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1:7) 노아의 신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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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노아의 신앙
2002년 3월 31일 39강
본문 말씀 :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계속해서 믿는 자에 대해 하나님은 소개 해 오고 있습니다. 연이어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이 세워 준 자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분들을 이해하는데 큰 무리가 뒤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역점을 두고 매진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노아는 '아직 보이 못하는 일에 대해서 경고하심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를 이해하기 위해 애초부터 우리 쪽에 출발하는 것을 하나님이 거부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에 기초를 두고 사는 자가 어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자의 마음을 제대로 알겠습니까?
특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상을 정죄하고'라는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정죄받은 자들이 과연 자신의 정죄하는 자의 마음을 바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 사태가 이렇더라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런 믿는 자를 앞장 세우면서 우리 인간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신앙인의 생활을 보면서 그들 신앙인들의 신앙 생활이 대단히 무모하게 보입니다. 맞습니다. 신앙, 이것은 곧 무모한 짓입니다. 안정을 원하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도 신앙이요 이 신앙은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이런 모습으로 등장됩니다.
흔히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이나 천국이나 신앙이라는 개념은 보이는 것의 연장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앙이란 보이는 것을 하늘까지 확장시켜 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여, 제발 낯선 사람들을 보내셔서 우리들 당황스럽게 하지 마시고 현재 우리의 역사와 문명은 발전과 진보와 진화로 이어지기에 언제가는 하늘까지 도달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바로 이런 진보에 역점을 두고 삽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생각은 하나님에게 신앙으로 간주되지도 않고 통할 리도 만무합니다.
따져 보세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용어들을 말입니다. '경고하심'이라든지, '구원 된다'든지 '세상을 정죄한다'든지 라는 주장들은 우리 인간들의 아이디어로 만들어 낸 것도 아니요 만들 수도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즉 애초에 인간 세계에 없는 내용을 하나님은 신앙인에게 담아 우리 앞에 던집니다.
왜 세상이 정죄되어야 합니까? 뭔가 잘못되었다고 정죄당해야 합니까?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우리 눈에서 그러하지요. 그러나 노아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몽땅 정죄받을 만한 대상임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노아라는 사람은 없는데서 새로 생긴 겁니다. 이러니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놓고 보면 황당하고 당황스럽지요.
노아가 주장하기를, "나 혼자 잘나서 나 혼자 천국 간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전부 썩은거야. 당연히 심판이 떨어져야지 암, 모두에게 말이다!"라고 큰 소리치면서 신앙 생활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서 다가옵니다.
만약 보이는 이 세상의 일부 요소가 담겨 있으면 우리가 잘 탐색해서 수용할 것인데 사정이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그 예로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우리가 교회에 앉아서 방주나 만들고 있으면 구원되나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방주란 그 때 그 시대에 일회용입니다.
만약 방주가 일회용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구원의 장치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방주를 여러 척 만들어 낼 재주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즉 방주가 눈에 보인다는 겁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도약하니 방주만 만들어서 자기 구원을 달성하려고 할 것이 뻔합니다.
그러니까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 방주란 분명히 눈에 보이겠지만 그 전에 자신들의 눈에 익힌 그런 방식이 아니기에 비록 눈에 보여도 거절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노아 시대가 지나가고 난 뒤에는, 사람들은 말하겠지요. 그 때 그 방주가 있었으면 잘 따져서 나라도 올라 탔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교회를 오늘날의 방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익히 아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는 이 시대 나름대로 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가지시고 우리에게 접근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방식으로 오늘날 이 시대와 노아 시대를 연결해 놓은 성경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전서 3:20절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노아 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앞 구절에 보면 난데없이 이 노아 이야기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8-19절에 보게 되면,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왜 성경은 과거와 현재를 섞어 버립니까? 과거나 현재나 서로 동일하게 작용하시는 요소가 따로 있기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로 계신 분이 영의 입장에서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은 오늘날 이 시대 뿐만 아니라 먼 과거에 돌아가서 그 때 그 노아 때에도 활동했었다는 겁니다. 영이니까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자 분명히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비록 노아 당시에 사람들은 방주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믿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20에 의하면 불과 8명 뿐이라고 합니다.
