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0:26-31) 무서운 하나님 본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34강-히10장,26-31(무서운,하나님)-heb020224.mp3
|
이근호
무서운 하나님
2002년 2월 24일 34강
본문 말씀: 히 10:26-31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신자와 불신자와의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신자는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에 반해서 불신자는 진리에 관심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만약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게 된다면 그 자체가 그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인간임을 표하는 겁니다. 돈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서 난데없이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왜 가질까요? 그만큼 지향점이 다르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진리를 가치 있게 쳐주기를 않습니다. 진리 가지고 있다고 남에게 인정받을 생각을 아예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상에서 진리에 관심을 갖고 있는다는 것을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이 세상은, "진리 이야기 안하기, 진리는 없다고 여기기"라는 법칙만 통합니다. 이 법칙에 준수해야 세상 사람들과 대충 얽기설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판국에도 진리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비록 이 세상에서 추방당해도 자기가 소속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못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너희들은 받았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받은 그 진리가 어느 정도로 가치가 있는가 하면, 다시는 자기 죄를 위하여 속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습니다.
진리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이 점에 대해서 입이 벌어지면서 미소띠면서 "야 가쁜하다", 하지만 겉으로만 진리 받은 폼을 내는 사람은,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이 말씀을 놓고 고민을 늘어지게 하게 됩니다. "예수믿고 난 뒤 다시 죄지으면 지옥갑니까?"라는 질문이 이런 바탕에서 나옵니다.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은 진리를 마치 칼로 둘로 나누는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예수믿으면 구원받는데 이것만 취하고 꼬리부분은 떼어 버립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말씀으로 안 보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렇게해서는 아니됩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뭔가 하셨지만, 내가 다시 죄지은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따지는 것은 칼로 진리를 두 동강내고 반만 갖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 정리를 다시해야 합니다.
뭔가 진리입니까? 오늘 본문 30절에 보면,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진리 안에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고 만다는 것도 포함을 시켜서 그것도 함께 수용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을 보면서, "나만 예수믿고 천국가면 그만이지"라는 마음을 갖지 말고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하시는 일, 전체를 다 받아야 합니다.
전체를 받지 않게 되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지을 자신의 죄와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의 맹렬한 심판이 무서워서 자기 쪽에서 예수를 포기하기로 작정해 버립니다. "나는 자신없어. 예수 믿고 난 뒤에 죄를 안 지을 자신이 없단 말이야"라는 식으로 나오지요.
성경에서의 죄란, 진리를 안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할 것을 심판 하신다는 것을 안 믿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일반 인간들이 생각하는 죄란, 내가 행동하는 여부에 달렸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심판을 믿지 않게 되면 그 대신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게 됩니다. 엉터리 기준을 가지고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나는 바쁘게 살아야 돼, 사람 취급받아야지"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내가 나를 채찍으로 치듯이 하면서 우리 자신을 못살게 굽니다. "아,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지. 등신아, 등신아"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치 않고 그껏 하나님 한테는, 예수믿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달랑 빼먹고서는 나머지는 자기가 자신을 심판하기에 급급합니다. 이는 잘못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가지고, 인간의 심판을 심판하시고자 합니다. "제발 자신을 심판하지 마세요"
인간의 자아상은 사회가 만드는 겁니다.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날부터 이미 사회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거기서 만든 기준이 우리의 자아상이 됩니다. 물론 수시로 변동되지요. 이 자아상이 우리 자신을 못살게 굽니다. 잘못된 심판 기준을 가지고 말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외부의 감각을 그 두뇌에서 조작합니다. 결국 우리 본인이 우리 본인의 꿈 속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 성경을 보니,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고 하니 이 사실만 쏙빼내어 머리 속에 비축해둡니다. 이것은 사회 시선들이 앞서서 갔던 방식이었습니다. 넓은 길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모자라는 것을 보충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우리의 근원부터 뒤집어버려야 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세상 사회가 너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 말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 저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비유를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관하고 너무 판이하게 나오는 진리관이 예수님 입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것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씨뿌리는 비유에는 네 가지 경우를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씨가 길 가에 뿌려졌습니다. 그런데 새와 와서 얼른 그 씨라는 말씀을 물고 가버렸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날라가 버리고, 말씀을 들으면 또 날라가 버리고 하는 사람을 말입니다. 진리가 이런 식으로 대우받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둘째로, 씨가 돌짝 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싹이 났습니다. 이는 처음 교회 나와서 복음을 듣고 좋아서, "오, 천국이여 오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노라"라고 감격하다가 난데없이 가정에 어려워지고 사고가 나고 장사가 잘 안되고, 건강이 나쁘면, "이 모든 것이 필시, 교회를 옮겼거나 아니면 종교를 바꾸었거나해서 생긴 저주야. 아, 정말 천국가기 힘들다 좀 쉬었다가 나중에 모든 것이 안정이 될 때 그 때, 교회 계속 다녀야지"라고 다짐하는 사람에 해당됩니다. 진리는 이처럼 고난 앞에서 얼마든지 무가치하게 취급 받습니다.
