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0:32-39) 고난과 신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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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고난과 신앙
2002년 3월 3일 35강
본문 말씀 : 히 10:32-39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오늘 본문을 대충보게 되면 구원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교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자기 교회나 자기 영역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하나님의 제시한 약속에 대한 집착입니다. 때로는 이러한 집착이 남들보기에 대단히 훌륭한 신앙처럼 간주되곤 합니다. 성격상 교회에 열심을 내는 사람은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신나겠지요. "야, 이거 오늘 본문은 완전히 내 이야기이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늘어진 채로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신앙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음이란 이런 잣대를 옹호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좋기 때문에 늘어질 수가 있는 겁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열심히라도 뭔가 해서 자신의 믿음없음을 대신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초조감에 참지 못하게 되지요. 그런데 '느긋하다'는 말은 여유만만하다는 자신감을 말합니다.
성경 공부 분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아는 것이 나로 하여금 더욱 믿음을 공고히 한다고 생각하기 쉽상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많이 아니까 행복해지던가요?" 허한 것이 많기에 그 허한 부분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이 행복치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는데도 행복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제공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용서가 들어가 있고 용서부터 시작합니다. 즉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화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인간이 안 받아주는 일입니다.
성경공부 하면서 불행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안받고 그 대신 자신이 아는 것으로 버티겠다는 심보 때문입니다. "용서받는 것 대신에 제가 전보다 더 착하면 될게 아닙니까?"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렇게 되면 본인이 괴롭고 본인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받아들이면 하나님과 좋고 그 사람도 좋고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는데 말이지요. 느긋한 가운데서 "저는 오실 이를 기다립니다"하고 살아가면 되잖아요.
용서가 들어오면 용서와 더불어 "왜 우리가 용서받아야만 하는가?"라는 상황도 기쁨과 같이 주어집니다. 34절에 보면,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줄 앎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히 고난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처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상태를 두고 표현합니다. 지지리 궁상과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이런 고난은 신앙이 없을 때 갖고 있는 고난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신앙이 있는 자의 고난은 그 고난 자체가 기쁨을 유발할 수가 있습니다. 즉 고난이라는 것을 용서받아 기쁜 것, 그리고 구원받아 기분이 좋고 감사한 것 과 연관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교회 안에서 통하는 상식과 상호 맞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너무 임의대로 생각해 버립니다. 구원도 받아야겠고, 교회에 집착을 하려는 몸은 몸대로 바쁘고, 돈은 돈대로 쓸 데가 따로 있고, 게다가 이 괴로운 상태에서 "온유하고 화평하고 기뻐하라"고 하니 억지로 웃음을 띠면서 합당한 표정 관리도 해야겠고, 완전히 뒤죽박죽 종교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말씀으로 정리에 들어가 봅시다.
예를 들면, 중국 음식집에 보면 쟁반이 나오지요, 그 쟁반에는 순전히 중국 음식이 담겨 있습니다. 또 한식집에 가면 거기에도 쟁반이 나오는데 그 쟁반 위에는 순전히 한국 음식만 있습니다. 양식 집에 나오는 쟁반에는 양식만 담겨 있겠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겠다는 사실이 일종의 쟁반이라고 봅시다. 그렇다면 그 쟁반에 담긴 것은 기존의 용서와 관련된 기쁜 소식만 담기게 됩니다. 마치 중국 음식집에서 나오는 쟁반에 중국 음식만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쟁반은 쟁반대로 받고 거기에다 자신이 집에서 만든 요리를 같이 담는다면 이것은 온전한 중국 음식집의 음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뒤죽박죽 짬뽕이 됩니다. 이처럼 새로운 세계가 덮치면 그 세계는 새로운 시간관과 공간관과 그리고 인간관을 가지고 들이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일체 거부하면서 말입니다.
하늘 나라는 일종의 쟁반에 담긴 나라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덮치면 기존의 것과 섞이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것을 가지고 마중나가서도 아니됩니다. 신혼 방에 보면 이불도, 요도, 베개도 모두 새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뭔가 했으면 인간 쪽에서도 성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뭔가 해 드려야 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신다면 신앙에 큰 오산을 갖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난'도 지상에서 '고생'하는 것과 연관시키면 그것은 해석 잘못한 겁니다. 초등학생이 중학교 올라가서 영어를 배우게 되는데, 영어 과목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회도 새롭고 수학도 새롭고 국어도 새롭습니다.
