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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10 :8-14) 무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0 :8-14) 무료

정인순 2010. 9. 5. 11:06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31강-히10장,8-14(무료)-heb020203.mp3

 

 

이근호

 

무료

 

2002년 2월 3일 31강

 

본문 말씀 : 히 10:8-14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우리는 모든 면에 민감합니다. 순간적인 승리가 왔을 때 기뻐하면서도 순간적인 패배가 왔을 때는 대단히 기분 나빠합니다. 사람들이 지은 글들 속에는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이 더 많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슬픈 일에 대한 두려움을 사전에 처리해 보겠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순간적인 성공과 실패에 민감하게 되면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이 듭니다.

 

그렇면 자신과 관련있는 성공과 실패 말고 따로 중대한 일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원치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 일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점을 놓치고 개인적인 성공과 실패에만 신경 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개인적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헛수고가 될 뿐이지요. 그래도 우리는 마지못해 변명을 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잘 압니다. 율법에 보니,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했으니 제가 그대로 실천에 옮겨서 하나님을 기뻐시게 할 작정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방금 주장한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하고는 서로 충돌되는 이야기입니다. 즉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마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하실거야"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하고는 전혀 다르더라 이 말입니다.

 

자, 이렇게 되니 그렇다면 평소에 우리가 성공과 실패를 논했던 모든 기준이 한마디로 말해서 너무나도 일방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제사와 번제와 속죄를 원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 것입니까? 그 본문을 계속 보니,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원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폐지해 버릴 것에 준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려고 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폐지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이유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고자 하셨습니까? 그것은 새 것을 세우기 위함이랍니다. 그러니까 새것을 세우는데는 필히 옛것을 폐지하는 절차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옛 것, 즉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새 것을 세울 수 없고, 새 것을 세웠다면 필히 옛 것은 이미 폐지되 버린 이후가 분명하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세우시고 일방적으로 폐지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 13절에 나오는 내용 때문입니다. 거기에 보면 '자기 원수', 즉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하나님의 원수를 의식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폐지되기 위해서 주셨고 실제로 그 율법을 주셔 놓고서는 폐지시키고 새 것을 등장시켰습니다. 이러한 연이은 하나님의 행위가 악마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우리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왜 인간들이 이 점을 알지 못할까요? 그것은 이미 인간 자체가 세상과 자신을 보는 눈이 악마에 의해서 조정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제일 가치있게 보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이 사실입니다. 그 외 그 어떤 것도 이것보다 더 중요시 여기지 않습니다. 남이 아니고 내가 살아 있다는 이 사실이 가장 기본입니다. 이 당연함에서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고자 합니다. 성공하면 당연한 것이고 실패하면 하나님께서 짜증을 부릴 준비가 늘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제일 가치 있는 것이 이미 확정이 된 상태에서 자동적으로 다음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자신에 의해서 나오는 자신만의 행위들이겠지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재차 또 확인해 주는 그 행위들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러한 모습은 곧 배후에 악마와 결탁되었기에 생긴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러한 자기 모습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달리 어떻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고 여깁니다. 마땅히 자기 행위를 발휘해서 하나님 조차도 기쁘게 해 드릴 수도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다른 한 몸'을 준비해 두신 겁니다. 그리고 그 몸에 의해서 행한 것만 새 규칙으로, 새 질서로 세우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새 것'은 전혀 인간의 몸으로 행사하는 행위과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니,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신 분은 예수님인데 왠 난데없이 우리가 덜렁 거룩하게 되는 겁니까? 참 희안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우리가 거룩함을 입은 것이 이해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 놓여 있음을 인정할 때나 나타나는 현상입니까?

 

여러분 누구에게 미안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방어하고 수호하고 지켜려고 할 때는 절대로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저 최선의 노력에만 열중하게 됩니다. "덤벼라. 내 세계는 내가 지킨다"라고 말입니다. 예배 시간에 늘 늦으시는 분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좀 더 일찍 오시면 어때서"하고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오늘 같은 날 예배 전 10분 전 오시는 것을 보고서는, "아이고 미안스러워라. 저런 분에 대해서 이전까지 예배 시간 때문에 공연히 원망했구나"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예수님 때문에 천국에 가면서도 성공과 실패의 신화 사이에 끼어서 얼마나 공연히 하나님을 원망해대었습니까. 쉴새없이 죄를 지어가면서 시간이 쭉치는 주제에 "내 인생이 내 마음이 든다느니 아니든다느니, 콩 내놔라니, 팥내어 놔라니" 하면서 얼마나 토를 달며 하나님께 짜증을 부렸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보기에 미안스럽지도 않습니까? 누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순간 만큼은 그동안 간직하고 있는 심적인 고통이 사라집니다. 즉 "덤벼, 누구든지 덤벼보란 말이야. 내 인생은 내가 지켜 낼거야"라는 이런 긴장에서 벗어난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이 따로 있다고 여기면 모든 일이 무겁게 느껴질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7을 보세요. 거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애초부터 우리 것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마음이 들든 아니들든 자기 인생을 가지고 우리가 왈가왈부할 입장이 못됩니다. 모든 것이 무료입니다.

