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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11:13-16) 더 나은 본향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1:13-16) 더 나은 본향

정인순 2010. 9. 5. 11:38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41강-히11장,13-16(더,나은,본향)-heb020414.mp3

 

 

더 나은 본향

 

2002년 4월 14일 41강

 

본문 말씀: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각자의 윤리나 도덕이나 자질을 가지고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일단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신과의 비교 우열을 논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착하니 죽어서도 좋은데 갈 것이라든지 반대로 너는 이렇게 나쁘니 죽어서 아마 혹독한 지옥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들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대로 라면, 이 세상을 떠나겠다는 사람에게는 개인적인 자질과 상관없이 그냥 떠나겠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푹 젖어살기는 싫다는 겁니다. 16절에 보면,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왜 이 자리에 모인 겁니까? 땅의 것을 얻기 위해 나왔습니까?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기에 나왔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신자라는 소리는 듣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돌아갈 본향의 내막과 하늘 나라의 모습을 고대했다면 신자입니다.

 

그런데 평소의 우리 자신이 일상 생활하면서 느끼는 감과 이 성경에 나온 신앙의 선조들의 감과 잘 부합이 안되지요.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고수에게 한 수 배워야 합니다. 이 분들이 밖으로 드러내는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나는 이방인이나 나그네이다"라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농사를 짓듯이 가축을 키우든지, 장사를 하든지 간에 이런 감이 밖으로 흘러 나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신학체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그들이 정립한 사고방식을 단숨에 확 마시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세계에 합류하고 싶어집니다. 13절에 나와 있듯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를 라고 했으니 그 '이 사람들' 안에 저와 여러분들도 같이 포함되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그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았기에 이런 고백을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뭔가가 빠져 있다는 겁니다. 없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사실 대형 할인점에 가든지 시장에 가보면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선조들이 봤을 때는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이 땅에서 생명은 없고 전부 죽음 뿐입니다. 산 자가 없고 모두 죽은 자들 뿐입니다. 죽어 가는 자들만 모여서 술렁이고 있고, 죽은 가는 자들만 모여서 웅성웅성 거리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 끼리 모여 월드컵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죽은 가는 자들이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죽어 가는 자들이 승진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도토리 키재기 식입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토록 행복을 뽑아낼 만한 것이 없습니다. 골프? 여행? 모두다 허무로 끝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의 끝에는 허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식? 결국 자기 밖에 모릅니다. 예술? 자기 극복이 안되고 스스로 자멸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어떤 길을 뚫어도 그 막장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기? 사람의 모든 영광이란 일순간에 피고서는 곧 져버리는 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꽃은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도 꽃이 지는 양상도 동일합니다. 신앙의 고수들은 이것을 먼저 눈치 챘습니다. "떠나야 돼. 이곳은 내가 살 곳이 아니야. 여기는 죽음 밖에 없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일체의 경쟁을 하나님은 붙이지 않습니다. 누가 많은 돈을 벌었는가, 누가 잘났는가, 누가 많이 배웠는가 하는 경쟁 말입니다. 떠나느냐 마느냐 그것 뿐입니다. 죽음이냐 생명이냐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고마워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능력 차이를 묻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홀가분합니다. 정말 신앙의 선배들은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발견했기에 모든 자들이 가는 쪽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이 땅에서 나그네며 이방인이다는 점을 자신만만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 힌트가 16절에 보면 나옵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했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니, 하늘에 어떤 성이 있고 그곳은 영원히 살만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성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까? 만약 아신다면 기꺼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나그네로 간주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하늘에 있는 그 무엇이 이 지상에 있는 우리들에게 기쁨과 환희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선조들도 그랬으니까요.

 

에스겔 48:35에 보면 하나님이 친히 만든 성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깨서 이 지상에다 성을 만들지 아니하시고 하늘에다 성을 만드신 것입니까? 그것은 그 성은 거룩한 성이기 때문입니다. 방금 제가 '거룩'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흔히 교회 나오는 이유가 갓바위 복을 빌기 위해 나오는 그런 사람에게 무엇이 빠지게 되느냐 하면, '거룩'이 빠진 겁니다. 거룩의 소중함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거룩에 대해서 호감을 갖느냐, 네가 거룩에 대해서 깜짝 놀라고 있느냐? 네가 거룩에 대해서 푹 빠지고 감탄하고 싶으냐?"를 묻는 겁니다.

