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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11:20-21) 언약적인 축복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1:20-21) 언약적인 축복

정인순 2010. 9. 5. 11:43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43강-히11장,20-21(언약적인,축복)-heb020428.mp3

 

 

이근호

 

언약적인 축복

 

2002년 4월 28일 43강

 

본문 말씀 : 히 11:20-21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성경에 보면 부활이 나옵니다. 부활이란 죽었는데 다시 산다는 겁니다. 신자란 부활체입니다. 교회란 부활 자의 무리, 부활 자의 집합입니다. 그런데 좀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과연 그럴까 하고 말입니다.

 

세상에서 인정해주는 현실이란, 살아있는 이 몸을 어떻게 하면 계속 살려내느냐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적 정서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성경은 죽음과도 상관없는 상태를 제시하니까 좀 현실성이 떨어져 보이겠지요. 정말이지 귀신 열전, 귀신 천하와 같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의 특징은 바로 무소유주의입니다. 세상에서 그 좋다는 것, 아름답다 것, 귀하다는 것도 귀신한테는 시큰둥 하겠지요. 별로 필요치 않습니다. 그만큼 세상을 초월해 있지요. 이 세상의 인간들은 소유가 나를 살린다고 여기고 악착같이 거기에 매달리게 됩니다.

 

축구 시합에는 전반전, 후반적으로 나뉘어져 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네 인생도 전반적 같은 이 세상과 후반적과 같은 이미 승리를 즐기고 있는 하늘 나라의 생활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3:20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무소유입니다.

 

세상 것에 대해서 초연하게 되지요. 못 가져서 애태울 것도 없습니다.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은 입장입니다. 자 이런 후반적 생활을 즐기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과연 '축복'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것을 소유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버릴 정도도 더 훨등한 것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삶을 누리는 것이 축복입니다."라고 자연스럽게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축복 이야기가 나오는데 성경 자체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축복에 대해서 성급한 선입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축복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성경 책에 박혀 있더라도 느긋한 후반전에 속한 사람과 전반적에만 알고 있는 사람들 따라서 그 내용이 다르게 됩니다.

 

"얼마나 좋으냐 이 모든 것을 초월해 버렸으니"라고 여기는 사람이 후반전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면, "저 권력과 재물이 내 소유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여기는 사람은 전반적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복은 내가 소유하고 사수할 대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복이 우리 자신들을 뒤덮어 버립니다. 마치 눈 사태가 덮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주인공이 아니라 축복의 종입니다. 아둥바둥 살려고 하다보니 생겨나는, 고뇌와 고민과 한맺임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없어져 버린 축복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축복 밖으로 탈출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저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영생 얻은 무리들에게 마음 가짐이지요. 가난한 심령 자체가 우리 자신을 장악한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현실이란 딴 게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곧 현실의 전부입니다. "살아 있는 이 놈의 몸체를 어떻게 유지하지?"라고 신경 쓰는 것 만이 가장 확실한 현실로 봅니다. 남의 몸 같으면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내 몸을 어떻게 내가 무시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로 부활체로 교체시키기 위해 기존의 몸체를 없애는 작업에 들어가시는 겁니다. 점점 죽이시는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기쁨과 환희로 받아드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죽게 하시는 작업을 보고서 즐거워 할 줄 아는 자가 축복된 사람입니다.

 

신제품있기에 중고품은 점차 중고품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만만함입니다. 성경은 참 이상한 책입니다. 죽었다고 부활된 자들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입니다. 이 관점과 동일할 때만 신자이고 못보면 불신자입니다.

 

느긋함으로 성경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고 이것 못지켰으니 나 지옥갈거야"하고 호들갑 떨면 아직 신자 아닙니다. 구원이란 우리들의 행함과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는 것에 자꾸만 상관두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행위없이 얻어진 것이 구원이요, 부활이요, 영생입니다.

 

축복이란 하늘에서 일방적으로 내리는 폭설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착한 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뒤덮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축복에 관해서 두 사람이 나오는데 이삭과 야곱입니다. 과연 이 사람들이 오늘날 흔히 사람들이 축복받은 자라고 간주되는 것, 즉 재벌이라고 된 겁니까, 아니면 천하 장사였습니까 아니면 권력자였습니까? 은근히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비켜가고 있습니다.

