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0:19-25) 산 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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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산 길 2002년 2월 17일 33강
본문 말씀: 히 2:19-25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성경을 읽고 나면 우리는 괜히 속이 상해 집니다. "이 바쁜 시기에 왜 나보고 이 이야기를 하느냐?"에서 오는 속상함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은행에서 돈을 찾고 있는데 옆에 있는 어떤 분이 다가와서 본문 말씀과 같은 이야기를 늘어 놓으면 대단히 불쾌합니다. "당신 눈에는 지금 내가 은행에서 돈 찾는 이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하고 톡 쏘아주고 싶을 뿐입니다.
오늘 날 다들 바쁘게 살아갑니다. 이 분주한 시기에 성경 말씀은 참으로 한가한 이야기만 늘어놓습니다. 우리가 정작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성경 말씀은 눈치 코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서는 "안다"라고 한마디로 하고 얼른 성경책을 덮어버리지요. 이 바쁜 시기에 이렇게 집회로 모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야구 방망이들고 저 뒤에서 갑자기 소리친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것들이 이 바쁜 시간에 여기에 모여 뭐 하는거야? 야, 꼬마 너 숙제했어? 아줌마, 아줌마는 아침 설거지도 안하고 이 자리에 왜 앉아 있는 것입니까? 다들 집으로 갓! "하고 윽박지르면, 우리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 그렇지 내가 쓸데없이 여기에 왜 왔지. 그래 얼른 집에 가서 딴 일이나 해야지"그런 마음이 들겠지요. 물론 교인이랍시고 그런 망나니에게 한 소리 할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진정하세요.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 " 이렇게 나오면 야구 방망이 들고 설치는 사람도 지지 않고 계속 달려듭니다. "그래, 여기 모인 이유가 뭡니까? 한번 그럴사하게 설명해 보세요"
그럴 때 우리는 갑자기 말 문이 막힙니다. 속으로 " 우리가 왜 모여있지? 집에 가지 않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 모였다고 할까? 이렇게 나오면 저 사람이 대꾸하기를, 집에 가면 하나님 영광 안돼? 할 것이 뻔한데 뭐라고 할 말이 없네…"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하고 그 다음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 것입니다. 과학에서 말하기를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종의 관성이라는 것이 우리 행위에도 적용이 됩니다. 쭉 해오던 식으로 되풀이하면 나중에 해 오는 이력 때문에 이유도 모르는 체 반복하게 됩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모였는가 하면, 남들이 관심 밖으로 돌려버린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였습니다. 즉 남들은 사람 관계로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라면서 사회나 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철저하게 교육 받아 왔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맺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단다."하고 말입니다. 이제는 이런 생각이 우리의 체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다는 생각을 말입니다.
이 생각을 잠시 역사적으로 확대를 시켜보면, 약 200년 전까지 서양 과학에서는, 생명 있는 것과 생명없는 것은 확연히 구분된다고 여겼습니다. 생명있는 것의 재료를 유기 물질이라고 했고 생명 없는 것의 재료를 무기 물질이라고 했습니다. 상호 확연히 갈라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중간에 들어서서 무기물을 가지고 유기물을 실험식에서 합성을 해내었습니다. 탄소와 수소를 가지고 아세틸렌이라는 물질을 합성을 해내었습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서는 밀러라는 사람은 메탄과 암모니아와 수소와 물을 가지고 아미노산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 아미노산은 인체의 기본 구성 요소입니다. 이러한 과학적 업적은 오늘날 초등학교 시절 때부터 배웁니다.
