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1:5-6) 에녹의 일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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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에녹의 일생
2002년 3월 24일 38강
본문 말씀 : 히 11: 5-6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성경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나옵니다. 과연 이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성경에 나올까요? 보통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이면 다 똑같은 입장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별한 부류의 인간들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는 자를 따로 분류하시려고 합니다. 물론 인간 세계에서는 이 점을 거부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다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뭡니까? 이 믿음이라는 것을 특별히 알려주기 위해서 아벨, 에녹, 노아 등등의 인물을 내세웁니다.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믿음이라는 견해를 거부하겠다는 취지에서 말입니다. 즉 믿음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특별히 알려주지 아니하면 모른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죽음 없음'을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4절에 봐도, 아벨에 대해서 언급하시면서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했던 아벨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죽음을 가지고 이야기하시고 오늘 본문 에녹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죽음을 가지고 이야기하십니다. 보통 인간 세상에서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 안하잖아요. 그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의 재력과 학식과 인물 같은 것으로 서로 내놓고 누가 잘 났는가를 따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관점을 거부하십니다. 인간의 본질은 죽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밝혀진다는 겁니다. 아벨은 죽음을 통해서 "너는 믿는 자야"라고 보시는 것이고,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에녹이 안죽고 천국에 들어간 것을 보니 "너는 믿는 자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양쪽 다 죽음을 가지고 그 사람의 본질을 보이시는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우리들이 가진 것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본질과 수준을 평가 해 달라고 소매걷고 나서는데 하나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본질에는 마치 바위처럼 고정적으로 박혀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바위는 곧 죽음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평소에 우리가 이 점을 잘 모르는 이유는, 우리들이 평소에 추구하는 것과 얻어진 것으로 잔뜩 그 위에 지속적으로 쌓아올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책 오래 안보면 그 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이지요. 하지만 "훅!"하고 불어버리면 먼지가 달아나고 또렷하게 성경책의 글씨가 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일상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본질을 감추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먼지 쌓이 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실 때, 사람들이 흔히 다른 사람과 만나는 식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겨냥하며 오십니다. 마치 모래 시계를 뒤집는 것과 같습니다. 위에 있는 것이 아래로 가고, 아래 감추어진 것이 위로 오도록 말압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저같이 잘난 인간은 왜 꼭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나라는 인간이 아깝지도 않는 겁니까?"하고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에 대해서 일부러 시비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다고 자청하는 그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런 식으로 접근해 오시는 겁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렵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래도 아벨의 참혹한 죽음보다는 화려한 귀향을 한 에녹이 더 이익을 본 것처럼 여기질 것입니다. 왜 아벨이 에녹에 비해서 손해 본 듯한 인상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인의 역할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몰라서 그러합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한 아벨은, 인간이 왜 죽을 수 밖에 없는 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한 겁니다. 중요한 것은 역할입니다. 배우가 때로는 이 역할, 때로는 저 역할을 얼마든지 맡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역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거기에 비해 에녹의 역할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엄연히 있어 신자가 갈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자는 취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다 똑같은 역할을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그림 짜 맞추기에서 있어 한 조각의 그림 파트를 맡고 있습니다. 바라보는 것은 모두들 예수님입니다마는 어떤 자는 예수님의 코 부분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귀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 우리들 생각은 안 죽고 천국가는 에녹같은 역할을 원할 것입니다. 왜 나는 같은 신앙인이면서 저 사람보다 못사는가? 왜 나는 같은 신앙인이면서도 저 사람보다 머리가 더 나쁜가? 라는 것을 따지면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자신만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서 신앙의 흔적을 못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맡은 역할이 뭡니까?"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아내의 입장이라면, "왜 내 남편은 저 남편처럼 안되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아, 하나님께서 나보고 아벨 되고 또는 에녹처럼 신앙의 역할을 담당하라고 저런 남편을 붙여주었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내는남편의 배필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배필자입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배필자라고 여기면 필시 다른 남편과 자기 소유의 남편과 비교해서 우열을 따지려고 할 것입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서 남편과 관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에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밝혀주신 바는 딴 것이 아니라, 죽음이란 하늘 나라로 가는 문 여는 일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문 뒤에 무슨 빛의 세계가 있는가가 더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어두운 세상에 갇혀 있다가 문을 왈칵 열면 빛의 세계의 빛들이 우리 마음 속으로 갑자기 밀려오지요. 이런 경우가 바로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경험한 것이고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겁니다.