진짜 신앙인들에게 어떤 기쁨이 있느냐 하면, "전에 내가 알고 있었던 고난, 내가 알고 있었던 예수, 내가 알고 있었던 기적"이런 것들을 다 버리는 기쁨도 있고 그 빈 자리에 예수님이 소개하신 새로운 고난과 예수와 기적에 대해서 알게 된 기쁨도 있습니다. 기존의 것과 연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생들도 이 점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오 신이여, 제가 이 선지 동산에 헌신하려 왔나이다. 이 신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저의 한 몸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앞으로 개척교회 하면서 어떤 고난이 오고 심방하면서 어떤 모독이 온다할지라도 저는 이미 죽은 몸이라고 간주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감당하고 견디겠나이다"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곧장 이어 부르는 찬송이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입니다. 이 노래는 완전히 이 세상에서 고생하는 것을 미화하고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나름대로의 자기 세계의 형성 시도입니다. 믿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본인이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 됩니다. 그래서 장차 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당할 고난을 미리 앞당겨서 이 신학교 시절에 자아에게 많이 실행케 하겠다는 겁니다.
찡그리는 연습과 찡그리는 훈련을 스스로에게 가합니다. "미리 고난을 많이 받게되면 나중에 세상에 나가서라도 어지간한 고난을 능히 견디지 않겠는가"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넘어짐은 고난이 아니라 유혹입니다. 목사라는 직임이 주는 유혹, 당회장이라는 직임의 유혹, 시찰장이라는 직임이 주는 유혹, 노회장, 총회장이라는 직임에 주는 유혹 말입니다.
배고픔과 아픔은 오기만 강하면 버팁니다. 버티는 그 자체가 영광스러워서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누가 이길 수 있습니까? 그 유혹 중의 하나가, "제가 주를 위하여 이렇게 희생하고 고생했나이다. 조금이라도 보상을…"라는 정신입니다.
이렇게 이 이야기를 쭉 하는 가운데 뭔가 빠져 있지요? 다름 아닌 "용서하심"이 빠져 있는 겁니다. 신학생 시절부터 용서하심에서 오는 '기쁨'이 빠져 있다는 이것은 진정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남들보기에는 천하의 신앙인으로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자비하심과 형제 우애가 넘친다 할지라도 비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속에는 오기가 들어 있지만 겉으로는 연기를 피우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늘 나라에는 연기가 필요 없습니다. 모방이나 시늉도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주어지는 쟁반, 그 쟁반에 담긴 것을 믿음으로 후룩룩 마시면 그만입니다. 마셨으면 기존의 것과 교체하는 일에 돌입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바꾸라!"입니다. 용서하심에서 출발 될 신앙을 오기에서 출발하면 가짜 신앙입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서 부터입니다. 가짜 신앙은 결국 주님의 곁을 떠나서 뒤로 돌아설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믿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로 바꿨기에 그 때부터 독자 세계를 따로 갖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 주님이 간섭하지 마소. 내가 목사이기에 내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모두 침륜에 빠진 꼴입니다.
"주님 저는 이 교회보다 주님의 오심을 더 간절히 고대합니다"라는 고백을 진심으로 못하게 됩니다. 그 대신 "주님, 제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해서 이 교회를 세운 줄 아세요? 무릎이 낙타 무릎 될 지경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어야 참 신앙입니까?
