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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11:4) 아벨의 제사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1:4) 아벨의 제사

정인순 2010. 9. 5. 11:28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37강-히11장,4(아벨의,제사)-heb020317.mp3

 

 

이근호

 

아벨의 제사

 

2002년 3월 17일 37강

 

본문 말씀 :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세상에 사람들 끼리만 있다면 편한대로 사는 것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인간 세상에 대해서 감시하고 있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심판이 실시되고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감시하고 있다는 말이 되지요.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나올 겁니다. "하나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평소에 적대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나타낼 것입니다. "누가 감히 나를 감시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심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라는 존재 조차 없다!" 물론 이런 사람은 불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적대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만 불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서 실 내용이 없는 사람도 불신자로 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인정하기는 하되, 그 하나님 다움의 내용을 따로 갖지 못하고 자기 할 도리만 열심히 하는 사람도 불신자입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데, 이 증거가 없는 것입니다. 옛적부터 내려오는 인간들의 가르침은, 바로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에 핵심이 있었습니다. 즉 짐승과 인간은 달라야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크면 그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훌륭한 인격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에 도달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인가요? 3절에 보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기준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이시고, 우리 인간들이 다듬은 기준은,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의 전부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 이외에 따로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정말 인간들이 믿고자 한다면 그 하나님되시는 분이 얼굴을 내비쳐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그 분의 얼굴을 보고 마음껏 믿게 말이지요. "실상이여 나타나라!"라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달리 말씀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믿는 증거가 있어야 돼"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과 우리들의 일상 행동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질곡 같은 것을 느낍니다. 성경은 신자와 불신자를 큰 벽으로 가운데 놓고 잘라버리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유명한 것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와 부자와의 처지이지요. 부자가 사는 지옥과, 거지가 간 천국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골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한 번 정해진 구역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꿔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옥 간 자의 절망 뿐만 아니라 천국 간의 변동되지 않는 신분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6:14에서는 아예 심판의 기준과 더불어 불신자와 철저한 단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죽어야만 결정될 것이 아니라 아예 살아 있으면서도 이미 신자가 불신자는 철저하게 구분되는데 그 기준이 바로 십자가 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왜 십자가라는 믿음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그것은 나타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 끝을 다시 보면,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죽은 자는 더 이상 일을 못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단 살아 있어야 업적이라도 쌓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벨은 그 죽음으로서 도리어 믿음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증거로서는 이 세상에 그런 식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35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죽음이란 단지 이 세상에서 은퇴된 것을 뜻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의인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본격적인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타난 것으로 모든 보이는 것의 전부라고 간주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재물과 지혜도 이 나타난 세계를 파악하는데 집중됩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이러한 작업에서 패배당한 자의 결과라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세계의 불실한 속성을 들추어내는 유일한 역대하 24:17-22에 보면,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요아스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기서 스가랴 선지자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인 비극에 머무는 죽음이 아니라 기존 인간 세계가 얼마나 악한 세계인가를 들추어내어 주는 죽음입니다. 이 스가랴도 죽음으로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이 지상에서 일할 때는 늘 이런 식입니다. 아벨의 죽음도 마찬가지이고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타난 세상만 붙들고 사는 자에게는 이러한 일련의 죽음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게 되지요. 특히 아벨의 죽음 같은 경우에는, 가인이라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의식을 통렬하게 심판하는 기준이 됩니다.

 

가인이라는 자는 부모로부터 특별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태어난 자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망나니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이름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진해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의 제사는 '나타난 것'에 의한 제사입니다. 흔히 종교를 말하는 겁니다.

 

이런 종교성이 인간 세상에 충만합니다. 사도행전 17:22과 26-31에 보면,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신의 소생으로서 인간이 정성과 성의를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나타난 세계에 관한 것 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세계에 한해서 그동안 묵인해 주었습니다. '허물치 아니하셨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과 그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심판의 증거물이 떨어졌습니다. 회개치 아니하는 자는 다 멸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않는 세계가 제공하는 심판의 기준입니다. 가인의 추수감사절은 하늘 나라에 소용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은 믿음도 아니요 증거도 안됩니다.