 

어떤 교회가 예배 장소가 문닫게 되어 광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같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원망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길 바닥으로 내모십니까? 우리보고 복음을 전하란 말입니까 전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복음만을 전하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도와주셔도 시원찮은 마당에 왜 방해하시려고 합니까? 어서 빨리 아늑하고 평안한 예배 처소를 허락해 달란 말입니다. 제발 마음껏 주의 복음 전할 수 있게 말입니다"라고 기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 보세요. 이와 비슷한 사태가 거기에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40일을 함께 있던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이 갑자기 자신은 하늘로 떠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걱정이 아니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로 떠나신 그 곳만 쳐다보고 있으니 천사와 나타나서 책망하십니다. "이 사람도 왜 하늘만 쳐다보느냐. 저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네 할 일들이나 하라"

 

여러분, 예배 처소가 아직도 있는 저희 '우리 교회' 교인들은 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나 합니까? 과연 예배 처소가 있는 마당에 과연 사도행전 1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처럼 '있음'이란 성경의 내용을 아는데 도리어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기기 바랍니다.

 

따라서 아무 것도 내세울만한 것도 없는 입장인 것을 아는 자만이 예수님이 드린 몸으로 인해 우리가 졸지에 거룩하게 된 것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도 무료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광야 생활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 광야가 오늘날 우리 하고는 상관없는 환경이라고 여기기 쉬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을 불가능속으로 집어넣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가능이란 불가능 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자신 몸을 드렸는데 우리가 졸지에 거룩해지는 것도 불가능속에서 우리가 가능한 것을 무료로 얻은 결과입니다.

 

우리 힘으로 거룩해지려면 모든 시도가 다 불가능입니다. 오직 무료도 주어집니다. 인생도 무료이듯이 구원도, 영생도, 천국도, 거룩함도 무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 놓고 스스로 폐지시키고 예수님의 한 몸의 행위만을 새로운 것으로 내세우시고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원수의 정체를 노출시키기 위함입니다.

 

10절을 다시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되어있지요.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과연 누가 이 '우리'에 포함될까요? 사도행전 2장 29-3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다윗의 무덤은 그대로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무리 사람이 신앙이 좋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의 무덤은 지상에 그대로 있고 그의 시체도 썩은 채로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 분, 한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되시면 그 자리에서 성령이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가 생성되는 겁니다. 인간들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거룩함을 입게 되는 그 '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노력은 불가능합니다. 이 불가능함 속에서만 하나님은 가능함으로 작용하십니다.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는 않는 자는 여전히 악마와 결탁되어 있는 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다가 다시 폐지시키시는 겁니까? 그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와 결탁되어 있는 악마와 분리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한 몸'되시는 분은 일종의 쇄기와 같은 역할을 하시는 분입니다. 쇄기란 돌이나 얼음이나, 나무에다 박아서 이쪽과 저쪽을 갈라지게 하는 장비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날 때부터 악마와 친구요 또 악마가 또한 우리의 친구로서 다정하게 지낸 사이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안 떨어집니다. 그러나 무료로 주신 그 한 몸의 위력으로 인해 우리는 악마와 결별하게 하십니다. "아, 이래서 하나님의 원수이구나. 이전까지는 다정한 내 친구인 줄 알았는데…"하면서 말입니다.