사도 바울은 거기서 삼층천을 봤습니다. 단지 성도는 죽을 때, 빛의 문을 확 열 때 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두운 이 세상만이 전부라고 믿어서는 아니됩니다. 정말 에녹의 행복으로 만끽한 인생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에녹의 인생은 세상에서 보는 기준으로 봐서 아무 것도 안하고 그저 죽음도 없이 하늘 나라 간 것으로 보이겠지요. "아벨은 힘들고 에녹은 수월했다"는 공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죽는 순간만을 놓고서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서 1:14-15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녹은 마지막 천국 문을 열 때까지 이 어두운 세계에 대해서 그냥 가만 보고만 있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그냥 환영했을까요 아니면 미워했을까요? 나중에 세상이 물로서 심판받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에녹은 엄청난 비난과 고난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나중에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육신이 없다고 치더라도 말입니다.
경건치 않는 세상 한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에녹을 두시는 이유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재미로 행복하고 생의 보람으로 삼는 자라면, 그 환영과 우호적인 사람들이 악한 환경으로 바뀌게 될 때 과연 여전히 하늘 나라만을 기뻐하고 행복할 사람일까요?
정말 하늘의 밝은 빛을 세상의 어두움보다 더 사랑하는지 점검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에 함께 어울려 버리면, 과연 내가 이 사람들과 헤어져도 좋다는 생각도 들겠습니까? 본인조차 분간 안 되잖아요.
흔히 고난이라고 할 때, 찡그림, 눈물 남, 슬픔 같은 것과 연관 짓는데 이것은 사실 고난이 아니라 고통입니다. 참 이상한 일 중의 하나가 뭔가 하면, 남이 자신의 육체에 신체적 폭행을 행하지도 않았는데 인간은 고통을 느낀다는 겁니다. 애인이 떠난다든지,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든지, 직장에서 쫓겨난다든지, 할 때 사람들은 매우 고통스러워합니다. 누가 자기를 치던가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고통스러워서 잠을 못이루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훅!" 부시는 바람을 제대로 몰라서 그러합니다. 모래시계가 언제가는 뒤집어져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겁니다. 우리의 본질은 바위같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위에 하나 둘 씩 먼지로 차곡차곡 열심히 쌓아올려 놓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뜻대로 안되니 우리는 마음의 번뇌과 고통을 갖는 것입니다. 고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진 하늘 나라 때문에 세상의 실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바로 고난의 길입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고난이 다가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고난 받아야 새삼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저것은 가짜이고 이것도 가짜이구나"라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아픔 같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게 되면 그동안 한국 교인들을 처절하게 짓눌러 왔던 대목이 나옵니다. 물론 잘못 해석해서 그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 뽑아서 전도하려 보내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교회 나오는 자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전도해서 자기에게 해당되는 몫의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겁니다. 목사들이 강단에서 강조하기를, "여러분들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신한다면 여기 나오는 12제자들처럼 전도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서 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오세요. 진짜 신자라면 말입니다"라는 강요를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0장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0:9-10에 보면,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소유로 나서야 전도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전도하는 너희들위 신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돈지갑이나 두 벌 옷이 없어도 무방할 정도라는 겁니다.
