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히 11:8-12) 아브라함과 사라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1:8-12) 아브라함과 사라

정인순 2010. 9. 5. 11:34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40강-히11장,8-12(아브라함과,사라)-heb020407.mp3

 

 

이근호

 

아브라함과 사라

 

2002년 4월 7일 40강

 

본문 말씀 : 히 11:8-12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 믿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누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예 없는데 사람들이 지어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임의로 조작해 낸 개념이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업을 할 때는 노력이나 투자한 결과가 실적으로 나오니까 사업 자체를 사업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란 것은 양적 실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마음이 여린 사람이나 모든 일에 자신감이 없는 자들이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설정해 놓은 초월적 대상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10년 다니든 20년 다니든 그동안의 모든 수고가 헛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기독교를 옹호하는 식으로 교인들은 세뇌시키면 안됩니다. 세뇌시킬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자신만이 좋다고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다수가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자라는 자들이 바보라는 그럴 수 도 있음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집단 체면과 집단 속임수에 넘어 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아무 탈 없이 잘 지내는 아브라함을 아예 근거지를 빼앗고 그 동네에서 추방시켜 버리는 하나님으로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무런 연고지도 없는 낯선 곳으로 이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의 두뇌로 창안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소하게 다가 올 하나님이요 낯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야 참 하나님입니다.

 

정말 아브라함과 함께 했던 하나님은 아브라함 조차도 낯설었던 하나님입니다. 물론 인간들이 만들어 낸 하나님도 시중에 유행하지만 어쨌든 엄연히 아브라함이라는 분이 계셨고 그 자를 난데없이 자기 고향에서 이끌어내신 그 하나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죽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가짜 하나님은 그저 우리들의 한숨으로 만들어낸 작품이기에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그 하나님을 버려도 되는 그런 실없는 존재이지만 참 하나님은 이 우주의 어른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안 것은 인생의 전부를 안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전부를 안 겁니다. 더 이상 인생을 질질 끌 필요가 없습니다. 참 하나님과 상봉을 하게 되는 좋은 일이 곧 있으니까 말입니다. 참 하나님만 알면 걱정, 근심이라는 것들은 부질없는 사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지금 건방지게도 참 하나님을 상대하고자 합니다. 교회나 인간들이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움직였던 그 하나님을 상대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면 인생의 전부를 안 것이 되고 우리의 장래도 다 챙긴 것이 됩니다.

 

문제는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눈치 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기적을 베푸는 분입니다. 어떤 기적이냐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밑바닥을 잘라버리는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착성을 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고향을 떠나게해서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근원을 잘라버리는 기적입니다.

 

우리는 지레 겁을 먹게 되지요. "하나님, 그러면 저는 죽습니다.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라는 소리가 나오지만 그 인식 자체가 하나님에게 나온 것이 아니라 불신 세계 속에서 몸에 배어 익숙해진 관행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라내는 것이 참 하나님의 면면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아브라함 다루시는 방식에 대해 지레 겁을 집어 먹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브라함 아닙니다. 저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큰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저를 그런 식으로 다룰 생각을 아예 안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저 아브라함의 신앙이나 제가 곁에서 칭찬하는 것에 머물겠습니다."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가려고 합니다.

 

이런 자세를 우리가 갖고 있다는 말은 지금, 우리는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정말 참 하나님의 구원이라면 아예 이런 공포 자체로부터도 건져 내시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이 가더라도 오래 오래 약먹고 질질 끄는 병원보다는 침 한방에 깨끗이 낫게 하는 치료가 제대로된 의사이겠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공포의 원인이 되는 자체로부터 구원되도록 해 주십니다. 어떻게요? 상상도 못한 더 큰 공포로서 침을 놓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 생활도 벗어버리고 그냥 살게 됩니다. 즉 공포도 없이 기쁘게 사는 생활을 말입니다.

 

그 당시의 아브라함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본인에게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자꾸만 도망할 궁리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중에 믿음 좋을 때 그 때 깊숙하게 사귑시다. 지금은 제가 하는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라고 핑계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루기로 단단히 작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낯선 땅에 등장케 했습니다.