 

악마는 우리를 격려해 줍니다. 용기를 부여합니다. "너는 할 수 있어. 열심히 하면 불가능은 없어. 너의 존재는 가치있는거야. 제발 네 인생을 더욱 더 가치있는 인생으로 바뀌어보란 말이야.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네가 다듬어 나가는거야. 너는 무료가 아니야. 무료로 얻은 인생에다 값어치를 추가해봐. 더욱 더 훌륭한 자아가 될꺼야"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악마의 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보고 넓게 보게 하옵소서. 순간적인 성공과 실패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하나님이 무료로 주신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1. 무료(히 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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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히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히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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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모든 면에서 민감한데, 그래서 순간적인 승리가 왔을 때는 기뻐하지만, 순간적인 패배가 왔을 때는 대단히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짜증이 나고 말이죠. 이런 통계가 있다고 하는데, 즉 “사람들의 글 속에는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이 더 많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에게 기쁜 일은 당연한 것이고, 반면에 슬픈 일은 없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실패를 하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그만 한이 생기고, 그런 한을 글로서 풀어내다가 보니, 사람들의 글 속에는 기쁜 일보다는 괴롭고 슬펐던 일들이 그만 주류가 되어있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이 너무 슬픈 것을 많이 의식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 주눅이 들어있다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슬픈 일에 대한 두려움을 미리 처리해보겠다는 의식, 즉 “이런 일이 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먼저 앞당겨서 어떻게 해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어쨌든 순간적인 성공과 실패에 민감하게 되면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이 듭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과 관련이 있는 성공과 실패가 아닌, 따로 중대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없는 것 같지만, 그게 있어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 그것이 곧 사람의 본분이라는 말이죠.

따라서 우리가 이런 점을 놓쳐버리고, 개인적인 성공과 실패에만 신경을 쓸 수는 없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그러면 개인적인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헛수고가 될 뿐이라는 말이죠.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히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원치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아,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이 있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 도대체 그게 무엇입니까?” 라고 나오겠지요.

애들아, 내가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 것이 있단다 !!

그게 8절에 보면 나오는데, 즉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그런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이유를 하나님께 물어보게 되는데,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배웠던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대로 제대로 한 번 지켜보겠다고 나오는데,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 왜 법을 따라서 드리느냐? 나는 그것을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야말로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데, 때로는 황당스럽기도 하고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 처음에 우리의 인생이 주눅이 들어있다고 했는데, 어디에 꽁꽁 묶여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힘들어한다는 말이죠. 왜 그런가 싶어서 그것을 분석해보니, 좋은 일에는 깔깔거리면서 생기면 웃기는 웃는데, 그런데 그 웃음 속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있더라는 겁니다. “혹시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분에게 참 미안하구나 !!

그러니 우리는 ‘내 인생’ 이라는 테두리에 그만 갇혀있는 꼴이 되고 말았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 것이 있다” 라는 말씀을 듣고 나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아하, 내가 내 인생이라는 것에 갇혀있어서는 안 되겠다” 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다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때, 그때는 인생에 대한 걱정과 불안도 같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참으로 희한한데 말이죠.

그럴 때는 “내 인생은 내가 지킨다” 라고 하는 긴장감도 그만 어디론가 사라지고 하는데, 뭔가 가벼워진다는 겁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이, 그게 자기 인생이라고 여길 때는 그렇게 무겁고 힘에 버거웠는데, 그런데 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때는 솜털처럼 가벼워지더라는 말이죠.

우리 아버님이 오늘은 예배시간 10분 전에 오셨는데, 그런데 평소에는 오시는 시간이 항상 정해져있어요. 항상 10분 후에 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좀 일찍 나오셨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일찍 나오시니까, 그런 마음을 가졌던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는 겁니다(ㅋㅋ).

가벼워지는 인생 !!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하나님께 제대로 살아드리지도 못하면서 인생이라는 것을 걸치고 있으니,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으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죄송하냐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마치 몸무게가 확 줄어든 것처럼 가벼워지더라는 말이죠.

그러니 “내 인생을 자기가 꾸리겠다” 라고 하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설칠 때는, 그야말로 남들에게 뒤지지 않겠다고 할 때는, 그럴 때는 그렇게 자기 인생이 무겁고도 힘에 버거웠는데, 그런데 “인생을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시간만 다 까먹고, 하나님께 정말이지 죄송하고 미안스럽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는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들이 다 감사의 덩어리가 된다는 겁니다. 인생 자체가 그저 고맙다는 말이죠. 자기는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 이렇게 70을 넘게 살게 해주시고, 사실은 자기 인생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짜증을 부리면서 살아왔는지, 거기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가 넘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참으로 미안한데, 그런데 그런 미안한 가운데 무엇이 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하나님이여, 명령만 하옵소서. 제가 얼마나 순종을 잘 하는지, 그 솜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객기를 부리면서 살아온 것도 들어있는데, 그러니 그러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는 전혀 모르고, 그저 “법대로 하자” 라고 하면서, 마치 교통사고가 나면 차에서 내려서 상대방에게 하듯이 말이죠.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대들면서 살아온 참으로 무모한 인생이 아니었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쪽에서 바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무엇을 기뻐하지 않는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첫 번째 것인 율법을 주셨다는 말이죠.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너희들, 속았지?” 라고 하시는 것과도 같은데,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첫번 것을 폐지하셨기 때문에, 첫 번째로 것에 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것은, 이제 그런 짓은 그만두라는 말이죠.