전에 이사야가 본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에녹이 경험했던 하늘 나라, 이런 것으로 인해 그들 에녹이나 이사야는 세상 부귀 영화에 대한 미련을 뚝 끊었다는 이 사실을 이제 12제자에게도 해당될 만큼 그들도 같은 부류의 신분임을 가르치고자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시키면서 자신의 본질을 다시금 되풀이해서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16절 같은 경우에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되어 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으로 뽑히기 전에는 그들에게 있어 무엇이 양인지 무엇이 이리 인지 분간할 길도 없었고 아예 분간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살았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난 뒤부터는 좋든 싫든 자신이 이리가 아니라 양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기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19-2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전에 같으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염두에 두고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했는데 실제로 성령께서 하실 말을 넣어 주니 과연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이 참으로 현실적으로 대단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전도란 그 제자들 본인들이 본질을 파악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야 자신의 능력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만을 전할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고난의 종류는 성도마다 다 틀립니다. 이발사가 졸지에 예수님 믿는다고해서 이발소 때려 치우고 미용실 시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제자들의 신앙 역할을 보면서 이발사는 이발사 나름대로 그 현장에서 보이게 되는데, 전에 하던대로 과도한 돈 욕심을 안내다든지, 조금 줄이다든지 해서 어쨌든 자기를 부인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로서 그 이발사는 제자들과 공통되고 고난이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신앙인입니다. 이것이 또한 전도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이란, 바로 에녹이 보여준 전 일생이 곧 상입니다. 곧 죽음을 보지 않는 그 하늘 나라를 의미합니다. 창세기 15:1에 나와있듯이, 하나님이 곧 성도에게 있어 상입니다. 우리가 보통 상이라는 것은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살림살이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더 들어오는 살림살이 종류로 알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상이란, 내가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상이 나를 지배하고 덮어서 삼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우리는 거대한 하늘 나라에게 포함되는 이것이 곧 성도에게 주어질 최고의 상입니다. 에녹이 이런 상을 늘 기쁨으로 바라보았기에 때문에 세상에 꿀리지 않고 세상 심판을 과감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질문을 고쳐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다룰까요?"라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원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환상을 뒤집어 씌우며 사는 자들에게는 늘 "훅!"라고 먼지를 날리시면서 다루십니다. 그렇게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주제 파악을 하는 쪽으로 다루십니다. 죽어야 될 죄인이기에 무엇이라도 기쁘게 하면서 산다는 자세를 견지하면서 말입니다. 이왕 구원받았기에 무슨 역할도 못하겠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본질을 숨기며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쓸데없는 고통말고 기쁨의 고난을 갖도록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8. 에녹의 일생(히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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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으면 사람도 아냐 !!
성경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러면 과연 이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성경에 나왔을까요?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이면 다 똑같은 입장에 있다고 보는데, 특별한 부류의 인간들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데, 믿는 자를 따로 분류하시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인간 세계에서는 이런 점을 거부하는데,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를 않고,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믿음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믿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만약에 이 믿음을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다면, 성경에서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사람인가? 신의 존재를 인정해? 그러면 믿는 것이구나” 라고 해서, 사람들을 모두 다 믿는 자라고 간주해서 천국에 보내주어도 괜찮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특별히 알려주기 위해서 아벨, 에녹, 노아와 같은 인물들을 내세웁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상식적인 믿음의 견해를 거부하겠다는 취지에서 말이죠. 그러니 믿음이란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따로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알려주지 아니하면 우리 인간들은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과연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믿음이 있는 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 세상에서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사람의 집안과 학식과 인품과 같은 것을 보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아니라, 특별히 ‘죽음’을 겨냥하시면서 그 사람의 속성을 찾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앞에 있는 4절을 보면,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우리 ‘죽음’을 가지고 이야기하자 !!
우리가 지난 시간에 아벨에 대해서 했는데, 거기서도 하나님은 죽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시고, 오늘 본문인 에녹에 대해서도 죽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는 이런 식으로 하지 않지요. 사람의 됨됨이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주위환경으로 평가를 하는데, 그렇게 해서 누가 누가 잘 났는지를 따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관점을 거부하십니다. 인간의 본질은 죽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밝혀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경우에는 죽음을 통해서 “너는 믿는 자구나” 라고 보시는 것이고,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에녹이 죽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 것을 보면서, “너도 믿는 자구나”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양쪽을 다 죽음을 가지고 그 사람의 본질을 보이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우리가 가진 것을 내세우면서, 우리 자신의 본질과 수준을 평가해 달라고 소매를 걷고 나서는데,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게 전혀 통하지 않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우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동산이나 예금통장을 가지고 “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감추고 싶어하는 죽음을 가지고 인간 됨됨이를 평가를 하시려고 하니, 우리는 솔직히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멀찍이 물러서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인간의 본질에는 마치 바위처럼 고정적으로 박혀있는 것이 있는데, 그 바위가 곧 죽음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평소에 우리가 이런 점을 잘 모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추구하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남들과 차이가 나는 것을 그 바위 위에 지속적으로 잔뜩 쌓아올려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나는 이렇게 훌륭하잖아. 공부도 잘하잖아” 라고 하면서 말이죠.