 

풍성한 곡식으로 신께 바치는 제사는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종교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있다라는 표시는 되지 못합니다. 신앙이란, 자신이 믿는 것과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일치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그 어느 누가 관심 두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 방주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노아도 방주를 겨냥했고 하나님도 방주를 주목했습니다. 이렇게 일치될 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은 그 예물에 대해서 증거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자 여기서, 아벨의 예물이 가인의 예물과 어떤 차이가 있는 지를 봅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아벨은 어떤 식으로 증거했을까요? 아벨은 직업이 양치는 자라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까지는 가인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가인이 농사짓는 자라서 거기에 걸맞는 예물을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다릅니다. 아벨은 양 몸체에서 기름 부위를 따로 떼 내었습니다. 왜 따로 떼 놓아서 기름부위를 부각시켰을까요? 아벨은 자신이 드리는 예물을 통해서 장차 오실 특별한 메시야를 그려내었던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히브리서 1:9를 보겠습니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기름이란, 타 인간들보다 특별히 우위에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함입니다. 아벨은 제물 전체를 기름부음에 예속되는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아벨의 제물관에 대해서 하나님도 인정하고 나서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일 때 뿐입니다. 가인이 대표적으로 보여준 종교성은 결코 신앙이 아닙니다. 누가 봐도 신앙인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 시대와 다를 바 없고 스가랴 시대와 다를 바 없고 아벨 시대에 다를 바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종교성을 마음껏 발휘하는데 가서 다음과 같이 말해보세요. "인간의 경건함이나 종교적 성의로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만으로 값없이 구원받습니다"라고 한다면 종교적인 불신앙인들은 담박 화를 내며 달려들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신이 하늘에 있고 우리 인간들이 그 신에게 정성을 다하여 경배하고 찬양하는 이 모습들을 봐라. 이게 뭐가 그리 나쁜 일인가 말이야" 하지만 이들은 나타난 것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유일한 증거, 즉 십자가만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나타난 것에 매이기 쉬운 인간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도 각가지 종교성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릅니다. 십자가와 부할의 의미를 모르는 이 불신자의 갈 곳은 오직 지옥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행동에 도취되어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해주옵소서. 오직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십자가만을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7. 아벨의 제사(히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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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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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눈 !!

지금 이 세상에 사람들끼리만 살고 있다면, 그러면 자기들이 편한 대로 사는 것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냥 그렇게 인간들끼리 잘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 인간 세상에 대해서 감시를 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누구에게 감시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참으로 싫어하는데,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있어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고,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심판이 실시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감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면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나오겠죠. “하나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나 평소에 적대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은, “누가 감히 나를 감시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심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라는 존재조차도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불신자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적대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만이 불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서 아무런 실제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역시 불신자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야말로 맹탕인 자들을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다움의 내용을 따로 가지지 못하고, 그냥 자기가 할 도리만 하면서 열심히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그렇게 하나님과 관련성이 없는 자들도 역시 믿음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신은 신대로, 나는 나대로 !!

