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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11:1-3) 믿음과 말씀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1:1-3) 믿음과 말씀

정인순 2010. 9. 5. 11:18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36강-히11장,1-3(믿음과,말씀)-heb020310.mp3

 

 

이근호

 

믿음과 말씀

 

2002년 3월 10일 36강

 

본문 말씀 : 히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펼쳐 보고 있는 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보고 그 내용을 전부 믿으라고 주신 책입니다. 우리가 따져서 믿음을 가질 만한 것을 제공하신 것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 인간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 하기 위한 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상의 책들은 사람들의 머리와 손에서 나왔기에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납득이 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런 노력과 사정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성경을 들이대면서 믿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자기 노력과 자기 지혜를 이미 믿고 있는 자들에게 도저히 못믿게 되는 내용을 담아서 말입니다.

 

성경을 대하면서 우리는 이 성경을 볼 이유도 없고, 성경을 볼 자격도 아니되고, 성경을 알았다고해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요 어디 써먹을 수도 없고, 가정이 화목하고 사업이 번창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깥 인간 세계에서 연구하고 노력하는 모든 것은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다 쓸 데가 충분히 있는 알찬 내용들입니다. 이것 하나 연구해서 인간의 수명을 늘리고 재산을 많아지게 하고 물자를 더욱 더 풍성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무슨 노력을 해도 이것과 상관있는 것에는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뿐 만 아니라 이러한 노력 안에는 '종교'라는 분야도 들어 있습니다. 노력 하에 따라 천국마저 자신이 사는 세계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죽음 뒤에도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성경 이외도 수많은 경전들이 있습니다. 각 경전마다 이구동성으로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이것을 믿어야 돼"라고 말입니다.

 

요즈음 시대를 과학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주변의 상황과 이치를 잘 알아서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의 종교는 요즈음 과학 시대에 와서는 모두 미신이 되고 만 겁니다. 조물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빌고, 이사 갈 때도 날 잡아서 가야되고, 점치고. 사주팔자보고 하는 행위들이 요즈음에 와서는 주류에서 밀리고 말았습니다.

 

장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과학이 월등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이지 않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낙후되거나 못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짓거리라고 여깁니다. 옛날에는 꿈을 꾸면서도 그것으로 하루 일을 미리 예상해 보려고 했는데 지금에 와서 꿈이라는 것은, 압축된 자신의 욕망으로 해석해 버리니 꿈은 개꿈으로 끝나는 겁니다.

 

신이라는 것도, 사람이 한 지점을 향하여 정신 집중에서 보게 되면 자아를 능가하는 초월적 존재를 느낄 수 있고 이것이 마치 신인 것처럼 짐작할 수도 있는 겁니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도 자기 처지와 행동을 변명하기 위한 대안들입니다. 여유만만하니 윤리 도덕을 찾지, 아쉬운 것이 많고 생존이 어려운 질 때면 윤리, 도덕은 날라가 버립니다. 배고품이 찾아오면 체면이고 위신은 뒷전입니다. 남의 가정 흉보고 남의 사정 흉보지만 본인에게 그런 상황이 닥쳐오면 어떤 치졸한 짓을 할지 아무도 장담 못하는 겁니다.

 

이러한 잠재성이 누구에게는 다 있는 겁니다. 다급한 형편에서는 윤리 도덕을 논할 입장이 못되는 겁니다. 노숙자들 집단에서 발 안 씻는다고 지적한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은 내가 나를 어떻게 건져낼 것인가와 연관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적 욕구입니다. 교회와도, "내가 무슨 행동을 하게 되면 나에게 더 도움되는 효력를 얻을 수 있을까?"하는 점을 노리고 오게 됩니다.

 

이 모든 노력은 사람이 뭔가 미흡함을 느끼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사람들이 아쉬운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중에 죽는 문제까지 남아 있기에 이것도 자기 선에서 미리 해결해 놓자는 의도에서 종교를 가집니다.