왜 성경책을 오랫동안 보지 않으면 그 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이지요. 하지만 훅 불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먼지가 달아나고 또렷하게 성경책의 글씨가 보인다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일상은 자기의 ‘죽음’ 이라는 그 본질을 감추는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마치 먼지가 쌓이듯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실 때,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식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겨냥하며 오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래시계를 뒤집는 것과도 같은데, 위에 있는 것이 아래로 가고, 아래에 감추어진 것이 위로 오도록 말이죠. 그렇게 뒤집어버리고, 또한 불어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누구냐?” 라고, 즉 “너는 왜 죽을 수밖에 없는지 아느냐?”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인간들은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하나님이여, 저같이 잘난 인간을 왜 꼭 죽어야만 하는 겁니까? ‘나’ 라는 인간이 아깝지도 않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죽음이라는 것에 마주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에 대해서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다고 자청하는 그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런 식으로 접근해 오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어떻게 인간을 규정하고 있는지를 말이죠.
아벨과 에녹은, 배우 !!
그러면 지난 시간에 본 아벨은 죽여버리고, 반면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녹은 죽지도 않고 천국에 데리고 가시고, 이것은 너무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아벨의 참혹한 죽음보다는 화려하게 천국에 복귀한 에녹이 더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인의 역할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아벨은 “인간이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말이죠. 거기에 비해서 에녹의 역할은 무엇인고 하니까,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엄연히 있어서, 믿는 자는 죽음 이후에 어떤 세계에 가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데, 즉 “갈 곳이 따로 있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러니 중요한 것은 ‘역할’ 이라는 말이죠. 배우가 때로는 이런 역할을, 때로는 저런 역할을 얼마든지 맡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할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에게 똑같은 역할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큰 그림을 맞추는데 있어서, 다들 한 조각의 퍼즐을 맡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바라보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이지만, 그래서 천국에 가는데,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코 부분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귀 부분의 역할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퍼즐을 모두 맞추게 되면,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이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아벨에게만 해당되는 사항도 아니고, 에녹에게만 해당되는 사항도 아니고, 모든 믿는 자는 아벨과 에녹처럼 동일하게 각자가 맡은 역할이 있다는 말이죠. 그들이 대표적으로 이렇게 성경에 나와있다는데, 물론 우리는 죽지 않고 천국에 가는 에녹과 같은 역할을 선호하겠지만, 모든 것이 다 역할이라는 겁니다.
주님, 제가 맡은 역할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왜 나는 같은 신앙인이면서 저 사람보다도 가난한가? 저 사람보다 머리가 더 나쁜가?” 라고 하면서 따지게 되면, 물론 그런 사람이 밉기도 하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입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혀 신앙의 흔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주님, 제가 맡은 역할이 무엇입니까?”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쌓인 먼지가 다 날아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디서 무슨 황사가 그렇게 많이 날아왔는지 몰라도, 양 사방이 다 먼지가 쌓여서 누렇다는 겁니다.
아내는 남편의 배필자가 아니고 !!
지난 금요일에 하양에 심방을 했는데, 거기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아내의 입장이라고 하면, “왜 내 남편은 저 남편처럼 안 되는가?” 라는 것을 따질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보고 아벨과 에녹처럼 신앙의 역할을 담당하라고 저런 남편을 붙여주었구나” 라고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런 아내가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아내는 남편의 배필자가 아니라, 그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의 배필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배필자인데, 만약 아내가 남편의 배필자라고 여기면, 반드시 다른 남편과 자기 소유의 남편과 비교해서 우열을 따지려고 하고, 그러면 하나님에게 화를 낸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소유밖에 되지 않는데, 그러니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서 남편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겁니다.