물론 이 세상에서는 신 존재 자체를 극도로 부정하는 것을 두고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신이 있다는 것을 아무리 증명하려고 해도 그게 되지를 않는데, 동일한 논리로 신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증명하려고 해도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신을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 그만 학문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요령이 되고 말았는데, 즉 “너는 있어라. 나는 나의 할 일을 한다”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되면 믿음이 없는 것이 되는데, 왜 지난 시간에 했지요. 무엇이 믿음이라고 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했는데, 그러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장차 올 어떤 실상에 대해서 그 증거가 없다는 말이죠. 즉 실상이 되시는 그분이 마음속에 없다는 겁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런데 이 세상에서 옛적부터 내려오는 선현들의 가르침은, 그것은 바로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에 핵심이 있어요. 즉 짐승과 인간은 달라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만약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이 되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서 윤리와 도덕이 시작된다는 말이죠. 즉 어떤 의미에서 사람이 짐승과는 다른지, 거기에 대해서 지식층에서 대중들에게 굉장히 많이 가르쳤다는 겁니다. 또한 그것을 부모가 듣고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말이죠. 그러면 왜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짐승과 같은 요소가 이미 있다는 것인데, 즉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천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그냥 내버려두면 짐승인지 사람인지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식으로 억지로라도 통제를 하고 기준을 잡으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인격을 아무리 강조를 해도, 그것은 그 당시 그 조직에만 해당이 되는 것인데, 그러니 그런 훌륭한 인격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에 도달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기준은 어느 정도인가요? 3절에 보니 그 기준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실상이여, 나타나라 !!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다듬은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의 전부다” 라고 하는데, 그것 이외에 달리 없다는 겁니다. 정말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 얼굴을 내비쳐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그분을 쳐다보고 마음껏 믿어주겠다는 말이죠. 즉 “실상이여, 나타나라!” 라는 것인데, 그러면 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달리 이야기하는데, 즉 “보이지 않는 믿는 증거가 있어야 돼” 라고 말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일상행동 사이에는 그야말로 건널 수 없는 질곡과도 같은 것을 느낄 수밖에는 없는데, 성경에는 신자와 불신자를 커다란 벽으로 가운데 놓고 잘라버리는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와 부자의 경우인데, 부자가 사는 지옥과 거지가 사는 천국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이 놓여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한 번 정해진 구역은 제 아무리 노력해도 바꿔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고강도의 유격훈련을 받아도 전혀 건너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우리는 지옥에 간 자들의 절망뿐만 아니라, 천국에 간 자들의 변동되지 않는 신분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즉 천국에서 아무리 데모를 하고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지옥으로 가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개 취급을 받으면서 살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영원함이 아니라는 점에서 충분히 견디고 이길 수가 있었다는 말이죠. 잠시 잠간인데, 꿈처럼 깨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죽어서 서로 영원히 갈라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 살아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을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여기서 사도바울은 심판의 기준과 더불어서, 불신자와의 철저한 단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과연 누가 산 자인가?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각자 각자가 서로를 보고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나는 산 자이고, 너는 죽은 자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죽어야만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아예 살아 있으면서도 이미 신자가 불신자는 철저하게 구분이 되는데, 그 기준이 곧 십자가라는 말이죠. 즉 “너희가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가?” 라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에게 믿는다는 증거로 제공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불신자들은 왜 십자가라는 믿음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 십자가라는 것이 자기들이 보기에는 실상으로 나타난 것이 전혀 아닌데, 오히려 반대로 죽음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도저히 증거물로서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십자가는 나타난 것으로 알 수 없는 세계를,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증거물로서 주어진 희한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방금 제가 희한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없었을까요? 물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나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죽은 자’가 믿음으로 하는 이야기 !!

여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동생인 아벨이 자기 인생으로 보여준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죠. 여기 끝에 보면,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알기로는 죽은 자는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일단 살아있어야 무엇을 하더라도 할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아벨은 어떻습니까? 자기의 죽음으로, 즉 자기는 죽었지만 도리어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에 가치를 두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아있어야지 뭔가 일을 하더라도 한다는 겁니다. 죽은 것이 아닌 살아있다는 조건 아래에서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지금의 이 나타난 세계에서 통용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는 겁니다.

죽었다는 것은 이미 일을 다 끝냈다는 것인데, 즉 은퇴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죽은 자에게서 더 이상 무엇이 나오겠느냐는 말이죠.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산 자들의 세계인데, 산 자들끼리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겁니다. 죽은 자는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 죽은 자에게 무슨 기대를 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다 알다시피 십자가라는 것은 죽었다는 증거인데, 즉 어떤 인물이 매달려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죽었으니 다 끝났다. 내 손을 떠났다” 라는 쪽이 있을 것이고, 반면에 “이제 나는 달라졌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으심으로 이제 나에게 값없이 의롭다고 할 수 있는 효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쪽이 있더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제는 끝났다고 여기는, 그렇게 죽었다고 하는 그 십자가에서 이렇게 놀라운 능력이 나온다고 하는 것을, 그야말로 희한한 세계에서 보여주는 희한한 사실을, 바로 그것을 믿느냐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다는 말이죠. 즉 “십자가를 믿는가?” 라는 겁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

지금의 이 나타난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책임 아래에 있다고 여기는데, 즉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세계를 움직이고 유지하는 힘도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명석한 두뇌들이 여기에 동원되고 엄청난 자원도 투입이 되는데, 그렇게 해서 이 나타난 세계를 더 영원토록 유지시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이러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래야 먹고 살아가니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전부이고 또한 핵심이냐는 겁니다. 그런 식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능력한 자는 거지 나사로인데, 만약 자기가 일한 대로 거둔다고 하면, 거지 나사로는 지옥에 가더라도 제일 밑바닥에 가야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으니 말이죠.