 

이런 것들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구체화 시켜 놓은 겁니다. 희망 사항을 보여준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점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어떤 때 낙심하고 주저앉는지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이 난관을 자기 힘으로 극복해 보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모습 전부가 바로 '불신앙'입니다. 그러면 신앙은 무엇입니까? 성경 내용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애쓰겠습니까. 노력한다는 것은, 미흡하다, 확실치 않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에 반대해서 믿음이란, 확정 되었음, 결정 났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 된 것을 그대로 마시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미흡함을 자신의 노력으로 채우려고 할 이유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가 좋은 대학 들어가야 하는 것이 성경에 어디에 나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란, 떼쓰면서 매달리는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해 놓고서, "신이시여. 제가 믿나이다. 내 자식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하옵소서"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란, 그 내용으로 결정짓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에서 나온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무리 떼를 쓰고 애를 써도 소용없습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것을 믿느냐, 아니면 미확정적인 인간의 것을 믿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종교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돌을 들면 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아이디어가 성경에 어디에 나옵니까? 안니오지요.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말씀이 누가 만든 말씀입니까? 하나님과 사람과 탁자 앞에 두고 이마를 맞대며 궁리한 것이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끼어들 자격이라도 갖고 있습니까? 끼어들지도 못하고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주제 파악을 못하고 현실감도 떨어진채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을 이 세상에 남길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면 마치 이런 것을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도 들어 있습니다. 로마서 1:28에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보고 우리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누구입니까?" "너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의 소유자이다"라고 확정적으로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사람이 거울을 보면서 자기가 못 나 보인다고 거울을 바꾸거나 거울 탓으로 돌린다면 참으로 이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애꿎은 거울보고 따집니까?

 

성경이 말씀하기를, "너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하면,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래 옳습니다. 저는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니 거기에서 신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고, 헌금을 한들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애초부터 자신의 욕망의 산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물론 공부를 꽤 하신 분들은, 인간들끼리 서로 돕는 것이 결국 자기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니 너무 개인적인 자기 이익만 챙기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잖습니까? 자기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넓게 열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넓게 열어놓은 그 마음이 신앙입니까? 남들 보기에는 도사요 신선이요 자비가 넘치는 위인으로 보일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 즉 "네 마음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간, 쓸개 다 떼어준다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신앙으로 간주해서 천국 보내줍니까?

 

성경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왜 인간들은, 이웃 사랑과 효도와 협력과 노력과 지혜로도 구원될 수 없는 죄인인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세계를 모르고 자기 주제 파악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를 들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네가 믿느냐?"라고 나오면, "못 믿겠습니다. 나는 그 이론을 거부합니다"라고 나오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만약 모든 세계가 말씀으로 지었다는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버리면 지금 내가 애쓰고 노력하고 살려고 몸부림치고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사람들은 이점을 겁을 내고 있는 겁니다.

 

만약 확정된 것을 그냥 믿어버리면 내면, 남에게 성공한 사람들으로 내 비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다는 점을 사람들은 매우 싫어하고 있습니다. 교회 부흥을 기도하는 것도 모두 욕심에서 나온 겁니다. 숫자 적은 교회 교인들은 지옥가고 숫자 많은 교회 교인들은 천국 간다고 성경 어디에 나오던가요? 믿음은 없는 허전함을 자기 노력의 대가로 충당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9:28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시겠다는 사실은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우리가 창안한 겁니까? 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는 계획은 우리 중에 누가 짜낸 것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사실입니다. 변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정된 난 사항을 하나님은 우리보고 믿으라고 들이 밀고 있습니다. 정말 믿는 자는 이런 말씀에 대해서 껄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됩니다. 오히려 크게 반겨야 합니다.

 