죽음이란, 하늘 게이트를 여는 것 !!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죽음이란 하늘나라로 가는 문을 여는 일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문 뒤에 무슨 빛의 세계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 우리가 어두운 세상에 갇혀 있다가, 문을 왈칵 열면 빛의 세계의 빛들이 그 열린 문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으로 밀려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 6장에서 이사야가 성전에서 경험한 것이고, 그리고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바울이 경험한 것이죠. 사도바울은 거기서 삼층천을 봤는데, 천국에 갔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살아서 보는 경우에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도는 죽을 때, 빛의 문이 확 열릴 때, 그때 그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이죠.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러니 우리는 어두운 이 세상을 보고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지 않으려고,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이 싫어서, 달리 말하면 이미 익숙해진 어두운 이 세상이 좋아서, 그렇게 이 세상에서 살려고 아등바등 설치느냐는 겁니다. 그냥 열면 되는데 말이죠.
물론 말로 이렇게 하면 쉬운데, 과연 에녹도 그렇게 쉬웠을까요? 언뜻 보면 정말 에녹의 인생은 행복으로 만끽한 인생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보는 기준으로 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죽음도 경험하지 않고 하늘나라로 간 것으로 보이겠죠. 하지만 “아벨은 힘들고 에녹은 수월했다” 라는 공식은 있을 수 없는데, 물론 죽는 순간만을 놓고 보면 그런 것 같지만, 에녹의 인생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여기서 유다서 1장 14절과 15을 보겠습니다.
(유 1: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유 1: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에녹 !!
여기에 보면 에녹이 평소에 무슨 일을 했는지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게 노아 때에 주어진 물 심판인데 말이죠. 그러니 마지막 천국 문을 열 때까지, 이 어두운 세계에 대해서 에녹은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과연 사람들이 환영했을까요? 아니면 미워했을까요? 당연히 미워했다는 말이죠.
그 당시 사람들이 믿음이 좋았을 리가 없는데, 그것은 노아 때에 하는 짓을 보면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 에녹은 엄청난 고난을 받은 것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비록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가서 이 땅에는 그의 육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살면서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했다는 말이죠.
저하고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분들의 불만이 무엇인고 하니, “왜 한국교회에 목사님과 같은 목회자가 없습니까? 왜 전부가 다 자기밖에 모르고, 그렇게 돈만을 밝힙니까?” 라고 하는데, 말을 하고 보니까 제 자랑처럼 되어서 좀 그렇지만 말이죠(ㅋㅋ).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정말 너희가 하늘의 밝은 빛을 이 세상의 어두움보다 더 좋아하는가? 정말 그러한가?” 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래서 그런 악조건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는 겁니다. 자기가 정말로 천국에 가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남들에게 인정을 받는다고 하는 자기 의미가 더 좋은 것인지, 그것을 정작 본인 스스로는 그것을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죠.
고난과 고통은 달라요 !!
우리가 고난과 고통을 구별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인상을 쓰고 찡그리고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데, 정작 견디기 힘든 것은 정신적인 고통인데, 육신적인 고통은 오기로도 버틸 수가 있다는 것이죠. 마치 군대의 유격훈련을 견디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진다든지,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든지 하면, 누가 때리지도 않았는데 그 심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몸을 아무리 찾아봐도 멍든 곳도 없고 부러진 곳도 없는데, 그런데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이죠. 거기서 기쁨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왜 그런 악한 자들이 있고 또한 그런 마음의 고통이 있는 겁니까? 그것은 일종의 ‘훅’ 부는 바람과 같은 역할을 하라고 있는 것인데, 즉 죽음이라는 바위 덩어리 위에 먼지를 쌓아놓고,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불어버리고, 모래시계처럼 뒤집어버리신다는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아하, 내가 죽어 마땅한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먼지가 쌓이게 되고, 그러면 점점 더 자기 본질로부터는 멀어지게 되는데, 세상적인 허영심은 더 늘어나고 말이죠. 그러면 거기서 고민과 번민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에녹의 경우에는, 물론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갔지만, 하지만 그런 시점이 오기까지는 이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에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고, 그런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가슴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고난’ !!
