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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11:17-19) 도로 받은 생명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1:17-19) 도로 받은 생명

정인순 2010. 9. 5. 11:41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42강-히11장,17-19(도로,받은,생명)-heb020421.mp3

 

 

도로 받은 생명

 

2002년 4월 21일 42강

 

본문 말씀: 히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신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어떻게 만들어 주시는 겁니까? 시장에 나가보면 많은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건들이 어디서 만드는지를 압니다. 제품은 공장에서 나오고 농산물은 농부에게서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돈만 주면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래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에 대해서 이처럼 시장에서 물건 구입하듯이 대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영생은 사람들에 의해 함부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의를 다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가지는 것은, 시장 물건 한 트럭하고도 바꿀 수 없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니, 영생은 주님의 채찍 맞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니 어린 양 되시는 분이 피를 흘림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분이 대신 징계를 받게 되므로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생을 받아 챙겼다"라는 것에 비중에 두지 마시고 영생을 주시기 까지 채찍을 맞고 피흘려 죽으신 그 고통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빠뜨리면 안됩니다. 공짜로 얻는 것이 영생이지만 그를 제공하기 위해서 수고하신 하나님의 노고를 영생의 핵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 나름대로 아픔을 하나님에게 하소연 하지요. 하지만 영생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아픔을 내몰라라 할 수는 있겠습니까.

 

제가 방금, 영생이란 채찍에 맞음으로 얻었고 징계를 받음으로 얻었다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19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생을 가진 자는 이제 죽음에 대해서 "이겼다!"라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 영생이니까 그런 겁니다. 죽으셨는데 거기서 영생이 나왔으니 영생을 받았다는 말은 곧 더 이상 죽음과 상관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물론 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일단 살았더라도 영원히 안죽었으면 하는 것도 또한 우리의 희망 사항입니다. 정말 영생이 주어지게 되려면 그 영생이 죽음을 꺾은 적이 있다는 과거의 이력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살고 싶다, 살고 싶다"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열망의 표출이라고 실효성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실제로 효과를 줄려면 죽음에서 도로 받은 그런 생명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동원된 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심어준 약속은 퍽이나 위대합니다.

 

사람마다 각자 하나님이 심으신 약속의 파편들이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어떤 이를 눈이라고 어떤 이를 발이라고 지칭됩니다. 이것이 은사, 곧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원천자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은사들은 '죽음에서 도로 받은' 성질을 함유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작품입니다. 자신이 홀로 징계를 받았고, 홀로 채찍에 맞음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을 떠나 있습니다.

 

자... 이 영생을 아브라함 통해서는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이 영생을 대해서 아는 것을 단지 지금 우리처럼 앉아서 설교 듣는 식으로 얻습니까? 물론 아브라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목회자요 설교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혼자서만 영생주시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대의 태어날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진리를 전하는 시범자 역할을 해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일생 전부를 가지고 영생을 설명하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전했습니까?

 