생명의 창조와 관리까지 이제 인간 손으로 넘어 왔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손을 털쳐 버려도 상관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뉴튼이란 과학자이 살던 시대까지 사람들은, 세상 만물은 하나님이 직접 섭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뉴튼이 만유 인력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과가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든지 지구와 태양의 관계도 모두 만유인력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이제는 하나님의 간섭에서 인간이 떠나도 상관없는 시절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교육에 익숙해졌기에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은 항상 뒷전입니다. 하나님을 버리자는 이야기가 하니라 우선 순서에서 밀렸다는 말입니다. 집회로 모이는 것도 짬짬히 여유 있을 때를 이용하면 되지 모임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죽음 뒤에 인간이 어디로 갈지가 분명치 않으니 하나님을 대우하기는 하겠지만 꽤나 중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겁니다. 바쁘면 드물게 모이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니 오늘 본문 25절과 맞지 않는 겁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는 이 말씀과 왜 부합되지 않는가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처음부터 잘못 생각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길'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길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우대할 때는 나올 단어입니다.
길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통하는 연결고리라는 말입니다. 곧 이 세상은 떠나야 될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길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길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당할 자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정말 길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내 혼자 그 길을 믿으면 그만 아니냐"라고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정말 길을 믿는다면 주위의 사람들의 관계가 재조정될 것이 뻔합니다.
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생각입니까? 따라서 믿음이란 강요하거나 윽박지을 성질이 아닙니다. 오히려 길을 믿는다고 한다면 신기하게 봐야 합니다. 이 과학 시대에 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땅만 바라보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의 승부를 걸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헌신짝처럼 포기한단 말입니까? 정말 대단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길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세상은 단지 역 대합실과 같은 대기소 역할 밖에 안됩니다. 잠시 머무는 공간밖에 안됩니다. 떠날 준비만 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정말 우리 삶의 생리와 전혀 안맞지요. 참으로 기적이 와야 믿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길 이야기를 꼭 하셔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20절에 보면, 그냥 길이 아니라 '산 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죽은 세상에 불과하면 정말 살만한 세상은 이 세상에서 떠나서 가게 되는 그 세상이라는 겁니다. 정말 은행에서 초조하게 돈을 찾는 자에게 다가와서 이 산 길을 이야기하면 대단히 기분 나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점을 충분히 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새롭고 산 길로서 건져낼 자만 건져내겠다는 체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은 국수를 헹굴 때 체를 사용하지요. 빠질 것은 빠지고 건져야 될 것은 건지기 위해 체를 사용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다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체를 던져서 걸릴 사람만 건지시겠다는 겁니다. 사람이 기분 나쁜 방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대부분 다 빠집니다.
그러나 혹시나 체에 걸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걸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본문 24-25절의 말씀에 합한 자들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들은 자기 운명과 인생이 확장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보다는 하나님의 체, 즉 새롭고 산 길이 더 우선이 된 것입니다.
반면에 체에 안 걸리고 "헤헤 나는 빠졌지롱"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야구 방망이들고 집회를 헤치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될 것이 뻔합니다. "이 바쁜 시절에 무슨 쓸데없는 짓 한다고 모여 있나?"하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25절의 말씀, 즉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모이기에 힘써라"는 말씀은 용인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길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그 길을 어떻게 접어들 수 있습니까? 하는 점이 궁금할 것입니다. 20절을 다시 봅시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여기에 보면 휘장 가운데에 길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양궁에서 표적지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크레이 사격술은, 날라다니는 쟁반 같은 목표물을 명중시켜야 합니다.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길이란,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길이 없습니다. 출몰할 때만 생기는 길입니다. 언제든지 접어들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면 길은 어디 있는가? 길은 휘장이 있는 장소에만 길이 있습니다. 그것도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한 차례씩으로만 말입니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계시가 이것입니다. 우리같으면 "그냥 길만 주세요"라고 우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휘장부터 만들라고 했습니다. 휘장은 막입니다. 못들어가도록 가로막게 하는 막입니다. 즉 휘장은 "못들어간다"는 표시입니다. 