환호성을 질러야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다!"고 소리치면서 말입니다. 그동안 살면서 남 뒤꽁무니 따라 다니며, 그토록 피곤에 절인 세월을 원망하면서 말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크게 변화되니 베드로가 좋아서 자기 쪽에서 신에게 무엇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다릅니다. "너희는 저의 말만 들으라"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확정적인 말씀입니까! 이게 다입니다. 정말 믿는 자라면 예수님의 말만 믿는 것으로 기뻐서 춤을 추어야 합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이 눈 사태처럼 밀려 옵니다. "바로 이거야 이거. 내가 그동안 꿈 같은 세상 헛발질 했구나"라고 후회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꿈 속에서 아무리 상대방에서 주먹을 날려 봐야 실제로는 그 사람은 멀쩡합니다. 인생이란 이미 말씀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 속에서 살면서 온갖 헛발질을 다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 만약에 "남들이 차 바꿀 때는 당신도 차 바꾸시기 바랍니다"라는 대목이 나오면 그대로 살면 되지요. 그러나 성경에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된 인간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오셔서 말씀 성취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성취가 자신만 구원받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이사야 53:4-5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다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분의 공로로 우리가 나음을 입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인간도 이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이룬 자가 없습니다. 남을 구원해 내는 능력은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없습니다. 예수님 차원에서의 말씀 순종이란, 자기 가정 잘되고, 자기 사업 복 받고, 자기 자식 좋은 대학 가고, 교회 부흥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상관없을 세상을 우리에게 안겨주시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병들어 죽든, 말라 죽든, 배고파 죽든 간에 상관없는 새 세상을 만들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보고 말합니다. "이것을 믿느냐?"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버티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한 것을 가지고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일에 바쁠 때는 범죄하고 싶어서 신경 쓸 여력이 없이 범죄 안하다가 휴가 가서는 범죄합니다. 별 할 일이 따로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것에 대해서 문제삼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그저 야심하나 큰 것만 쥐고 사는 인간을 공격합니다. 큰 놈이기 때문에 큰 홍수를 얻은 맞은 것입니다. 모두들 큰 것 못 가져서 한이 맺혀 있으니 모두들 정신 병자들 같습니다. 정말 믿는 자라면 평안함입니다. 내가 만들어 가는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신 천국에 그냥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회개하라고 준 것입니다. 따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왜 죽었습니까? 이런 큰 야심 때문에 죽었습니다. 교회 욕심, 가정 축복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원하는 바는 오로지 회개 뿐입니다. 예수님의 귀한 생명을 내어놓았습니다. 우리의 넝마같은 목숨이 아닙니다. 참으로 귀한 생명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 점을 기준으로 삼아 늘 회개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십자가 같이 진 강도가 그런 자였습니다. 비록 강도였지만 그 날로 그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모델입니다.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보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마음 속의 신앙이 그 세계의 증거요 실상입니다. 기도해서 얻었다는 아파트나 기도 해서 나았다는 암치료가 증거가 아니라 그냥 그 말씀의 세계를 믿는 믿음이 그 증거요 실상입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얻을 것만 생각하는 이 거짓된 신앙을 버리고 늘 회개하는 심령으로 이미 확정된 약속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6. 믿음과 말씀(히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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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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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대는 성경 !!

우리가 지금 펼쳐보고 있는 이 성경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내용을 전부 다 믿으라고 주신 책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연구하고 분석해서 알아채는, 그렇게 해서는 믿을 만한 내용은 전혀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 인간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하기 위한 책이라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이 세상의 책들은 사람들의 머리와 손에서 다 나왔기에, 즉 저자도 사람이고, 또한 독자도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의식해서 만든 것이기에, 그러니 자기의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충분히 납득이 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 내용이 제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결국은 다 뚫리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런 노력과 사정을 알고 있기에, 그래서 의도적으로 성경을 들이대면서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자기 노력과 자기 지혜를 이미 믿고 있는 자들에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을 담아서 말이죠. 즉 “너희들이 애쓰지만, 그게 곧 불신앙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인간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알아낸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있는 게 성경이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말씀을 대할 때는, “나는 이 성경을 알 이유도 없고, 알 자격도 안 되는구나” 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을 알았다고 해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가정이 화목해지고 사업이 번창해지지도 않고 말이죠. 오히려 그렇게 하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를 깡그리 다 차버린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세계에서 사람들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모든 것은 목적이 분명히 있는데, 충분히 쓸데가 있는 알찬 내용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열심히 연구해서 인간의 수명을 늘리고, 재산도 늘어나게 해서, 더욱 더 풍성한 삶을 살도록 도와준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무슨 노력을 해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에는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뿐만이 아니라, 이런 노력 안에는 ‘종교’ 라는 분야도 들어있는데, 즉 노력여하에 따라서 천국마저도 자신이 사는 세계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즉 죽음 뒤에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조치를 하겠다는 말이죠. 성경 이외도 수많은 경전들이 있는데, 각 경전들마다 이구동성으로 요구하는 것이 있어요. 즉 “무조건 이것을 믿어야 돼!” 라고 한다는 것이죠.