아브라함이나 우리들이 다 같은 인간입니다. 따라서 나름대로의 꿈이 있고 비젼이 있는 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아침에 눈만 뜨면 오늘 하루동안 달성해야 될 목표를 생각하는 것처럼 아브라함도 그런 자였습니다.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곧 아브라함의 모든 꿈을 깨어버리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개입이란 늘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의 관여는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최종적인 인간의 궁극적 꿈에다 직격탄을 던져 와해시키는 일입니다. 현재 아브라함에게 있어 사랑의 대상은 오직 이삭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해서 번제를 드려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관여는 인간의 편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한 테스트에 통과 못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시험 문제를 우리가 출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껏 인간들이 스스로 만드는 시험문제가 이런 것들입니다. 하루에 성경 3장 읽기, 기도 시간은 1시간으로 잡기, 올해에 전도 2명하기, 이번 여름에는 기도원에 가서 방언 터지게 하기, 다시는 욕 안하기, 에로 영화 더 이상 안보기,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 스스로 내는 문제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음도 또 그것을 스스로 어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문제내고 스스로 정답 내어서 지켰다고 자위하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테스트에서는 그 정답에 대해 인간은 모릅니다. 그냥 문제가 던져질 뿐이고 인간의 반응만 지켜 볼 뿐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스스로 신앙 생활에 열성을 내려고 한다면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건드리는 그 방식은 도저히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이랬을 것입니다. "내 하나 밖에 없는 이삭을 신학교에 보내어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일꾼을 만들어야 겠다"라는 꿈 같은 것을 가졌을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주셨다, 그 다음, 잘 키워야지, 그 다음, 잘키우는 것이 무엇인가?, 그 다음 국가와 민족을 위한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 이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영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착실하고, 이렇게 훌륭하다고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영생은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얻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종교 시장에 가보세요. 나름대로 기도 도사, 전도 도사, 봉사 도사, 선행 도시, 금욕 도사 들이 수두룩합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기독교 들어온 지 기껏 200년 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무려 2000년 이상 종교가 발달하면서, 자기 절제 기술, 신체의 고통을 면하는 방법, 정신 통일하는 방법, 번뇌와 마음의 심란할 것을 잠재울 수 있는 특별한 처방 같은 것들은 대단히 발달해 있습니다.

 

종교도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기 때문에 성화되는 방법, 거룩해 지는 방안 같은 것이 종교의 선배들이 많은 기법을 내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높다란 원주 위에 앉아서 도를 닦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적 애씀과 노력은 신에게 잘 보이려고 스스로 문제를 출제하고 해답도 같이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신에게 귀염받고 칭찬받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영생을 못 받았기에 허전해서 해보는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공허감을 메꾸기 위해 발악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따로 있으니 너의 노력이 별개 아님을 네가 아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로마서 9:27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되어 있고 로마서 11:4-6에 보면, 같은 뜻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은 자만 건진다는 겁니다. 인간의 행위 세계 안에서도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않는 자를 구원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영생이라는 것이, 공장에서 상품 만들 듯이, 농장에서 농사 짓듯이 하여 생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특정 인물 한 분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그 분에게 일임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인들은 이 점을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 노력 여하에 영생이 주어진다는 주장을 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테스트하면서 보신 것이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의지하느냐 하는 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과연 자신이 아끼고 가진 것을 의지하느냐를 보십니다. 19절에 보면,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왕 살았으니 계속 사는 식으로 나가도록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끌어당길려고 합니다. "이미 산 목숨이나 계속 살려주소서" 라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부르짖습니다. 산 인간 더 살게 해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어떻게 보았느냐 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살리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답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브라함이 영생을 얻기 전에 어떤 노선에 서 있는가도 아울러 보고자 합니다. 영생이라는 것이 시장에 물건 고르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 아브라함이 어떤 하나님으로 보았는가 하는 점까지 아울러 우리들도 공유해야 합니다. 이런 요건을 갖추니 하나님 보시기에 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믿으려면 아브라함처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해서 이런 하나님인줄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제사를 요구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제사를 요구하셨다는 것은 그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뭔가 알리고자 한 것으로 뭔가 있구나 하는 것으로 이해 한 것입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 아브라함 본인과 이삭이 한 세트가 되어 영화 찍듯이 역할을 담당하므로서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둘의 행동이 하나님의 작품을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둘이 뭐 했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은 서슴없이 죽음의 자리로 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역할을 아브라함이 하고, 아들의 역할은 이삭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영생이 주어지느냐를 아브라함과 이삭의 동원해서 후대에게 전달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버지가 사랑하는 제 자식을 칼로 잡아 죽이는 것이 얼마나 가슴터지는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 고통이 바로 지금 하나님의 고통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건지시기 위해 아낌없이 자기 아들을 버렸잖습니까. 영생은 이렇게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털털 털리도록 하시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고통과 채찍 맞음과 아픔이 채워지도록 하십니다.