 

하나님은 거룩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인간들은 교회와서 "복 주세요"만 따지고 있습니다. 자기 소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유는 작은 겁니다. 또 타인의 것을 뺏아서 합쳐봐야 이 사람 것 , 저 사람 것을 아직 다 합치지 않았기에 여전히 작은 겁니다.

 

그러나 거룩은 큰 것입니다. 내 것을 따로 가지지 않더라도 온 우주를 충분히 덮을 만큼 큽니다. 작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지 마시고 큰 것에 푹 빠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사람이 작은 것, 가지고 사는 재미로 살면 안됩니다. 큰 것에 참여한 재미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이 더럽기에 하늘 나라에다 거룩한 성을 지으신 겁니다. 거룩이 성립해야 영생도 장만되는 겁니다.

 

이 땅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더러운 것에 마음을 둡니까? 사실 대다수가 이 더러운 세계에만 몰두하며 삽니다. 따라서 이런 대세를 벗어나서 하늘 나라만 바라 보고 산 사람들이 어떤 마음 가짐으로 살아갔을까요? 시편 84:5-7에 보면,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10절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세를 따르지 않고 그 삶의 현장에서 주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단지 거룩됨 때문에 문지기로 서 있는 것으로 만족하다는 자들이 이들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0:19-20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요구로 거룩한 곳에 들어 갈 수 있을까요? 우리들의 노력으로 사다리를 높이 걸치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거룩한 분이 이 땅까지 주저않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늘이 거룩이 내려앉은 그 곳만이 이 지상의 거룩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0:20에서 이것을, '산 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위에서 뚜레박이 내려와야 우리가 올라 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주장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뚜레박이 안 내려오면 하늘 나라에 못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옛날 신앙의 선조들은 시온의 대로를 통해 하늘 나라 궁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근거를 실제로 장만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거룩이 주저 앉아야만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찢어 산 길로 제공해야 합니다. 자신의 육체를 더러운 육체를 위해 대신 희생해야만 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 13절 초반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든 성도 아니든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하지만 믿음에 따라 죽게 되면 부활, 즉 새생명에 참여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은 일종의 공동묘지입니다. 한 줄로 쭉 서서 차례차례로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죽음으로 들어가서 부활체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런 남는 장사가 또 있을까요? 이것이 가능한 장치가 곧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7장에 나와 있듯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기분좋은 소식이 예수님인데도 불구하고 왜 찾는 이가 적을까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1:44에 보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것에 욕심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자고 나서면 그 자는 박살이 나고 가루가 되어 버릴 정도로 예수님은 거룩하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예수님을 함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떡이나 주니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지만 "내 살과 피를 마셔라"하니 다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생명 길이 이처럼 찾는 이가 적은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어떤 자세로 부활에 이르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10에 보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활에 참예하기 위해 부활의 길로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로 통해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7:14에 보니,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자.. 과연,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 성도라면 성도들이 몽땅 집단 자살이하는 것이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는 가장 빠른 길일까요? 아닙니다. 요한복음 7:15에 보니,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이란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속에 대해 바라보면 그것은 죽음의 세계이며 비거룩한 세계이며 참된 거룩의 세계로 통하는 산 길이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졌음을 믿는 생활이 곧 십자가의 생활이요 세상 사람과는 다른 사고방식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오늘날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 속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나그네로 여겼고 이방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직업과 생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그것에다 인생의 전부를 건 것은 아닙니다. 늘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그 거룩한 성을 사모하고 환영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이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로 하여금 하늘의 성에 대해서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원히 거할 것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 땅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1. 더 나은 본향(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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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 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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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인생 !!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람과 사람을 차별을 두면서 서로 비교하는 기준과 같은 것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 하지만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각 사람의 인품이나 자질 등을 가지고 비교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착하니 죽어서 좋은 곳에 갈 것이다” 라고 하든지, 반대로 “너는 이렇게 나쁘니 죽어서 혹독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대로라면, 그러한 차별이 아니라, 한 쪽은 “나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고 이방인이다” 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고, 다른 쪽은 “이 세상이 전부다. 그러니 죽자살자 열심히 해서, 이 세상에서 유명인사가 되자. 그게 소원이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이 세상에 푹 젖어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을 말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가지고서 우열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즉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본향을 고대하면서 살아가는지, 그런 차이점만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땅의 것을 얻기 위해서,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기에 나왔습니까? 그러면 아무리 나와도 하나님 앞에 신자라는 소리는 듣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자신이 돌아갈 본향의 내막과 하늘나라의 모습을, 즉 하나님이 어떤 장치를 통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멀리서 고대했다고 하면, 그것은 교회에 나오던 말던 간에 신자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이런 하나님의 분류방법에 대해서 우리가 공감을 해주어야 하는데, “아하,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분류시키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신앙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하늘나라를 멀리서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믿음이고 신앙임을 우리가 감을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우리가 실제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온 몸으로 느끼는, 그런 우리 자신의 인생관과는 부합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고수들에게 한 수 배워야 하는데, 그분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죠.