그것은 예수님의 옆에 같이 달렸던 강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는 살인강도임에 분명한데, 그러니 십자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그가 이 세상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리가 만무한데, 남들에게 폐만 끼쳤다는 겁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어도 국가에 막대한 손해만 끼친다는 말이죠.

요즘 교도소에 가보면, 국가예산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밥도 먹어주어야 하고, 옷도 입혀주어야 하고, 잠도 재워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겨울에는 난방까지 해주고 말이죠. 그리고 공무원들을 동원해서 경호까지 해주어야 하는데, 그러니 사회에서 피해를 주고, 또 교도소에 가서도 피해를 주는데, 그러니 이런 자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바로 이런 생각, 즉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밀어붙이겠다고 하는 사고방식, 감히 이것을 누가 차단하는고 하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가 차단하고 나선다는 겁니다. 즉 “너희들이 지금 밀어붙이는 그 원칙은, 하나님이 인간을 감시하는 기준과 일치되지 않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말이죠. 인간들이 이렇게 힘을 내는 모든 것이 결국은 어디로 모아집니까? 그것이 하나님에게 대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모아진다는 것인데, 그것이 핵심을 찌르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인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여기에 가인과 아벨이 나오죠. 하나님께서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데, 그 기준을 감추어놓은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미리 심판의 기준을 적용시킨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누구인고 하니, 가인과 아벨이라는 형제인데, 그들에게 그 기준을 적용시켰다는 말이죠.

가인,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자’ !!

우리가 보기에는 가인이 성질도 더럽고 동생도 위할 줄을 모르는, 그야말로 자기밖에 모르는 나쁜 놈으로 보이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가인이란 이름의 뜻이 ‘얻었다’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태어났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자’ 라고 하면서, 그렇게 불려지면서 기어다녔고, 또한 걸어다녔다는 겁니다. 자기 출생 때부터 하나님이 관여한 사람인데, 되먹지 못한 게 아니라는 말이죠. 즉 가인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릴 줄 아는 자였다는 겁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어떻게 짓습니까? 첫째는 멋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이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 모세, 사무엘, 요한, 바울 등등,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다 나온다는 말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은 거의 사용하지를 않는데, 건방져 보인다고 해서 그런 지는 몰라도 말이죠. 그런데 다른 나라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흔한데, 여호수아도 같은 의미이고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한다는 겁니다.

이 가인은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째 아들인데, 그러니 얼마나 부모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겠습니까? “야야,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자식이다” 라고 하면서, 그야말로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났다는 말이죠. 첫 째를 낳아서 키워보신 분들은 그러한 느낌을 잘 알지 싶은데 말이죠. 그야말로 온갖 것을 다 해주면서 키우는데, 둘째나 셋째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한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런데 그 제사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라고 하는 인식, 즉 불신앙인데 말이죠. 그러한 인식으로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다고 가인을 믿었다는 겁니다.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믿음이 없이 할 수는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믿었던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믿음의 기준은?