하지만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그게 고통이 아니라 고난이라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이미 가진 하늘나라 때문에 이 세상의 실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곧 고난의 길이라는 겁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고난이 다가오도록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목사님, 고난을 받아야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고난을 받아야 새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저것은 가짜이고, 이것도 가짜이구나. 모든 것이 다 가짜네. 정말 괴롭네. 떠나고 싶네” 라고 하는, 즉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느끼는 아픔과 같은 것, 그게 바로 고난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0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6절입니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 10: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마 10: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마 10:4)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마 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게 그동안 한국교회 교인들을 처절히 짓눌러 왔던 대목인데, 물론 잘못 해석해서 그렇지만 말이죠. 이것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뽑아서 전도하라고 보내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목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자기에게 해당되는 몫의 사람들을 전도해서 우리교회로 데리고 와야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스트레스를 주는 성경말씀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전도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전도는 제자들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권세와 그 속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9절과 1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마 10: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마 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그런 것이 없어도 괜찮다 !!
이것이 “너희들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무소유로 나서야 전도가 된다” 라고 하는 의미인가요? 과연 그렇습니까?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전도하는 너희들의 신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래서 돈지갑이나 두 벌의 옷이나 신발이나 지팡이와 같은 것은 없어도 전혀 무방하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뽑았다는 것은 이미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구원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세계에서 어떤 세계로 이동하는 것인지를,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동안 쌓아놓았던, 그 소복이 쌓인 먼지를 다 털고 밀쳐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전도를 함으로서 자기 본질이 무엇이며, 자기는 전혀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구원이 되었는지, 그 배후에는 누가 작용했는지,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의미에서 전도를 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그렇게 자기 자신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이사야가 성전에서 본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에녹이 경험했던 하늘나라, 이런 것으로 인해서 그들 에녹이나 이사야는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한 미련을 뚝 끊었다는 사실, 그것이 이제는 12제자들에게도 해당될 만큼, 그들도 역시 같은 부류의 신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전도’ 라는 형식을 통해서 가르치고자 하시는데,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걸치고 있는 것을 벗도록 하시고, 그렇게 해도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에는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를 시키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다시 살펴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전도는 도를 전하는 것인데,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누가 구원을 시켜주었는지, 그것을 증거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아도 되는 행색으로 함으로서, 누구를 끌어 모으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정말 구원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확인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고난’ 이라는 말이죠.
이제 구별되는 양과 이리 !!
그리고 16절에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라고 하는데, 그들이 예수님에게 제자로서 뽑히기 이전에는, 그들은 무엇이 양인지 무엇이 이리인지 분간할 길도 없었고, 또한 분간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살았다는 겁니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만약에 인간의 패를 가르고 한다면, 그것은 나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지옥도 없애버리고, 천국만 남겨놓는 것이 자비로운 하나님답다는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에게 구원을 받기 전에는 그게 옳다고 주장했던 자들인데, 그런데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고 난 다음부터는, 이제 무엇이 양이고 무엇이 이리인지, 그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난 뒤부터는, 좋든 싫든 간에 자기들이 이리가 아니라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즉 자기들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말이죠. 그것은 여기 마태복음 10장 19절과 20절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마 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전 같으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체면과 위신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망설이고 두려워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 성령께서 하실 말씀을 가르쳐주시니, 정말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이 참으로 대단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전도여행을 하면서 현실적으로 실감나게 느낀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통해서,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들 본질을 파악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시는데, 즉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 속에 놓이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야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만을 전할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전도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억지로 돈을 가지지 않고, 옷도 없이, 신발도 없이, 지팡이도 없이 전도에 나설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 왜냐하면 마음속으로 모두들 그런 것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그런 능력이 예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무소유가 아니라 !!
독일에 어떤 분이 있는데, 공부도 참 많이 했고, 한국에도 제가 전에 있던 성광교회의 초청을 받아서 몇 번 다녀갔는데 말이죠. 그분은 무소유를 몸소 실천한다고 하면서 그야말로 완전히 노숙자 생활을 하는데, 정말로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성경공부는 쉬지 않고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당신은 왜 그렇게 삽니까?” 라고 물어보면, “인간이 무소유로도 살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삽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사람에게는 그만 무소유가 진리가 되고 말았는데, 하지만 그 사람의 말대로 되려고 하면 계속해서 그런 생활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20년을 계속해서 그렇게 살다가 만약에 그 다음날에 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했던 것이 그만 다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죠.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암, 간질, 치질, 그리고 감기까지도 그렇게 기도를 해서 나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이 이제 일종의 체인이 되어서, 그렇게 돌아가다가 그만 중간에서 하나가 끊어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만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 꼴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술을 끊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10년 6개월 10일 뒤에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만 무너지고 만다는 겁니다. 담배도 역시 그렇고 말이죠. 그것은 뭔가 자기도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에는 오는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건져주었다고 하는 것에서 오는 기쁨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전도가 아니고 자기 자랑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돈을 가지지 않고 옷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역할인데, 그것이 우리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이 어두운 세계에서 ‘고난’ 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공통점이기는 하지만, 그 종류는 성도마다 다 틀린다는 말이죠.