이분들은 바깥으로 드러내는 그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고 나그네다” 라는 것인데, 농사를 짓든, 가축을 키우든, 장사를 하든지 간에, 그런 모습이 바깥으로 흘러나온다는 말이죠. 신앙의 선배들은 이렇게 살아갔는데, 그런데 왜 똑같은 천국에 가겠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온 우리들은 그런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알았던 세계는?

여기서 우리는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분들이 가졌던 하나님과 이 세상에 사고방식이 과연 어떠한지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단숨에 확 마시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그 세계에 합류하고 싶어지는데, 그게 오늘 본문 13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여기에 ‘이 사람들은’ 이라고 하는데, 그 안에 여러분도 같이 포함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았기에 이런 고백을 하는 겁니까? 우리가 보기는 똑같은 세상인데,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여길 수 있었던 그 토대, 그것은 어디서 나왔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뭔가가 빠져있다는 것인데, 이 땅에는 없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대형마트에 가든지 시장에 가보면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그러나 신앙의 선배들이 봤을 때는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말이죠.

생명인가? 죽음인가?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생명’ 인데, 이 땅에서 생명은 없고 전부 죽음뿐이란 겁니다. 산 자가 없고 모두 죽은 자들뿐입니다. 죽어 가는 자들만 모여서 술렁이고 있고, 죽은 가는 자들만 모여서 웅성웅성 거리고 있다는 겁니다. 즉 죽은 자들끼리 모여서 월드컵 경기를 하고 있고, 죽은 가는 자들이 저축을 하고 있고, 죽어 가는 자들이 승진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두가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분인데 말이죠. “목사님, 이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시시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직은 돌아가실 정도로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말이죠. 저는 성경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까지 그게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에는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하면서 거기서 계속해서 행복을 뽑아내고 또한 기쁨을 뽑아내고 할 것이 없더라는 말이죠. 볼링, 골프, 여행, 아무리 해봐야 모든 것이 허무로 끝나고 마는데, 아무리 여행을 좋아해도 오히려 사람은 귀소본능이 있어서 돌아와야 마음이 편하다는 겁니다. 뭔가 고정된 장소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모든 일의 끝에는 허탈이 기다리고 있는데, 자식이나 남편도 결국은 다들 자기 밖에 모릅니다. 예술도 자기 극복이 안 되기에, 그래서 예술가들이 자살에 이르고 마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어떤 길을 뚫어도 그 막장은 생명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허무, 즉 죽음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

젊은이들이 초행길을 가면서, “이 길을 가면 행복할 것이다” 라고 여기면서 가보지만, 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는 말이죠. 또한 아무리 인기를 추구해도, “사람의 모든 영광은 한 순간에 피고 곧 시들어버리는 꽃과 같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도 결국은 지게 되어있는데, 우리 인생도 꽃이 지는 양상과 동일하다는 말이죠.

