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히 10:15-18) 실패와 은혜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0:15-18) 실패와 은혜

정인순 2010. 9. 5. 11:09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32강-히10장,15-18(실패와,은혜)-heb020210.mp3

 

 

이근호

 

실패와 은혜

 

2002년 2월 10일 32강

 

본문 말씀: 히 10:15-18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 인간들은 우리 몸 하나라도 건사하기 힘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과 예수님까지 챙기려는 참 힘듭니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 행복이라는 것도 자기와 자기 가정만 지키면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행복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광을!"이라고 외치면서 차고 들어오니 우리 인간으로 봐서는 참으로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어떤 수를 쓰느냐 하면 하나님에게 생색은 내되 보상을 받아내고자 합니다. 마치 채권자가 부동산을 담보로 잡는 것과 같이 인간들은 천국을 담보로 잡아서 하나님이 제대로 자신들에게 기도 응답을 안해 줄 때는 마지 못해 천국이라도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어쨌든 교인들 마음 속에 "나는 손해보고는 가만 안 있는 인간이다. 상대가 하나님이라도 할지라도 챙길 것은 챙긴다"하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에게 관심갖기 보다는 주님마저 자신의 일에 끌어와서 도움되는 분으로 바꾸어놓겠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런데 아까 불렀던 찬송가 147장에 보면,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 달려 죽게 된 그 십자가를 우리가 왜 생각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생각할 게 많은데 말입니다. 아시아나 항공사의 여객기 조종사가 비행기를 운행하면서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생각합니까? 자기가 비행기 조종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비행기 조종술과 주 달려 죽은 십자가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잖아요. 차범근 감독이 기도하면서 예수를 부를 때에, 주 달려 죽은 십자가의 예수입니까 아니면 지금 한 일전 축구 경기 도중에 한 골 넣게해 주시는 예수입니까? 이런 축구 예수는 평생을 교회 다녀도 구원과는 무관한 예수입니다.

 

사실 십자가 달린 예수를 생각하는 것은 평상시의 자신의 일과는 별개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구태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그것 생각 안해도 가정의 행복에 지장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결국 십자가 죽은 예수님과 우리가 무관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태어날부터 실패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연세를 들어 늙어가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지만 현대 의학에서는 늙는 것도 병으로 봅니다. 따라서 일종의 환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환자 아닌 자는 누구입니까? 갓 태어난 신생아 밖에 없습니다. 그들만이 생명이 잠시나마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후로 늙음이라는 병으로 차츰 진척이 됩니다.

 

아무리 성형 수술해도 이 병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의 진실된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예수님의 최후의 모습이 나옵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여기에 보면,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버림 받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것은 저주받았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본질을 지닌 우리들이지만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심장과 목숨을 관장하시고 보호해주시고 햇빛과 공기와 비까지 공짜로 주십니다.

 

흔히들 세상은 돈 없이는 못산다고 하지만 우리를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들은 대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두 다리를 가지고 서 있게 된 것도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총에 대해서 우리가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가요? 그것은 실패자인 우리가 스스로 실패자 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신을 성공했다고 보고 이 성공에다 더욱 성공을 가미하기 위해 예수님을 부르다 보니,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빼놓고 있거나 무관심한 것입니다.

 

기도하면서도, "하나님, 이것 이것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답습니다. 알겠습니까?"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도리어 한 수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무엇이 은혜입니까? 내가 감사할 것이 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라는 기도를 해야하는 것이 피조물입니다.

 

사람이 실패를 모르면 은혜도 모르고 실패를 모르면 사랑을 모르게 됩니다. 언제 사랑의 감정을 갖는냐 하면 본인이 실패할 때입니다. 사람이 실패를 안한 상태에서는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가 나옵니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똑바로 살았다, 누구라도 내 흠이 있거든 한 번 잡아내봐라"하는 식입니다. 사랑이 없는 작자들이 꼭 자기 정당함을 내세웁니다. 이것으로도 이만큼 성공적 인생을 살아왔노라고 자부합니다.