세 번째 경우는, 가시덤불 위에 떨어진 씨의 경우입니다. 이 사람은 어려운 역경과 시련을 즐기듯이 잘 견딥니다. "시련아 오라. 예수믿고 당하는 시련은 복된 것이리라! 내가 얼마나 고난을 잘 이기는지 보여주리라"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만사가 형통하고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고 교회에서 인정을 받으니까 예수님의 고난은 뒷전이고, 큰 역경을 헤쳐나온 자신이 신앙의 대영웅이다는 사실이 자신이 간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종의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진리란 이렇게도 활용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 번째 경우는, 씨가 옥토에 떨어진 경우입니다. 진리가 인간의 모든 예상을 넘어서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솜씨가 아닙니다. 진리 그 자체적인 능력을 유감없이 보이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이나 노고와 전혀 무관합니다. 이것이 진리로서의 마지막 본질을 다 드러낸 겁니다.
진리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그 가운데서도 내가 행할 것을 따로 뽑아낼 수 없다는 것이 진리를 바르게 믿는 태도입니다. 내가 행한 것을 따로 뽑아내어 그것을 잘했느니 못했느니 따질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 진리를 믿는 결과로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내 행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무엇을 믿느냐?"하는 것으로 실시됩니다.
28-29절에 보면,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불신자의 입장에서 이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반발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왕 봐주시는 것, 왕창 봐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지은 죄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주신다면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왜 그리 짜십니까? 연약한 인간들이 뭘 알겠습니까? 철이 없어 예수님을 안믿을 수도 있고 속죄의 피도 무시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하나님되어서 그것까지 간섭하셔야 겠습니까? 하나님, 예수 안믿는 죄, 그것까지 좀 봐주셔서 심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른이 되었으면 어른답게 대승대자비한 마음으로 인간을 다루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 민수기 32:30-31을 봅시다. "무릇 사람을 죽인 자 곧 고살자를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속전'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속전이란, 어떤 이가 죄 지은 것이 생각날 때면 그 죄값을 하나님에게 드리므로서 죄를 용서받게 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고의로 살인자는 그 속전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여버려라는 겁니다. 속전 바쳐서 다시 원상회복되는 기회를 그 사람에게는 부여하지 말고 박탈하라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는 무조건 용서해주시는 게 아닙니까? 예, 하나님께서 속전제도라든지 속죄제도를 남기신 것은 우리가 구원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성을 펼치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겁니다.
"나, 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네가 아느냐?"라는 차원에서 말씀도 주시고 예수님도 보내신 겁니다. 어느 정도로 거룩을 유지하려고 하느냐 하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죽이시기 까지 거룩을 유지하려고 하십니다. 살인한 자가 자기 살기 위해서, 생명연장책으로, 혹은 자기 하나 편하기 위하여 속전 제도를 활용한다면 이는 극도로 속전 제도를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거룩을 발로 밟는 경우와 같습니다.
