다시 생각하세요. 그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고 한다면,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이단시가 되는데, 이상한 놈들로 취급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라’ 라는 것만 들어있는 사람들에게는, ‘믿어라’ 라는 것이 들어오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반면에 ‘믿어라’ 라는 것이 들어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라’ 라는 것이 그만 시시해져 버린다는 것이죠.
저는 그 책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는데, 자아를 깨달아서 무엇을 하자는 겁니까?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것을 찾겠습니까만, 하지만 그것은 굼벵이가 제 자리를 구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진리는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런데 왜 지상에 까불고 난리를 치느냐는 말이죠. 왜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러한데, 그렇다면 요셉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죽으면 해골이 된다는 것을 모두들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기 해골에서 손을 떼지 않았는데, 당연히 떼야 하는데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죽고 난 뒤에는 나의 해골을 가지고 나서라. 그래야만 하나님의 약속의 세상에 도달할 수 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해골을 들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죠.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
그래서 출애굽기 13장 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고 하니, 그들은 반드시 요셉의 해골을 준비해야 한다는 겁니다. 애굽 땅에서 죽었던 요셉의 해골을 말이죠.
(출 13: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사람이 어디를 놀러갈 때도 반드시 준비해야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는 무엇을 준비해야 될까요? 빈 손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출애굽기 13장에 의하면, 그게 바로 ‘요셉의 해골’ 이라는 말이죠.
약속의 땅은, 그때그때 !!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자신의 행함이 아닌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신약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데, 그러면 구약에서 출애굽을 할 때,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들은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약속의 땅이란 것은,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 땅은 없는데, 그러한 땅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기존의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 당시에 가나안 땅에 ‘네피림’ 이라고 하는, 그야말로 장대와 같이 키가 큰 사람들이 이미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약속의 땅은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약속의 땅은 언제 생깁니까? 그것은 약속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끌림을 당할 때, 즉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들어갈 때, 그러면서 말도 안 되는 그 네피림들이 쫓겨나는 절차를 밟음으로서, 그 땅이 약속의 땅이 된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그렇게 생겨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약속을 거부하면 어떻게 됩니까? 놀랍게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졸지에 저주가 흐르는 땅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저주의 자손들, 그리고 에녹 !!
일반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일단 자기 소유화를 시키고, 그 소유된 것을 키워나가는 방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후예들이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도시를 형성하고, 그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곽을 세우고, 그 성곽을 보다 더 튼튼히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해서 자손들을 그 안에 번식을 시킨다는 말이죠.
(창 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창 4: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창 4:18)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이들이 바로 저주의 자손인데, 그런데 오늘날도 다들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성읍을 세우면서 살아가는데, 우리나라는 휴전선까지 만들어서 말이죠. 그렇다면 과연 이 삶의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은 전혀 없는 것일까요? 우리 생각에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겨지는데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5장에 보면, 거기에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에녹’ 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보여주는데, 즉 가인의 후예와 다른 방식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갑니까? 이 세상을 떠나는 방식의 삶인데, 이 세상에 대해서 고발을 하면서 말이죠.
(창 5:18) 야렛은 일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창 5: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20) 그가 구백육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 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23)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5) 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창 5: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 5:28) 라멕은 일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창 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그리고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 당시에 온 세상의 그야말로 저주의 물로 덮이고 말았는데, 인간들이 그렇게 좋아하던 부동산이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믿음입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키우려는 것이 믿음입니까? 아니면 다른 곳에 가서 사는 것이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했다는 그 세계가 정말로 그리우냐는 말이죠.
우리가 흔히 “씨가 다르다” 라는 말을 하는데, 이게 전혀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영생으로 가는, 그게 분명히 천국으로 통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왜 찾는 사람들이 그토록 적으냐는 말이죠. 우리는 이러한 점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장난 삼아서 성경을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내 해골을 지정된 장소에다 묻어라 !!