왜 그들은 눈으로 노아를 보고 방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을 까요? 그것은 그들이 그동안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정립된 사실 안에는 '방주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도 완전히 쓸데없는 무용지물 거리를 만드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형편은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즉 베드로전서 3:18을 다시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과연 우리 자신들이 전적으로 죄인입니까? 우리 인간들은 그동안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정립한 바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결코 전적인 죄인일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동안 인류는 끊임없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물질적인 면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향상을 보였습니다.
야만적인 생활 태도에서 고차원적인 품위까지 챙기는 수준까지 진보되어 왔기에 앞으로도 더 나아진다는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죄인입니까? 도저히 믿기지 않지요. 그러니까 노아 때 사정이나 오늘날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또 제시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일이 뭔고 하니, 예수님이라는 의인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설득하기가 난처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구원받고 싶은 의욕이 있으면 그 의욕을 가진 당사자가 뭔가 행동에 옮겨서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보통이잖아요.
그런데 구원될 의욕을 가진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받게 되니 이것도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얼마나 판이한 방식입니까? 그러니까 노아 때 사람들이 노아를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일이나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구원방식을 안믿는 것이나 다 같이 부활하신 영의 의해 주도된 일관된 활동이라는 겁니다.
이 사실도 모르는채 오늘도 교회마다 목사 직분 자랑, 장로 직분 자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죠. 지금 이 시대에는 교회의 직분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요 교회 부흥과 성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가 구원합니까? 우리가 전적으로 죄인이다는 이 사실과 의인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도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바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노아는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다고 한 겁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여러분들은 혹시 이렇게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래 믿어주자. 믿는 것이 뭐가 힘드냐"라고 하실 것입니다. 물론 믿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고 산다는 것이 힘듭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노아약 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약 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는 세상을 정죄한다고 했거든요. 즉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노아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노아는 보이지 않는 세계 편에 완전히 두 발을 다 옮겨놓고 사는 자입니다. 남들은 보이는 세계에 매진하고 그것에 전부를 거는 반면에 노아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그에게 전부입니다.
바로 이런 인식을 갖고 있으니 노아는 가볍게 세상을 정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모두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방인 되기 싫지요? 이점을 생각한다면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6장 끝에 나와 있는 말씀을 보니 그 나라의 의를 구하라고 되어 있고 또한 그런 자는 더 이상 염려거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계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으니 염려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저 하늘의 도움을 받아 한 발을 들여놓은 이 보이는 것들이 잘 되기를 바라니까 염려는 염려대로 그대로 있고 세상을 정죄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기에 의의 증인도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기에다 모든 기대를 걸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예수님의 의를 뜻합니다. 비록 우리들이 노아처럼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자가 된다 할지라도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의 후계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즉 노아는 하늘의 의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확실한 실상임을 보여주는 증인이 된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시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말고 다른 세계가 더 현실적임을 알려주는 의의 종이 되기를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것을 다 못가졌다고 한탄 할 것이 아니라 노아의 8명 속에 포함된 것을 더 기뻐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9. 노아의 신앙(히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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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 !!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계속해서 하면서,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 또한 바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는데,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황당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그 어떤 바탕도 이쪽 보이는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죠.
그런데도 성경은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자꾸만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다는 것이죠. 즉 보이는 세계에 속한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세계가 주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 방법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통해서, 즉 믿는 자의 생활과 보이는 세계에 있는 우리의 생활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주신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경우에도 보면, 거기에 ‘노아’ 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말이죠. 물론 우리는 노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노아니까 그렇구나!”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전혀 노아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면, 이 노아는 참으로 특이한 인물로 비쳐질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노아가 대기업의 회장님이라든지, 아니면 유명한 야구선수라든지, 유명한 연예인이라든지, 혹은 위대한 물리학자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가 노아에 대해서 대단히 부러워하면서 “나도 노아처럼 되어야지” 라고 하겠는데, 그렇게 얼마든지 우리에게 도전이 되고 자극이 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노아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그러면 어떤 사람입니까? 방주를 만든 인물인데, 물론 방주를 만든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방주는 아주 특이한 배인데, 마음만 먹으면 우리도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손재주가 없어서 안 됩니까?