불신자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진정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을 안믿고 예수를 안믿어도 그냥 봐주고 넘어가면 되지 않느냐?"하고 나섭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거룩은 생각지 않고 자기 이익과 안일과 행복만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사랑까지 이 목적에 유용하겠다는 심보입니다. 이것은 바로 어린 양의 피를 발로 밟고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은 이런 자를 겨냥해서 날라갑니다. "이 저주받을 놈아!'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을 개인용으로 전환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의 거룩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어서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이 취지를 모르고 예수님 피없이도 만사가 잘 돌아가는 쪽으로 생각합니다. 이러니 이런 비거룩을 하나님이 봐줄 리가 없습니다. 사정두지 않고 말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교회 청소를 하는데 더러운 지렁이 하나가 기어가고 있습니다. 지렁이가 하는 말이, "교회 청소하는 것은 당신네 인간들의 문제고 나 지렁이는 지렁이 나름대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청소를 하시더라도 날 건드리지말고 나 비켜서 나머지나 잘 청소하소"라고 나온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렁아, 네가 있으면 전체적으로 청소가 잘 안되는걸 어떡하니?" 그렇게 하니까 지렁이가 하는 말이, "아니, 인간이 되었으면 넓은 아량으로 이 지렁이를 좀 불쌍히 봐주소. 그 뭐 지렁이하고 싸울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냥 날 놔두시고 못본척 그냥 지나가소"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됩니까? 발로 콱 밟아버리고 죽이고 하는 말이 "아, 깨끗하게 청소했다"하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잘 동의하지 않으려는 것은 처음부터 우리 자신이 진노의 자식이고 저주의 자식이고 심판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속성이 그대로 나온 겁니다. 로마서 5:10에서는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원수된 자'라고 했습니다. 이 원수된 자를 위하여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보내셔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횡재입니까! 원수된 자라는 전제로 깔고 예수님의 피를 생각해야 제대로 생각한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된 사실과 예수님의 화물제물됨을 더불어 형성된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점을 놓치고 칼로서 반을 뚝 잘라 예수님의 화목제물에 취하려고 하니 온전한 진리라고 볼 수 없지요.
에베소서 2:1-5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단 우리는 본디 '진노의 자녀'라는 것은 인정 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고 완전한 처음 만든 인간형을 원하는데, 우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변명하기 급급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점을 인정안하니까 그 뒤에 나오는 말씀, 즉 크신 긍휼의 사랑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현재 우리 자신이 저주의 자식의 말씀에 동의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래 하나님은 너무 심한 분이야. 무슨 짓을 해도 눈 한 번 감고 용서해 주면 그만이지 말이야"하고 불만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맹렬하게 심판한다는 하나님의 하신 일까지 반갑고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26절을 보고 큰 안도감을 갖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 더 이상 우리 죄를 씻을 다른 조치가 필요없다는 점을 통해서 이미 우리가 얼마나 큰 은총 속에 있는가 하는 점에 안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을 빠짐없이 전부 다 받아드립시다.
단번에 끝난 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고서 염려할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가 진노의 자식이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인간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읽지 말게 하옵소서.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됩니다. 제대로 알아서 더욱 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4. 무서운 하나님(히 10:26-31)
------------------------------------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히 10: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
신자와 불신자 !!
신자와 불신자와의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신자는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있지만, 불신자는 진리에 관심이 없는 자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 자체가 그 인간을 격상시키는 것인데, 뭔가 다른 인간임을 말이죠. 그러니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고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겁니다.