요셉은 말하기를, “내가 죽거들랑 내 해골을 지정된 장소에다 묻어라” 라고 했는데, 그 지정된 장소의 내력이 창세기 49장에 보면 나옵니다. 도대체 그곳이 어디이고,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30절과 33절을 보겠습니다.
(창 49: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창 49: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창 49: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창 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여기에 보면 33절 마지막에 “야곱이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라고 하는데, “야곱이 죽었다” 라고 하지 않고 말이죠. 그렇다면 이 열조가 무슨 열조입니까? 그리고 그는 왜 열조에게 돌아가기를 원했습니까?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부활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마태복음 22장 31절에서 33절을 보겠습니다.
(마 22: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 22: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약속에 대한 보증, 막벨라 굴 !!
야곱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에게 자기의 죽은 몸을 참여시키려고 하는데, 즉 약속에 자기 몸을 합류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통령이 되고, 월드컵 16강에 들어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의 하나님의 약속의 광주리 안에 참여되는 것이 제일로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 약속의 광주리가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야곱도 참여되기를 원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참여하는 방식이 바로 여기 막벨라 굴속에 자기 시신을 합치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2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그 굴을 사는데, 먼 미래를 위한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서 산다는 것이죠. 법적으로 하자가 없도록 말이죠.
(창 23:12)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 백성을 대하여 몸을 굽히고 (창 23:13) 그 땅 백성의 듣는데 에브론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비록 지금은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떠돌이 신세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창세기 15장에 의하면, 이 땅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게 되어있는 땅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미리 돈을 주고 샀다는 말이죠. 먼저 자기 아내 사라가 묻히는데, 또한 자기도 묻히고 자기 자손들도 묻힌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자손손 묻힐 장소가 곧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약속의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겁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식까지 대대로 묻힐 곳이란 말이죠. 그렇게 약속의 땅에 묻히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약속에 의해서 묻힌 자에게만 부활이 주어지는데, 이 영광된 부활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생명의 부활이란, 자기 전부를 다 바친 자에 한해서 전부의 부활로 주어진다는 말이죠.
부활과 약속의 땅 !!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씀하셨지만, 구약에서는 희미하게 부활에 대해서 소개하는데, 그것이 어떤 식이냐 하면, “이제 조금 있으면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라고, 즉 ‘약속의 땅’으로 표현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그곳이 곧 약속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 약속의 땅을 언급함으로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몰고 나가려고 하는데, 그러면서 희망의 내용을 부여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도 죽음 가운데 부활을 내다보면서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는데, 그래서 야곱도 자기 해골을 거기에 묻어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즉 이들은 모두 약속의 땅에서 활약하다가 약속의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말이죠.
물론 야곱의 경우는 조금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같은데, 야곱은 비록 약속의 땅에서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약속의 땅이 아닌 애굽 땅에서 자기의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은 어떻게 합니까? 바로 왕의 허락을 받아서 아버지의 뼈를 그곳에 안장을 시키고, 자기는 다시 돌아온다는 겁니다.
이제는 요셉 차례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개인적으로 자기 뼈가 묻히는 차원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다른 12명의 형제들과 더불어 집단적으로 몽땅 다, 그들의 해골이 약속의 땅에 묻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그래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진다는 말이죠.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이 걸려있는 요셉 !!
그러니 요셉의 해골은 요셉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장만되어진 물건이 아니라는 말이죠. 여기에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운명이 걸려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이 백성들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부터 부활의 혜택을 입게 될 것인데,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애굽에 포로로 잡혀있는 형국인데, 과연 집단적인 탈출이 가능하냐는 겁니다. 애굽이라는 나라가 그냥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서 일을 성사시키는데, 그러니 이것은 모세의 개인구원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지정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에 떠내려가는 모세를 건져서, 그 모세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빠져 나오도록 하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 그들이 느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죽음’ 이라는 것인데, 그들은 죽음의 짙은 그림자와 그 힘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당장 이해가 되지 않지 싶은데, 쉽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광야는, 죽음으로 포위된 공간 !!