 

자,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 이 점이 대해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으면 이제부터 새사람에 맞는 새생활을 해야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화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각종 윤리적 명령들에 순종해서 세상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되어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주장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 중에 있어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뭘 했습니까? 그냥 장막생활 한 것입니다. 떠돌이 생활을 한 것입니다. 밑둥치가 잘려 나간채 말입니다. "이 땅은 내 땅이 아니라 영원히 살 곳이 아니야"라는 소리만 해가면서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남의 동네를 임시로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관심사는 죽을 때까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을까요?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주실 것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일종의 거지입니다. "하나님, 제가 얼마만큼이나 노력하면 제 원하는 것을 주실렵니까?"가 아닙니다.

 

"내가 행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는 빈털털인데 하나님께서 이런 거지같은 저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입니다. 뻔뻔스럽기도 하고 염치도 없지만,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것 중에서 저에게 내려 주실 것이 무엇이냐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이것을 저는 신앙, 곧 신앙의 삶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천하의 거지로 돌아가고 천하의 뻔뻔스러운 작자로 돌아서는 것을 저는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네가 하나님에게 뭘 바쳤다고 달라기는 달라느냐"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그런 소리까지 극복할 수 있어야 신앙입니다. 다윗이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제사도 아니요. 번제도 아니다. 도리어 이 썩어빠진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고백입니다.

 

이것을 누가 조장하시는가요?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조장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의인되게 하려 왔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와같은 일이 아브라함 당시에도 그 원리 안에서 하나님이 움직여 왔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의 가족을 방랑생활 하도록 조치했을까요? 오늘날 우리보고 배우라고 아브라함을 먼저 다루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직도 윤리, 도덕을 거론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아직도 공포심이 만개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나쁜 짓 하게 되면 벌을 받게 된다는 그 공포심마저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공포심을 계속 간직한채 교회 10년을 다녀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불러 내었습니까? 이 해답을 오늘날 우리들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1-12절을 보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이라는 대목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의 중심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운명의 해답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곁에 있는 아내 사라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로 사라가 아기를 가질 만한 능력이 있을 때에는 아기가 갖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사라가 더 이상 어머니로서 기능을 상실되었을 때, 그 죽은 태를 가지고 비로소 하나님은 그 자리에 아기를 갖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기대했던 "정말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주시고자 하는 그 약속이 바로 이것이다"고 해답을 던져 주시는 겁니다. 죽은 자리에서 새생명으로 태어난 그 이삭과 같은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이요 야곱이요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진리를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예 아브라함의 근거지를 잘라 버리시고 그곳에서 내 쫓아버린 겁니다.

 

자...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이삭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바로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치라고"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도로 이삭을 회수하려고 했고 아브라함은 이삭의 원천자에게 이삭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아, 이제는 네가 나를 믿는 줄을 내가 알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현재 나의 모든 조건과 상황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 덩어리임을 믿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이것 외에 모든 것은 종교적 탐욕 덩어리입니다. 자기 것을 더 챙기기 위한 탐욕의 몸부림이요 그림자입니다. 신앙이란 거지로 돌아가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드릴 기도는 주기도문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자신을 나그네로 인정하면서 그렇게 거지 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리고 덧붙어서 자신의 것도 아닌데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이 죄를 용서해 달라는 회개말입니다. 남들이 봐서는 참으로 기이한 기도일 것입니다. 마치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붕붕 떠있는 상태처럼 보일 것입니다.

 

뭔가 틈이 있습니다. 정착이 아니라 비정착 생활입니다. 남편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둘 다 뿌리가 잘린 자들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약속만 바라보고 산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니, 이 이삭은 아브라함 부부에게 있어 평소의 욕망의 산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도 못했던 새생명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은 하늘 나라의 새 성을 보고 살았습니다. 자식을 가졌고 양 떼가 늘어나도 그것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이곳이 네가 살 곳이 아니라 정착될 곳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까요? 신앙 생활은 걸쳐놓기 위한 용도가 아닙니다. 기도 자랑, 전도 자랑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주특기든지 내 몸 걸치면 내 소유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남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새생명인 것을 받아주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태가 죽은 사라의 몸에 나온 자식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존재하는 새생명인 것에 동의하게 하옵소서. 남을 무시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부터 무시하게 하옵소서. 그 가운데 새생명 주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0. 아브라함과 사라(히 11:8-12)