돈만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 세상에서, 그런데 왜 난데없이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까요? 그만큼 서로 지향점이 다르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는 진리를 쳐주지 않는데, 그러니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진리를 이야기하지 않기, 진리는 없다고 여기기!” 라는 법칙만 통하는데, 이러한 법칙을 준수해야 세상 사람들과 대충 얽혀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판국에도 진리에 관심을 두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것은 이 세상에서 모든 관계를 다 끊고 떠나겠다는 것인데, 그런 자가 있다고 하면, 그런 자가 바로 ‘신자’ 라는 겁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추방을 당하더라도, 자기가 소속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신자이고, 관심이 없다고 하면 불신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 26절을 보겠습니다.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지 못했는데, 하지만 너희들은 받았다” 라는 것이죠. 진리를 받은 것이 어느 정도로 가치가 있는가 하면, “다시는 자기 죄를 위하여 속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 라는 겁니다. 즉 다시는 속죄제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귀한 진리를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이 점에 대해서 그만 입이 벌어지면서 미소를 띠게 되는데, 그러면서 “야, 가뿐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진리를 받고 폼을 내는 사람은,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라는 말씀을 놓고서, 그만 고민을 늘어지게 하게 된다는 말이죠.
목사님, 예수를 믿고 난 뒤 다시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갑니까?
그래서 강의를 마치고 나면 나오는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목사님, 예수를 믿고 난 뒤 다시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갑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서 다급하게 질문을 한다는 말이죠. “목사님, 제가 예수님을 믿는데, 그런데 다시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니, 반드시 답변을 좀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지금까지 제가 한 강의를 어떻게 들었습니까? 제가 모두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목사님이 강의를 믿음에 대해서 잘 해주셨는데, 저의 질문은 그 믿음이 아니라, 믿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는지, 바로 그 문제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은, 강의내용을 제대로 받아들인 것이 전혀 아니라, 그만 진리를 마치 칼로 둘로 나누는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인데, 즉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만 취하고 꼬리부분은 그만 떼버린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말씀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26절에서, 분명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이것을 믿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안심이 되어야하고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아하, 예수님만 있으면 되었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게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마음가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아무리 예수님이 하셨지만, 내가 다시 죄를 지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하면서 따지는 것은, 그것은 마치 진리를 두 동강을 내어서 반만 가지고 다니겠다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이 나오는데, 물론 정작 본인에게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이겠지만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 정리를 다시 해야하는데, 왜 진리라는 것이 우리가 다시 죄를 지어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것인지를 말이죠. 그 진리에 대해서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진리입니까?
여기서 오늘 본문 30절을 보겠습니다.
(히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
여기에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라고 하는데, 즉 진리 안에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고 만다는 것도 포함시켜서, 그것도 함께 수용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을 보면서, “나만 예수를 믿고 천국가면 그만이지” 라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하시는 일, 그 전체를 다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전체를 다 받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을 잘라서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지을 자신의 죄와,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의 맹렬한 심판이 너무나 무서워서, 그 공포심으로 인해서 그만 자기 쪽에서 예수를 포기하기로 작정을 해버리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즉 “나는 자신이 없어.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죄를 짓지 않을 자신이 없단 말이야. 그러니 예수님 안녕!” 이라고, 바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에서의 죄라는 것은,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심판할 것을 심판하신다” 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인데,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의 행동여하에 달렸다고 보는데,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차이점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지 마세요 !!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즉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게 됩니다. 당연히 자기가 만든 엉터리 기준을 가지고 말이죠.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시달리고 있는데, “나는 바쁘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취급을 받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채찍으로 치면서,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굽니다. “아,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지? 이 바보 등신아!”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지 않고, 기껏 하나님한테는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간다” 라는 사실만을 달랑 챙기고는, 그 나머지는 자기가 자신을 심판하기에 급급해하죠.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심판인데,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가지고 우리 인간의 그런 심판을 심판하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죠.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를 하면, ‘나’ 라는 것은 없는데, 그것은 사회가 만드는 겁니다.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회에 둘러싸여 있는데, 가정이라는 사회, 학교라는 사회, 직장이라는 사회, 바로 거기서 만든 기준이 우리의 자아상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수시로 변동하는데, 그러한 자아상이 우리 자신을 못살게 굽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 인간의 심판을 그만 심판해버리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자아상으로 인해서 잘못된 심판기준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죠. 주님의 뜻은 그것과 다르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머리가 있어서, 외부의 감각을 그 두뇌에서 조작을 합니다. 타인과 자아를 구분하는 것까지도 말이죠. 그러니 결국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이 자기의 꿈속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 성경을 보니,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라고 하니, 이 사실만 쏙 빼내어서 머리 속에 비축을 해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종교부분을 채운다는 겁니다.