노아, 당신은 참으로 무모한 짓을 했소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 방주는 사람들이 보기에, 자기들이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노아가 그런 것을 만들었으니, 그러니 사람들이 거기에 끌릴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오히려 “당신은 참으로 무모한 짓을 했소” 라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놀러 다니기에 편리한 유람선을 만들던지, 아니면 하늘을 나는 멋있는 비행기를 만들든지, 그렇게 되어야 ‘성공시대’ 라는 TV프로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그것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하게 되고, 그러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해줄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노아가 방주를 만든다는 것은, 그것을 왜 만들죠? 평생을 헛수고를 한 것은 아니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니냐는 말이죠.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노아는 그야말로 쓸모가 없는 인간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노아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필요한 인간이라고 우리에게 들이민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기대하고 원한 것은 따로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을 갖다대니, 우리는 “아니 이게 뭐야?” 라고 하면서, 뭔가에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보이는 것에 역점을 두고 매진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경고하심을 받아” 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전혀 다른데,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신다는 말이죠.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경고, 구원, 정죄, 의의 후사 !!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거기에 동의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고, 구원, 정죄 등등, 이런 용어들은 우리에게 상당히 낯설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과 천국이란 개념은 보이는 것의 연장인데, 즉 보이는 것을 하늘까지 확장시켜 보겠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신앙생활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제발 낯선 사람들을 보내셔서 우리들 당황하게 하지 마옵소서. 현재 우리의 역사와 문명은 발전과 진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언젠가는 하늘에 도달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것에 역점을 두고 살아갑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라고 말이죠.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거기서 구원, 즉 건져낸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방주가 그 대표적인데, 그게 왜 필요하냐는 말이죠. 그러니 그 당시 사람들이 그런 방주를 만든 노아를 좋게 보았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노아는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는, 고집도 그런 왕고집이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세상이 정죄를 당해야 합니까? 무엇을 잘못했다고,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 눈에는 모두들 열심히 살고 괜찮아 보이는데, 그러나 노아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몽땅 정죄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노아는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엉뚱하고 무모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방주, 구원, 정죄, 의의 후사와 같은 것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믿으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쪽 세계에서는 전혀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터트리면서, “이것이 현실이다. 받아들여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방주는 필요치 않는데, 빠져나간다기보다는 오히려 경제계획이 필요하고 발전대책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들이밀면서 “이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계속 다그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우리가 무모한 인간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참으로 당황스럽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열중하고 있는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방주, 구원, 정죄, 의의 후사, 이런 것은 우리 마음속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믿으라고 하신다면, 결국 헤어지자는 소리입니까? 도대체 왜 그리하십니까?” 라고 나오는데, 사실 그런 느낌으로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는 방주가 아냐 !!
흔히들 교회가 방주라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있는 것이니 말이죠. 교회에 올 때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을 느끼니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것인데, 즉 눈에 보이는, 있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에 익히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하시지 않는데, 이 시대에는 이 시대 나름대로의 또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접근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그리고 우리 마음에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행함으로 따라잡으려고 시도할 것이 분명한데, 열심히 해서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제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방주’ !!
우리가 오늘의 본문 말씀을 놓고 본다면 참으로 황당하고 당황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주장하기를, “나 혼자 잘나서 나 혼자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전부 썩은 거야. 그러니 당연히 심판이 떨어져야지” 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곧 ‘신앙’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만약에 보이는 이 세상의 일부 요소라도 거기에 담겨있으면, 그러면 우리가 잘 찾아서 수용하면 되는데, 하지만 사정이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이죠.
이 방주라는 것이 타고 물놀이를 하는 용도가 아니라 구원의 방주인데, 그러면 지금도 우리가 교회에 앉아서 방주를 만들고 있으면 됩니까? 기술이 모자라면 현대중공업에 가서 자문도 좀 받고 말이죠. 그렇게 하면 구원이 됩니까? 하지만 방주라는 것은, 그때 그 시대에 필요한 일회용이었다는 겁니다.
만약 방주가 일회용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구원의 장치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방주를 여러 척 만들어낼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즉 방주가 눈에 보인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도달하려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방주를 만들어 자기 구원을 달성하려고 할 것이 너무나 뻔하다는 겁니다.
물론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방주란 분명히 눈에 보였지만, 하지만 그들은 이것이 그 이전에 자기들의 눈에 익은 방식이 아니기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방주는 비록 자기들 눈에 보여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방주는 그 당시의 일회용이고, 오늘날은 오늘날대로 그런 것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표 !!