요즈음은 과학시대 !!

요즈음 시대를 과학시대라고 하는데, 이 과학이라는 것은 주변의 상황과 이치를 잘 알아서 그것으로 자기를 구원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의 종교는 과학시대에 와서는 그만 모두가 미신이 되고 말았는데, 하지만 그 당시에는 미신이 아닌 나름대로의 과학이었다는 말이죠. 조물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빌고, 그래서 이사를 갈 때도 날을 잡아서 가야되고, 또한 점도 치고, 사주팔자도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들이 요즘에 와서는 주류에서 밀리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장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인간의 머리로 만들어낸 과학이 월등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까 과학적이지 않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낙후되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거리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이상한 꿈을 꾸어도, 그것으로 하루 일을 미리 예상해보려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꿈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압축된 자신의 욕망으로 해석을 해버리니, 꿈은 그냥 개꿈으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제는 신이라는 것도, 사람이 한 지점을 향하여 정신을 집중해서 보게 되면, 자아를 능가하는 초월적 존재를 느낄 수 있고, 그것을 마치 신인 것처럼 여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즉 정신을 집중하면 신을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말이죠.

윤리와 도덕은, 어설프기가 짝이 없어 !!

그리고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도, 그것은 옛날부터 어설프기가 짝이 없었는데, 자기의 처지와 행동을 변명하기 위한 대안들이라는 겁니다. 여유가 있으니 윤리나 도덕을 찾지, 살아가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지면 윤리와 도덕은 그만 날아가 버리는데, 그렇게 되면 체면과 위신은 뒷전이라는 겁니다.

우선 살고 봐야한다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윤리와 도덕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3일 이상을 굶으면 얼마든지 남의 빵집에 가서 빵을 훔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자기 행동에 대해서 변명을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남의 가정이나 남의 일에 대해서 쉽게 흉을 보는 경향이 있는데, 하지만 막상 자기에게 그런 상황이 닥쳐오면 자기도 어떤 치졸한 짓을 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잠재성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데, 다급한 형편에서는 윤리와 도덕을 논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노숙자들의 집단에서 발을 씻지 않는다고 지적한다는 것이 우스운 것과 같다는 말이죠.

내가 나를 어떻게 건져낼 것인가?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내가 나를 어떻게 건져낼 것인가?” 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종교적 욕구인데, 그래서 교회에 와도, “내가 무슨 행동을 하게 되면 나에게 더 도움이 되고, 효력을 더 얻을 수 있을까?” 라는 점을 노리고 오게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람이 뭔가 미흡함을 느끼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데, 그래서 자기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고 여기면 열심히 교회에 다니다가, 그게 해결이 되면 등한시하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결국에는 죽는 문제가 남아있기에, 그런 종교적인 것을 놓치지는 않고 가지고 가게 되는데, 그런 것들이 지금의 이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은 전혀 믿음이 아닌데, 그냥 자기가 원하는 바를 구체화시켜 놓은 것이죠. 즉 희망사항을 보여주는 겁니다. 즉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점을 다 알고 계시는데, 인간들이 어떤 때 낙심을 하고 주저앉는지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난관을 자기 힘으로 극복해 보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아신다는 겁니다.

믿음은, 확정되고 결정이 났음을 !!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이런 모습의 전부가 ‘불신앙’ 이라고 보시는데, 그렇다면 신앙은 무엇입니까? 인간들의 그런 바람이나 행함이 아니라, 성경내용을 믿느냐는 것인데, 믿으면 그게 곧 신앙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애쓰고 노력한다는 것은 전혀 신앙이 아닌데,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애쓰고 노력한다는 것은, 미흡하고 확실치 않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해서 믿음이란 것은, 확정되었고 결정이 났음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즉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것을 그대로 홀딱 마시는 것인데, 따라서 미흡함을 자신의 노력으로 채우려고 할 이유가 그만 사라져 버리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곧 ‘믿는 자’ 라는 말이죠.