 

실패를 모르니 자기 사랑만 남지요. 부부 싸움에도 정당함을 주장하게 되면 가정이 아니라 법원이 되고 맙니다. 바깥 사회에서 우리는 "사랑하면 손해본다. 사랑 대신 법으로 하자"하는 분위기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점차 체질화 되어 갑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교회와서도 같은 행세를 합니다. "교회 와 주어잖아. 천국 내놔라 기도 했잖아 복 내놔라"라는 겁니다. 이것은 상거래 일 뿐입니다. 사랑도 없고 은혜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은 모든 이들은 살고자하는 가운데서도 고독을 품고 죽었습니다. 그분이 채찍을 맞았는데 사실은 우리가 맞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 분이 징계를 받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 18절, 즉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라는 이것 하나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신앙이란, 내 것 내놓는 것도 아니요 자신의 착실함과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란 사랑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저쪽 예수님이 큰 사랑으로 오셨으니 우리도 사랑으로 마중 나가는 것입니다. "나 주님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마음을 주님을 환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생각하시기를, "아무리 예수님이 사랑으로 십자가 지셨지만 그 동일한 사랑이 내 마음에서 안 생기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지 않습니까?"하고 의문점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우리가 차를 사면 오디오까지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동차 샀는데 라디오 안 나오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그것만으로 우리에게 해 주실 것을 끝내신 것이 아니라 그 공로로 얻어진 것까지 우리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 속까지 넣어주시는 겁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로운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안 믿기지는 이유는, 스스로 실패자임을 자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 바탕 위에서만 진행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실패자임을 파악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론하십니다. 마치 스키나 피겨 선수들이 얼음판이나 눈 위에서는 고난도 기술과 예술을 펼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은혜로 깨닫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2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결코 우리는 은혜를 은혜로 인정 할 줄 모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실패의 마음으로 빈 쟁반 되게 하시고 그 위에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우리 마음 속에 차곡 차곡 채이게 하십니다. 마치 빈 쟁반과 과자와 과실들이 계속 담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은혜로운 과자와 과실이 무엇입니까?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돌비석에다 새겨서 주었습니다. 일종의 교과서를 던져 주신 겁니다. 학생들이 교과서를 받았다고 다 이해하고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학생들은 교과서 내용을 미리고 보고서는 질려버리지요. 어느 세월을 저것을 다 외우냐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돌비에 십계명을 적어서 우리에게 교과서로 주셨습니다. 과연 누가 이 교과서대로 살겠습니까? 예수님 이 외는 없습니다. 따라서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 지킬 전담자를 세우시고, 그 다음 9절-10절에 보면,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첫 것을 폐하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공짜로 얻는 법칙만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조차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일방적으로 은혜로 넣어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절차에 대해서 다른 곳에도 언급하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2:8-9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완전한 실패자이기 때문에 이 후부터는 예수님의 공적만 자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를 소망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망은 계속해서 또 다른 좌절을 낳습니다. 어떤 분은 한 손이 없는 것에 좌절하지 않고 다른 한 손으로 피아노를 쳐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직도 더 철저한 절망을 모르는 자입니다. 한 쪽 손마저 날라가 버린다면 그래도 피아노에 미련두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요 하나님의 선물인 것으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선물로서 또 다시 소망하는 바를 얻으려 해서는 아니됩니다. 로마서 8:24에 보면,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또 다시 욕심이 일어납니다. 더 이상 소망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은혜의 일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분수도 모르는 채 철없이 하나님에게 달라는 소리만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2. 실패와 은혜(히 10:15-18)