그것을 성경에서는 아무 함축해서 어렵게 이야기하는데, 즉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표니라” 라고 말이죠. 이것은 오늘날 이 시대와 노아시대를 연결해놓은 겁니다. 그것이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나오는데, 20절과 21절입니다.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방주와 물의 관계로서 무엇을 표시로 무엇을 남겼는고 하니까,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세례의 표시로서, 그래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고 하나님의 심판이 왔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내용인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사람이 뭔가 이야기를 할 때는 상대방이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만, 그것을 ‘패러다임’ 이라고 하는데, 그런 가운데 서로 대화가 성립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여기에 마이크가 있고 녹음기도 있고 종이도 있고 의자도 있는데, 그런데 만약에 제가 “이 마이크는 우주선입니다” 라고 하면 상대방이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겠지요. 여러분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런 말은 하나마나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오늘날인데,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옛날이라는 것이죠. 물론 지금의 현대에서 보면 둘 다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그 당시로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왜 오늘날 이야기와 옛날 이야기를 마구 섞어서 헛갈리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에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부활이 이 세상에서 눈이 띄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그 모든 내용은, 사람들이 상식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닌데, 물론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예수님의 부활체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
예수님의 부활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났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동안 생활을 같이 했는데도 말이죠. 왜 그렇죠? 예수님의 모습이 이전과는 너무 판이했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설명을 해주시니 깨닫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은 그만 사라지고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무슨 산신령도 아니고 말이죠(ㅋㅋ).
(눅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 24: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눅 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눅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눅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참으로 당황스럽다는 겁니다.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열심히 교회만 다니면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런데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이니, 결코 교회가 믿음의 증표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이런 고약한 분이 다 있느냐는 것이죠. 우리가 난처해할 줄 뻔히 아시면서 말이죠. 여기에 대한 힌트가 우리가 방금 살펴보았던 베드로전서 3장에 나오는데, 18절과 19절입니다.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먼저 그리스도께서 액션을 !!
여기 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라고 하는데, 저는 이 구절을 보고 엄청 고민에 빠졌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싶은데,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겁니다. 짧은 이 세상을 살다가 그냥 연기처럼 사라지기는 싫고, 영생을 누리면서 살고 싶다는 말이죠.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우리 쪽에서 나서야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는 것이죠. 마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 자기가 돈을 내듯이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마음에 드는 것을 사니까 당연히 자기가 그 비용을 지불한다는 겁니다. 즉 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자가 행동을 취하는 것이 우리네의 상식적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에게 인도함을 받는 그 토대를 우리가 어떻게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분이 이미 다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분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분은 죄가 없는 분인데, 그런데 그렇게 죄가 없으신 의인이 불의한 자들을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겁니다.
그 불의한 자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인데, 그분의 그 대신 죽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즉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분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알아서 다 해주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런데 그런 구원을 받고 싶어하는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예수님이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받게 되니, 이것도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얼마나 다르냐는 겁니다. 그러니 노아 때 사람들이 노아 방주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나, 또한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의 구원방식을 믿지 않는 것이나, 모두가 부활하신 영의 의해서 주도된 일관된 활동이라는 말이죠.
육체에서, 이제는 부활의 영으로 !!
설교를 처음으로 다시 돌려서, 우리의 시작은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인데, 그런데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인데, 그런데 어떤 의인이 그런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으셨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사람에게서 끄집어낸 것도 아니고, 공장에서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뭐라고 합니까?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취소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제는 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영으로 계셔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신다는 겁니다. 마치 산신령처럼 말이죠.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시는데, 바로 그것을 믿으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물질문명에 매진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우리의 뒤통수를 때리는 말씀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활동이 아닌, 또 다른 세계에서 움직이는 활동이 개시되고 진척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다리를 이쪽에 걸치고 다른 다리는 저쪽에 걸치는 게 아니라, 두 다리를 몽땅 다 이쪽 세계로, 즉 주님이 하시는 일에 모두 다 집어넣는 것,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노아방주 !!