제가 강의를 하면, 저를 공격하는 신학생들이나 목사님들의 생각이 무엇인고 하니, “믿는데 왜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절에 다니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믿음을 말한다는 것이죠. 즉 “저 사람은 절에 다니고, 나는 교회에 다니고, 그러니 내가 믿음이 있다” 라고 하는데, 즉 “내가 목사인데, 어떻게 믿음이 없겠노?”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사회적인 평가를 가지고 기준으로 삼는데, 그렇다고 하면 가인은 믿는 자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눈에 보이고 나타나는, 그러한 사회적 평가를 가지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을 보면서, 그 차이점을 통해서 “나는 어느 쪽인가?” 라는 것을 판정해야 하는데, 우리 눈이 보는 것으로 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벨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그러니까 믿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증거물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줄줄이 내려온 그 증거물과 일치가 된다고 하는 확정을 받으면 된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아벨이 믿는 것과 하나님이 믿어야 한다고 하는 것과 동일한 장소에서 만날 수 있으면, 그것은 진짜 믿음임에 틀림이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벨이 평소에 믿던 것과 하나님이 벌리신 일이 서로 일치가 된다면, 그렇다면 아벨은 믿는 자가 틀림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두고 오늘 본문 4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하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는데, 하지만 그 누구도 노아가 방주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두들 “미친놈아,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네. 완전히 광신도구만”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온갖 비난들을 했는데, 그런데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을 누가 동의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노아는 믿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신자 !!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조금만 더 공손하게 했으면 살려주었을 텐데, 너무 고집이 세었어. 우리가 반드시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잖아” 라고 했는데,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인정을 해주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신자, 즉 믿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나타난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자기가 현재 믿고 있는 것이 그 말씀과 일치가 되는지, 그게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벨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아벨은 어떤 제사를 드렸기에, 어떤 예물을 드렸기에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인정을 받고, 그 예물에 대해서 증거함을 받았느냐는 말이죠. 그 점에 대해서 마태복음 23장 35절을 보겠습니다.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벨, 사가랴, 예수님 !!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서 피를 흘리고 죽었는데, 그리고 바라갸의 아들인 사가랴도 피를 흘리고 죽었다는 겁니다. 또한 예수님도 피를 흘리고 죽었고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이 땅에서 의로운 피를 흘렸다고 하는, 그런 동일한 범주 내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아벨이 드린 제사가 어떤 역할을 했는고 하니까, 기존의 인간들이 드린 모든 제사, 인간들이 조립해서 만든 모든 종교, 거기에 대해서 아벨이 드린 제사는 반대위치에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벨은 그런 자들로부터 그만 순교를 당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생각에는, 제사를 드릴 때 이쪽은 이쪽에서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저쪽은 저쪽에서 제사를 드리면 된다는 말이죠. 마치 미장원에서 가서 자기는 이쪽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하고, 다른 사람은 저쪽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하듯이,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는데, 자기는 머리가 잘 나오고 저쪽은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고 하면, 그러면 저쪽이 그냥 곱게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머리가 잘 나온 자기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마구 흔들면서 쥐어뜯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반응을 보인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라고 하면, 물론 미장원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만든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하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물론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해도, 그것은 자기 마음이고,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되었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그 당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데, 그게 일회성이 아닌데, 오늘날도 그때와 똑같다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역겨웠던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역시 역겨운데, 반드시 이 세상은 그렇게 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지금 나타난 것을 보면, 종교라는 것이 서로서로를 인정해주고 화합하면서 좋게 잘 지내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종교를 인정해줄 때나 하는 이야기이고, “모든 종교는 다 엉터리이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이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상대방은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는데, 그것은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역대하 24장을 보겠는데, 17절에서 22절입니다.

(대하 24: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대하 24:18)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대하 24:19)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대하 24:20)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대하 24:21)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대하 24: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요시아 왕 때에 ‘여호야다’ 라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래도 괜찮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니 왕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데, 그러자 그 제사장의 아들 ‘스가랴’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왕이여,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왕이 그만 신하들에게, 그를 죽여버리라고 한다는 말이죠.

바로 이것인데, 저쪽에서 참지 못하는 요소가 이 믿음 안에는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스가랴 선지자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인 비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존 인간 세계가 얼마나 악한 세계인지를 들추어내는 죽음이란 겁니다. 그러니 이 스가랴도 죽음으로 진리를 말하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세계가 이 지상에서 일을 할 때는 늘 이런 식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아벨의 죽음도 마찬가지이고,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나타난 이 세상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이런 죽음이 무슨 뜻인지를 전혀 모르는데, 특히 아벨의 죽음과 같은 경우에는, 가인이라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의식을 통렬하게 심판하는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사도행전 17장 22절에서 31절을 보겠습니다.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를 하는데, 무엇이라고 합니까? 22절에 보면,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라고 하는데, 종교성이 많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신의 권위를 인정해준다는 것인데, 즉 자기들은 신의 소생이고 신의 자녀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신의 자녀로서 정성과 성의를 다하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증거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저 나타난 세계에 관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방세계에 한해서 그동안 묵인해주셨다는 겁니다. 30절에 나오듯이 “허물치 아니하셨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종교성이지 신앙은 아니라는 말이죠.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는데, 31절에 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과 그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심판의 증거물이 떨어졌는데, 그러니 회개치 아니하는 자는 다 멸망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종교성이 많아도 모두 지옥행이라는 말이죠. 그 지옥은 어떻다고 했습니까? 한 번 들어가면 전혀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않는 세계가 제공하는 심판의 기준인데, 그러니 종교성에서 나온 가인의 제사는, 그것은 일종의 추수감사절과도 같은 것인데, 그런 것은 믿음도 아니고 증거도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 나타난 것으로 신을 파악하고, 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도 가인의 제사에 머물러있다는 겁니다.