 

20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축복이란 '장차 오는 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야곱 본인에게 물어 보세요.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 가지고 판단하지 말자고 나설 것입니다. 축구는 전반전이 다가 아닙니다. 후반전도 있습니다. 전반적 가지고 인생 실패, 성공을 논하지 맙시다. 아직 시합이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이 축복이 성취하시는데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작업하시는 겁니까? 부활의 세계란 죽지 않으면 못들어 갑니다. 따라서 부활에 참여 될 사람들은 미리 자신이 죽었음을 알게 되는 과정을 갖게 됩니다. 자기 죽음을 맛보는 겁니다. 자해나 자살 가지고 안됩니다. 정작 죽어야 될 것은 목숨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 왔는 정신 자세입니다.

 

즉 '나는 나로 인하여 살아간다'는 의식, 이것이 붕괴되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내가 살린다는 겁니다.

 

후반전의 삶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살아가게 하신다는 의식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 나의 부활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가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가지의 사고방식이 공존되어 있고 우리 자신 속에도 나란히 같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을 알게 하십니다. 즉 "어떤 사고 방식이 하늘 나라에 부합되지 않는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발췌해서 하나님이 밟아버리시는 겁니다.

 

이삭은 우리 성도의 본보기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루는 것은 곧 현재 우리도 그와 같이 다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이삭은 맏이 에서를 대단히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약속된 아들이 단지 하나 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에게 하늘의 축복권을 인계해 주면 그만이지만 이삭의 경우는 쌍둥이 아들 둘이 동시에 등장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로 이삭을 혼동하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흔히 하나님을 잘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지만 실상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우리 자신도 앞으로 살아봐야 알 정도입니다.

 

인간의 선택을 통해서 잠재되어 있는 죄가 나오도록 유도하시는 겁니다. 우리 본색을 늘 노출하도록 말입니다. 이삭은 남성다운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 하는 사람은 뭘 해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자는 무슨 이쁜 짓을 해도 밉상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평생 자신의 선입견에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이삭은 에서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편애합니다. 모든 좋은 것이 그의 것이 되도록 밀어주지요. 이쁜 자식에게 축복 몰아주기에 나갑니다. 게임이 공정치 않습니다. 야곱이 아무리해도 못 이룰 과업을 큰 아들에게 임의로 맡기려고 시도합니다.

 

반면 이삭의 부인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되게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둘이라는 것이 계속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가정 파탄이 일어날 지경입니다. 이 모든 것도, 세상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삭이든, 리브가든, 에서든, 야곱이든 모두 자기 힘으로 자기를 살리려는 의식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모두다 자기 성질대로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사람이 조심한다고 성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단지 성질이 잠시 위장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사칭죄'입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인간은 숨겨놓은 성질까지 들추어내는 데 초점을 두고 일하십니다. 수시로 계기를 만들어서 폭로시키십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자신의 옳은 선택으로 인해 천국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결코 인간의 그 어떤 선택도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이삭과 에서는 완벽한 작전에 들어갔지만 여기에 못지 않게 리브가도 역시 자기 사람 밀어주기 작전을 실시해서 결국 모든 축복이 몽땅 야곱에게 돌아오고 맙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의 속임수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순전히 하나님이 개입한 결과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친히 축복으로 개입하면 천국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소외시키면 그 사람은 저주받을 자인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 눈을 뜨게 된 이삭은 비로소 축복의 내막을 알았습니다. 즉 축복이란 딴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는 바로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면 운명이 안 바뀝니다. 이삭은 자신이 실패를 통해서 이점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21절에 보면,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에 보면, 지팡이에 의지해서 경배한 것이 아니라 침상에 의지해서 경배와 축복을 했습니다. 웬 난데 없는 지팡이입니까?

 

야곱은 처음부터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건장하고 의기양양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버티는데는 장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고 달성한다는 주의이지요. 내 재산은 내 지혜로 모은다는 겁니다. 이것에 보람과 쾌락을 느낀 사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2장에 보니 야곱은 자신의 힘의 원천이 와장창 무너져 내립니다. 진짜 축복이란 다른 인간을 꺽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진짜 엄청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진짜 붙어야 될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그토록 자랑했던 완력의 원천이 망가지면서 그분에게 살려달라고 빌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지팡이 없이는 못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이 가장 근본적으로 삼는 원천을 박살내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과연 하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5:11에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허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현재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격받아 깨어진 장소가 바로 허리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보겠다는 인간의 의지가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깨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작정하신 축복의 결과들이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야곱은 죽고 깨진 허리를 가진 이스라엘이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야곱의 힘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살다가 작살난 자가 바로 나이다"라는 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부화의 생명체가 야곱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바로 지팡이입니다.