---------------------------------------

(히 10: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

아, 신경 쓰이네 !!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두라고 하는데, 하지만 정작 우리 인간들은 자기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까지 챙기려고 하면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자기 몸만 간수하면, 자기 가족만 잘되면 그게 행복의 절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소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고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주접을 떨면서 살아가려고 하니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즘 같으면 설도 챙기고 해야하는데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이중 삼중으로 시달리고 있으니 당연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데, 왜 예수님에게 그렇게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몸 하나만 잘 간수해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참 똑똑하다. 잘한다” 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종종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데, 일단은 하나님을 믿어주고 예수님을 믿어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어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그냥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믿어주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를 챙기려고 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에게 좋은 마음으로 돈을 빌려주었는데, 그런데 그만 그 사람이 돈을 떼먹고 날랐다는 겁니다. 얼마나 화가 나는지 모르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에게 부동산이 있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속이 풀리는데, “내 돈을 떼먹고 어디를 도망간다는 말이야? 이제 이 땅은 내 것이다” 라고 하면, 복수라도 한 것 같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교회에 충성해도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드는데, 마치 돈을 떼인 기분이 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업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남들보다 몸이 특별히 건강한 것도 아니니 말이죠.

그러니 뭔가를 차압을 하든지 해야하는데, 그래서 천국을 노린다는 겁니다. 즉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본 것, 천국에 가서 보상을 받자. 이제 천국은 내 것이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천국이라도 건져서 그 동안 자기가 이 땅에서 손해본 것을 만회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런 심보로 교회에 나오는데, 하나님 사랑이고 예수 사랑이고 간에, 그런 것은 웃기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는 손해를 보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천국이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강렬하다는 말이죠.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

우리가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가 147장에 보면, 그 가사에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라고 되어있는데, 아니 우리가 주 달려서 죽은 십자가를 왜 생각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생각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아시아나 항공사의 조종사가 비행기를 운행하면서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생각합니까? 자기는 자기에게 맡겨진 비행기만 잘 조종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승객들을 무사히 목적지까지 잘 데려다주면 된다는 겁니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과 주 달려 죽은 십자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말이죠.

차범근 감독이 경기를 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그러면 그게 주 달려 죽은 십자가의 주님입니까? 아니면 지금 한일전 축구경기 도중에 한 골을 넣게 해주시는 주님입니까? 그런 예수님은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구원과는 무관한, 즉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정육점 주인이 고기를 썰면서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생각합니까? “예수님도 고개를 잘 썰었겠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과연 그런가요?

그러니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은 평상시의 자신의 일과는 별개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태여 그런 예수님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가정의 행복에 지장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 이유로 인해서 결국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과 우리는 그만 무관한 관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예수를 우리는 생각하기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괜히 손해만 보고, 그래서 짜증만 나고 스트레스만 점점 쌓인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외쳐도, 그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전혀 예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일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에 관련을 지어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제대로 생각하는 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말이죠.

우리는 ‘실패자’ !!

그러면 우리는 왜 그런 예수님을 생각해야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실패자’이기 때문인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까, 이렇게 새해가 되면 우리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데, 그것은 늙는다는 겁니다. 보통 나이가 들어서 백발이 되는 것을 영광스럽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로차원에서 하는 말이고, 현대의학에서는 늙는 것도 병으로 본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가 일종의 환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환자가 아닌 자는 누구라는 겁니까? 갓 태어난 신생아 밖에 없는데, 그들만이 생명이 잠시나마 유지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도 이후로는 곧장 노화라는 병으로 차츰차츰 진척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나이가 90이 지나가면 그야말로 병색이 완연한데, 그래서 “아버님, 어디가 아픕니까?” 라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지금 놀리나? 너도 내 나이가 되어봐라. 아프지 않은 곳이 있는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늙은이를 공경하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어떻게 환자를 공경하느냐는 말이죠.

키에르케고르 -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어간다’ !!

그러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환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이라는 겁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실패작인데, 그래서 병든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어간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이미 병에 걸렸는데, 즉 실패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미리 실패하자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진짜 똑똑한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미리 실패할 수가 있습니까? 그냥 도박을 해서 전 재산을 다 날리면 됩니까? 그것이 아니라, 주 달리신 십자가를 생각하면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우리의 본질이 담겨있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미리 실패하자고 외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미리 실패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은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심장이 뛰는 것도 은혜이고, 잠을 자는 것도 은혜라는 말이죠. 사람에는 자율신경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기가 의식하지 않아도 움직이는데, 사실 중요한 것은 다 자율신경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심장이고 말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지시하고 있기에 말이죠. 햇빛과 비도 그러한데, 모든 것이 하나님은 은혜라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돈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은혜인 줄을 우리는 왜 모르는고 하니, “나는 실패자다” 라는 것을 모르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즉 자기의 본질을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더 성공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는 말이죠.