자기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성경에 어디에 나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떼쓰며 매달리는 것을 믿음이라고 자기가 일방적으로 규정해놓고, “신이시여, 제가 믿나이다. 제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면서 우기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믿음은 그 내용으로 결정을 짓는 것인데,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을 믿는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떼를 쓰고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 신념인데,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달리 말씀을 드려서,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을 믿는지, 그 내용이 중요한데, 즉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것을 믿느냐? 아니면 미확정적인 인간의 것을 믿느냐?” 라는 것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긴다고 하면,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구인사를 아십니까?

오늘날 우리는 종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기독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불교의 경우에도, 저기 단양의 ‘구인사’ 라는 절에 가게 되면, 방언도 이야기하고 병 고치는 은사도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이 구인사는 이 두 가지의 주특기를 가진 절인데, 전국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모여든다는 말이죠. 여기 영천에도 비슷한 절이 있는데 말이죠.

우리는 종교를 너무나 모르기에 기독교만 그런 것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신념이 얼마나 대한한지 모르는데, 즉 “내가 이 돌을 들지 못한다” 라고 하면 실제로 들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돌을 들려고 난리를 피우는데, 하지만 “돌을 들면 내 소원이 이루어진다” 라는 아이디어가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라고 합니다. 방금 믿음은 내용으로 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말씀은 누가 만든 말씀입니까? 하나님과 인간이 탁자 앞에 앉아서 이마를 맞대며 궁리한 것입니까?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세상을 만들 때 우리의 의견이 조금이라도 반영된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끼어들 자격이라도 됩니까? 전혀 끼어 들지도 못하고 되어버린 이 세상,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제도 파악하지를 못하고 현실감도 떨어진 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을 이 세상에 남기려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앙인데, 그런데 교회에 가면 이런 것을 가지고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죠.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교회에서 어떻게 했는고 하니,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도 모두가 다들 불신앙이니, 그만 이것을 신앙으로 가르치자고, 인간들끼리 그렇게 결정을 내려버렸다는 겁니다.

이러한 거대한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도 있는데, 로마서 1장 28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말씀을 보고 우리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한다는 겁니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너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의 소유자다 !!

성경은 “하나님, 저는 누구입니까?” 라고 하면, “너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의 소유자다” 라고 이미 규정을 해놓았다는 겁니다. 왜 사람이 거울을 보면서, 자기가 못생겨 보인다고 해서 거울을 바꾸거나 거울 탓으로 돌린다고 하면, 그것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애꿎은 거울에게 왜 화풀이를 하고 따지느냐는 말이죠.

성경이 말씀하기를 “너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라고 하면, 이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래, 옳습니다. 저는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신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고, 헌금을 한들,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그런 것은 애초부터 자기 욕망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공부를 좀 하신 분들은, “인간들끼리 서로 돕는 것은, 즉 이웃을 돌보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니, 너무 개인적인 자기 이익만 챙기지 마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사람들에게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난한 부모를 만나든지 하면 형편상 그렇게 공부를 할 수가 없는데, 머리가 따라주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사회에 나가게 되면, 결국 생각하는 것이 자기 밖에 모르는데, 그래서 장사를 하면서도 손님을 속여 가면서 물건을 판다는 겁니다. 중국산의 국내산으로 파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야만 이윤이 많이 남는다는 말이죠. 심지어 자기 회사 기밀을 훔쳐다가 팔기도 하고 말이죠.

물론 여기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이익만 생각합니까? 정말이지 너무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다그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자기 이익만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넓게 열었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그러면 그렇게 넓게 열어놓은 그 마음이 과연 신앙입니까?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도사요, 선비요, 자비가 넘치는 위인으로 보일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즉 “네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설령 자기의 간과 쓸개를 다 떼어준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신앙으로 간주해서 천국에 보내줍니까? 과연 그런 것인가요?

너 지신을 알라 !!