---------------------------------------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

하나님은 있다. 정말?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은 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감히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없는데 사람들이 지어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이죠. 우리 마음속에는 다들 하나님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보편적으로 하나님이라고 간주하자고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서 당하는 징벌이라고 여기고, 물론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축복이고 말이죠. 그렇게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가 머리를 맞대고 짜내어서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어떤 집단이든 종족이든 간에, 그것은 진짜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그래서 임의로 조작해낸 개념일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무시해버리면 안 되고, 언제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사업을 했을 때는 투자한 결과가 실적으로 나오는데, 그런 양적인 효과가 나오니 사업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양적인 실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여린 자들이나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 자들이, 그런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서 설정을 해놓은, 하나님이라는 것이 그런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없다 !!

그러니 교회를 10년 다니든 20년 다니든, 그동안의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죠. 교회자체가 사기집단이 될 가능성도 농후하고 말이죠. 그래서 교회가 기독교를 옹호하는 식으로 교인들은 세뇌시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교회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데, 돈도 들어오고 하니 말이죠. 하지만 교회가 좋다고 해서 그게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없다” 라는 것인데, 자기가 교회에 가는 것도 가지 않으면 찜찜해서 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없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 것이 아닌데, 오히려 소수가 제 아무리 하나님이 있다고 해봐야, 그것은 자기들끼리의 집단 체면과 집단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다가오시는 하나님, 낯선 하나님 !!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떤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서 아무런 탈없이 잘 지내는 아브라함을, 아예 그 근거지를 다 빼앗고 그가 살던 동네에서 그만 추방을 시켜버리는, 그리고는 전혀 낯선 곳으로 이사를 하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인간들이 자기의 유익을 해서, 그리고 뭔가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만든 찾아가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즉 너무나 생소하고 낯선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 참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내 사업이 잘 되게 해볼까? 술 담배를 끊을까?” 라고 하는데, 그런 자기 꿍꿍이를 가지고 자기 것을 챙기기 위해서 만든, 그런 짝퉁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은 그분 쪽에서 먼저 다가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란 말이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없을 수도 있다” 라는 토대 위해서 시작된 하나님은 당연히 가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정말 아브라함과 함께 했던 하나님은 아브라함조차도 낯설었던 하나님인데, 물론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님도 세상에 유행했지만, 어쨌든 엄연히 아브라함이라는 분이 계셨고, 그를 난데없이 자기 고향에서 이끌어내신 그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진짜 ‘어른’을 알았다면, 모든 것을 다 안 것 !!

만약에 그 하나님을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죽어도 괜찮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가짜 하나님은 그저 우리들의 한숨으로 만들어낸 작품이기에,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그런 하나님은 얼마든지 버려도 되는데, 그러니 그런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야. 나는 전부를 얻었다” 라는 말은 그런 하나님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참된 하나님은 온 우주의 어른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어른’을 알았다는 것은 인생의 전부를 알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은 인생을 질질 끌 필요가 없는데, 참된 하나님과 상봉을 하는 좋은 일이 곧 있게 되니까 말이죠.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참된 하나님만 알면, 걱정과 근심이라는 것들은 부질없는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건방지게도 그런 참된 하나님을 감히 상대하고자 하는데, 교회나 인간들이 자기 필요에 따라서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움직였던 그 하나님을 말이죠. 따라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인생의 전부를 안 것이고, 우리의 장래도 다 챙긴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인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젊은 사람이 나이가 든 노인을 상대한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정착성’을 치시는 하나님 !!