“하나님, 예수님, 제발 도와주세요. 이것은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 안 됩니다” 라고 하는데, 아니 무슨 협박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도대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 누가 창조주고 피조물인지 전혀 구분도 되지 않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하나님, 무엇이 은혜입니까? 감사할 것이 또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기도할 줄 모르고, “이대로 좀 해주세요. 내일까지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적금을 깨서 헌금을 했으면, 그 대가로서 뭔가 좀 해주는 것이 있어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사랑은 실패를 타고 !!

사람이 실패가 없으면 은혜를 모르게 되는데, 그러면 사랑이 없다는 말이죠. 사랑은 언제 아는고 하니, 실패할 때 비로소 사랑을 느낀다는 겁니다. 반면에 실패를 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이 나오는데, 즉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제대로 살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실패도 하지를 않고, 남들이 보기에 완벽하게 버티고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랑이 없는 자들이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는데, 그런 윤리도덕으로 자기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으로 계속해서 밀어 부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부싸움이 일어나는데, 즉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라는 겁니다. “니가 못났나? 내가 못났나?” 라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가정이 가정이 아니라 그만 뭔가를 판단해야하는 법원이 되고 말았는데, 얼마나 답답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저는 부동산 중개소와 같은 곳에 가면 얼마나 답답함을 느끼는지 모르는데, “얼마입니까? 그렇습니까? 그러면 계약을 합시다” 라고 하는데, 인간미도 없고 갑갑한지 모르는데, 무슨 안드로메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마치 로봇이나 외계인을 대하는 것 같다는 겁니다.

우리는 직장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것을 점차 점차 배우고 있는데, 즉 “사랑하면 손해를 본다. 그러니 사랑이 아니라 법으로 하자. 계약서대로 하자. 이제 도장을 찍어라”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완전히 하나의 체계가 되고 체질이 말았는데, 그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예수님, 도장을 찍읍시다 !!

그래서 교회에 와서도 뭐라고 합니까? “예수를 믿어줄 테니까, 천국을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그러니 사랑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냥 딱딱한 문서에 도장을 찍는, 즉 “교회에 왔으니 천국을 내놔야지요. 기도를 했으니 복을 줘야지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하던 행세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주님에게 하고 있는데, 자기 딴에는 성공했다는 겁니다. 실패자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가 성공자라고 보면 그 다음부터는 사랑이 없어지는데, 물론 은혜도 없어지고 말이죠. 그러니 주님 앞에서 당연히 뭐라고 합니까? “제가 이렇게 해드릴 테니, 주님도 나의 노동의 대가로 이렇게 좀 해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장사꾼이 되고 마는데, 하지만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다들 살고 또 살고자 하는 풍토 속에서, 그분은 그야말로 남을 위해서, 그야말로 저질이고 저질인 우리를 위해서 홀로 죽으셨다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최후모습이 마태복음 27장에 나오는데, 46절입니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여기 ‘9시’ 라고 하는데, 그 당시 9시는 6시간을 더하면 되는데, 즉 오후 3시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는데, 우리가 버림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버림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의 저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우리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아야 하는데 그분이 대해서 다 받았다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18절을 보겠습니다.

(히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만들기 위해서 그분은 외롭게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살려고 하는 분위기 속에 휩싸여있지만, 그분은 홀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왜 그분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달라고 하기만 하고 말이죠.

신앙은, 사랑과 사랑의 관계 !!