 

과연 야곱의 허리에서 열왕들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 요셉의 한평생이 보여주게 됩니다. 야곱에게는 무려 12명이나 되는 자식이 있습니다. 과연 12명 가운데 어느 누가 축복권을 인계받을 것인지 누가 감히 알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요셉이 꿈을 꾸게 됩니다. 볏 짚단이 둘러서서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라든지 해와 달과 별 11개가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을 꿉니다. 이로서 더욱 더 형들에게 밉상을 받아서 결국 가장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애굽 나라 종으로 팔려갑니다.

 

과연 그 꿈은 무산되어 버릴 까요? 여기 또 다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꿈을 꾸게 되는데 살찐 암소 7마리가 풀을 뜯어먹다가 뒤에 나타난 흉한 암소 7마리가 되레 그 소들을 잡아 먹는 꿈을 꾸게 되고 또 무성한 일곱 이삭이 피어나다가 뒤에 등장된 바싹 마른 일곱 이삭에 되레 삼킴을 당하는 꿈 때문에 고민합니다.

 

여기에 가장 말단 신세에 처해있던 요셉이 등장해서 흉년을 대비한 훌륭한 정책을 사전에 구사하게 됩니다. 모든 재산이 일시에 애굽 나라로 몰리게 되고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애굽 나라의 종이되는데 그 와중에서 야곱의 식구들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요셉의 꿈처럼 모든 것이 이루어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야곱 자신의 운명을 통해서 전달되는 복의 결과이었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하나님의 복이 지니고 있는 한 가지 원칙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원래적인 인식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꺽으시면서 복은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에 있어 그 증거는 깨어진 허리이며 그 허리 때문에 지팡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말년에 눈이 어두울 때에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해주게 됩니다. 역시 축복과 저주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자와 차자의 본 위치에 앉게 하고서는 이상스럽게도 손을 어긋맞게 하여 축복을 합니다.

 

요셉이 손 위치가 반대가 되었다고 말리려 들자 야곱은 말합니다. "나도 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네 인간 사정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가 기대하는 식과 정반대로 나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살리는 식으로 축복의 방안을 지레짐작 하며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깨어져야 하고 무너져야 될 대상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이 있습니다. 그래야 천국이 저의 것입니다. 이 가난한 심령을 만들어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마치 저주처럼 간주되는 일을 가지고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스스로의 모든 성공적인 기지와 지혜가 무용지물이 되게 하십니다. 그럴 때 비로서 우리들은 부활의 생명체가 결코 우리의 힘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축복이란 이처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일방적으로 개입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아는 것입니다. 이 느긋함과 자신만만함으로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스스로 잘 믿기에 너무나도 완벽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개입없이는 구원도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만 공로를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3. 언약적인 축복(히 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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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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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럴까?

성경에 보면 부활이 나오는데, 이 부활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죽었는데, 다시 산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신자라는 것은 부활체인데, 즉 교회는 영생을 얻은 부활 자들의 집합이라는 말이죠. 성경에서 이렇게 신자를 영생을 얻은 자, 혹은 죽었는데 살아난 자들이라고 하니, 이게 좀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과연 그럴까?”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세상에서 인정해주는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 살아있는 이 몸을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살려내는 것인데, 우리는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지요. 이게 현실적인 정서인데, 거기에 비해서 성경은 죽음과도 상관없는 상태를 제시하니까, 전혀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는 말이죠. 정말로 귀신 열전과 같은 느낌까지 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귀신들의 특징이 바로 ‘무소유’ 라는 겁니다. 세상에서 좋다는 것, 아름답다 것, 귀하다는 것도 귀신들한테는 시큰둥하겠죠. 필요치가 않다는 겁니다. 그만큼 이 세상을 초월해있는데, 하지만 거기에 비해서 이 세상의 인간들은 소유가 자기를 살린다고 여기고, 악착같이 매달린다는 말이죠.

귀신들이 벌리는 축구시합 !!