그러니 정말 중요한 것은, 참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인데, 그렇다면 참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기적을 베푸는 분이라고 하면, 그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데, 그게 어떤 기적이냐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밑바닥을 잘라버리는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하나님,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이것은 없으면 안 됩니다” 라고 했던 바로 그것,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도끼를 가지고 가차없이 잘라버리신다는 말이죠.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정착성’을 치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정착해서 살아가는데 익숙해진 우리를 그만 쫓아내어 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고향을 떠나게 해서 엉뚱한 곳으로 데리고 가시는데,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근원을 잘라버리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진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지레 겁을 먹게 되겠지요. “하나님, 그러면 저는 죽습니다. 더 이상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러한 인식 자체가 하나님에게 나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몸에 배어서 익숙해진 관행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잘라내 버리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면면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진짜 하나님을 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니라, 사실은 자기가 딛고 서 있는 정착지를 더 튼튼하게 하고 안정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일종의 하수인으로서 하나님을 이용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의 밑뿌리를 잘라버리는, 그런 하나님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 그러면 죽습니다. 더 이상 안 됩니다” 라는 인식자체가, 그것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은 이 세상에서 지옥에 가는 사람들과 함께 살다보니까 나온 습관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든 않든 간에 태어나면서부터 익숙해진 것인데, 그게 우리 몸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것을 잘라내지 않고는 참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근원을 작살내시는 하나님 !!

오늘 주보에 보면 설교내용이 요약되어있는데, 좀 어려워요. 참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가왔다고 하면 우리는 궁금해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아브라함을 어떻게 다루는지 똑똑히 봐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만 아브라함의 근원을 작살내고 마신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 아브라함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대입시켜보는데, 만약에 참된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이 나오겠죠. “정말 아브라함은 훌륭하구나. 하나님께서 본토를 떠나라고 하시니, 나 같으면 떠나지 않고 버틸텐데,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아서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저렇게 떠나니, 정말로 믿음이 좋구나” 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에는 무엇이 깔려있는고 하니, 이런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방식을 겁내고 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 저는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저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큰 자가 아닙니다. 저를 그런 식으로 다룰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저 아브라함의 신앙을 곁에서 칭찬하는 것에 머물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려고 하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당했던 내막을 제대로 몰라서 그러한데, 정말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기는 좋습니까? 그래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것이 맞습니까? 도대체 그렇게 떠나서 된 일이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본토를 떠난 것은 맞지만, 어떤 계획을 가지고 떠난 것이 아니라, 그냥 추방을 당했다는 말이죠.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있는 인간들 !!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모든 인간들이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는 겁니다. 어디 아브라함만 그렇게 보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도 보고 예수님도 보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말로 참된 하나님의 구원이라면, 아예 이러한 공포 자체로부터도 건져내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몸이 아파서 병원이 가더라도, 약을 오랫동안 먹고 질질 끄는 것보다는 그냥 한 방의 침으로 깨끗이 낫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의사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 한 방을 하나님께서는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죠. 얼마 전에 고모님이 담에 걸려서 꼼짝도 못하다가, 한 방의 침으로 바로 해결을 했다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공포의 근원에서부터 해방을 시켜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야 진짜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냐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제 신앙생활이란 것도 벗어버리고 살아가게 되는데,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한답시고 하게 되면 그게 곧 종교생활이 되니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그냥 살면 되는데, 그런데 그야말로 공포도 없이 기쁘게 환희의 삶을 산다는 겁니다. 공포에 짓눌린 삶이 아니고 말이죠. 그것이 바로 그 당시 아브라함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동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막상 이런 하나님이 찾아오게 되면, 그 당시의 아브라함이나 오늘날 우리나 큰 부담일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꾸만 도망칠 궁리만 합니다. “하나님, 나중에 믿음이 좋을 때, 그때 서로 깊이 사귑시다. 제가 지금은 좀 바빠서 곤란합니다. 그러니 나중에 봅시다” 라고 하면서 핑계를 댄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은 낯선 곳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루기로 단단히 작정하셨고, 그래서 아브라함을 작살을 내시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살던 곳에서 쫓겨나서, 그리고는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낯선 땅에 등장케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과연 무엇을 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데 말이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었으면, 이제부터 새사람에 맞는 새생활을 해야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화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각종 윤리적 명령들에 순종해서,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데, 사기꾼들의 아주 전형적인 멘트라는 말이죠.