그러니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닌데, 자기의 착실하고 의로운 행동을 내놓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신앙은 사랑과 사랑의 관계인데, 주님께서 먼저 사랑을 내놓았으니 우리도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보잘것없는 우리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으로서 마중을 나가자는 겁니다. “저는 주님이 좋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말이죠. 그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가정이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런 가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하면 됩니까? 금식기도를 할까요?” 라고 하지 싶은데, 거기에 대해서 조금 더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동차를 구입하면 차만 덜렁 줍니까? 그게 아닌데, 라디오와 에어컨이 옵션으로 달려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차를 샀는데, 라디오가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라고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무엇을 걱정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니까, “주님 혼자서 잘났네. 주님만 그렇게 달리면 뭐하지? 내가 거룩해야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까지도 옵션으로 딸려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오늘 본문 16절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내가 다 해줄게. 걱정하지마 !!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다” 라는 것만 약속이 아니라, 물론 그게 제일 중요한데, 자동차로 말하면 엔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우리에게 해주실 것을 끝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으셨든 그 의로움을 옵션으로, 사실 옵션이 아니고 필수인데 말이죠. 그것을 우리 마음속까지 배달을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모두 예수님이 하신 일 가운데 다 포함되어있다는 말이죠.

요즘 어떤 교단에서는, 사실은 다 그렇지만 말이죠. 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의 몫이지만, 그것을 믿고 말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자유의지이기 때문에, 그러니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삽니다” 라고,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겁니다.

앞으로 나오세요 !!

그러면서 찬양집회를 열어서 분위기를 띄우고 하는데, 전자오르간에 사이키 조명까지도 동원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데, 그래야 다른 일들을 모두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곗돈을 넣어놓은 것도, 월드컵 16강도 잊게 만들고, 오직 주님만 생각나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 나와서 울먹이면서 간증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다음에는 병을 고친 사람이 등장하고 말이죠. 그러면서 마지막 코스가 무엇인고 하니, “각오를 새롭게 하시는 분들은 두 손을 들고 찬양을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해놓고, 제일 마지막에는 “그런 분들은 이제 앞으로 나오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좀비 모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하지만 과연 이런 게 필요합니까? 이렇게 해야 구원을 받느냐는 말이죠. 제가 감히 장담할 수 있는데, 아주머니가 설거지를 하다가 예수를 믿어도 그날 밤에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물론 교회에 나온 적이 없어도 말이죠. 기도도 할 줄 모르고, 전도도 한 적이 없는데, 그래도 주님의 십자가와 자기 관련성이 있음을 알게 되면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예수님이 하신 일의 연장이기 때문에, 그게 하나의 세트가 되어서 다 준다는 말이죠. 십자가를 지신 것만이 아니라, 그 영생까지도 우리 마음속에 택배로 안전하게 배달을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솜씨인데, 주님이 홀로 다 하신다는 말이죠.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로운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까지도, 그 모든 것을 주님이 다 하신다는 말이죠.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는 실패자야 !!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우리는 왜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 겁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실패자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어떤 바탕 위에 세워지는고 하니, 자기가 실패자라고 하는 바탕 위에 있을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는 겁니다.

우리가 스키를 맨 땅에서 탈 수가 있습니까? 안 되는데, 그 바탕에 일단 얼음이 깔려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어떤 자들에게 이해가 되는고 하니, 그 바탕이 은혜로 깔려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은혜로 깔리려고 하면 먼저 자기가 실패자임을, 그래서 자기가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실패를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자기가 실패자라는 것을 우리의 힘으로 과연 알 수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고린도전서 1장을 보겠는데, 20절에서 24절입니다.

(고전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기에 십자가가 나오는데, 즉 먼저 십자가가 깔리게 된다는 겁니다. 왜 중국 음식점에 가서 코스메뉴를 시키면 무엇부터 나옵니까? 찐빵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쟁반부터 깔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코스가 무엇인고 하니, 먼저 십자가부터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너는 실패자야. 이게 너의 본질이고, 너의 정체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값비싼 화장품을 사용하고 보톡스 시술을 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실패한 인생이니 말이죠. 나중에는 부작용이 생겨서 더 보기가 싫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를 먼저 들이대는데, 그 다음에 오는 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은 십자가이고, 2장은 성령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을 무엇을 알게 하십니까? 그게 12절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 그 다음이 성령 !!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있을 때만, “아하, 이것이 은혜구나” 라는 소리가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부터 먼저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러니 십자가를 먼저 들이대면서 “이분은 왜 죽으셨는지 너희들은 아는가?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돌아가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은 왜 오셨는지 아는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은혜임을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은혜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오시는데,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인고 하니, 성령이 얼음판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 얼음판 위에서 마음껏 스케이트를 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십자가를 주셔서 죄를 용서해시고 구원을 해주셨는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해주시는데, 그러면 그게 하나님의 어떤 연속적인 작업에 의해서 이루어졌느냐는 겁니다.