그러면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을 보겠습니다.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

여기 9절에 보면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둘째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것은 율법이고, 둘째 것은 10절에 나오듯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 몸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는 말이죠.

그 한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셨는데, 그것을 믿음으로서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두 번째의 것인데, 그러니 우리가 의논해서 예수님을 앞장세우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첫 번째 율법도 하나님이 제시한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의 한 몸도 역시 하나님께서 제공한 것이라는 말이죠.

인생자체가 ‘무료’ !!

그런데 하나님께서 둘 다 자기가 주셔놓고는, 첫 번째 것을 폐지하고 두 번째를 세우신다는 말이죠. 이렇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십니까? 인생자체가 곧 ‘무료’ 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무료이고 공짜인데, 우리가 산다는 것도 무료이고, 천국에 가는 것도 역시나 무료라는 말이죠.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소유를 하려고 하니까, 첫 번째 것인 율법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율법을 주세요. 지키겠습니다. 제 것으로 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첫 번째 것은 폐지하시고 두 번째 것으로 주려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13절입니다.

(히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하나님의 원수 !!

여기에 ‘자기 원수’ 라고, 즉 ‘하나님의 원수’ 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악마들이 보이는데, 그런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객기를 부렸다는 겁니다. 즉 “내 것이 있어야만 하고, 그 중에서 일부를 떼어서 하나님에게 바치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구원을 하신다” 라고 말이죠. 자기 것이 있을 때, ‘나’ 라는 게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인생의 모든 고민이 거기에서 생기는데,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그런 것은 다 치우고, 자기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살아남은 것, 그게 전부라는 겁니다. 지금 당장에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가 살아남았다는 것인데, 그 다음에야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성령님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가 살아남았다는 현실,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이 악마의 생각이라는 것은 우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처리하는 과정 속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의 생각조차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마귀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 예배당이 없어요 !!

오늘 아침에 십자가 마을에 들어가 보니, 부산에 어느 목사님의 교회에서 광고가 났는데, “이제 교회 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직 20여명의 교인이 있어서, 일요일과 수요일에 잠시 장소를 빌려줄 수 있는 분은 연락을 바랍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건물을 유지하려고 하니 부담이 되니, 이제부터는 모일 때마다 약간의 임대료를 주고 사용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우리교회의 교인들이 그런 입장에 있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마음이 생성되겠느냐는 겁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도와주지는 않고, 이렇게 일이 꼬이고 망하는 쪽으로 몰아넣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정말 부끄럽습니다. 예배당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도대체 이게 뭡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시위라도 벌이지 싶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거기서 우리는 자기 것이 없다는 것에서 오는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이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함께 40일 동안 거하게 되는데,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이제 하늘로 올라갈란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황당하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제자들의 생각에는, “도대체 이제 누구를 믿고 이 모임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는가?” 라는 겁니다. 기가 차지도 않는데, 그래서 제자들이 “하늘나라가 임하는 것이 이때입니까?” 라고 하니, 예수님은 “아니다. 먼저 올라간다. 그것은 아버지가 정하신 것이기에,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내가 가서 성령을 보낼 테니, 그 성령이 오면 너희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말씀을 하시고는 구름과 같은 것이 와서 가리우더니만, 그만 하늘로 올라가시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늘만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천사가 와서는 뭐라고 합니까? “지금 무엇들을 하지? 이제 다들 각 자의 할 일을 해야지” 라고 하는 겁니다.

(행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행 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게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데, 지금 예배처소가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공중에 떴습니까? 흐지부지하게 된 겁니까? 예수님의 사명도 같이 날아간 것인가요? 주의 말씀도 같이 없어진 것인가요? 정말로 예배처소가 없다고 해서 주의 일이 중지된 것인가요? 성령님도 없어졌느냐는 겁니다.

예배처소가 없기에, 오히려 !!