왜 축구시합을 보면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뉘어져 있지요. 우리네 인생도 역시 그러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전반전이라고 하면, 후반전은 이미 승리를 즐기고 있는 하늘나라의 생활이라는 것이죠. 물론 실제 축구경기는 후반전이 더 치열하지만 말이죠.

그러니 성경은 전반전에는 좀 고생할지 몰라도, 후반전을 거쳐서 결국 승리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귀신들이 벌리는 축구시합인데, 즉 부활의 집합체가 벌리는 노닥거림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이렇게 영생을 받은 자들은 그 소속이 다 하늘나라인데, 이런 귀신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야기하고,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이 세상 것에 대해서 초연하게 되고, 무엇을 더 가지지 못해서 애태울 것도 없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은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후반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세상 것을 소유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니겠죠. 왜냐하면 그런 것을 모두 버릴 정도도 월등한 것 속에서 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부활의 삶을 누리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라고 자연스럽게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복은 우리가 소유할 수 없어 !!

오늘 본문에 보면 축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는 성경자체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축복에 대해서 선입감을 가질 수가 있어요. 축복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성경책에 박혀있더라도, 느긋한 후반전을 뛰고 있는 사람들과, 전반전을 뛰고 있는 사람들은 그 알고 있는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얼마나 좋으냐? 이 모든 것을 초월해 버렸으니, 정말로 좋다” 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후반전에 속해있다고 하면, 반면에 “저 권력과 재물이 내 소유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여전히 전반전에 속해있다는 말이죠.

여러분, 복은 우리가 소유하고 사수할 대상이 전혀 아닙니다. 도리어 복이 우리 자신을 그만 뒤덮어 버리는데, 마치 눈사태가 덮치듯이 말이죠. 아등바등 살려고 하다보니 생겨난 고뇌와 한 맺힘과 같은 것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없는데, 그런 것들이 다 없어버린 것이 바로 축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애를 써도 축복 바깥으로 탈출할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천국이 바로 그러한데, 누가 뭐라고 해도 일단 천국에 간 사람은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천국에서 살아야만 하는데, 그렇게 운명 자체가 축복의 종이 되어서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러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축복이 아니고 복이라고 하셨는데, 물론 같은 뜻인데 말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심령의 가난함인데,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것은 후반전을 뛰는, 이미 영생을 얻은 무리들의 마음가짐인데, 즉 가난한 심령 자체가 자기 자신을 장악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텅텅 비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도 역시 복 자체가 우리를 뒤덮어버리는데, 그러니 도저히 여기서 빠져나갈 수가 없는, 그런 인생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말하는 현실은 그게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 라는 것이 곧 현실의 전부라는 말이죠. “살아있는 이 놈의 몸을 도대체 어떻게 관리하지?” 라고 신경을 쓰는 것, 그것만 가장 확실한 현실로 본다는 겁니다. 물론 남의 몸 같으면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자기 몸을 어떻게 자기가 무시를 하느냐는 말이죠.

아랫배가 점점 확장이 되면서 이전에 입던 바지를 입지 못하게 되면 정말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물론 그 반대도 있다고 하는데, 밤에 제 아무리 라면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점점 줄어든다는 말이죠. 물론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현상인데, 아무튼 끼니때마다 맛있는 것을 먹여주어야 하고, 잠도 재워주어야 하고, 그리고 옷도 새로운 유행에 맞추어서 입혀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새로운 부활체로 교체시키는 하나님의 작업 !!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부활체로 교체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몸을 없애는 작업에 들어가시는 겁니다. 우리를 점점 목을 졸라서 죽이시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기쁨과 환희로 받아드리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이죠. 말을 하고 보니, 표현이 조금은 이상한데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죽게 하시는 작업을 보고 즐거워할 줄 아는 자가 곧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신제품이 있기에 중고품은 중고품이 되게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자신만만하다는 겁니다. 이미 시민권에 하늘에 있으니 말이죠.