길 이전에 휘장을 만드시는 것은 우리가 길에 들어설 입장이 되지 못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3:22-24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즉 하나님은 생명 나무의 길을 지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안 넣어 주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예 길이라는 말씀도 하지 않아야 하잖아요. 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 이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죽고 난 뒤 좋은데 가려고 하기 때문에 각자 나름대로의 길과 방법과 체를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길도 아닌 것을 저희들끼리 제멋대로 길이라고 규정하면서 천국을 가려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교회 등록했으니 천국 넣어주겠지, 목사나 장로 직분을 맡아서도 분명 구원될 거야, 낙타무릎이 될 정도로 기도를 많이 했으니 구원되겠지"라는 일방적인 길들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교회가 '구원의 체'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점을 하나님께서 철저히 확인시키려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들이 천국에 못 들어가도록 지키신다는 이야도 하시면서 동시에 길 이야기를 언급하셨습니다.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 모순점은 오늘 본문 22절에서 넉넉하게 풀립니다. 거기에 보면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휘장이 쳐져 있는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 휘장 안 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일년 단 한 차례만 허용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이 몸에 방울을 달고 들어가는 그 날 뿐입니다. 다른 날에 아무렇게나 함부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제사장은 그 휘장 안쪽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도로 이 쪽 세계에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아, 길이구나!" 물론 희생 제물의 피 덕분이지요.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하실 일의 맞뵈기로 보여준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다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작전은 이것입니다. 생명나무로 못들어가는 하신 그 장치를 그대로 모형으로 만들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장막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는 예수님 자신의 육체를 휘장으로 삼아 그것이 찢어져서 대제사장이 살아서 돌아온 그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방식말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 겁니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우리 쪽에서 내세운 모든 길을 포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 21-24절까지 보시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지혜와 표적과 기적을 바라는 심성도 십자가 피 앞에서 포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만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예수의 피를 힘입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에 다 기대하지 말고 아예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에 대해서 단지 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포기를 했느냐 하는 그 바탕 위에서 예수님만을 믿는 관권입니다. 즉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우리를 못들어가게 하셨다는 점을 감안합시다. 절대로 우리 자신을 믿지 맙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제시하는 방식과 길을 끊어버리고 해 주옵소서. 그리고 오로지 예수님의 피만 힘입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3. 산 길(히 1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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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속상해 !!
우리가 성경을 읽고 나면, 특히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읽고 나면, 우리는 어떤 마음이 드는고 하니, 괜히 속이 상하고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이 바쁜 시기에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라는 것에서 오는, 그런 일종의 짜증과 같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자기가 지금 은행에서 바쁘게 돈을 찾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성경말씀을 줄줄이 늘어놓으면 그만 불쾌해지고 마는데, 그러면 “당신의 눈에는 지금 내가 은행에서 돈을 찾는 이렇게 중요한 일이 보이지 않아요?” 라고 하면서 톡 쏘아주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도 여유가 있어서 조용히 명상을 한다든지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하면 몰라도 말이죠. 특히 여기 25절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필이면 왜 지금 하느냐는 겁니다. 나름 살아간다고 정신이 없는데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가 시비를 걸면 기분이 대단히 나쁜데, 그런데 하나님이 무슨 악취미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나오시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하나님도 좀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죠.
우리는 말씀에 관심이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을 올리는 식으로 다가오셔서, 우리는 관심도 없는 성경말씀을, 즉 예수 이야기를 자꾸만 들이대니까, 그렇지 않아도 성경을 보기 싫은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니 우리는 더욱 더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사람이 오기가 있는데, 옆에서 하라고 하면 더 하기가 싫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이것을 지금 읽어야 하나? 이것이 과연 나에게 다급한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때는 귀찮은 생각까지도 든다는 말이죠. 시간이 나면 읽으면 좋지만, 요즘 같이 바쁜 때에 굳이 이런 성경을 봐야하느냐는 겁니다.
다들 집으로 갓 !!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솔직한 감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보기 싫어하는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여있는데, 누군가 야구 방망이라도 들고 와서, 저 뒤에서 갑자기 소리친다고 상상을 해보자는 말이죠.