기쁨으로 받아 쟁반에 무엇이 담겨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37-38절에 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즉 이 본문이 지금 용서라는 쟁반에 담겨서 우리들에게 그저 제공된 겁니다. 그래서 이 내용의 의미를 용서라는 차원에서 파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구원되고 아니되고를 결정하는데 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을 꼭 집어 거론해야 합니까? 전도 많이 하면 구원받고 헌금 많이 하면 구원받아 살리라 하는 그런 말씀을 아니하시고 말입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은 구약 하박국 2:3-4절에 나오는 말씀의 성취라고 간주되어 따온 것입니다. 그 대목을 봅시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하고 비교해 보니 뭔가 틀리지요? 구약 하박국에서는, 하나님의 묵시와 예언의 말씀이 장차 꼭 이루어질 것이니까 이점을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살리라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대목을 따 온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묵시의 자리에 어떤 인물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미 오신 분으로서 '앞으로 오실 어떤 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는 그 말씀이 실현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 하박국에서 하신 묵시와 예언의 말씀은 이미 예수라는 분에 의해서 다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참 신앙인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면, "구약의 모든 말씀이 예수라는 분에 의해서 다 완성되었음" 이라는 이 자체를 믿을 때만 참 믿음이라는 겁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잠시 제가 잠시 잘못된 해석과 신앙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 어디 구세주 없나? 메시야 없나? 예수님이 구세주란다. 야, 모두 다같이 믿으세. 그런데 성경에 보니, 마지막 때일수록 인내를 가지고 고난을 참고 앞으로 오실 분을 강하게 믿어야 한데. 만약 나태해서 뒤로 물러가면 구원에서 탈락한데, 따라서 우리는 열심히 믿습니다."라는 주장 같은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뭘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홀로 모든 예언과 묵시와 말씀을 다 이루어서 그 결과와 선물로 믿음이 생겨서 그 믿음으로 우리가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그 사항이 순전히 예수님 홀로 해내신 말씀 완성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앞서 소개한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다면, 예수님 믿는 것은 내 몫으로 여전히 남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은 구원될지 아니될지 전혀 믿는 구석이 없고 그저 행하는 구석만 남게 됩니다.
다이어트 하는 사람 가운데 10% 밖에 성공이 안 된 답니다. 체중 조절하고 난 뒤, 5년 내에 다시 원 중량으로 안 돌아가면 다이어트 성공할 것으로 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거의 매일같이 쉬지말고 운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언제 그 노력이 중지될지 본인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믿는 구석은 전혀 없고 그저 행하는 추진력만 실시할 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이라면 그 누구도 신앙 생활에 실패합니다.
참된 신앙이란, 현재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까지 하박국에 예언대로 주님의 다 이루신 그 효과 안에 담겨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장차 누가 부름받게 되고, 믿게 되고, 누가 천국가게 된다는 사실까지 주님이 이미 담당하신 결과로 일어난다는 점을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 기쁜 일은 오늘 본문에서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로부터 별종이라고 구경거리가 되고 산업을 억울하게 빼앗기는 사태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듣기 좋아라 제가 지은 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9:15에 보니,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용서라는 쟁반에 담긴 내용입니다. 홀딱 마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전서 1:3-4절에 봐도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반드시 거듭나게 하시고 또 결국에는 쇠하지 않는 기업을 잇게 하겠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말입니다. 어떤 유혹 말입니까? "네가 열심히 안하면 탈락한다, 모든 구원도 네 행위에 달렸다"라는 유혹이 오더라도 말입니다. 주께서 하신 일 속에는 우리가 못하는 것, 하는 것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음으로 의인은 산다는 겁니다. 믿음이란 인간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1에 보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날라온 쟁반은 지상에 사는 인간과 단절 되었기에 믿음에 대해 이런 표현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세상과 하늘이 단절되지 않는 것이 더 신앙에 수월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노력 여하에 따라 신앙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신앙 생활 안하다가 갑작스럽게 애쓰면 또 유발할 수 있는 성질의 신앙이 오히려 수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순전히 하늘의 선물입니다. 용서와 같이 말입니다. 동시에 남들로부터 오해를 받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인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담대함을 가지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분이 무엇을 했는가를 주목하면서 말입니다.
용서라는 쟁반에 있는 것을 홀딱 마시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나 거지 나사로처럼 말입니다. 믿음에서 제일 큰 유혹은 다름 아닌, "아,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던고, 아 내가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던고"하는 후회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시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임을 안다면 이런 유혹 때문에 뒤로 물러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만든 기독교에 자신이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용서받아야 될 중의 하나가 내 신앙 내가 책임진다는 사항도 포함되는 줄 압니다. 어리석게도 내 신앙, 내가 유지한다고 인내하고 참다가 고난은 이겼지만 유혹에 넘어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차라리 거지 나사로처럼 믿음의 길로 당당하게 우리의 길로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5. 고난과 신앙(히 10:32-39)
---------------------------------- (히 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히 10: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히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 10: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늘어진 신앙생활 !!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읽어보게 되면, 구원에 대한 강렬한 집착과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기 38절에 보면 “또한 뒤로 물러가면” 라고 하는데, 그러니 절대로 뒤로 물러나지 말고 붙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집착증과도 같은데, 몸과 마음을 다 던지는, 그런 도박과도 같은 느낌을 강하게 준다는 말이죠.