풍성한 곡식으로 신께 바치는 제사는 인간이면 누구나 드릴 수 있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신앙이 있다는 표시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이 믿는 것과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일치되는 것인데,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말이죠.

하나님이 증거한 아벨의 예물 !!

오늘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은 그 예물에 대해서 증거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기서 아벨의 예물이 가인의 예물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과연 아벨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어떤 식으로 증거했을까요? 아벨의 예물은 아벨 자신의 운명과 같이 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벨의 예물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것이 그 안에 담겨있다는 말이죠.

아벨은 직업이 양을 치는 자라서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까지는 가인과 차이가 없는데,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라서 거기에 걸맞는 예물을 드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다음부터 전혀 달라요. 아벨은 양 몸체에서 기름 부위를 따로 떼서 내었는데, 그렇게 분리를 했다는 겁니다.

물론 아벨이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그렇게 따로 기름부위를 부각시킨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아벨은 자신이 드리는 예물을 통해서 장차 오실 특별한 메시야를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벨은 양을 잡아도 그런 식으로 기름을 따로 분리해서 잡았다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다는 말이죠.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여기서 히브리서 1장 9절을 보겠습니다.

(히 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기름’ 이라는 의미는?

여기서 ‘기름’ 이란 것은, 다른 인간들보다 특별히 우위에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함인데, 즉 아벨은 제사를 드리는 그 제물전체를 기름부음에 예속되는 식으로 표현을 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아벨의 제물의 인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고, 그것이 믿음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벨이 기름을 따로 분리해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마음인데, 즉 “하나님, 지금 제가 양을 바치는 것은 양이 아닌, 장차 오실 기름부음을 받는 자의 의미로서 바칩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기름부위를 따로 떼서 바쳤다는 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부각시켰다는 말이죠. 그러니 먼저 기름부위가 있고, 그 다음에 양의 몸이 있고, 그 다음에 아벨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름에 복속이 된다는 말이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일 때뿐인데, 그러니 가인이 대표적으로 보여준 종교성은 결코 믿음도 신앙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그냥 자기 것을 드린 것인데, 즉 “이것은 제 것이니 제 것을 받으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아벨 사이에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

그러니 그것은 신앙인 것처럼 보일 뿐인데, 조금 전에 그것을 추수감사절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하지만 아벨은 그런 식으로 자기 것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중간에 ‘기름’ 이라는 것을 삽입시키죠.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름을 받으심으로서, 그것이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시는 제사가 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과 아벨 사이에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중재가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벨은 그 기름부음을 받는 자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보는 것과 일치가 될 경우인데,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말이죠. 즉 “니가 그리스도만 바라보나? 나도 그리스도만 바라본다. 그러니 나와 같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하면 노아도 방주를 만들 필요가 없었는데,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모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갓바위에 가서 일년에 한 번식 바치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이게 저의 것입니다. 받으소서”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나타난 너의 것은 받지 않는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가인의 제사에는 자기 것밖에 없었는데, 하지만 아벨의 제사 속에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담겨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희미했지만 말이죠.

그래서 아벨은 예물과 같은 운명의 길을 !!

그런데 아벨은 그 드린 제사로 인해서 예물과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되는데, 그래서 그 착한 형인 가인이 그만 화가 나서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아벨은 끝입니까? 그게 아니라, 그의 죽음이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데, 이 세상의 모든 종교로부터 거부를 당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벨의 피와 사가랴의 피와 예수님의 피가 한 영역 속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도 예수님의 시대와 다를 바가 없고, 사가랴의 시대와 다를 바가 없고, 아벨의 시대와도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죠. 각자가 자신의 종교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데, 거기에 가서 “인간의 경건함과 종교적 열심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아무리 성격이 좋아 보이던 자들도 화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신이 하늘에 있고, 우리 인간들이 그 신에게 정성을 다하여 경배하고 찬양하는 이 모습들을 봐라. 이게 무엇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 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나타난 것으로 사는 자들인데, 그러니 보이지 않는 세계의 유일한 증거인 십자가만은 결단코 인정하고 싶지 않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런 것들이 나타난 것에 매이기 쉬운 인간의 행위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마지막 때는 결코 묵인해주지 않는데, 반드시 심판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데,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갈 곳은 오직 지옥뿐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종교라는 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익히 다들 알고 있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부수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직 그 피만이 증거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28 오후 9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