“이것들아, 이 바쁜 시간에 여기에 모여서 무엇을 하는 거야? 꼬마야, 너는 숙제했어? 아줌마, 아침 설거지도 하지 않고 이 자리에 왜 앉아있어? 다들 집으로 갓!” 라고 하면서 윽박지르면,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 그렇지. 내가 여기에 왜 왔지? 그래, 얼른 집에 가서 설거지를 마저 해야지” 라고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물론 교인이랍시고, 그런 망나니에게 한 소리를 할 수도 있어요.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진정하세요.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나오면 야구 방망이를 들고 설치는 사람도 지지 않고 계속 달려듭니다. “그래, 여기에 모인 이유가 뭡니까? 한 번 그럴듯하게 설명을 좀 해보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데, 그러면서 속으로 “우리가 여기에 왜 모여있지? 집에 가지도 않고 말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였다고 할까? 그렇게 하면 저 사람이 ‘집에 가면 하나님에게 영광이 안 돼?’ 라고 나올 것이 뻔한데, 달리 뭐라고 할 말이 없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정말로 그러한데,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 라고 하고는, 그 다음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이죠. 달리 그 이유를 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성경을 보기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마음과 서로 동일한 마음의 연장선에 놓여있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쭉 해오던 그대로 !!
과학에서 말하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그 관성이라는 것이 우리의 행위에도 역시 적용이 됩니다. 계속해서 쭉 해오던 식으로 되풀이를 하면, 나중에는 그렇게 해오던 것 때문에 이유도 모르는 체로 끌려서 계속해서 반복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참 문제인데 말이죠.
여러분, 우리가 왜 여기에 모였는고 하면, 남들이 관심 밖으로 돌려버린 그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모였다는 겁니다. 남들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서 모든 것을 끝내겠다”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이어져야한다” 라는 생각 때문에 모였다는 말이죠. 바로 그런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지, 아니면 관계를 끊고 살아가는지, 그게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는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사회나 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철저히 교육을 받아왔는데, “애들아,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가 있다. 먼저 자기 것부터 챙기고 남는 시간이 있으면 하나님을 챙겨라. 제발 부탁이다” 라고 말이죠. 그리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그만 우리의 체질이 되고 말았는데, “그렇구나.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구나” 라고 하는 것이 말이죠.
우리는 그런 소리를 평생동안 온 몸으로 되풀이해서 듣고 또 들어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는 “이 모임을 없애라” 라고 하면, “그래, 알았어. 집에 가면 되잖아”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겁니다.
유기물질과 무기물질 !!
이것을 잠시 역사적으로 확대를 시켜보면, 약 200년 전까지 기독교가 융성했던 서양에서는 어떻게 생각을 했는고 하니,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은 확연히 구분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생명이 있는 것의 재료를 유기물질이라고 했고, 생명이 없는 것의 재료를 무기물질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서로 확연히 갈라진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런데 19세기 중간에 들어와서, 무기물을 가지고 유기물을 합성해내었다는 겁니다. 즉 탄소와 수소를 가지고 ‘아세틸렌’ 이라는 물질을 합성해내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20세기초에 들어와서는, ‘밀러’ 라는 사람은 메탄과 암모니아와 수소와 물을 가지고서 아미노산을 만들어내었다는 겁니다. 이 아미노산은 인체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인데 말이죠.
그러니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생명은 처음부터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손으로 생명을 만들 수 있다” 라고 여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즉 생명의 창조와 관리까지 이제 인간 손으로 넘어왔다는 말이죠. 이것은 “이제는 하나님이 없어도 우리끼리 살아갈 수가 있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게 곧 과학교육이라는 겁니다. 오늘날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것을 배우는데 말이죠.