(시 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앞길이 벚꽃으로 인해서 얼마나 화려했는지 모르는데, 그야말로 천국의 길처럼 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꽃도 다 떨어지고 쓸쓸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인데, 여자들이 아무리 피부를 관리하고 해도 결국은 다 쭈글쭈글해지고 마는데,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사진을 찍으면 다 드러난다는 겁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온 몸이 피곤해지고 기억도 점점 사라지고 시력도 떨어지는데, 신앙의 고수들은 바로 이것을 먼저 눈치를 챘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떠나야 돼. 이곳은 우리가 살 곳이 아냐. 여기에는 죽음 밖에 없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 어느 정도는 희미하게 눈치를 챌 수도 있는데, 하지만 젊은이들을 보라는 겁니다. 낮인지 밤인지 구별도 하지 못하고 단란주점에서 술이나 퍼마시면서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는 쓸데없는 경쟁에 돌입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설교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일체의 경쟁을 붙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누가 많은 돈을 벌었는가? 누가 많이 배웠는가? 누가 더 잘났는가?” 라는 경쟁을 말이죠. 그냥 “떠나느냐? 마느냐?” 라는, 즉 “죽음이냐? 생명이냐?” 라는 것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고마워 해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능력의 차이를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윤리나 도덕적인 품성의 정도를 가지고, 천국에 넣을지 지옥에 넣을지를 구분하지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참으로 홀가분하다는 겁니다

신앙의 선배들의 힘의 원천은?

그러면 우리가 이 시간에 챙겨야하는 것은, 도대체 신앙의 선배들은 무엇을 발견했기에 모든 자들이 가는 쪽으로 가지 않고, 다들 이 세상에서 승부를 걸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나그네며 이방인이라는 점을 자신만만하게 주장했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도대체 그 힘의 원천이 어디냐는 겁니다. 그 힌트가 오늘 본문에 보면 나오는데, 16절입니다.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여기에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신앙의 선배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늘에 어떤 성이 있고, 그곳은 영원히 살만한 곳이다” 라는 점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 성을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놓으셨다는 말이죠.

여러분, 정말 이 성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까? 만약에 알게 된다면 기꺼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나그네로 간주하실 의향이 있느냐는 겁니다. 하늘에 있는 그 무엇이 이 땅에 있는 우리에게 기쁨과 환희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신앙의 선배들도 그러했으니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진짜로 그렇습니까? 그런 성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라고 하신다면, 정말 궁금하다고 하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냥 “죽으면 가겠지” 라고 하면 안 되고, 우리가 죽지 않아도 현재의 우리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거룩한 성 !!

그것이 에스겔서 제일 마지막인 48장에 보면 나오는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만든 성이 나옵니다. 그 이름을 ‘여호와 삼마’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에 만들지 않고 하늘에 성을 만든 취지가 있는데, 눈이 보이는 이 땅을 포기하고 하늘에 만든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 성이 곧 ‘거룩한 성’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겔 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방금 제가 ‘거룩’ 이라는 말을 했는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즉 갓바위에게 복을 빌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이 거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거룩의 소중함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는데, 즉 “네가 거룩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가? 네가 거룩에 대해서 깜짝 놀라고 있는가? 네가 거룩에 대해서 감탄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라는 것을 묻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것이 아닌 거룩에 대해서 말이죠.

하나님은 그렇게 거룩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 복을 주세요” 라고 있다는 겁니다. 즉 자기 소유만 생각하고 있는데, 하지만 소유는 작은 겁니다. 또 타인의 것을 빼앗아서 합쳐봐야, 이 사람 것과 저 사람 것을 모두 다 합치지 않았기에 여전히 작다는 말이죠.

그러나 거룩은 자기가 따로 소유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큰 것인데, 온 우주를 다 덮을 만큼 크다는 겁니다. 그러니 작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지 마시고 큰 것에 푹 빠지는 것, 그것이 제대로 된 행복이란 말이죠. 작은 것을 가지고 사는 재미보다는, 큰 것에 참여한 재미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즉 거룩에 푹 빠져서 살자는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거룩한 성을 짓습니까? 이 땅에 지으면 건축비가 비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땅은 더럽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거룩한 성을 지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이 성립되어야 영생도 장만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땅은 거룩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더러운 것에 마음을 둡니까? 사람들은 이 더러운 세계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데, 다들 왜 그렇게 사느냐는 겁니다. “더럽거나 말거나 이 땅에 태어났으니 버티면서 살자” 라고 하면서 살아가는데, 이게 대세인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에서 것에서 벗어나서 하늘나라만을 바라보고 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갔을까요?