 

종착역에 도달한 승객들이 슬슬 자리에 일어나서 내릴 준비를 하지요. 이처럼 "이제 끝이다!"고 여겨야 합니다. 건강, 명예, 인기, 남들의 수군수군 거림도 쓰레기 봉지에다 담아 버리게 되고 그 빈자리에 영생이 들어와 교체가 되어야 합니다.

 

내 꿈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차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찬송하고 기도하고 선행을 해도 예수님이 하신 것에 어떻게 보답이 되겠습니까. 거저주시는 영생을 고맙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생을 공짜로 얻었지만 그 배후에 예수님의 고난의 작품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고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픔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2. 도로 받은 생명(히 1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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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히 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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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에는,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이 !!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신다는 이야기가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생을 어떻게 만들어 주십니까? 시장에 가보면 많은 물건들이 나와있는데, 그리고 그 물건들을 어디서 만드는지를 압니다. 공산품은 공장에서 나오고, 또 농산물은 농부에게서 나오죠. 그래서 우리는 돈만 주면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가 있는데, 이러한 거래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영생에 대해서는 이처럼 시장에 있는 물건을 대하듯이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영생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말이죠. 영생은 하나님이 성의를 다해서 만드신 것인데, 그러니 영생을 가진다는 것은, 시장의 물건들처럼 돈을 주고 사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이사야서 53장에 보니, 영생은 주님의 채찍 맞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리고 요한복음을 보면, 어린양이 되시는 분의 피 흘림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대신해서 징계를 받음으로서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다는 말이죠.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따라서 우리는, “나는 이제 영생을 받아 챙겼다” 라는 것에 비중에 두어버리면 안 되고, 그렇게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고 피를 흘리신 그분의 고통을 먼저 생각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빠뜨리게 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는 영생을 공짜로 얻었지만, 그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수고하신 하나님의 그 노고를 영생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고통과 아픔을 하나님에게 하소연하는데,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영생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고통을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 !!

제가 방금 “영생이란 채찍에 맞음으로 얻었고 징계를 받음으로 얻었다” 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달리 뭐라고 합니까? 19절에 보면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영생을 가진 자는 이제 죽음에 대해서 ‘이겼다’ 라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데, 즉 “죽음이 두렵지 않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 영생이니까 말이죠.

(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죽었는데 거기서 영생이 나왔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을 받았다” 라는 말은, “이제는 더 이상 죽음과 상관없다” 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물론 살고 싶은 게 우리의 소망인데, 일단 살았더라도 영원히 죽지 않았으면 하고 말이죠.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죽음을 꺾은 적이 있다” 라고 하는 과거의 이력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냥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라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열망이고 희망사항인데, 그게 실효성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는 겁니다. 실제로 효과를 주려고 하면 말로서만 외칠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시는데, 그리고 제일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도 아신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의 경우에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이 아닌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런데 그 뒷모습을 보니 “이제는 정말 죽음을 이겼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증거물을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죽음에서 도로 받았다는 것이고,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동원된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라는 말이죠.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을 대할 때, 물론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다 같은 인간인데, 그러나 아브라함을 대할 때, 그것은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자질이 아니고, 그것은 다 똑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아브라함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심어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이 위대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오늘날에도 각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것이 있는데, 즉 약속의 파편들이 다들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어떤 사람은 눈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발이라고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두 글자로 ‘은사’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고전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그런데 그 은사는 원래의 원천을 바라보게 되는데, 그것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원천자로부터 주어졌다는 겁니다. 즉 믿음도 원천자가 따로 있고, 소망도 원천자가 따로 있고, 그리고 사랑도 원천자가 따로 있는데, 그것을 선물로 받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은사라는 것은, 죽음에서 도로 받은 성질을 함유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죠.

죽음에서 도로 받았다 !!