뉴턴이란 과학자가 살던 시대까지 사람들은, “세상 만물은 하나님이 직접 섭리하신다” 라고 믿었는데, 그런데 뉴턴이 그만 만유인력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말이죠. 그 이전까지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이제부터는 사과가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든지, 지구와 태양의 관계도 모두가 만유인력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신은 이 세상을 만들어놓고 손을 뗐다” 라는 것인데, 즉 “이제는 하나님의 간섭에서 인간이 떠나도 상관없는 시절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정해주기는 하는데, 하나님이 손을 뗀 것과 동시도 우리 인간도 하나님에게서 손을 뗐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교육에 우리가 익숙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은 항상 뒷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없어도 우리끼리 살아갈 수가 있다” 라는 것이 그만 체질화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을 버리자는 이야기가 하니라,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는 겁니다. 자기 일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모이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를 모이면 되고, 모임 자체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전혀 모이지 않으면 되는데, 왜 모입니까? 아직은 죽음 뒤에 인간이 어디로 갈지가 분명치 않아서 하나님을 대우해주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대단한 존재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쁘면 가끔씩 모이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와서 “이 바쁜 시간에 여기서 무엇을 합니까?” 라고 하면, “그렇지. 우리가 무엇을 하지?”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게 오늘 본문 25절과 전혀 맞지를 않는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라고 하는 말씀과 말이죠. 이 말씀이 전혀 우리 체질과 맞지를 않다는 겁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러면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것이 있기 때문인데, 그러면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20절을 보겠습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길, 산 길, 십자가의 길 !!
여기에 보면, ‘길’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즉 ‘산 길’ 이라고 하는데, 혹은 ‘살 길’ 이라고 해도 되고 말이죠. 이렇게 ‘길’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렇게 길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용인해주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진짜로 길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곧 길, 산 길, 즉 십자가의 길인데, 이 길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모두 나쁜 놈들이고 상종치 말아야 될 놈들이라는 겁니다. 정말로 길이 있다고 하면 말이죠.
제가 처음 설교를 했을 때라면, “여러분, 예수님만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무조건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고 하면서, 그리고 그냥 그렇게만 해버리면 흥이 나지 않으니까, “여러분, 이것을 믿는 분들은 아멘을 하세요” 라고 했을 텐데, 그런데 지금은 제가 먼저 그렇게 아멘을 하는 것을 말리고 자제를 시키고 싶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믿을 못할 이야기를 해놓고 그것을 믿으라고 한다면, 요즘과 같은 이런 과학시대에, 어떻게 그것을 아멘을 하면서 믿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하나님이 우선이 아닌 이 시대에, 어떻게 그런 말을 믿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해야 믿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우대할 때는 나오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즉 “이쪽 세상보다는 저쪽 세상이 더 중요하다” 라는 겁니다. 이 길이라는 것은,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통하는 일종의 ‘연결고리’ 인데, 그러니 이 세상은 곧 떠나야하는 세상이라는 말이죠.
언제나 떠날 준비를 !!
하지만 그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이고, 그래서 나름 이 세상에서 승부를 걸고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승리했다는 기쁨도 누리고 같이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길이 있다고 함으로서, 이 세상은 그야말로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대합실’과 같은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정말이지 길이 있다고 하면 말이죠.
대구역과 같은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에 가면, 실제로 그 앞에 있는 식당들의 음식 맛이 별로인데, 한 번은 수원에서 오뎅을 사먹었는데, 국물에 무슨 미원만 넣었는지 얼마나 그 맛이 닝닝한지 말이죠. 터미널 앞이라서 한 번 왔다가 가면 그만인 뜨내기 손님들로 보아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물론 저의 편견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런 터미널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다 떠난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도 길이 있다면 떠날 준비만 하면 되는데, 거기서 승부를 걸 일은 없다는 겁니다. 설령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더라도, “지금 서울행 기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 당장에 그만 두고 기차를 타고 떠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길이 있다는 것은, 이쪽은 대기상태이고 길 넘어있는 저쪽은 고정된 영원한 세계라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라고 하셨으니, 그것을 누가 믿겠느냐는 말이죠. 우리의 살아가는 생리와는 전혀 맞지를 않다는 겁니다. 그것을 아멘을 하면서 믿으라고 강요를 한다고 해서 믿어지겠습니까? 전혀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닌데, 물론 강요할 필요도 없고 말이죠.