저는 포커를 할 줄 모르는데, 왜 007과 같은 영화에 보면 “한 장 더!” 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죠? 물론 주인공은 포커를 잘 하니 그렇게 하겠지만, 그런데 우리는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그렇게 배팅을 하는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죠. 정리된 것도 없고, 확정된 것도 없는데 말이죠.
그러면 그 길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사회의 시선들이 앞서서 갔던 방식인, 즉 넓은 길이라는 겁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자기를 때리고 자학을 하는데, 심판을 하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보충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원부터 뒤집어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말인가요? “이 사회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 라는 것으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완전히 뒤집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두고 “진리를 안다” 라고, 혹은 “진리를 믿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씨뿌리는 비유 !!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에서 저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소위 ‘씨뿌리는 비유’에 대해서 소개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판이한 진리관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데 말이죠.
(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 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 13: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마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 씨뿌리는 비유에 있어서, 네 가지 경우를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씨가 길 가에 뿌려졌는데, 그런데 새와 와서 얼른 그 씨라는 말씀을 물고 가버렸다는 겁니다. 즉 “언제 내가 말씀을 들었나?” 라고 할 정도로 말이죠. 말씀을 들으면 날아가 버리고, 말씀을 들으면 또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리가 이런 식으로 대우받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말이죠.
두 번째로, 씨가 돌밭에 떨어졌는데, 그리고 싹이 났다는 겁니다. 이것은 처음 교회에 나와서 복음을 듣고 좋아서, “천국이여 어서 오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노라” 라고 하면서 감격을 했는데, 그런데 난데없이 가정이 어려워지고, 장사도 잘 되지 않고, 그리고 건강도 몹시 나빠지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모든 것이 필시 교회를 옮겼거나 아니면 종교를 바꾸었거나해서 생긴 저주야. 정말로 천국에 가기 힘들구나. 좀 쉬었다가 나중에 모든 것이 안정이 될 때, 그때 교회에 계속 다녀야지” 라고 다짐하는 자들에게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리가 고난 앞에서 얼마든지 무가치하게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죠.
세 번째의 경우는, 씨가 가시덤불 위에 떨어졌습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어려운 역경과 시련이 와도, 그것을 즐기듯이 잘 견딥니다. “시련아 오너라. 예수를 믿고 당하는 시련은 정말 복된 것이리라. 내가 얼마나 고난을 잘 이기는지 보여주리라”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야말로 순교자의 각오로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에리히 프롬’ 이라는 학자는 이것을 ‘매조키스트’ 라고 해서, 얻어맞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는데,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때리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지만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얻어맞는데서 자기의 의로움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나는 매력적인 여자야 !!
예를 들어서, 새댁이 교회에 나오는데 시어머니가 그만 보살이 되어서 구박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런데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만사가 잘 풀리더라는 말이죠. 남편의 사업은 번창하고,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고, 그리고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으니까, 여자로서 그 이상의 행복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만 예수님의 고난은 뒷전이고, 큰 역경을 헤쳐 나온 자기 자신이 신앙의 영웅이라는 사실, 그게 그만 자기의 간판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즉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누구를 믿는 겁니까? 예수님을 잘 믿는 ‘나’를 믿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고난도 받을 만큼 받았기 때문에 어디 무서울 것이 없는데, 그런데 비록 고난은 이겼을지 모르지만 세상적인 매력은 이기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이 된다는 말이죠. 바로 진리가 이렇게도 활용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겁니다.