설교를 다시 하면, 대형마트나 시장에서 파는 모든 물건들은 인간들이 애써서 만든 것인데, 즉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물론 옷을 만들다가 그만 재봉틀 바늘에 찔려서 피를 흘릴 수는 있는데, 또한 공기가 탁한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보면 엄청 고생도 하는데, 하지만 대신해서 채찍에 맞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면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음에서 도로 받았다” 라는 것은, 그것은 인간의 손을 떠났다는 것인데, 즉 예수님의 자기 작품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홀로 징계를 받았고, 홀로 채찍에 맞으셨는데, 그것은 저주를 대신해서 가지고 가시기 위해서, 지옥의 불 심판을 거두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예수님은 홀로 온 몸으로 다 받으셨는데, 바로 거기서 깔끔하게 튀어나온 것이 바로 ‘영생’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영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라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데, 물론 성경도 여기에 주목하고 있고, 우리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 일을 담당한 자가 바로 아브라함이었는데, 그러니 이제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영생이 구현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영생에 대해서 아는 것이, 지금의 우리처럼 앉아서 설교를 듣는 식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우리교회에 나와서 침이 튀고 잠이 와도 40분만 참고 버텨라” 라고 했느냐는 겁니다(ㅋㅋ). 그런 식으로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습니까?

물론 아브라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목회자이고 설교자인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혼자에게만 영생을 주시고자 했으면 그렇게 하셨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란 말이죠. 아브라함은 후대의 태어날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진리를 전하는 시범조교 역할을 해야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일생 전부를 가지고, “영생은 이렇게 해서 나온다” 라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아브라함에 전달했습니까?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다 같은 인간인데, 따라서 아브라함은 나름대로의 꿈이 있고 비전이 있는 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침에 눈만 뜨면 하루동안 달성해야 될 목표를 생각하는 것처럼, 아브라함도 역시 그러했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아, 꿈 깨라 !!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했다는 것인데, 이 시험은 곧 아브라함의 모든 꿈을 깨어버리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개입은 늘 이런 식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에 침입해서, 그가 가지고 있던 꿈에다가 그만 직격탄을 던져서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것이죠.

현재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꿈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어떻게 하면 자기의 사랑의 아들 이삭과 함께 남은 인생을 보람차게 설계하는가?” 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아브라함의 그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에게 바치라고 하시는데, 즉 “이삭을 제물로 해서 번제를 드려라” 라는 명령을 내리신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이나 우리가 똑같다고 했는데, 그도 역시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각자가 나름대로의 꿈이 있는데, 그렇게 아브라함도 꿈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난입을 하셔서, 아브라함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한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마는데, 이것이 곧 시험이란 말이죠. “아브라함아, 지금 너의 표정이 왜 그래? 완전히 똥 밟은 폼인데, 그렇게 하면 되겠나? 왜 내가 미워?”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출제하는 시험문제는 의미가 없어 !!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시험문제를 출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껏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시험문제는 이런 것들인데, 즉 “하루에 성경 3장 읽기, 기도는 하루에 10분 더하기, 올해는 전도 2명하기, 이번 여름에는 기도원에 가서 방언 터지기, 욕하지 않기, 에로영화는 일주일에 두 번만 보기 등등”, 이런 것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 스스로 내는 문제에 대해서 아예 관심조차도 보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다음에 또 그것을 어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문제를 내고 스스로 정답을 만들어서 지켰다고 위로하고 싶은 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테스트에서는 그 정답을 인간은 전혀 모르는데, 그냥 문제가 던져질 뿐이고, 그리고는 인간의 반응만 지켜볼 뿐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스스로 신앙생활에 열성을 내려고 했다면,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을 이렇게 하는 방식은 도저히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마도 다음과 같이 나왔지 싶은데, “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이삭을 신학교에 보내서,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일꾼을 만들어야겠다” 라고 말이죠.

왜 그런가요?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니 잘 키워야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렇게 잘 키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 그것이 전부라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영생이 아니라는 점인데, 즉 착실하고 훌륭하다고 해서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영생은 오직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얻어진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각양 도사들의 모임 !!