죽은 세상, 산 성도 !!
그런데 그것을 오늘 본문 20절에서는 ‘산 길’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지금의 우리는 죽어있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즉 “저쪽은 산 세계이고 이쪽은 죽은 세계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니, 그러면 우리는 졸지에 죽은 세계에서 죽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헛수고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애들아, 여기에 산 길이 있단다” 라는 이야기를 하시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듣는 사람들의 입장도 좀 생각을 해주어야 하는데, 듣는 사람은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모른다는 겁니다. 은행에서 돈을 찾다가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말이죠.
지금 돈을 찾아서 아이들 용돈도 주고 반찬도 사고 해야하는데, 그런데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길입니다” 라고 하면, 갑자기 열을 받으면서 “아줌마, 얼른 저리 가소”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그 아줌마는 가면 그만이지만, 성경말씀은 이렇게 펼쳐져 있으면서 우리에게 그런 듣기 싫은 잔소리를 계속해서 해대고 있다는 겁니다.
‘산 길’과 ‘체’ !!
이 길은 마치 ‘체’와도 같은데, 왜 국수를 헹굴 때 사용하는 것 말이죠. 이 ‘체’ 라는 것은, 빠질 것은 빠지고 건져야할 것은 건지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산 길’을 가지고 체처럼 사용해서 건져낼 자만 건져내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모든 사람을 다 건지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체를 던져서 걸릴 사람만 건지시겠다는 것인데, 그것도 사람들이 기분이 나빠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대부분은 다 빠지고 말겠지만 말이죠.
다시 말해서, “그 길은 새롭고 산 길입니다” 라고 해서, 그것이 ‘체’ 역할을 해서, 거기에 걸린 놈들만 건지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이고 전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실은 모두가 기분이 나쁜데, 걸린 놈들도 기분이 나쁘고 빠져나간 놈들도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죠.
모두가 다들 바쁜데, 그러니 내용과 상관없이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분은 쉬지 않고 기분이 나쁜 ‘체’를 가지고, “이것이 바로 너희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선된 것이다” 라고 하면서 걸러내는 작업을 지금도 계속해서 하시고 계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면 대부분이 다 빠지고 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걸리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걸인 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25절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체에 걸린 놈들은 모두 모여라 !!
여기에 걸려든 자들은 자기 운명과 인생이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 세상보다 하나님의 체, 즉 새롭고 산 길이 더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상의 기쁨보다도 모이는 것이 더욱 기쁘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우리끼리’의 집단적인 공동체 의식이 생기면서, 거기에서 그 체를 바라보면서, 자기들을 걸러준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즐거워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새로운 공동체가 생기는데, 그런데 반면에 체에 걸리지 않고, “헤헤 나는 빠졌지롱” 라고 하면서 다행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은 야구 방망이를 들고 집회를 부수고 싶은 충동을 가지겠죠. “이런 바쁜 시기에 쓸데없이 왜 다들 이렇게 모여있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런 자들에게는 25절의 말씀, 즉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모이기에 힘써라” 라는 말씀은 전혀 용인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훌륭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면서, 그 뒤에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너무 바쁘기 때문에, 먼저 그것부터 해결하시고, 시간이 허락되면 다들 모여서 말씀도 듣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시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오늘 본문 25절은, 즉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더욱 더 모이기를 힘쓰자” 라는 말씀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바쁜데 왜 모이는가? 시간이 날 때 모이면 되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내가 야구 방망이를 들고 가볼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취미라고 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이렇게 성경말씀을 가볍게 보지만,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에 자기의 목숨을 걸었는데, 목숨을 걸고서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이 성경말씀을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는데, 그러면 우리는 “주님, 그렇다면 그 길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그 길을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 점이 궁금하겠죠. 오늘 본문 20절을 다시 봅시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휘장 가운데에 길이 있다 !!