이발사는 이발사대로 !!
예를 들어서, 이발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이발소를 때려치우고 미용실을 시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게 자격증이 달라서 마음대로 바꾸지는 못하는데, 이발사와 미용사는 다르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제자들의 신앙역할을 보면서, 그 이발사는 자기 나름대로 삶의 현장에서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과거에 하던 것처럼 너무 과도한 돈 욕심을 내지 않다든지, 요금을 만원을 받는 것을 이제는 6천원만 받는다든지 말이죠. 물론 아깝기는 하지만, 어쨌든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서 그 이발사는 제자들과 공통점을 가지게 되는데, 즉 고난이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신앙인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라는 말이죠.
교사의 경우에도, 수업을 다 마치고 난 다음에는 종종 회식모임이 있고 하는데, 거기서 교장에서 온갖 아부를 다하고 하다가, 이제는 아벨을 알고 에녹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리고 마태복음 10장을 보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런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그 사람의 고난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마태복음 10장을 봐라.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살라고 했는데 당신은 왜 은행에 저축을 하지? 그리고 왜 전도를 하지 않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발사는 이발사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전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전도라는 것은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하는데, 아직 살펴보지 않는 본문이 있는데, 그게 6절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곧 성도의 상급 !!
여기서 말하는 ‘상(常)’ 이란, 바로 에녹이 보여준 그의 일생이 곧 상이라는 말이죠. 즉 “죽음을 보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상’ 이라고 하면,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것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무엇인가 더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집에 밀가루가 있는데 설탕을 더 준다든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상이란 새로운 나라에 참여하는 것인데, 자기가 무엇을 더 가지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는데, 상은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삼키는 것을 뜻한다는 겁니다. 즉 거대한 하늘나라에게 포함되는 것이 곧 성도에게 주어질 최고의 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창세기 15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곧 성도에게 있어서 상이라는 겁니다. 달리 다른 것으로 상을 찾거나 기대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창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러니 에녹이 남들에게 그렇게 욕을 듣고 무시를 당해가면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은 바로 이 상을 늘 기쁨으로 바라보았기에 때문인데, 그게 바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에녹에게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곧 상이라는 겁니다. 즉 거대한 나라가 따로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 세상은 작다는 말이죠.
이제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다룰까?
이제 이 말씀만 하고 마치고자 하는데, 그러니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라는 질문은 전혀 잘못된 질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물을 내용이 아니고, 우리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하는데, 즉 “이제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다룰까요?” 라고 말이죠.
어차피 우리는 죽은 몸인데, 그러니 이발사를 시킬 것인지, 교사를 시킬 것인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달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죽음’ 이라는 원석을 늘 지니고 있는데, 그래서 늘 환상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훅’ 하고 먼지를 날리면서 다루어 가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주제파악을 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내 옆에 못된 남편이 있더라 !!
우리는 이미 죽어야 될 죄인이기에, 그러니 이제는 무엇이라도 기쁘게 하면서 살겠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자세를 가지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이왕 구원을 받았기에 무슨 역할이든 감당하지 못하겠습니까? 만약에 자기가 가정주부라고 하면, “내 옆에 못된 남편이 있더라”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 남편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것은 에녹의 몫이고, 그리고 얻어맞는 것이 아벨의 몫이라는 겁니다.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표현이 조금 과격하게 되었는데, 아무튼 그렇게 전도를 하는 가운데 자기가 얼마나 못난 죄인인가를 깨닫는, 그렇게 자기에 쌓여있는 먼지를 바라보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훅’ 불어서 다 날리면서 다루어주시는, 그런 주님의 그 사랑에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의 본질을 숨기면서 산다는 것이 참으로 큰 고통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런 고통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한 기쁨의 고통을, 그런 고난을 감히 감당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10 오후 4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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