여러분, 종교시장에 가보세요. 나름대로 기도 도사, 전도 도사, 봉사 도사, 선행 도사, 금욕 도사 등등, 없는 도사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40일 금식기도가 먹혀들지만, 그 동네에 가면 그것은 기본이라는 말이죠. 일년에 절반 이상을 굶어가면서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들어온 지가 기껏 200년 밖에 되지를 않았는데, 그러나 다른 나라는 무려 2000년 이상 종교가 발달하면서, 자기를 절제하는 방법, 신체적 고통을 면하는 방법, 정신을 통일하는 방법, 번뇌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 등등, 그런 종교적 테크닉들이 대단히 발달해있다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고 어쩌고 하는데, 천주교를 보라는 겁니다. 그들은 수 백년 전부터 이미 그렇게들 해왔는데, 문둥병 환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생활하는 신부와 수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겁니다. 요즘은 개척교회의 주특기가 가운데 하나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 좀 모이면 정부 보조금을 타내고 말이죠.

종교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기 때문에, 성화가 되고 거룩해지는 방법과 같은 것은 이미 종교의 선배들이 다 내놓았다는 것이죠. 초대교회 때 어떤 사람은 높은 원주 위에 앉아서 도를 닦았다고 하는데, 초월적인 경험을 한다고 하면서 말이죠. 하늘나라와 가까운 곳에서 간다고 그렇게 높이 올라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세월에 그렇게 하겠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들의 모든 종교적 애씀과 노력이라는 것은, 신에게 잘 보이려고 스스로 문제를 출제하고 해답도 자기들이 제시하는 방식인데, 그렇게 해서 신에게 귀염을 받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하나님에 의하면, 그런 것 자체가 영생을 받지 못해서 오는 허전함에 몸부림을 치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는 말이죠. 즉 스스로 자신의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서 발악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이 따로 있으니, 그것이 너의 행위와 노력이 별 것이 아님을 네가 아느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바로 이것을 두고 ‘믿음’ 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믿음은 자기를 믿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로마서 9장 27절과 11장 4절에서 6절에 살펴보겠는데,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이 서로 같은 의미인데 말이죠.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11: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로 남은 자만 건지겠다 !!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남은 자만 건지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인간의 모든 행위는 차단이 되고 마는데, 은혜로서 남겨서 구원을 하시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행위의 세계 안에서,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않는 자를 구원하시겠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영생이란 것은, 마치 공장에서 상품을 만들듯이 그렇게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특정 인물에게, 오직 한 분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일임을 했는데, 그러니 당연히 다른 종교인들은 도저히 이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각자 노력 여하에 따라서 영생이 주어진다고 여기는데,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주장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특정 인물을 지정해서, 그를 믿는 자만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고 해버리면, 그게 도대체 말이 되냐는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당연히 불만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물론 우리가 보면 그게 기쁨이고 그야말로 ‘땡’ 잡았는데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테스트하면서 보신 것은 이것인데, 즉 “아브라함이 무엇을 의지하는가?” 라는 것에 관한 겁니다. 아브라함이 과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의지하는지, 그것을 보시겠다는 말이죠.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여, 이왕 살았으니 계속 사는 식으로 도와주소서” 라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한 끌어당기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이미 산 목숨이니 계속 살려주세요” 라고 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부르짖는데, 즉 살아있는 인간을 더 살도록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자기를 좀 키워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여겼는데, 이게 정답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 보자” 라고 해서 시험을 쳤는데, 아브라함이 정답을 맞추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죽은 것을 살리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것을 더 살려달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런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하나님답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이 서있었던 노선 !!

지금 우리는 영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즉 “영생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는가? 라는 것을 살펴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영생을 받았다고 하면 그 이전에 반드시 어떤 과정을 겪게 되는고 하니, 그러한 아브라함의 노선을 우리가 같이 따라가 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지금 우리는 아브라함이 영생을 얻기 이전에 어떤 노선에 서있는지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하는 겁니다.