여기에 보면, “휘장 가운데에 길이 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게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양궁의 경우에는 표적이 고정이 되어있는데, 반면에 ‘크레이’ 라는 사격의 경우에는 표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날아다니는 쟁반과 같은 목표물을 명중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다들 TV를 통해서는 본 적이 있지 싶은데, 실제로 이런 취미를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데 말이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성경에서 말씀하는 길이란 것은, 그것은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길은 없는데, 출몰할 때만 생기는 길이란 말이죠. 길이 보어야 우리가 가든지 말든지 할 텐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환장할 노릇인데,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길이 아닌데, 그러면 그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길은 휘장이 있는 장소에만 있다는 말이죠.
어떤 예를 들어야할지 망설여지는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손수건을 붙잡으면 병이 낫습니다” 라고 했다면, 그러면 모두가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끄집어내는데, 그래서 각자가 “이 손수건입니까?” 라고 하니, “그 손수건이 아닙니다. 바로 이 손수건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끄집어낸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사람이 없으면 손수건도 없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 길이라는 것은, 이 길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휘장’부터 먼저 만들어진다는 말이죠. 그 휘장이 바로 시내산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것도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한 차례씩만 허락되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시가 굉장히 복잡하다는 말이죠.
시내산에서 주어진 계시가 바로 이것인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휘장부터 만들라고 했어요. 아마 우리가 거기에 있었으면 “하나님, 싫습니다. 그냥 길만 주세요” 라고 우겼을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 돼. 휘장부터 만들어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 휘장은 일종의 ‘막’ 인데, 즉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휘장은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표시인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휘장을 먼저 만들게 하신 것은, 우리가 길에 들어설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길에 앞서서 먼저 휘장을 만들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공간과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을 그만 구별을 지어놓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길을 열어주세요” 라고 하면,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니 무슨 약을 올릴 일이 있습니까? 들어가게 해주세요” 라고 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올 때까지 기다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여기서 말하는 길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길이 있다. 그러니 어서 들어가거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길을 주어도 들어가지 못한다. 너희들은 그런 자격이 되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일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길을 말씀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길인데, 그러니 이것을 설교해야하는 목사로서는 참 난처하다는 것이죠.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하면, 우리는 지금 먹고 사는 것도 바쁜데,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그런 소리가 참 귀찮은데,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그 길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니까, 그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길은 없습니다. 들어가지 못합니다” 라고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데, 최초의 길이 거기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죠. 여기서 창세기 3장 22절에서 24절을 보겠습니다.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여기 24절에 보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은 그 길에 넣어주지를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몰래 들어가려고 하는데, 왜 옛날에 서커스 공연을 하면 천막을 올리고 몰래 들어가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기억이 없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그게 전혀 통하지 않는데,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안 된다고 하면 아예 길이라는 말씀도 하지 않아야 되는데, 그런데 왜 길을 만들고 지키라고 하십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말이죠.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길은 왜 만들고, 그리고 예수님은 왜 “나는 길이요” 라는 말씀을 하셨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이 죽고 난 뒤는 좋은 곳에 가려고 하기 때문에, 바로 그런 구원욕구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신 길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이미 각자 나름대로의 길과 방법과 체를 자기가 만들어서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인가? 구원의 체인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제시한 길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제멋대로 길이라고 규정을 하면서 천국을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교회에 등록했으니 천국에 넣어주겠지. 장로가 되었으니 구원은 분명하겠지. 낙타무릎이 될 정도로 기도를 많이 했으니 구원은 되겠지” 라고 하는, 그런 일방적인 길들을 각자의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교회에 등록해서 일단 구원은 챙겨놓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바쁘게 은행에서 돈을 찾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와서 길 이야기를 하면 귀찮다는 겁니다. 모이는 것도 시간이 있으면 모이고, 바쁘면 굳이 모이지 않아도 그만인데, 그러니 오늘날에는 교회가 그만 ‘구원의 체’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아무튼 우리는 우리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지고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의 그 길을 포기할 거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하시면서 마구 다그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전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그 길을 가지고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예수님을 죽으심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파악해라. 그리고 모두 다 바꾸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을 모두 다 바꾸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창세기 3장을 지상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곧 ‘성막’ !!