사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지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물론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해서도 지독하겠지만, 자기가 다니는 교회나 자기 영역 대해서도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그것이 아닌데,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집착이라는 말이죠. 그 약속에 매달려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러한 집착이 남들이 보기에 대단히 훌륭한 신앙처럼 간주가 되곤 하는데, 그렇다면 교회에 봉사를 많이 하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 아주 경우에 신이 나겠죠. “야, 오늘 본문은 완전히 내 이야기이네” 라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그렇지 않고 늘어진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엄매, 기죽어” 라고, 그렇게 되고 마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음은 그런 태도를 전혀 옹호해주지를 않는데, 왜 그렇습니까? 오히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열심히 뭔가를 해서, 교회에 충성해서 자기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숨기고, 그것을 대신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초조함에 그만 시달리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늘어진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대체 신앙생활을 하는지 마는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늘어진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좋을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믿음이 좋기 때문에 늘어졌다는 말이죠. 그래서 느긋하고 여유가 있는데, 그게 곧 자신감이고, 이미 손을 털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열심을 내는 것에 속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오히려 자기가 할 것을 다 하면서도 오늘 본문에 딱 들어맞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비로소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열심과 충성을 가지고 믿음의 있음과 없음을 결정하려는, 그런 오류를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러한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인데 말이죠. “여러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탈락되면 안 됩니다” 라고 하면, 제일 많이 시도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다들 다음과 같이 나온다는 겁니다.
“아하, 뭔가 많이 알아야 하는구나. 성경공부도 더 열심히 해서 많이 알아야 하고, 그래야 그것이 힘이 되고, 또한 나의 믿음의 바탕이 되는구나” 라고 말이죠. 물론 얼른 들으면 맞는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뭔가 더 많이 아는 것이 자기로 하여금 더욱 더 믿음을 공고히 할까요? 과연 그런가요? 많이 알면 더 행복해지던가요?
오히려 그것은 공허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그 부분을 채우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태도는 그 사람이 행복치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아는 것이 오히려 비극이 씨앗이 될 수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는데도 왜 행복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제공하는 바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용서가 들어있는데, 즉 용서부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말이죠.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고, 그것을 대신해서 자기가 아는 것으로 버티겠다는 심보 때문이라는 말이죠. 즉 “용서를 받는 것 대신에 제가 전보다 더 착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는 식으로 말이죠. 과연 그렇게 해서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제일 화를 내시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용서를 우리 인간이 거부한다는 겁니다. 그 용서를 받아들이면 하나님도 좋고 그 사람도 좋고,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말이죠. 그런 느긋함 가운데서 “저는 오실 이를 기다립니다” 라고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고난과 기쁨 !!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가 들어오게 되면, 이 용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용서와 더불어서 “왜 우리가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가?” 라는 상황도 기쁨과 같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 ‘기쁨’ 이라는 말이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데, 34절입니다.
(히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흔히 우리는 ‘고난’ 이라고 하면 무슨 생각을 합니까? 자기 처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를 생각하는데, 즉 지지리 궁상과 연결을 시킵니다. 인상을 쓰고 찡그리는 것을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고난이 아닌데, 신앙이 없을 때 가지고 있는 고난에 대한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에도 나오듯이, “신앙이 있는 자의 고난은 그 고난 자체가 기쁨을 유발시킬 수 있다” 라는 것이죠. 그러니 고난이라는 것을, 자기가 인상을 쓰면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서 기쁜 것, 그리고 구원을 받아서 감사한 것, 그런 것과 관련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교회 안에서 통하는 상식과는 서로 맞지 않는데, 사람들이 너무 임의대로 생각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구원은 받아야 하는데, 교회에 집착을 하려고 하니 몸은 몸대로 바쁘고, 또한 돈은 돈대로 쓸 곳이 따로 있고, 이렇게 괴로운 상태에서 “온유하고 화평하고 기뻐하라” 라고 하니, 억지로 웃음을 띠면서 표정관리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뒤죽박죽인 종교생활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전혀 신앙생활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뭔가 정리된 상태에서, 행복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당연히 말씀으로 정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중국집에서는 짜장면을 !!