영생이라는 것을 마치 시장에 물건을 고르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 얼마입니까? 오백원입니까? 그러면 주세요” 라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영생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이전에, 아브라함이 어떤 하나님으로 보았는지, 그러한 점까지도 아울러서 우리가 공유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격이었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믿으려면 아브라함처럼 믿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런 하나님인줄 알게 되었습니까? 19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게 좀 어려워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는고 하니, 그것은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기 때문인데, 그게 창세기 22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네 아들을 번제로 드려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사를 요구하셨는데, 번제를 말이죠. 그것을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해했는고 하니, 그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뭔가 알리고자 하는 것이 있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알고자 하는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 자신과 이삭이 한 세트가 되어서 영화를 찍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즉 둘의 행동이 하나님의 작품을 구성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 둘이 무엇을 했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은 서슴없이 죽음의 자리로 갔다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역할인데, 즉 하나님 아버지의 역할을 아브라함이 하고, 그 아들인 예수님의 역할은 이삭이 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세상에서 이런 이러한 일을 하고 싶다” 라는 것이 있었는데, 즉 “이런 식으로 해야지 영생이 주어지고 죽음을 이길 수 있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 역할을 아브라함과 이삭이라는 배우를 이 땅에 등장시켜서 보여주셨다는 것이죠. 물론 주연이 아니고 조연이지만 말이죠.

니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은 참 불쌍하다. 괜히 뽑혀서 그런 일을 하는구나. 우리처럼 이렇게 편안하게 설교를 들으면서 영생을 얻으면 되는데 말이야” 라고 하는데, 마치 군대에서 다들 일요일이라서 편안하게 쉬면서, 뽑혀서 사역을 나가는 동료를 보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 당시 아브라함이나 지금 우리나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같이 빼앗고 주시고 하신다는 말이죠. “제가 이것을 가지고 조국과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을 내놔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꿈과 비전이지 하나님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그야말로 자기의 몸을 텅텅 다 비워버린,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데리고 가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몸을 텅텅 비워버린 그 길로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연세가 많은 분들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분들은 그야말로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릴 준비들을 하는데, 그래서 옷도 입고 짐도 챙깁니다. 그때는 홍익회에서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을 팔아도 사지를 않는데, 이제 곧 내릴 것이니 말이죠. 물론 그럴 줄 알고 팔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건강,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명예, 인간, 남들의 수군거림, 그런 것도 이제 쓰레기통에 넣어도 괜찮다는 말이죠. 이런 것은 젊은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를 낼 수가 없는데, 젊었을 때는 이것저것을 다 해보다가, 물론 사기도 당하면서 말이죠.

아무튼 아브라함은 그것을 보여주었는데, 심지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까지 바치는 모습은,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아낌없이 희생시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그대로 재현되어야 하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꿈의 원천인 독생자를 바쳐라 !!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독생자’ 라고 하는데, 그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꿈의 원천이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교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주님이 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차고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곧 “너희가 백 날을 고생해봐라. 내가 채찍에 맞은 것에 비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란 말이죠.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하고, 낙타무릎이 되어도, 그게 예수님이 하신 일에 어떻게 보답이 되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를 좀 했다고, 전도를 좀 했다고 자랑하지 말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주님이 주신 그 사랑과는 비교할 수조차도 없다는 말이죠.

더욱이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아무리 보약을 먹고 해도, 그저 주시는 영생에 어떻게 비교가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현장에 투입되어서 온 몸으로 그것을 실현해서 보였는데, 또한 우리도 그러한 현장에 놓여있다는 말이죠. 그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설교를 듣고 해도, 돌아서면 그 자리에서 또 다시 자기 자신의 꿈을 꾸게 되는데,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소망을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억지로 포기할 필요도 없는데, 그냥 가만히 있다가 깨어지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깨어지지 않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 깨어지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시장에 가서 영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즉 우리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영생은 그 배후에 주님의 채찍에 맞으심과 징계를 받음과 고난을 당하심이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바로 그 결과물이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칼로 잡아죽이는 것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상상도 잘 되지 않는데 말이죠. 그 고통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말이죠. 그것을 평생 잊지 마시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우리 꿈을 달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못된 습관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를 못할 것 같은데,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대신 채찍에 맞아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는 아들을 버리신 아버지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8 오후 3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