그런데 정작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중에서 사실은 자기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자기는 그냥 장막생활을 했을 뿐인데, 즉 떠돌이 생활을, 나그네 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살았는데, 물론 밑둥치가 완전히 잘려나간 상태로 말이죠.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이 땅은 내 땅이 아니고, 영원히 살 곳도 아냐” 라는 소리만 냅다 질러댔다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외방’ 이라고 표현했는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라고 말이죠. 즉 자기 동네가 아닌 남의 동네에서 임시로 살았다는 것이죠.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노숙자, 아브라함 !!

지금 아브라함의 관심사는 죽을 때까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한국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화의 삶이 아닌데, 전혀 인격이나 성품의 도약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주실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브라함은 일종의 거지인데, “하나님이여, 제가 얼마만큼 노력하면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습니까?” 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즉 “제가 행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는 빈 털털인데, 하나님께서 이런 거지같은 저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신앙은, 뻔뻔스러움 !!

그러니 아브라함은 “제가 뻔뻔스럽기도 하고 염치도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것들 중에서 저에게 주실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은 바로 그런 인생을 살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저는 이것을 감히 ‘신앙’, 곧 ‘신앙의 삶’ 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겁니다. 천하의 거지로 돌아다니고 뻔뻔스러운 작자로 돌아다니는 것을 말이죠.

달리 말해서, “당신이 도대체 하나님에게 무엇을 바쳤다고 달라기는 달라고 해?” 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그런 비난까지도 극복할 수 있어야 신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번제도 아니다. 도리어 이렇게 썩어빠진 상한심령을 원하신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고백이냐는 겁니다. 사람이 더 이상 뻔뻔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조장합니까?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앞장서서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 왔다” 라고 말이죠. 예수님은 전혀 의인을 찾으러 오신 게 아닌데, 이와 같은 일이 아브라함 당시에도, 그런 원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움직여왔다는 겁니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왜 아브라함은 나그네의 삶을 살았는가?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나름대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본토에서 대대손손 잘 살고 있는데, 그런데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몰라도 수많은 가정들이 있고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물론 찾아오셨다고 해도, 예배를 드리면 잘 받고 복을 주시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잘 살고 있는 고향에서 왜 쫓아내느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의 가족을 방랑생활을 하도록 조치를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보고 배우라고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진짜 신앙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무엇인지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윤리와 도덕을 거론한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공포심이 남아있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나쁜 짓을 하게 되면 벌을 받게 된다” 라는 공포심마저 극복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공포심을 계속 간직한 채로 교회를 10년을 다니고 20년을 다닌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이죠. 어차피 가짜 하나님인데, 그러니 일이 잘 풀리면 다 떠나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을 불러내었습니까? 이 해답을 오늘날 우리도 함께 알아야 하는데, 여기서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 ‘사라’ !!

여기 12절에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라고 하는데, 이 대목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 뜻의 중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정작 그 해답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곁에 있는 아내 ‘사라’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 낯선 곳으로 불러내셨다는 말이죠.

이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는 나름대로 소망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는 이것을 원합니다. 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럴 때는 기도가 일사천리로 나옵니다. 평소에 품고 있던 생각이 줄줄 터지니 말이죠.

그런데 원하는 것이 없으면, 사실은 기도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교회에 나오는 시는 분들은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제부터는 생기게 되는데, 왜냐하면 엉뚱한 곳을 찾아다녔다는 말이죠. 해답이 가까이 있는데, 그런데 다른 곳에서 찾고자 했다는 겁니다.

그 가까운 것이 바로 사라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부로 사라가 아기를 가질 만한 능력이 있을 때는 아기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더 이상 어머니로서 기능을 그만 상실하게 되었을 때, 즉 이제는 죽은 태를 가지고 있을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아기를 가지게 하셨다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

조금 복잡하지요?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저는 무엇입니까? 저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불러내십니까? 궁금합니다” 라고 하는데, 사실 누구나 궁금하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래, 궁금하지?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다” 라고 하시는데, 그게 곧 자기 아내, 즉 ‘사라’ 라는 겁니다.