그렇게 말씀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중국 음식점에 가면 쟁반이 나오는데, 그 쟁반에는 중국음식이 담겨있어요. 또한 한식집에 가면 거기에도 쟁반이 나오는데, 그 쟁반 위에는 한국음식만 담겨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양식집에 가면 거기에 나오는 쟁반에는 양식만 소복이 담겨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겠다는 것을 일종의 쟁반이라고 생각을 해봅시다. 그러면 그 쟁반에 담긴 것은 무엇이야 하겠습니까? 거기에는 기존의 쟁반과는 달리, 새로운 쟁반에는 새로운 것이 담기게 된다는 겁니다. 즉 용서와 관련된 기쁜 소식만 담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중국집에서 나오는 쟁반에는 중국음식만 소복이 담겨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 쟁반에 있는 것은 아무 것이나 다 먹어도 중국음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집에서 만든 요리를 가지고 와서 그 쟁반에 같이 담는다고 하면, 이것은 온전한 중국음식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야말로 뒤죽박죽 짬뽕이 되는데, 그러고 보니 짬뽕도 중국 음식인데 말이죠(ㅋㅋ).
하나님은 짬뽕을 싫어해 !!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쟁반에는 하나님의 주신 것만 담겨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 것을 거기에 엎어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어렵게 이야기하는데, 즉 “새로운 세계가 덮치면 그 세계는 새로운 시간관과 공간관, 그리고 새로운 인간관을 가지고 들이닥치게 되어있다” 라고 말이죠.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일체 거부하면서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는 쟁반에 담긴 나라와 같은데, 새로운 세계가 덮치면 기존의 것과 섞이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것을 가지고 마중을 나가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신혼방을 몰래 훔쳐보면 이불도 베개도 모두가 새로운 것인데, 새 것이 아닌 게 없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 알뜰 신혼족은 중고물건도 새 것처럼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뭔가 했으면 인간 쪽에서도 성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뭔가를 해드려야 한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라는 겁니다. 신앙은 신혼살림 못지 않게 모든 것이 새로워야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인간의 그런 중고물건은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난과 고생은 달라요 !!
그러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난’도 이 땅에서 우리가 ‘고생’을 하는 것과 관련을 시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겁니다. 그 고난은 하늘나라에서 주는 고난이라는 겁니다. 왜 초등학생이 중학교에 올라가서 영어를 배우게 되면, 물론 요즘은 이미 다 배워서 가는데, 아무튼 그때는 영어과목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회도 새롭고 수학도 새롭고 국어도 다 새롭다는 겁니다.
진짜 신앙인들에게 어떤 기쁨이 있는고 하면, 이전에 자기가 알고 있었던 고난, 자기가 알고 있었던 믿음, 자기가 알고 있었던 기적, 그런 것들을 다 버리는 기쁨도 있고, 그리고 그 빈자리에 예수님이 소개해주시는 새로운 고난과 믿음과 기적에 대해서 알게 되는 기쁨도 있다는 겁니다. 기존의 것과 연계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신학생들과 그 치명적 유혹 !!
제가 신학교에 종종 가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신학생들이 이런 점을 모르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 신이여, 제가 이 선지동산에 헌신하려 왔나이다. 한 몸을 주님에게 바치겠습니다. 앞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개척교회를 하면서 어떤 고난이 오고, 심방을 하면서 어떤 모독이 온다할지라도, 저는 이미 죽은 몸으로 간주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감당하고 견디겠나이다” 라고 하면서 다짐을 하고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곧장 이어서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 라고 찬송을 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전혀 신앙생활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고생하는 것을 미화하고, 거기에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뜻이 담겨있다는 말이죠. 나름대로의 자기 세계를 형성하려는 시도인데,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데, 그러니 주인공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장차 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당할 고난을 미리 앞당겨서, 신학교 시절에 더 많이 실행토록 하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찡그리는 연습과 훈련을 스스로에게 가한다는 겁니다. 옷도 허름하고 입고 말이죠. 즉 “미리 고난을 많이 받게되면, 나중에 이 세상에 나가서라도 어지간한 고난을 능히 견디지 않겠는가?”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자들이 목사가 되어서 넘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그런 고난으로 인해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혹이 큰 문제라는 겁니다. 그게 목사라는 직임이 주는 유혹인데, 당회장이라는 직임이 주는 유혹, 시찰장라는 직임이 주는 유혹, 노회장라는 직임이 주는 유혹, 총회장이라는 직임이 주는 유혹, 그런 것이 치명적이라는 말이죠.