성경의 내용은 이것인데, 왜 우리 인간들은 이웃사랑과 부모효도와 서로협동과 노력과 지혜로도 구원될 수 없는 죄인인지,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불교는 그렇게 하면 극락에 간다고 하는데, 하지만 성경은 어림도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곧 인간들이 제대로 된 현실, 즉 하나님의 세계를 모르고 있기 때문인데, 달리 말해서 자기의 주제파악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의 예를 들면, 3절에 나오듯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네가 믿느냐?” 라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믿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이론에 대해서 거부합니다”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만약에 모든 세계가 말씀으로 지었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버리면, 지금 자기가 애쓰고 몸부림치면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그만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죠. 만약 확정된 것을 그냥 믿어버리면, 자기가 남들에게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했던 그 모든 노력들이 허사가 되고 마는데, 그러니 그것을 인간들은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부흥을 기도하는 것도 사실은 모두 자기 욕심에서 나온 것인데, 숫자가 적은 교회의 교인들은 지옥에 가고, 숫자가 많은 교회 교인들은 천국에 간다는 것이 성경말씀에 나오던가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그 허전함을 자기 노력의 대가로서 충당시키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내가 이렇게 기도를 했더니만, 응답을 받았다”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다 알아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작인 신을 만들어서 호주머니에 넣어서 다니려고 한다는 겁니다. 마치 신용카드처럼 말이죠. 즉 자기가 필요할 때 사용하겠다는 것이죠.

하지만 히브리서 9장 28을 보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라고 하는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시겠다는 것이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우리가 창안한 것입니까? 그리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 라는 계획도 우리 중에서 누가 짜낸 것입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미 확정된 사실이기에 !!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사실이라는 말이죠. 변동이 있을 수가 없는데, 이미 결정된 난 사항을 하나님은 우리보고 믿으라고 들이밀고 있다는 겁니다. 정말로 믿는 자라고 하면, 이런 말씀에 대해서 껄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좋아서 환호성을 질러야 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동안 살면서 남들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닌다고 피곤에 찌든 인생을 살았는데, 남들이 차를 바꾸면 자기도 바꾸어야 하고, 또 남들이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자기도 따라서 이사를 가면서 말이죠. 비록 다리가 찢어져도 그렇게 따라했어야 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크게 변화하니 베드로가 너무 좋아서 자기 쪽에서 하나님에게 뭔가 바치려고 했는데, 자기의 행위를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르다는 말이죠.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얼마나 확정적인 말씀이냐는 겁니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여러분, 이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믿는 자라면 예수님의 말만 믿는 것으로 기뻐서 춤을 마구 추어야 하는데,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이 눈사태처럼 밀려온다는 겁니다. “아하, 바로 이것이야. 내가 그동안 꿈 같은 세상에서 헛발질을 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행복의 눈사태 !!

우리가 꿈속에서 아무리 상대방에서 주먹을 날려봐야 어떻습니까? 실제로는 그 사람은 너무나 멀쩡하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인생이란 그렇게 이미 말씀으로 확정되어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속에서 살면서 그렇게 온갖 헛발질을 다 해대고 있다는 말이죠. 성공과 실패에서 자기 스스로 판단을 내리면서, 그래서 심지어는 가족과 동반자살을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성경에 “남들이 차를 바꿀 때는 당신도 차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라는 대목이 나오면 그대로 하면서 살면 되는데, 그러면 현대자동차 사장은 엄청 좋아하겠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는 말이죠. 옆에 있는 교회에서 교육관을 지으면서 자기들도 덩달아서 짓고, 그러니 인간들이 만든 종교는 얼마나 사기성이 농후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 기도를 얼마나 하면 됩니까?” 라고 하면, 목사는 “예, 일주일만 금식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면서 처방을 내려주는데, 교인들이 그런 목사를 원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원해서 교회에 나왔고, 그래서 당연히 그런 요구를 들어줄 목사를 교회에 데려다 놓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된 인간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인데,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신병자라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오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즉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오셔서 말씀성취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성취가 자기 자신만 구원받기 위함입니까? 자기만 말씀을 지키고, 자기만 천당에 가면 되는 겁니까? 과연 그런 것인가요?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

정말 볼 때마다 우리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말씀인데, 바로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셨다는 말이죠. 그분의 공로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는데,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을 이룰 수 없다는 겁니다. 남을 구원해내는 능력, 그것은 그 누구도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공자나 부처가 과연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순종이 이 땅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는데, 그게 자기 가정이 잘되고, 자기 사업이 복을 받고, 자기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고, 그리고 교회가 부흥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말씀성취가 아닌데, 그러면 무엇입니까? 죽어도 전혀 상관이 없는 세상을 우리에게 안겨주시는데 있다는 말이죠.