물론 사라는 젊었을 때는 태가 살아있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이제 나이가 많아서 태가 그만 죽었는데, 그렇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죽은 태에서, 그렇게도 예쁜 옥동자 이삭을 낳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죽은 자리에서 태어난 새 생명, 그게 누구인고 하니, 그게 바로 아브라함이요, 야곱이요,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라는 말이죠.

바로 이러한 진리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고향에서 내쫓아버리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가셨고, 과거의 아브라함은 죽이고, 새 생명이 담긴 아브라함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서, 그런 하나님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임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밑둥치를 그만 잘라버리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 이삭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바로 이런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압박을 가하시는데, 즉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쳐라” 라고 명령을 하셨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도로 이삭을 회수하려고 하셨는데, 즉 “이삭의 원천자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고 했고, 그러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아, 이제는 네가 나를 믿는 줄을 내가 알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드디어 여기에 ‘신앙’ 이라는 개념이 새 생명처럼 새롭게 달라붙는데, 즉 ‘믿는다’ 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따라서 믿음이란, 현재 자기의 모든 조건과 상황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 덩어리임을 믿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인데, 팔다리가 잘리던 말던 간에 말이죠.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은 종교적인 탐욕 덩어리인데, 자기 것을 더욱 더 챙기기 위한 탐욕의 소산이라는 겁니다. 교회를 20년을 다니던 30년을 다니던 간에, 그런 것은 전혀 믿음으로 인정해줄 수 없다는 말이죠.

우리가 드릴 기도는 단 하나, ‘주기도문’ !!

그러니 참된 신앙이란 거지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래서 지금 우리가 드릴 기도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내용과 동일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시는데, 그런 것을 위해서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기도하면 됩니까? 자신을 나그네로 인정하면서, 거지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기도할 것은, 자신의 것도 아닌데 자신의 것으로 삼는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그런 회개의 기도를 하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죄의 개념도 전혀 새로운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 곧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이니 말이죠.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러니 이 주기도문은 남들이 봐서는 참으로 기이한 기도인데, 완전히 비정상적이라는 겁니다. 마치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붕 떠있는 상태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뭔가 틈이 있는데, 즉 정착이 아니라 비정착 생활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생각하고, 자기의 이름보다도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그런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설교하면 안 되는데, “여러분, 자식이 없습니까? 성경이 폼으로 있습니까?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고 태가 닫혔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낳는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래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라고 말이죠.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사라가 어디 웃었겠습니까? 그렇게 믿음이 좋다면 말이죠.

남편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둘 다 뿌리가 잘린 자들인데,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고, 사라는 그만 태가 닫혔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약속만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말이죠.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는데, 그러면 이 이삭은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니 적어도 이삭은 아브라함 부부에게 있어서, 평소에 자기들이 바라던 욕망의 산물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약속의 자녀라는 말이죠. 즉 “너희도 없는데서 새로 생긴 새 생명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물로서 등장한 자녀가 바로 이삭이라는 겁니다.

새 하늘과 새 땅 !!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 가족은 자기들이 살던 곳을 떠나서 낯선 곳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래서 장막에서 살아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 본문 10절에 보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었다는 말이죠.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그곳을 떠나라 !!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 가족은 하늘나라의 새 성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비록 이제는 자식을 가졌고 양들이 늘어나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곳을 떠나라!” 라고 하시면,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드렸다는 겁니다. 즉 “그곳은 너희가 살 곳이 아니라, 너희가 정착할 곳은 따로 있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고, 그러한 가운데서 새로운 성을 바라보는 것을 두고 ‘믿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따로 준비되었다는 것이고, 바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은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대구에서 떠돌이 생활을, 나그네 생활을,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제발 유별나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처럼 장막에서 살면 된다는 것이죠. 신앙생활은 걸쳐놓기 위한 용도가 아닌데, 즉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자랑, 전도자랑, 교회자랑과 같은 것은 제발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걸치게 되면 비정착이 아닌 정착이고, 그것이 곧 자기 소유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현재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남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인 것을 감사하게 받으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고, 그리고 사라를 왜 붙여주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다. 그러니 사라가 죽은 태에서 낳은 이삭과 같이, 저희들도 그러한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주어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5 오후 3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