이렇게 여기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예수님이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과,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을 서로 관련을 시키는데, 그러니 이 세상에 속한 우리로서는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로 우리에게 비쳐진다는 말이죠.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전혀 다른 시대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어떻게 연결되고 같은 이야기가 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3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육체가 아니라 부활의 영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무엇이 어렵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부활의 영으로 계시면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때는, 원래 영이신 분이 육체로 계신 것이고, 그러니 육체로 오시기 이전부터 영으로 계셔서, 옛날 노아 때도 “너희들이 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라는 이야기를 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19절에서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를 하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아는데, 즉 “그분은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이고,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없는데, 그런데 그분이 한 번 죽으심으로서 졸지에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는 우리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성경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그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처럼, 십자가 사건 이전인 노아 시대에도 이미 그런 하나님의 작업이 있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은 왜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섞어버립니까? 그것은 과거와 현재에서 서로 동일하게 작용하시는 요소가 따로 있기에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란 말이죠. 즉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로 계신 분이 영의 입장에서 활동하신다는 겁니다. 그 영은 오늘날 이 시대뿐만이 아니라, 먼 과거인 노아 때도 역시 활동했는데, 영이니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은 “목사님, 그때도 많이 믿었겠네요” 라는 할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성경은 몇 명이나 믿었다고 합니까? 분명히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싶은데,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방주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지 아니했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의하면, 믿은 사람들이 달랑 8명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대에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이전인 노아 때는 어떻게 하셨다는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방주와 물 심판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그들은 두 눈으로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을까요?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그것은 바로 그들이 그동안 자기들의 두 눈으로 정립한 것 속에는 ‘방주’ 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인데, 그러니 노아가 수많은 날 동안 방주를 만들어도 쓸데없는 무용지물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형편은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도 역시나 마찬가지 취급을 받는다는 말이죠.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사람은 모두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그런데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한다면, 그것을 과연 믿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짜고짜 뭐라고 하십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의인인데, 그 예수님이 너의 죄 때문에 죽어야 너는 구원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들이미신다는 겁니다.
그게 노아시절에도 역시 동일했다는 말이죠. 노아가 하는 말이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야한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다짜고짜 망치와 톱을 들고 방주를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방주가 아니라면 장차 다가올 물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달랑 노아식구만, 즉 8명만이 믿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노아는 참으로 비효율적이고 무모하다는 말이죠. 노아는,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
무엇이 우리를 구원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도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데,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뭐라고 합니까? 오늘 본문 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여기에 “노아는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라고 하는데,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노아만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를 받아서 믿었느냐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바보입니까? 다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들은 노아를 통해서 받았다는 말이죠.
노아처럼 하나님에게 직접 받는 것과 그들이 노아에게 듣는 것과는 다른 내용이 아닌데, 그런데 왜 하나님의 경고를 유독 노아의 식구들만 받아들였느냐는 겁니다. 한 가족이라서 그런 겁니까? 저에게는 이것이 참 난제였는데, 물론 핵심은 이것이죠. 즉 보이지 않는 것, 그게 바로 믿음의 실상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에 노아는 관심을 가졌고,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관심을 끊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보이지 않으니 말이죠.
예수님의 부활하심인가? 교회인가?
그러면 오늘날 대표적인 보이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교회이고 교회 일인데, 그러니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하심이라는 것이죠. 물론 우리 생각에는 보이니 보이는 것이고, 그렇게 보이니 열심을 내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오늘 본문을 계속해서 보면,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노아가 가진 믿음이라는 겁니다. 즉 “나만 믿음을 가지면 되었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이 정죄의 대상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즉 믿음을 보여주는 믿음의 증거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 세상을 정죄하는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왜 보이지 않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로 아는가?”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서 부활의 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그런데 왜 눈에 보이는 교회에만 집착하는가?” 라는 겁니다. “기도해서 병이 나았고, 기도해서 사업이 잘 되었습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게 전혀 믿음이 아닌데, 정말로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면, 그 죄를 위해서 어떤 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각 교회마다 목사라는 직분을 자랑하고, 또한 장로라는 직분을 자랑을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봐라, 봐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그런 교회직분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교회부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기에 말이죠. 그런 것들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평생 가지고 가야하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죠. “예수님은 의인이며” 라는 것도 평생 가지고 가야하고, 또 “의인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간다” 라는 것도 평생 가지고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보이지 않는 진리에 대해서 방해하고 막아서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순간순간 스며들어오는 보이는 것들로 인하여, 이 믿음의 구조가 그만 다 깨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보이는 것들과 전쟁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방주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베드로전서 3장 2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물 심판과 예수님의 세례 !!