새 세상을 만들자 !!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이것인데, 우리가 이 땅에서 병이 들어서 죽든, 배가 고파 죽든 간에 상관없이, 죽어도 괜찮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의논해서 나온 아이디어인데,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것을 믿느냐?” 라고 말이죠.

그러니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기쁨으로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그것을 폭력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 즉 “예수, 당신만 잘났나? 정말 그래? 부처도 있고 공자도 있단 말이야. 그리고 나도 착해질 수 있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것이 일종의 버티기인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정작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한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죄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평소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그냥 있다가, 여름철에 휴가를 가서는 그만 사고를 치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별로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가 아니라, 교만한 것에 대해서는 시비를 거는데, 즉 회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자기 주제도 모르고, 그저 야심하나 크게 해서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는데, 아니 크다고 해서 좋은 것인가요? 큰 집, 큰 회사, 큰 교회, 물론 큰 머리는 환영을 받지 못하는데 말이죠(ㅋㅋ).

오히려 노아 홍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큰놈이기 때문에 큰 홍수를 얻어맞았다는 겁니다. 그 당시에 네피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커다란 거인족속이었다는 말이죠. 그들이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모두가 그렇게 큰 것을 가지지 못해서 한이 맺혀 있는데, 그러니 모두가 다들 정신병자들과 같다는 말이죠.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에 가서 뭐라고 합니까? 소주 한 병에 오징어 한 마리를 들고 가서는, “아버지, 이제 아들이 왔습니다. 성공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아들의 모습도 보지 못하고, 왜 벌써 돌아가셨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 기준이 아버지가 아니고 자기 마누라라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목사인가? 지옥행 전세버스 기사인가?

그렇게 자기 기분에 자기가 도취되어서 살아가면서, 그것을 이루지 못해서 한이 맺혀서 어디를 찾아오는고 하니, 교회로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가 뭐라고 합니까?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 뭐라고 합니까? “믿으세요. 믿으면 반드시 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지옥에 갈 사람들을 더욱 더 지옥으로 보낸다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는 지옥행 전세버스 기사라는 말이죠.

하지만 정말 믿는 자라고 하면 평안함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만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냥 주신 천국에 가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성경말씀은 회개하라고 준 것이지, 무엇을 따지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인간들의 큰 야심 때문에, 그리고 교회욕심, 가정축복, 그런 것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셔야만 했다는 말이죠.

기도는, 회개의 기도뿐 !!

바로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오직 회개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 귀한 생명을 내어놓으셨는데, 우리의 넝마와 같은 목숨이 아니라, 참으로 귀한 생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는 이런 점을 기준으로 삼아서, 늘 회개하는 기도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기도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이러한 회개가 곧 주기도문의 핵심인데,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겁니다. 교회에 가면 믿음이 있는 척을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또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죄를 용서해달라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러니 회개하라고 성경말씀을 주셨는데, 우리의 야심은 거기에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죽었습니까? 바로 그러한 우리의 인간의 야심 때문에, 그런 욕심 때문에, 사업욕심, 자식욕심, 교회욕심 등등, 그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말이죠.

그는 비록 강도였지만 !!

하지만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어떠했습니까? 그가 비록 흉악한 강도였지만, 그 날로 그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서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더 이상 우리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욕심으로 교회에 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사기꾼들이 하는 짓인데, 예수님의 말씀성취는 자기 생명까지도 내어놓았는데, 그러면 우리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의 생명은 전혀 귀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주님이 쓰시고자 하면 봉사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해야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참된 행복을 주님으로부터 믿음과 더불어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것을 아무리 질투하고 시기를 한다고 해도, 그래서 고난을 받고 자기 목숨까지 빼앗기는 일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확정된 것을 믿음으로 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아하, 그게 믿음이구나 !!

이제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보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이 그 세계의 증거이고 실상이라는 겁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얻었다고 하는 아파트나, 또 열심히 기도해서 나았다고 하는 암이 증거가 아니고, 그런 것이 실상이 아니라, 그런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즉 말씀의 세계를 믿는 믿음이 바로 그 증거이고 실상이란 말이죠.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을 살아가면서 탐나는 것들이 왜 그리 많은지, 그야말로 두리번거리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말씀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그 예수님에게 흠뻑 빠져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28 오전 2시에 마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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