아하,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구나 !!

그것이 바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인데,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차곡차곡 담겨있다는 말이죠. 마치 쟁반에 땅콩강정이 담기고 깨강정이 담기고, 또한 과자도 담기고 사탕도 담기고, 그렇게 담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난 다음에,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인지, 그게 것을 알아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남은 한 평생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아하, 창세기는 이렇게 해서 은혜고, 신명기는 이렇게 해서 은혜고, 시편은 이렇게 해서 은혜고, 마태복음은 이렇게 해서 은혜구나” 라고, 그렇게 하나님의 하신 일이 계속해서 차곡차곡 쌓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마치 눈이 쌓이듯이 쌓인다는 말이죠. 마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고 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말이죠.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게 쌓이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오늘 본문 16절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하게 설명해주어야 하는데, 지금 남은 시간이 별로 없지만 말이죠. 어떻게 하지 말까요? (ㅋㅋ).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옛날에는 교과서 !!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셨는고 하니, 마음속에 법을 넣어주신 게 아니고, 처음에는 덜렁 교과서만 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학생시절에는 이 교과서가 참으로 골치가 아픈데, 특히 독일어 교과서는 말이죠. 그래서 “선생님, 이것을 해야 대학에 갑니까? 하지 않고 공장에 가면 안 됩니까?”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국어 교과서는 그동안 없던 한자까지 들어있는데, 수학 교과는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죠. 그러니 공부를 하지 않고 대학에 가는 방법이 없느냐는 겁니다. 학생들은 교과서를 받아서 그 내용을 미리 보고는 다들 질려버리는데, 어느 세월에 일일이 다 외우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돌비에 십계명을 적어서 우리에게 교과서로 주셨다는 겁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안식을 일을 지켜라” 라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머리가 좋은 사람은 외울 수도 있는데, 하지만 외우면 무엇을 하느냐는 겁니다. “하나만 어겨도 모두 어긴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말이죠.

갈라디아서에 보면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임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모두 다 지켜야 축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과연 누가 교과서대로 살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예수님 이외는 없다는 겁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지킬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법을 만들었는데, “수준이 높은 사람은 많이 지키고 낮은 사람은 적게 지켜도 괜찮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자기들이 전혀 하나님도 아니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그렇게 법을 만들고 했다는 겁니다.

아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옛날 삼국시대에 원효대사가 있었는데, 그때는 불교가 교종이 되어서 법으로 했는데, 즉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한다” 라고 말이죠. 그때 원효대사가 중국으로 가려다가 말고 돌아와서 도를 닦고 난 다음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런 부처님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민중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는데, 그때 민중불교가 생겼는데 말이죠. 민중들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하니, “이제는 하나만 외우면 되는데, ‘아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것만 외우면 됩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것만 외우면 모든 축복을 다 받는다는 말이죠.

오직 믿음으로서 극락에 간다는 것인데, 즉 ‘돈오돈수’ 라는 겁니다. ‘돈오점수’가 아니고 말이죠. 성철스님의 주장도 그러한데,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행함이 아니고 말이죠. 이게 미륵신앙인데,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아이디어라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인데, 즉 “죄를 많이 지었으면 헌금을 많이 하고, 조금 지었으면 적게 해도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완벽한 것인데, 하나도 빠짐이 없이 모든 것을 다 지켜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이 그 법이 너무 심하다고 하면서 중간에서 그만 완화를 시켰는데, 소위 지도자들이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5절 말씀을 보면, 이것이 지난 번 본문인데 말이죠.