여기에 ‘물’이 나오는데, 물론 이것은 우리가 지금 마시는 물이 아니라 노아 때에 하늘에서 쏟아진 물인데,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말이죠. 노아는 분명히 물 심판을 이야기했는데,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물 이야기가 아닌 세례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물론 교회에서 목사가 주는 그런 세례가 아니고 예수님의 세례라는 말이죠. 이 세례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심판이 있고 그 가운데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건짐을 받는다” 라고 하는 구조, 그것을 자기 몸에 뒤집어씌워서 가지고 다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노아는 ‘물 심판과 방주’ 라는 구조를 평소에 마음에 담고 살았는데, 즉 “물 심판에서 방주로 인해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는 구조를 노아는 온 몸에 휘감고 다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시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나는 살아가고 있다” 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 그것을 뒤집어쓰고 다니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곧 ‘세례’ 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으로 다시금 돌아와서, 7절 마지막에 보면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노아는 의가 먼저 있고, 그 의의 후예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의’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고 의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서 노아는 증거자가 되었고, 즉 증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없는데서 생겨난 인물 !!
이렇게 전체적으로 성경을 보니,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인고 하니까, “노아는 없는데서 생겨난 인물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별종을 하나님께서는 ‘의의 후사’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바로 이런 인식을 갖고 있으니, 노아는 가볍게 이 세상을 정죄할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인물은 무엇인가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여러분은 이방인은 되기 싫죠? 우리가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매일같이 이런 것이니 말이죠.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그런데 33절에 있는 말씀을 보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교회에 나오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니 생계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주로 목사가 그런 경우인데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 나라의 의,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물론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러면 우리도 쪼다가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신다면,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남들에게는 꿀릴 것이 없는데, 하지만 노아 앞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구원을 받은 자들 앞에서는 꿀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시대의 노아가 되자 !!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간단한데, 그 나라의 의를 구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당연히 노아처럼 무모한 자가 되고 또한 낯선 존재가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바로 ‘믿는 자’ 라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 아니라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 속에 의가 들어있어서 그 의가 흘러 넘치는, 즉 “이 시대의 노아가 되자” 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방주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 당시에 필요했던 일회용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그야말로 난처하게 하시는데, 궁지로 몰아가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너는 이미 이 땅의 선을 넘었다. 이제는 천국에 속한 자이다. 그러니 이제 너는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하게도 ‘신자’ 라는, ‘성도’ 라는 이름을 붙여주신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뒤를 돌아보면,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짓들이, 아무리 교회라고 해도, 목사가 어떻고 장로가 어떻고 해도, 그런 것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짓들을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한 번 죽으심’이 있으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다 된 것이지, 굳이 부활절을 지켜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말이죠.
아니 조상에게 제사를 지냅니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이미 죽었다는 선언인데, 이미 죽고 없으니 기념이라도 해보자는 것인데, 하지만 살아있는 분에게는 제사를 지내는 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노아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증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게 실제이고 실상임을 인정한다는 말이죠. 따라서 우리는 당당하고 꿀릴 것이 없는데, 왜 그렇습니까? “너희들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무시하니, 멸망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한 번 죽으심으로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의, 그것이 없을 때는 설령 천년을 살아도 산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여러분은 어느 인생의 길을 가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닌데, 그러니 노아처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 즉 예수님인데, 그분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면, 결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6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의의 후계자 !!
비록 우리가 노아처럼 사람들로부터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의 후사’, 즉 ‘의의 후계자’ 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즉 노아는 하늘의 의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확실한 실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인이 되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바로 이런 노아와 같은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전혀 다른 세계가 더욱 더 현실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의의 후사, 의의 후계자, 의의 종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셨는데, 그래서 노아는 무모하고 황당한 인생을 살았는데,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의의 후사로서, 하나님의 의를 비추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저희들도 이 세상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노아의 8명에 포함된 것을 더 기뻐하면서, 오직 노아처럼 주님을 증거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4 오후 6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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