이제 네 번째는, 씨가 옥토에 떨어진 경우입니다.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인간들의 예상을 넘어서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는데, 이것은 결코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는 겁니다. 진리가 그 자체적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인데, 인간의 행함이나 노고와 전혀 무관하다는 말이죠. 이것을 두고서 예수님은 ‘하늘나라’ 라고 하시는데, 즉 진리로서의 마지막 본질을 다 드러내었다는 겁니다.
진리는, 자기가 따로 챙길 필요가 없어 !!
이 전체가 진리라고 하면, 그러면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진리란 이처럼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이기에, 그 가운데서 자기가 행할 것을 따로 뽑아낼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를 올바르게 믿는 태도라는 겁니다.
오늘 따라서 침이 많이 튀는데(ㅋㅋ), 자기가 행한 것을 따로 뽑아내어서, 그것을 가지고서 잘했느니 못했느니, 그렇게 따질 필요조차도 없다고 하는 것이 진리를 믿는 결과로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심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무엇을 믿느냐?” 라는 것으로 실시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 28절과 29절을 보겠습니다.
(히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하나님, 좀 봐주세요 !!
참으로 무서운 말씀인데, 물론 불신자의 입장에서 이 말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발하겠죠. “하나님, 이왕 봐주시는 것, 왕창 다 봐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지은 죄를 불쌍히 여겨서 용서를 해주신다고 하셨는데,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서 왜 그리 짜십니까?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라고 말이죠.
“철이 없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도 있고, 속죄의 피도 무시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되어서 그것까지 간섭하셔야 하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까지 좀 봐주셔서 심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른이라면, 어른답게 대승대자비한 마음으로 인간을 다뤄주면 안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믿지 않는다고,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을 상대하지 마시고, 너그럽게 좀 봐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민수기 35장 30절과 31절을 보겠습니다.
(민 35:30) 무릇 사람을 죽인 자 곧 고살자를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민 35:31)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은 받지 말라 !!
여기 ‘고살자’ 라는 것은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의미하는데, 그리고 31절에 ‘속전(贖錢)’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속전이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지은 죄가 생각날 때면, 그 죄값을 하나님에게 드림으로서 죄를 용서받게 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고살자는 그 속전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여버리라고 하는데, 즉 속전을 바쳐서 다시 원상회복이 되는 기회를 박탈하라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속전제도라든지 속죄제도를 남기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우리가 구원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펼치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셨다는 겁니다. 즉 “나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네가 아느냐?” 라는 차원에서 말씀도 주시고, 그래서 예수님도 보내셨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정도로 거룩을 유지하려고 하느냐 하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죽이시기까지 거룩을 유지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살인한 자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생명연장으로서, 혹은 자기 하나 편하기 위하여 속전제도를 활용한다면, 이것은 극도로 속전제도를 모독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을 발로 짓밟는 태도라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 인간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예수를 믿지 않아도 그냥 봐주고 넘어가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섭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은 생각지 않고, 자기 이익과 안일과 행복만 염두에 두고서, 하나님의 사랑까지 이러한 개인적인 목적에 유용하겠다는 심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양의 피를 짓밟고 모독하는 행위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은 이런 자들을 겨냥해서 날아갑니다.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구원만 챙기려는 자들에게 말이죠. “이 저주받을 놈아!”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죄사함을 개인용으로 전환시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의 거룩을 계속해서 유지하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을 예수님의 피로 씻어서 유지하려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의 취지를 전혀 모르고, 예수님의 피가 없이도 만사가 잘 돌아가는 쪽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이런 비거룩을 하나님께서 그냥 봐줄 리가 없는데, 그래서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그만 맹렬한 불로서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겁니다.
이 바퀴벌레야 !!