(히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그분이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

여기에서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라고 하는데, 즉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따로 한 몸을 예비하셨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한 몸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셨는데, 그래서 9절과 10절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여기 9절에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전담해서 행하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 그것을 믿음으로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실패의 얼음판에 있음을 한다고 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아하,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이 은혜구나. 천당에 가는 것이 은혜구나. 정말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덜렁 구원을 받았구나. 그 배후에는 주님이 홀로 작업하시고 홀로 열심히 일하신 덕분이구나. 그 은혜를 선물로 받아서 구원을 받게 되었구나” 라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실패자인데, 하지만 은혜를 안다는 점에서 인간승리라는 겁니다. 마지막에 승리를 해야 진짜 승리인데, 그러니 순간 순간 승리한 것에 기가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모든 것에 실패를 했으면 꿀릴 것도 없는데, 이왕 실패한 것인데 무엇이 그리 겁이 나겠느냐는 겁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그렇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방금 목사님이 한 이야기가 다 성경에 있습니까? 있다면 우리는 왜 몰랐지요?” 라고 하신다면,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을 보시면 됩니다. 거기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사람이 자기가 실패자라고 여기지 않으면 항상 자랑을 하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그러한 자랑거리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실패자가 되기 싫어. 지금은 비록 이렇지만 나중에 반드시 성공을 할거야. 안 되는 것이 어디에 있어. 나는 할 수 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 자체가 자기주제를 파악하지 못해서 나오는 소리인데, 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못하느냐는 말이죠. 아직 실패의 맛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데, 정말로 실패하게 되면, 자기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즉 극복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물론 손을 하나 잃으면 나머지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치면 되는데, 그런데 그 손마저도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자기를 실패자로 보지 않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소망은 가지지 마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망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라고 하는데, 소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 자체가 진짜 행복이라는 겁니다. 실패자가 무슨 염치로 소망을 가지느냐는 말이죠. 소망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자기 분수를 모른다는 것인데, 그런 잘못된 소망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낙심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런 소망을 버리시고, 사랑만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그런데 우리는 눈만 뜨면 소망을 찾는데, 소망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좌절을 하고, 그러면 소망을 좀 낮추는데, 하지만 낮춘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더욱 낙심을 하고, 그렇게 재수를 하고 삼수를 하면서 계속해서 시도를 한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말이죠. 심장이 뛰라고 해서 뛰는 것도 아니고, 햇빛과 공기도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알아서 주시는데,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도 그렇다는 말이죠.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창세기 9장을 보겠는데, 11절에서 13절입니다.

(창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창 9: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창 9: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무지개 언약, 이것이 곧 하나님다움 !!

이것이 ‘무지개 언약’ 이라는 것인데, 11절에 “내가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다움’ 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무지개를 걸어놓고 이런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이죠.

그 자비가 신약에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는데,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다시는 너희의 죄를 묻지 않겠다” 라고 하는,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여러분, 그런데도 우리가 계속해서 “다오, 다오” 라고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까? 마치 담보물을 잡듯이, “그래도 이렇게 교회를 열심히 다녔으면 챙길 것을 챙겨야지. 하나님, 어서 주세요” 라고 하면서, 그런 식으로 종교생활을 주장하고, 윤리와 도덕을 주장할 것이냐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그 크신 사랑 앞에서, 저와 여러분도 사랑으로 마음으로, 물론 우리가 가진 사랑은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사랑으로 마중을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과 사랑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언제 사랑으로 알아본 적이나 있습니까? 평소에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하면서도 사랑으로 대하지를 않고, 흥정을 하려고 하고, 또한 법으로 대하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으로 바로잡아주옵소서. 주님은 사랑으로 오셨기에, 그 사랑을 실패자로서 귀하게 받아들이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22 오후 8시에 마침. - 녹취 구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히브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 10:26-31) 무서운 하나님  (0) 2010.09.05
(히 10:19-25) 산 길  (0) 2010.09.05
(히 10 :8-14) 무료  (0) 2010.09.05
(히 10:1-7) 제사와 한 몸  (0) 2010.09.05
(히 9:23-28) 죄사함  (0) 2010.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