그래도 배고픔과 아픔은 어떻게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데, 버티는 그 자체가 영광스러워서 말이죠. 그러나 유혹을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 유혹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까, “제가 주를 위하여 이렇게 희생하고 고생했나이다” 라고 하는 마음가짐인데, 그런데 정작 그게 유혹인 줄도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용서하심’이 없다면 !!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뭔가가 빠져있지요? 다름이 아닌 ‘용서하심’이 빠져있다는 겁니다. 신학생 시절부터 용서하심에서 오는 기쁨이 빠져있다는 것은,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천하의 신앙인으로,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자비하심과 형제우애가 넘친다고 할지라도 말이죠. 그 속에는 오기가 가득 들어있는데, 겉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는 연기가 필요가 없는데, 모방이나 시늉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오로지 주어지는 용서의 쟁반, 그 쟁반에 담긴 것을 믿음으로 홀딱 마시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홀딱 마셨다고 하면, 기존의 것과 교체하는 일에 돌입하게 된다는 말이죠.
까불지마. 바꿔라 !!
오늘 본문의 핵심이 이것인데, 즉 ‘바꿔라!’ 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안 됩니다. 바꾸지 못합니다. 고난도 제가 만든 고난으로 밀어 부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그것은 고난이 아니다. 너의 과시욕이고 오기다. 바꿔라” 라고 하면, 우리는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라고 하면서 버틴다는 겁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오로지 ‘용서하심’에서 출발해하는데, 그런데 자기 자존심이나 오기에서 출발한다면 가짜라는 말이죠. 그러면 모든 성경말씀이 엉망이 되고 마는데, 이런 가짜 신앙은 결국 주님의 곁을 떠나서 돌아설 수밖에 없게 만들죠. 고난은 어떻게 이기는데, 유혹은 이길 수가 없어서 말이죠.
이제부터는 믿는 자가 아니라 이제는 행하는 자로 바꿨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독자적인 세계를 따로 가지게 됩니다. “우리교회는 주님이 간섭하지 마이소.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바로 넘어진 꼴인데, 즉 침륜에 빠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 저는 이 교회보다도 주님의 오심을 더 간절히 고대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뭐라고 합니까? “주님, 제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해서 이 교회를 세운 줄 아세요? 그야말로 낙타무릎이 될 지경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이런 것이 하나의 우상이 되는데, 또한 교회가 바벨탑이 되고 말이죠.
일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 주님이 한 달 뒤에 재림을 하시는데, 그런데 한 달 반 뒤에 자기 딸이 시집을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재림을 하면 결혼식은 물 건너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한 달만 어떻게 연기를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런 것을 상상해볼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과연 어떤 유혹에 빠져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늘 본문 37절과 38절을 보겠습니다.
(히 10: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여기 38절에 보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하는데, 이 본문 말씀은 ‘용서’ 라는 쟁반에 담겨서 우리에게 공짜로 제공된 것인데, 맞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내용을 용서라는 차원에서 파악해야 하고, 또한 기쁨으로 받아서 홀딱 마시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구원되고 말고 하는 것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왜 이렇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라는 말씀을 꼭 집어서 거론을 하시느냐는 겁니다. “전도를 많이 하면 구원을 받고, 헌금을 많이 하면, 그러면 구원을 받아 살리라” 라는 말씀으로 하지 않고 말이죠. 왜 하필이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라는 말씀을 가지고 천국에 가는 키포인트로 삼느냐는 겁니다.
이 본문 말씀은 구약성경인 하박국서 2장 3절과 4절에 나오는 말씀의 성취인데, 여기서 다시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그 대목을 살펴봅시다.
(합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아니, 인용한 구약과 다른데?
그런데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비교를 해보니 뭔가 맞지를 않다는 겁니다. 구약의 하박국서에서는, “하나님의 묵시와 예언의 말씀이 장차 반드시 꼭 이루어질 것이니, 이러한 점을 믿는 자는 의인이고, 그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대목을 따온 오늘 본문에서는, 37절에 보면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박국서에는 없는 내용인데, 그러니 하박국서 2장 3절의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라고 하는, 그 ‘묵시’ 라는 자리에 어떤 인물이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이미 오신 분으로서, 즉 ‘앞으로 오실 어떤 이’ 라고 하는데, 물론 그분은 예수님인데 말이죠.