여기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즉 생명나무로 가는 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그대로 만들어놓은 것이 바로 ‘장막’ 인데, 즉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있는데, 거기에 휘장을 쳐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았다는 겁니다. 그것을 그대로 지상에 옮겨서 모세가 모형으로 만든 게 장막, 즉 ‘성막’ 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지상에 성막을 만들게 해놓고는 뭐라고 하십니까? 백성들이 “하나님, 길을 열어주세요. 휘장 때문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안 된다. 내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넉넉하게 풀리는데, 21절과 22절을 보겠습니다.
(히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여기 21절에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휘장이 쳐져 있는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는데, 그 휘장 안 쪽으로, 그게 곧 지성소인데 말이죠.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일년에 단 한 차례만 허용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7월 10일 대속죄일이라는 겁니다.
대제사장이 그때 몸에 방울을 달고 그날만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 방울은 소리가 나는 것으로, 그래야 대제사장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죠. 물론 다른 날에는 들어갈 수 없고 말이죠.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데, 천사들이 지키는 생명나무가 있는 그곳에, 그런데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제사장은 그 휘장 안쪽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다시 이쪽 세계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즉 “아, 이게 산 길이구나!” 라는 것인데, 물론 희생제물의 피 덕분에 말이죠. 그러므로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하실 일을 맛보기로서 미리 보여준다는 말이죠.
이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셔서 !!
그 당시에는 대제사장이 자기 혼자만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어서 자기 몸을, 즉 자신의 육체를 휘장으로 삼아서, 그러면 그 휘장이 찢어지면서 대제사장이 살아서 나온 그 길을 우리로 하여금 가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 겁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우리 쪽에서 내세운 모든 길을 포기토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의 것을 포기하는 것을, 여기 22절에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단지 안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것을 포기했다고 하는, 바로 그 바탕 위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자기를 믿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기에 말이죠. 우리는 바로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절대로 우리 자신을 믿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좀 봐주지 않겠는가?” 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자기 손수건이 아니라, 그런 것은 다 버리고, 예수님의 손수건일 경우에만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는, 잘라낼 것은 잘라내겠다는 것인데, 인간적인 아이디어, 지혜, 예상문제, 그런 것은 다 부수어 버린다는 말이죠.
이제 끝으로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24절을 보겠습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왜 십자가인가?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지혜를 끊어버리는 것인데,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도를 믿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이 십자가의 피라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왜냐하면 어리석고 무지하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그 방법 외에는 왜 안 됩니까?” 라고 물어봐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아직도 우리가 예수님과 막 먹으려고 하고, 예수님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오기나 자존심, 거기서 우리 마음대로 길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시나리오도 자기가 작성해서 말이죠.
하나님은 바로 이런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이 십자가 방식을 고집했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는, 그래서 그 누구라도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미련한 방식을 말이죠.
예수의 피를 힘입어 !!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예수의 피를 힘입어’ 라고 하는데, 여기에 우리 자신의 피를 첨가시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의 전도, 자기의 구제, 자기의 기도, 그런 것을 집어넣지 말라는 것이죠. 아무리 우리는 낙타무릎이 되어도 안 된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인데, 그 피를 힘입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걸려든 자들은,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바쁘기는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이제는 하늘나라의 새로운 가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 날이 다가올수록 더욱 더 모이기를 힘쓰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그런 삶의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장난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우리 자신의 일은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의 일마저 그렇게 여긴다면, 그것은 여전히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는 불신앙의 세계인 줄 압니다. 하지만 이제는 오직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23 오후 5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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