설교 처음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 자는 생명이 있고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했는데, 교회의 충성유무와는 상관이 없이 말이죠. 이 사실을 믿는다고 하면,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우리가 속해있는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죽음의 공포를 진하게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깊은 좌절과 실패를 느껴야,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그만큼 좋아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집에 있는 통장에 돈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지?” 라고 하든지, “자식놈이 3명이나 있는데, 뭐가 걱정이고?”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마음 든든해하는 게 있다고 하는, 그것은 결코 죽음의 경험이라고 볼 수가 없는데, 죽음의 세력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진하게 느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을 느꼈습니까? 물론 느꼈는데, 그게 곧 ‘유월절의 밤’ 이라는 겁니다. 죽음의 천사가 다가와서 각 집안의 장자를 다 죽이고 말았는데, 그런데 거기서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안은 피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게 히브리인이든 애굽인이든 상관없이 말이죠.
(출 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것을 다 치시매 (출 12: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그리고 난 다음에 그들이 간 곳이 어디인고 하니, 그것도 역시 죽음의 현장인데, 그곳이 바로 ‘광야’ 라는 겁니다. 광야라는 것은 죽음으로 포위된 공간입니다. 흔히 광야를 이 세상과 비유하는데, 말로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그래도 이 세상은 숨통이라도 조금은 터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환풍기가 돌아간다고 여기니, 죽음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와닿지 않는다는 겁니다.
특히 요즘과 같이 눈부신 과학문명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체제 내에서, 특히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의 공포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지만 죽음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란 말이죠.
그리고 이 광야라는 죽음의 공간 안에서는, 그 어떤 신분적인 차이도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모두가 동일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 모두가 똑같은 환경 속에 놓여있게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모세까지도 여기에서 전혀 예외가 될 수 없었다는 말이죠.
공포의 화생방 훈련 !!
남자들이 군대에 가면 먼저 훈련소를 거쳐야 하는데, 거기서 고된 훈련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 중에는 어떤 훈련이 있는고 하니, ‘화생방 훈련’ 이라는 것이 있어요. 폐쇄된 공간에 들어가서 방독면을 나눠주고 훈련을 받게 하는데, 것을 소위 ‘가스실’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방독면은 쓰는 것이 아니라 벗으라고 준 것인데, 즉 가스 맛을 일부러 보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벗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군가를 부르게 하는데, 그런데 짜증이 나는 것이 조교도 같이 벗어야 하는데, 자기들은 쓰고 있더라는 말이죠. 그러다가 바깥으로 나오면, 그야말로 콧물과 눈물이 줄줄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훈련을 통해서 방독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데, 사실은 그 방독면은 쓰더라도 별로 효과가 없지만 말이죠.
아무튼 모세와 더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가스실에 들어가서 가스맛을 보게 되는데, 그러니 그들은 이런 죽음의 환경 속에서 일관되게 목소리를 높여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 내용이 민수기 11장에 나와있는데, 18절입니다.
(민 11:18)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 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애굽에 있을 때가 재미있었다 !!
여기에 보면 그들이 말하기를, “애굽에 있을 때가 재미있었다” 라고 하는데, 왜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들을 때보다 필드에 있을 때가 재미있다는 말을 곧잘 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것이 우리 속에 잠재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극한 어려움이 닥치면, 염치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살려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러분, 이래도 이 세상이 광야가 아닙니까? 우리 속에 어떤 뱀들이 우글거리고 있는지, 그것을 토해내게 하는 현장이 바로 우리의 한 평생이라는 겁니다. “어휴, 예수를 모를 때가 그때가 더 좋았는데!” 라고 하는 본심이 튀어나오는, 그 시점이 곧 죽음이 공포를 극한으로 느끼는 순간입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광야의 기능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것은, 하나님은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을 때가 좋았는데, 일요일에도 마음놓고 가게문을 활짝 열고 장사를 할 때가 좋았는데, 동창생을 만나서 밤을 새우면서 맥주잔을 기울일 때가 좋았는데, 다방에 앉아서 박 마담과 쌍화차를 마실 때가 좋았는데!”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민수기 14장 1절에서 3절을 보겠습니다.