그러면 이 히브리서는 그 말씀이 실현되었다는 것인데, 즉 구약 하박국에서 하신 묵시와 예언의 말씀은 이미 ‘예수’ 라는 분에 의해서 다 완성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참된 신앙인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면, “구약의 모든 말씀이 예수라는 분에 의해서 다 완성되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믿을 때만 참된 믿음이라는 말이죠.
아, 어디 구세주가 없나?
이게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인데, 여기서 제가 잠시 잘못된 해석과 신앙부터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아, 어디 구세주가 없나? 메시야가 없나?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그러면 모두 다같이 믿으세. 그런데 성경에 보니, 마지막 때일수록 인내를 가지고 고난을 참고 앞으로 오실 분을 강하게 믿어야 한다고 하는데, 만약에 나태해서 뒤로 물러가면 구원에서 탈락한다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열심히 믿읍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은 전혀 이런 것이 아닌데, 우리가 무엇을 행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도 별 다르게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처럼 일상적인 삶을 살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홀로 모든 예언과 묵시와 말씀을 다 이루어서, 그 결과로 믿음이 생겨서, 그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고 신앙이라는 말이죠.
이게 서로 같은 이야기가 아니냐고 할지 몰라도,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앞의 이야기는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지만, 그것을 믿는 것은 자기가 믿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의 몫인데, 그러니 거기에 소홀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실 분을 자기가 제대로 믿지 못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런 경우에는 참으로 초조하고 불안하게 되는데, 10년을 믿고 20년을 믿어도 그 다음 날에 믿지를 못하게 되면 구원에서 탈락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서 뒤로 물러가지 말라고 하면, 자기가 물러가지 않고 버티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힘이 들어서 미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그 사항이 순전히 예수님 홀로 해내신 말씀 완성 안에 이미 포함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자기 몫으로 여전히 남게 되는데, 그러면 이 사람은 구원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게 되고, 그러면 전혀 믿는 것은 없고 그저 행하는 것만 남게 된다는 말이죠.
무슨 이런 짓이 다 있노?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10퍼센트 밖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체중조절을 하고 난 뒤에 5년 내에 다시 원래의 몸무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성공한 것으로 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거의 매일같이 쉬지 말고 운동을 해야하는데, 하지만 그것조차도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죠. 언제 그 노력이 중지될지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말이죠.
제가 박사교회에 있으면서 몸무게가 76kg까지 나갔었는데,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운동을 시작해서 69kg까지 내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살이 찌니 옷이고 뭐고 맞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냥 있으면 다시 원위치로 되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해서 운동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도 열심히 뛰면서 운동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무슨 생각이 드는고 하니까, “도대체 무슨 이런 짓이 다 있노?”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 뛴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계속해서 뛰어야 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신앙생활을 그렇게 해야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신앙생활에 도저히 성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혹시 그런 짓을 우리가 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믿음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는 것까지도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까지도 주님께서 다 이루셨음을 믿는 것 !!
바로 그것을 이 하박국서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즉 장차 누가 선택을 받고, 누가 믿고, 누가 천당에 갈 것이지, 그리고 누가 지옥에 갈 것인지, 그것까지도 주님께서 이미 담당하셔서, 그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계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믿어질 때, 그게 바로 신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물론 십자가는 주님이 지셨지만, 그것을 믿고 말고 하는 것은 내 몫이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이어트를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결국은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성공한다는 겁니까? 실패한다는 겁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것은 하박국서에 의하면, 모든 예언과 묵시를 몽땅 다 포함해서 완성하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완성에는 어떤 내용까지 들어있는고 하니, “너는 내가 선택해서 구원을 받았어. 니가 잘나서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것이 아냐. 그러니 까불지마!” 라고 하는 것까지도 쟁반에 담겨있더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선택인데, 바로 그것을 홀딱 마실 때, 그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게 무슨 찡그림이고 낙타무릎이냐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듣기 좋아라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히브리서 9장에 보면 나오는데, 15절입니다.
(히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 !!