여기서 시편 84편 5절에서 10절을 보겠습니다.

(시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시 84:7)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시 84: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시 84: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온의 대로와 문지기 !!

이 시편 84편이 믿음의 선배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는지, 그것을 쉽게 잘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5절에서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10절에서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세를 따르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은 따로 있었다는 말이죠. 즉 시온의 대로로 가서 하늘나라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욱 좋다는 겁니다. 그것은 단지 ‘거룩함’ 때문에, 그래서 문지기로 있는 것에 대해서 만족해하는 자들이었는데, 그러니 그들의 마음가짐도 얼마나 거룩했겠느냐는 것이죠.

그러니 당연히 이 세상 사람들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하면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는가?” 라는 겁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데, 19절과 20절을 보겠습니다.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이 땅에 내려앉은 ‘거룩’ !!

과연 우리의 요구로 거룩한 곳에 올라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다리를 높이 걸치면 올라갈 수 있는 겁니까? 전혀 아닌데, 거룩한 분이 이 땅까지 주저 않으셔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거룩한 곳에 갈 수 없는데, 그래서 하늘의 거룩이 내려앉으면, 그곳이 이 땅에서 거룩한 곳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 이외는 달리 방법이 없는데, 그것을 여기 20절에서 ‘산 길’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선녀와 나무꾼’ 이라는 유명한 동화가 있는데, 다들 아시죠? 그 나무꾼에 하늘나라에 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 앞에 보면 선녀의 옷을 훔쳐서 같이 살면서 아이 둘을 낳고 어쩌고 하는 내용도 있지만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위에서 두레박이 내려와야 올라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주장인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이라도 두레박이 내려오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이죠. 옛날 신앙의 선배들은 시온의 대로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문지기로 있기를 원했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늘로 올려보낼 수 있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여기 히브리서 10장 20절에 의하면, 자신의 육체를 찢어서 산 길로 제공해야 한다고 하는데, 즉 자신의 육체를 더러운 육체를 위해서 대신 희생물로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도든 성도가 아니든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믿음에 따라서 죽게 되면 부활, 즉 새 생명에 참여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땅은 일종의 공동묘지인데, 한 줄로 서서 차례차례로 죽음으로 들어가는데, 그렇게 죽음으로 들어간다는 말이죠.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그런데 믿음을 따라서 간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부활체로 태어난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런 남는 장사가 또 있을까요? 이것이 가능한 장치가 곧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7장 14장에도 나와있듯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아서 찾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물론 찾는 사람이 적어도 분명히 생명의 길이 있기는 있는데,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하면, 그 길이 좁던 넓던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그런 길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예수님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예수님께서 “내가 구원의 두레박이다. 다 나에게 오라” 라고 하셨다고 하면,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에게 와서 구원을 받으면 될 것 같은데, 그렇지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기분 좋은 소식인데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적으냐는 겁니다.

내가 가루로 만들고 말리라 !!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마태복음 21장 44절에 보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도대체 무슨 이런 돌이 다 있느냐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마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이 세상 것에 욕심을 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자고 나선다면, 마치 갓바위에 빌듯이 말이죠. 그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이 더러운 놈들아!” 라고 하시면서 박살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는데, 그 정도로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누가 감히 예수님을 함부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떡을 주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살과 피를 마셔라” 라고 하니, 그만 다 가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생명의 길은 이처럼 찾는 이가 적다는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정리를 해보면,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이고 죽음밖에 없는데, 따라서 우리가 살 길은 영생이 있는 하늘나라로 가는 것밖에 없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물론 말은 쉽다는 겁니다. 은혜가 되는 것 같다는 말이죠. 즉 “차별이 없이, 각각의 인간 됨됨이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나그네이며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하는지, 그것으로 결정이 된다” 라고 하면, 이것도 역시나 쉽다는 겁니다.