쉽게 말씀을 드려서, 우리가 교회청소를 하는데 바퀴벌레가 한 마리 슬슬 기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퀴벌레가 하는 말이, “교회청소를 하는 것은 당신 인간들의 문제이고, 나 바퀴벌레는 나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청소를 하더라도 나를 건드리지 말고, 나를 비켜서 청소를 좀 하소” 라고 나온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바퀴벌레야, 네가 있으면 전체적으로 청소가 잘 되지 않아” 라고 하는데, 그러니 바퀴벌레가 하는 말이, “아니, 인간이 되었으면 넓은 아량으로 이 바퀴벌레를 좀 불쌍히 봐주소. 이 바퀴벌레하고 싸울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 그냥 보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지나가소” 라고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됩니까? 그만 발로 콱 밟아버리겠지요. 그리고는 “아, 깨끗하게 청소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된 자 !!
그런데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잘 동의하지 않으려는 것은, 처음부터 우리 자신이 진노의 자식이고 저주의 자식이고 심판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속성이 그대로 나온 겁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서는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원수된 자’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원수된 자를 위하여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보내셨다는 겁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그러니 우리로서는 이것이 얼마나 큰 횡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볼 때, “나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먼저 ‘원수된 자’ 라는 전제로 깔고서 예수님의 피를 생각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예수님의 화물제물됨과 더불어서 형성된 것이 곧 진리라는 말이죠. 이러한 점을 놓치고, 마치 칼로 반을 자르듯이 잘라서 예수님의 화목제물만 취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진리라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5을 보겠습니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여기 3절에 보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치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무 심하다는 말이죠. 물론 자기 자신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인정을 하는데, 그러나 본래부터 진노의 자녀라는 점에 대해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처음 만든 인간형을 원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변명하기 급급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 뒤에 나오는 하나님이 긍휼하신 그 사랑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왜 자기에게 필요한 말씀만 취하고 다른 것은 버립니까? 우리는 이미 저주의 분위기에 익숙해져있고, 이 세상의 원리원칙에 동의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너무 심해. 예수님의 피로 사랑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처음부터 용서해주면 참 좋잖아. 나는 정말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 맹렬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일까지도 당연히 반갑고 기쁘게 받아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디 불신자들에게만 해당이 됩니까?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마음속에도 얼마든지 피어날 수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2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우리는 여기 29절에 나오는 사실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하나님,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그런 자들은 저주를 받아도 당연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26절의 말씀을 보고 큰 안도감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더 이상 우리의 죄를 씻을 다른 조치가 필요치 않다” 라는 점을 통해서, 이미 우리가 얼마나 큰 은총 속에 놓여있는지, 그런 점에서 안심하게 된다는 겁니다.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그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한 번 봐준 것은 참 잘하신 일인데, 그렇게만 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나서 또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그것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바로 심판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
‘진주만’ 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보려면 비디오를 두 개를 빌려야 하는데, 상하로 되어있어서 하나만 보면 안 되고 두 개를 다 봐야 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도 전체를 다 알아야 하는데, 몽땅 다 봐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상만 보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믿고 다시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맹렬한 지옥불에 들어가야 합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고 진노의 자녀임을 먼저 인정해주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그 완벽한 인간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자기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름철에 소나기가 내리듯이 그렇게 인간 전체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부어졌을 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긍휼과 자비하심에서 벗어나기 싫습니다. 여기서 살겠습니다” 라는, 그런 평안함, 그게 바로 성도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면 마귀의 올무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치려고 한 적은 없었습니까? 하지만 날마다 덮치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24 오후 4시에 마침. - 녹취 구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히브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히 11:1-3) 믿음과 말씀 (0) | 2010.09.05 |
|---|---|
| (히 10:32-39) 고난과 신앙 (0) | 2010.09.05 |
| (히 10:19-25) 산 길 (0) | 2010.09.05 |
| (히 10:15-18) 실패와 은혜 (0) | 2010.09.05 |
| (히 10 :8-14) 무료 (0) | 2010.09.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