요즘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얼굴을 보니까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은데, 전라도도 쥐고 있고 부산도 그렇고 말이죠. 하지만 기껏해야 한 나라의 대통령에 불과한데, 그것은 청와대 천하이지 귀신 천하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전반전인데, 새로운 고민거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성경은 참으로 이상한 책인데, 축복이라는 말을 던져도, 그게 이미 죽었다가 부활된 자들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는 겁니다. 이 관점과 동일할 때만 신자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신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느긋함으로 성경을 볼 수가 있어야 하는데, “아이고 이것을 못 지켰으니 나는 지옥에 갈 거야” 라고 호들갑을 떨면, 그것은 전혀 신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행함과 상관이 없는데, 그러니 상관이 없는 것에 자꾸만 마음을 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행위가 없이 얻어진 것이 구원이요, 부활이요, 영생이라는 겁니다. 축복이란 하늘에서 일방적으로 내리는 폭설인데, 이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얼마나 착한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자기를 뒤덮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삭과 야곱 !!

여기에 축복에 관해서 두 사람이 나오는데, 이삭과 야곱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들이 오늘날 사람들이 축복을 받은 자라고 간주하는, 그런 자들입니까? 그들이 삼성재벌이라도 됩니까? 아니라면 청와대의 권력자였습니까? 오히려 그런 것과는 비켜가고 있는데, 이 세상의 축복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죠.

여기 20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축복이란 ‘장차 오는 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즉 귀신들이 벌리는 후반전이 아직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보면 이삭과 야곱은 고생을 늘어지게 했는데, 하지만 야곱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과연 그러한지 말이죠.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자는 것이죠. 전반전만 가지고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논하면 안 되는데, 아직 시합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축복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일을 하십니까?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 땅에 나타나는고 하니, 부활의 세계란 죽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데, 따라서 부활에 참여하게 될 자들은 미리 자신이 죽었음을 알게 되는 과정을 경험한다는 말이죠. 즉 자기 죽음을 미리 맛본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살할 문제가 아닌데, 정작 죽어야하는 것은 자기 목숨이 아닌,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왔던 힘, 즉 “나는 나로 인해서 살아간다” 라는 의식, 그것이 붕괴되는 과정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후반전의 삶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를 살아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다” 라는 것인데, 주님으로 인하여 자기가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두 가지인데, 자기로 인해서 사는 것과 하나님으로 인하는 사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이러한 두 가지 사고방식이 공존되어 있는, 물론 우리 속에도 둘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고 방식이 하늘나라에 부합되지 않는 것인가?” 라는 것을 골라내서, 그만 짓밟아버리신다는 말이죠. 그런 식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을 다루어 가신다는 겁니다.

이삭은 성도의 본보기 !!

그것을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라고 하는데, 이삭은 알다시피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다같이 못난 자들인데, “나는 구원을 받았기에 나에게는 하자가 없다” 라고 여긴, 그런 교만한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마음가짐은 가지고 싶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반전을 뛸 때까지는 자기에게 얼마나 많은 죄가 들어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자기 죄를 알아서 스스로 처리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 그 자체를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즉 죄는 죄대로 남겨두시고 구원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왜 아직 나를 이 땅에 남겨두시는가?”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서 보여주시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도 다루신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은 성도의 본보기와도 같다는 말이죠.

쌍둥이의 등장 !!

창세기 25장을 보면, 이삭은 맏이인 에서를 대단히 사랑했는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약속된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에게 하늘의 축복권을 인계해주면 그만이었는데, 물론 자기가 임의대로 해서 낳은 종의 자식인 이스마엘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런데 이삭의 경우에는 쌍둥이 아들이, 즉 두 명이나 동시에 등장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 25: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창 25: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창 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창 25: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창 25: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일부로 이삭을 혼동케 하셨는데, 왜냐하면 평소에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 라고 자부를 했지만, 그런데 둘을 동시에 낳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둘 다 좋은데, 어떻게 하나를 선택하지? 내 성질대로 골라잡자”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경향이 나오도록 일부러 하나님께서 유도를 하시는데, 그렇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실 때는 살살 약을 올리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평소에는 “나는 거룩하다. 나는 자랑스러운 성도다” 라고 하다가, 막상 어떤 일이 생기게 되면 그만 그게 헛갈린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것은 자신 자신도 모르는데, 앞으로 살아봐야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을 통해서 잠재되어있던 죄가 나오도록 유도를 하신다는 것이죠. 우리의 본색을 늘 노출하도록, 즉 “이래도 너희가 거룩하다고? 하늘만 쳐다본다고?” 라고 말이죠.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복권에 당첨이 되게 해서 헛갈리게 할 수도 있는데, “이래도 돈이 싫단 말인가?”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물론 그런 유혹은 서로 당하려고 난리인데, 그러니 그런 유혹을 아무에게나 허락하시는 것은 아니고, 거기에 적합한 사람은 또 따로 있다는 겁니다(ㅋㅋ).