여기서 더 쉽게 하면, “우리는 더럽기 때문에, 아무도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데, 그래서 하늘에 계신 분이 내려오셨는데, 그렇게 해서 그분이 우리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다” 라고 하면, 그것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처럼 쉽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어렵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면, 그 두레박이 우리의 뒤통수를 그만 쳐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기 일보직전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데, 즉 “이제 예수를 믿어볼까?” 라고 하다가 그만 돌아설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그게 좁은 길로 가는 것이고, 찾는 사람들이 적은 이유를 이제 알았다. 이런 예수를 누가 믿겠는가? 아무리 천국이 좋아도 자기 욕심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도 조금 있다가 믿고 싶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그러면 그는 어떤 자세로서 끝가지 천국에 이르렀습니까? 바로 그것이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데, 10절을 보겠습니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과 십자가의 길 !!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나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부활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따라서 나는 그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부활의 길로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들어간다는 겁니다. 즉 부활의 길을 가기 위해서 죽음의 길을 스스로 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나는 십자가의 길로 간다” 라고 하는 것이나, 오늘 본문 16절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인데, 둘 다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겁니다.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몽땅 공동묘지로 가서 매장되는 것이 십자가의 길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까? 그게 아니면 가진 것을 다 팔고 기도원에 가서 죽은 듯이 살면 됩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게 아니라 “그냥 살면 됩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십자가의 길이란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 위해서 요한복음 17장을 보겠는데, 여기에 해답이 나와있다는 겁니다. 이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대목인데, 14절과 15절을 보겠습니다.

(요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 !!

14절에 보면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이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속하신 분인데, 그러면 예수님만 그렇습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역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 성도라면, 그러면 몽땅 집단자살을 하던지 히는 것이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까? 그게 아닌데, 15절에 보면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이 땅에 남겨두신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늘나라는 분명히 있고, 그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두레박은 이미 예수님께서 완성하셨으니, 이제 그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라고,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여전히 남겨져 있다는 겁니다.

공동묘지로 가든지 재산을 바치고 산 속에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우리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즉 우리 인간의 자질이나 직업을 묻는 것이 전혀 아니란 말이죠. “아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불법 노래방을 하고 술집을 하다니, 그리고 러브호텔까지, 그렇게 하다가는 지옥에 간다” 라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악에 빠지지 않는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바라보기를 “하늘나라는 있고, 거기에 가는 길은 예수님밖에 없다고 하는,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이 땅에서 버티는가?” 라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두고 ‘거룩’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너’ 이야기말고 ‘내’ 이야기를 해라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서 가장 실패하는 경우가 무엇인고 하니, “나 같이 더러운 인간이 어떻게 천국에 가겠는가? 돈이 없어서 헌금도 못하고, 게을러서 전도도 못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 그런데 저 사람은 기도도 잘하고 헌금도 잘하고 전도도 잘하고, 정말 좋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태도인데, 자신의 잘남이나 못남을 말이죠. 우리의 딜레마가 바로 이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 아닌데, 어릴 때는 어떻게 자랐고, 그 가정환경은 어떻고, 또한 결혼은 어떻게 했고,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뭐라고 기도를 합니까? “하나님, 저도 아파트도 있고 근사한 차도 있고, 그렇게 남들처럼 인간답게 살고 싶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거기는 나그네나 이방인이라는 모습이 없다는 것이죠.

부활이 있기에, 죽음의 길을 가도 좋다 !!

우리는 이미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자들인데, 예수님처럼 말이죠. 그러면 자살을 하면 됩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늘 간직하면서 살면 되는데, 그러다가 보면 그때 그때마다 남들에게 전도를 할 수도 있고, 봉사를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꾸만 자기 신상을 가지고 서로 우열을 논하려고 하는, 그런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에 오면 안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자신을 ‘산 길’ 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생활이고, 세상 사람과는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부활이 있기에 나는 과감하게 죽음의 길을 가도 좋다” 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해도 허무가 기다리고 있는데, 어차피 우리는 나그네고 이방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거룩한 성이 있는데, 그러니 그 성을 사모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에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유익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말았는데, 그러나 세리와 창기처럼 순진하게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었고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저희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이미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로서,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7 오전 2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