(민 14: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민 14: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민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화생방 훈련인데,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생명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말이죠. 성경에서 생명이라고 하니까, 마치 시장난전에서 물건을 팔듯이 그렇게 헐값으로 내놓은 줄로 아십니까? 예수님의 그 귀한 목숨이 내장되어있는 것이 생명이고, 그게 곧 영생이라는 겁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한숨과 고통이 담겨있는데, 시장에서 쉽게 돈을 주고 사는 물건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10번이나 원망했는데, 그러니 애굽의 바로 왕을 탓할 수만은 없다는 겁니다. 바로 왕도 10번이나 거부했는데, 즉 애굽이나 이스라엘이나 모두가 애굽사람이란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생활을 40년간 연장시키는데, 그들을 모두 죽이는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겁니다. 여호수와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그래서 진짜배기 죽음이 어떤 것인지 철저히 알려주게 된다는 겁니다. 40년 동안 같은 자리를 뱅뱅 돌게 하시면서, 모든 사람들을 다 죽여버린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죽음을 모르는 자가 무슨 부활을 언급할 수 있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모르는 자가 어찌 천국의 복락을 이야기할 수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나를 이곳 애굽 땅에 그냥 놔두지 말고, 우리 조상이 묻힌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 라고 했던, 요셉의 그 유언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는 말이죠.
교회는, 죽음의 강도를 느끼는 곳 !!
우리도 이것을 모르면 안 되는데,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진정한 저주와 죽음의 강도를 파악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교회는 자녀들 이야기나 하면서 노닥거리는 곳이 아닌데, “저는 지난 한 주를 살면서 이런 죽음의 강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길을 찾는 이가 왜 적은지를 알았습니다” 라고, 그러한 것을 고백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모르는 불신자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교회는, 그저 자신들의 자유스러움이 좋아서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죠.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란 바로 애굽인데, 자신의 죽음을 전혀 느끼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진정한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물론 광야에서 죽은 자들이 모두 다 지옥에 갔다고 여기면 안 되는데, 모세는 천국에 갔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의 역할이라는 말이죠. 아무튼 하나님은 자기 자신들의 실상을 알도록 해주시기 위해서 그들이 약속의 땅을 정탐하는 것을 허락해주셨는데, 그러면 그 정탐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지파 가운데서 10개 지파에서 뽑힌 자들이 들어가기를 거부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거대한 종족이 살고 있었는데,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안타까워서 울기까지 했는데, 자기들이 어떻게 하고 싶어도 전혀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유다 지파의 갈렙과 요셉 지파의 여호수아만이 놀랍게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는데,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그들이 우리들보다도 덩치가 큰 것도 안다.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는 것도 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도 저곳에 들어갈 수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요셉의 해골은 이 광야에 묻힐 해골이 아니라, 저 약속의 땅에 묻힐 해골이다. 그러니 우리도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겁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았는데, 여호수아와 갈렙만 믿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둘만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
그래서 여호수아서 24장 32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드디어 요셉의 해골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여호수아서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는 말이죠.
(수 24:3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여기서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라고 하는 것은,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았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도 진정 하늘나라의 상속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요셉의 해골과도 같은 십자가의 피와 살이 지닌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피와 살은 우리가 당해야하는 저주로 인해서 생겨난 것인데, 그러니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예수님의 피와 살을 증거하는데 쓰여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말씀이 정말로 기이하고 특이합니다. 전혀 상식과는 거리가 먼 말씀인데,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 영생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보이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게 하시고,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만을 증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10 오후 6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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