이삭의 에서에 대한 일방적 사랑 !!

아무튼 그렇게 두 명의 자식을 낳게 되면, 거기에는 우열이 생긴다는 겁니다. 이삭은 남성다운 에서를 더욱 좋아했는데, 자기와 성질이 비슷한 놈을 선택했다는 말이죠. 이삭은 바깥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큰놈인 에서가 그러했다는 겁니다. 에서는 바깥에서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으니 말이죠.

여러분이 믿을지 몰라도 저는 성격이 내성적이라서 낚시와 사냥과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것이 가정파탄의 주범이라는 겁니다. 매일같이 바깥으로만 돌아다니기 때문에 자기 가정을 박살내는 것은 물론이고, 총을 잘못 쏘면 남의 가정도 그렇게 만든다는 말이죠.

아무튼 이삭은 에서가 마음에 든다는 겁니다. 행동의 규칙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좋아 보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자는 무슨 짓을 해도 밉상으로 보이기 마련이라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평생 그런 자신의 선입견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말이죠.

자식도 당연히 편애를 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사람은 그것을 들키지 않을 뿐이고 말이죠. 늦둥이라도 하나 낳아보세요.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지 말이죠. 아무튼 이삭은 에서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푸는데, 좋은 것은 다 그의 것이 되도록 밀어주는 겁니다. 전혀 게임이 공정치 않다는 말이죠.

이삭은 에서를 몰래 불러서 하나님의 축복을 몰아주려고 하는데, 그래서 에서가 사냥을 해서 가지고 온 것으로 축복을 해주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야곱이 아무리 어떻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말이죠. 완전히 일방적인 게임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반면 이삭의 부인인 리브가는 동생인 야곱을 엄청 좋아하는데, 그러니 자식이 둘이라는 것이 계속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그야말로 가정파탄이 일어날 지경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는 왜 죽을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보여주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삭이든, 리브가든, 에서든, 야곱이든, 모두가 자기 힘으로 자기를 살리려는 의식에 그대로 놓여있는데, 그래서 모두가 다 자기 성질대로 행동에 옮기게 된다는 말이죠. 모두가 똑같은 놈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나 강의를 하면서 “여러분, 성질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이것 때문에 시비를 거는 분들이 많은데 말이죠.

어디 사람이 조심한다고 해서 자기 성질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단지 성질이 잠시 위장될 뿐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곧 ‘신앙 사칭죄’ 라는 것인데, 저는 도저히 이것을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냥 믿으면 되는데, 왜 자기를 위장하면서 난리를 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숨겨놓은 성질까지 들추어내시는데 초점을 두고 일하시는데, 수시로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서 폭로를 시킨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인간의 자기 선택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는 겁니다. 결코 인간의 자기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의 그 어떤 선택도 의가 될 수 없는데, 이삭과 에서는 나름대로 완벽한 작전에 들어갔지만, 야곱을 따돌리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못지 않게 리브가도 역시 야곱과 작전을 실시해서, 결국에는 모든 축복이 몽땅 야곱에게 돌아오도록 만들고 만다는 겁니다.

이삭과 에서, 그리고 리브가와 야곱이 벌리는 전반전 !!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참으로 치졸한데 말이죠.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많아서 앞을 잘 보지 못하니까,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형인 에서처럼 몸에 털이 많은 것처럼 위장을 시켜서, 그래서 사냥을 했다고 하면서 아버지에게 바치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이삭은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손에 털이 많은 것을 만져서 확인하고는, 큰놈인 에서라고 여기고 축복을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닌가요? 늑대가 양을 잡아먹기 위해서 위장을 하잖아요. 그래서 늑대가 엄마처럼 보이기 위해서 팔을 흰색으로 색칠을 해서 “여기 엄마 손이다. 그러니 문을 열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문을 열자 그만 잡아먹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엄마의 복수혈전이 벌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집에 오는데, 하지만 이제 그에게 돌아갈 축복은 남아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뜻은 천국의 내막을 소개하는데 있는데, 그러니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은 가지고 있는 정보자체가 다르다는 겁니다.