여기에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까지 쟁반에 담겨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불렀는데, 이게 히브리서를 비롯해서 성경말씀에 가득하다는 말이죠. 이것이 곧 용서라는 쟁반에 담긴 내용인데, 그러니 홀딱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베드로전서 1장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
여기에 보면, “부르심을 입은 자는 반드시 거듭나게 하시고, 또한 결국에는 쇠하지 않는 기업을 잇게 하겠다” 라고 분명히 나와있는데, 이것을 믿는 게 참된 신앙이라는 겁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말이죠. 즉 “너도 열심히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탈락이다” 라고 해도, 주님이 하신 일 속에는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 라는 게 들어있음을 믿을 때,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믿는 구석은 전혀 없고, 그저 행하는 추진력만 있다면, 그런 신앙이라면 누구라도 신앙생활에 실패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참된 신앙은, 현재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까지도 하박국서에 예언대로 주님께서 다 이루신 그 효과 안에 담겨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장차 누가 부르심을 받게 되고, 믿게 되고, 누가 천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까지도, 그것까지도 이미 주님이 담당하신 결과로서 일어난다는 것이 믿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 38절에 나오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즉 믿음은 인간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히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는데, 하늘에서 날아온 쟁반은 이 땅에 사는 인간들과는 완전히 그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믿음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과연 이러한 믿음을 우리가 이 땅에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한데, 우리가 밤을 지새워서 공부를 한다고 그게 되겠습니까? 그냥 선물로서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것을 ‘부르심을 받은 자’ 라고 하는데, 바로 그런 자들에게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세상과의 단절인데, 물론 그게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닌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도 이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물론 모든 관계를 다 끊고 산에 가서 혼자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성도는 구경거리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믿음은 순전히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인데,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핍박을 받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오늘 본문 33절에서는 ‘구경거리’ 라고 하는데, 즉 “무슨 저런 별종들이 다 있지? 뭐 혼자서 다 이루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마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히 10: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그렇게 해서 남들로부터 분리가 되고 격리가 된다는 인식을 받는 것인데,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은데, 그들과 분리가 되면 외로워서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35절에서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라고 하고, 또한 36절에서는 ‘인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라는 분이 무엇을 했는가?” 라는 것에 주목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어떤 하셨는지, 그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로 여기고, 전혀 초조하지 아니하고 마음 든든하게, 용서라는 쟁반에 있는 것을 홀딱 다 마시고 행복하게 살면 된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나 거지 나사로처럼 말이죠. 그게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하나님, 다음에도 부탁합니다 !!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견뎌야 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라고 하게 되면, 물론 참을 만하면 참는데, 그런데 남들이 좀 알아주면, 즉 “개척교회를 10군데나 하고, 전도도 1년에 500이나 하고, 정말이지 최고입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러면 모두가 다 넘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하, 이것이 바로 내가 그만큼 인내하고 견뎠다는 것에 대한 보상이구나. 내가 이렇게 충성을 다하니, 하나님도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는구나. 그러면 그렇지!”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다음에도 부탁합니다!” 라고 나오더라는 말이죠.
우리가 성경을 보면, 굳이 사도바울이나 사도 베드로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스데반 집사님이 있고 거지 나사로가 있고 또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주변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그들은 자기에게 주신 믿음대로만 가더라는 말이죠.
그것이 선물이니까 가능한 것인데, 만약에 자기가 만들어낸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어떻게 하려고 난리를 치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대로 가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를 못하느냐는 말이죠.
자기가 만든 예수에 속으면 안 돼 !!
이제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는데, 믿음에 있어서 제일 큰 유혹이 무엇인고 하니, 다름이 아닌 “아하,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하고,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던고? 그렇지 않았으면 큰복을 받았을 텐데, 그러니 앞으로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라고, 그런 후회와 같은 것들을 계속해서 되새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또 다시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임을 안다고 하면, 그런 유혹 때문에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아무리 후회를 해도, 또 다시 반복을 한다는 겁니다. 흔히들 술과 담배를 끊는다고 하는데, 그게 됩니까? 설령 끊는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니 그런 자기 과거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자기가 만든 기독교에 스스로 속아넘어가는 것인데, 자기가 만든 하나님, 자기가 만든 예수, 자기가 만든 교회, 그런 것은 다 부수어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오직 의인을 믿음으로 사는데, 자기가 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그 속에는 예정된 자는 반드시 구원하는 능력까지도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행복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용서를 받아야 될 중의 하나가 자기 신앙은 자기가 책임진다는 사항도 포함되는 줄로 압니다. 어리석게도 자기 신앙을 자기가 유지한다고 하면서 참다가, 비록 고난은 이겼지만 유혹에 넘어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줄 압니다. 그러니 거지 나사로처럼 믿음의 길로 당당하게 가게 하옵소서. 그런 믿음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27 오전 1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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