몽땅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은 천국에 가고, 하지만 이런 인간은 지옥에 간다” 라고 하는 것을, 이 둘을 다 우리에게 축복의 덩어리로, 그렇게 눈사태를 일으켜서 뒤집어씌운다는 말이죠. 즉 “천국에 갈 사람인가? 지옥에 갈 사람인가?” 라는 정보자체를 우리에게 입혀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리브기와 야곱의 속임수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당한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야곱이 받은 축복은 순전히 하나님이 개입한 결과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친히 축복으로 개입하시면 천국에 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소외시키면 그 사람은 저주받은 자가 된다는 말이죠.

이삭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

야곱은 처음부터 천국에 가도록 예정된 자이고, 반면에 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그런데 철없는 이삭이 그 운명을 틀어보려고 시도했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그 운명이 바뀌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이삭은 자신이 실패를 통해서 이러한 점을 알게 되었는데, 물론 이것을 야곱은 알고 있었고, 그것을 축복을 해준 당사자인 이삭도 알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하, 내가 내 머리로 뛴 전반전은 전혀 하늘나라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구나. 하나님이 처음부터 개입을 하셨구나. 주여,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삭은 자기의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 무엇이 진짜 복인지, 즉 하나님의 축복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삭은 기쁘게 야곱에게 축복을 하였고, 에서에게 저주를 하였다는 말이죠.

그것은 야곱도 마찬가지인데, 오늘 본문 2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여기에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라고 하는데, 그러나 창세기 47장에 보면 야곱이 지팡이에 의지해서 경배한 것이 아니라, 침상에 의지해서 경배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웬 난데없는 지팡이입니까? 여기서는 침상이 아니라 왜 지팡이가 등장하느냐는 겁니다.

(창 47:31) 야곱이 또 가로되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

야곱이 처음부터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자가 아닌데, 건장하고 의기양양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자기 힘으로 버티는데는 일가견이 있던 자인데, 즉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고 달성한다” 라는, “내 재산은 내 지혜로 모은다” 라는 사고방식으로 살았던, 그런 것에 보람과 쾌락을 느끼면서 살아가던 사람이라는 겁니다.

무너진 야곱의 원천, 그리고 ‘지팡이’ !!

그런데 창세기 32장에 보니, 야곱은 자신의 힘의 원천이 그만 와장창 무너져 내립니다. 진짜 축복이란 다른 인간을 꺾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진짜로 엄청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동안에는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는데, 먼저 자기의 형을 이김으로서 그러한 자신감을 가졌다는 겁니다.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창 32: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창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런데 진짜 붙어야 될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거기에서 야곱은 그동안 자기가 그토록 자랑했던 힘의 원천이 그만 망가지면서, 그분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죠. 그때부터 야곱은 지팡이가 없이는 버티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즉 야곱은 하나님이 왜 자신이 근본적인 원천을 박살내는지를 알아야만 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창세기 35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창 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깨진 허리와 이스라엘 !!

여기에 보면, ‘허리’ 라는 말이 나옵니다. 현재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깨어진 장소가 바로 허리입니다. 그러니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보겠다는 인간의 의지가 있던 자리,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깨진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작정하신 축복의 결과물들이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은 허리가 깨지면서, 거기에서 ‘이스라엘’ 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허리는 깨진 장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의 장소가 된다는 겁니다. 이제 야곱은 더 이상 자기 힘을 사용하지 않게 되는데, 즉 “내 힘으로 살다가 작살난 것이 바로 나입니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부활의 생명체가 야곱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야곱을 주물럭거리면서 일을 진행시켜 나가시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바로 ‘지팡이’ 라는 말이죠. 그래서 야곱은 지팡이를 집고 절뚝거리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과연 야곱의 허리에서 열왕들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러면 과연 야곱의 허리에서 열왕들이 나올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야곱은 걱정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을 요셉의 일생이 보여주게 된다는 겁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한 명이었고, 이삭에게는 두 명이라서 헛갈렸고, 그런데 야곱에게는 무려 12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12명 가운데 어느 누가 축복권을 인수를 받을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을 하시는데, 그래서 요셉이 꿈을 꾸게 된다는 겁니다. 꿈의 내용이 참으로 특이한데, 11개의 볏 짚단들이 둘러서서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11개가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편애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로서 더욱 형들에게 밉상을 받아서 결국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된다는 겁니다.

과연 그 꿈은 무산될까요? 여기 또 다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꿈을 꾸게 되는데, 살찐 암소 7마리가 풀을 뜯어먹는데, 뒤에 나타난 흉한 암소 7마리가 도리어 그 소들을 잡아먹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다시 꿈을 꾸게 되는데, 무성한 일곱 이삭이 피어나다가, 뒤에 등장하는 바싹 마른 일곱 이삭에 도리어 삼킴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바로 왕은 이 꿈으로 인해서 고민을 하는데, 그러자 감옥에 갇혀있던 요셉이 드디어 등장해서 그 꿈을 해석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들이닥칠 풍년과, 그리고 흉년을 대비한 훌륭한 정책을 미리 세우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모든 재산이 일시에 애굽으로 몰리게 되고, 주변에 있던 나라들은 그만 애굽 나라의 종이 되는데, 그 와중에서 야곱의 식구들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일부터 풍년이 들고 하고, 또한 흉년이 들게 하셨는데, 그것은 애굽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겁니다. 하지만 애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전혀 흉년을 대비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요셉에게 꾸게 한 꿈을, 즉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요셉의 가족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오게 되고, 결국 요셉의 발 아래에 놓이게 되는데, 즉 요셉이 주가 된다는 겁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은데, 요셉은 자기 동생을 일부러 볼모로 잡으면서 자기 가족들이 우여곡절을 겪는데, 형들은 겁에 질리고, 아버지 야곱도 슬픔에 쌓이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결국 자기들이 그렇게 무시했던 요셉에게 도움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과 그 식구들은 요셉의 꿈처럼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들은 야곱의 운명을 통해서 전달되는 축복의 결과였다는 말이죠. 야곱의 허리에서 열왕들이 나온다고 하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이죠. 즉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죠.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의 복이 지니고 있는 한 가지 원칙을 알게 되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타고난 인식을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꺾으시면서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말이죠. 야곱에 있어서 그 증거가 바로 자신의 깨진 허리고, 그것 때문에 야곱은 지팡이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하지만 그게 곧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이라는 겁니다.

아들아, 나도 안다 !!

그래서 야곱이 말년에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해줄 때 어떻게 합니까? 야곱도 역시나 이삭처럼 축복과 저주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자와 차자를 본래 위치에 앉게 하고서는,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손을 어긋맞게 해서 축복을 한다는 겁니다. 팔을 펴서 바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것을 오늘 본문 21절에서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라고 하는데, 즉 ‘지팡이’에 의지해서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께 까불다가 얻어맞은 그 지팡이, 자기의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구원을 받으려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바꾸라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손을 어긋맞게 해서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철저하게 깨어지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대로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요셉은 그 장면을 보고,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서 그렇게 하는 줄로만 알고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손이 바뀌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자 야곱이 뭐라고 합니까? “아들아, 나도 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48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창 48:13)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창 48:14)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창 48: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창 48: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창 48:17)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창 48:18)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창 48:19)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참으로 가슴이 뭉클했는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사정을 다 모를 것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아신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이기에, 전반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후반전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사정을 다 알면서도, 우리가 기대하는 식과는 정반대로 나아가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살리는 식으로 축복의 방안을 지레짐작하며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깨어져야 하고 무너져야 될 대상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큰 양식이고 큰 은혜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열심을 내지 않더라도, 그냥 값없이 주시는 영생과 부활의 혜택인데, 과연 그것을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고마워했느냐는 겁니다.

사실상 우리는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해보려고 했으니 말이죠. 하지만 그것을 박살내는 것이 곧 야곱의 지팡이였고, 그래서 야곱은 남은 인생을 감사하면서 그 지팡이에 의지해서 살아갔다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데,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가난한 심령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마치 저주처럼 간주되는 일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시는데, 그렇게 해서 우리 스스로의 모든 성공적인 기지와 지혜가 무용지물이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부활의 생명체가 결코 우리 힘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데, 그러니 축복이란 무엇입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일방적으로 개입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느긋함과 자신만만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반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후반전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진짜 승리는 거기에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까불고 있습니다. 부활의 집단, 영생의 집단, 거기에 포함이 되었으면 느긋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9 오후 4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