오히려 예배처소가 없는 상태에서 이 사도행전 1장이 제대로 보이는데, 그렇게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기가 죽지 아니하고 마음껏 주님과 교제를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배처소가 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것이 있기에 우리는 사도행전 1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래도 아파트가 있고 자기 집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월세든지 전세든지 간에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인자는 머리를 둘 곳이 없다” 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우리가 그래도 성경을 조금 안다고 하는데, 과연 조금이라도 아느냐는 겁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압니까? 이미 가진 것이 있는데, 알기는 무엇을 아느냐는 말이죠. 이미 남편이 있는 자가 남편이 없는 것을 어떻게 알고, 이미 자식이 있는 자가 자식이 없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 인생이 그야말로 무료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이런 시간을 주시고, 목숨을 유지시켜주시고, 그렇게 살게 해주시는 그분에게 뭔가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자기 인생이 자기 것이 전혀 아닌데, 그런데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라고 자기 확신을 하면서, 스스로 세뇌를 시키면서 부질없이 살아왔던 것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미안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순간 모든 어두운 그림자도 같이 다 없어진다는 말이죠.

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었던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오히려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 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무명한 자 같으니 유명한 자로다” 라고 했는데, 마귀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으니, 사도바울은 마귀의 나라에서 유명한 자라는 겁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말이죠.

(고후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말씀을 대해도 무지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리고 하나님께 원망과 짜증을 마구 냅니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전혀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두 번째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그 두 번째 것이 오늘 본문 10절 말씀인데,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얻었노라’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그것을 믿는 동시에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값없이, 무료로 얻었다는 말이죠.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런데 사람이 자기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거기에 보태려고 난리인데, 그러니 오히려 없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부산의 그 교회의 경우에, 그래도 일요일은 비는 장소가 많아서 빌릴 수가 있는데, 문제는 수요예배라는 것이죠. 저는 그렇게 되면 수요예배를 없애버리겠는데 말이죠.

비단 이게 부산의 그 교회경우뿐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들도 이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은데, 다들 살기에 바쁘고, 그래서 교회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점점 더 없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보다도 자기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왜 우리가 거룩함을 입는가?

그렇다면 왜 여기서 두 번째 것, 즉 “예수님이 몸을 드림으로서 우리가 단번에 거룩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느냐는 말이죠. 이제부터는 여기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드리심으로서 우리가 단번에 거룩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여기서 어려운 것은, 예수님이 자기 몸을 단번에 드렸는데, 거룩하기는 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느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렸으면 예수님 혼자서 거룩해지는 것이 맞는데, 그런데 왜 우리가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도대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광야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꾸만 우리를 불가능한 환경 속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운데 우리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하나님이 준비하신 환경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광야’ 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광야에 살고 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을 획득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이라는 말이죠.

그게 우리가 아무 것도 행한 것도 없이 덜렁 거룩함을 입었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먼저 불가능 속에 사로잡혀 있음을, 그리고 그게 구체화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어떤 것이 불가능인지, 그것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면 된다” 라는 것이 아니라, “해도 소용이 없어” 라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기도를 해도 안 돼. 전도를 해도 안 돼. 설교를 해도 안 돼. 교회를 세워도 안 돼”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그야말로 절실하게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자식이 아닌 웬쑤 !!

부모가 자식을 키우다보면, 4살이나 5살 때는 천재가 아닌 아이가 없는데, “어쩌면 저렇게 똑똑하지?” 라고 하는데, 그래서 유치원 때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하지요. 정말 천재인 줄 알고 말이죠. 그런데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천재에서 둔재로 바뀌게 되는데, 그러면서 보통 정도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도 할 수 없이 과외를 시키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식이라도 하지 않으면 보통조차도 따라잡을 수가 없으니 말이죠. 그리고 15살이 넘어가면서 드디어 자식이 아니라 원수임을 알게 되는데, 매일같이 사고를 치고 완전히 집안을 말아먹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예가 적절한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평소에 우리는 세상 만사가 자기편이라고 여기고, 우리의 친구인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원래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망하게 만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료로 영생을 집어넣어서, 그야말로 쐐기를 박아버리신다는 겁니다.

쐐기라는 것은, 왜 돌을 쪼갤 때 집어넣는 쇠로 만든 뾰족한 물건인데, 그것을 넣어서 망치로 때리면 그만 돌이 둘로 쪼개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서 공짜로 영생을, 복음을 집어넣게 되면 무슨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까? 그동안 우리가 단짝이 되어서 같이 얼싸안고 있었던 것들이, 그만 갈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를 찾아가는 작업 !!

하나님께서 그런 작업을 하시기 위해서, 즉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다” 라고 할 때, 그 ‘우리’는 정해진 우리가 아니고, 물론 믿는 사람들에게는 정해진 것인데 말이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정해진 것이 아닌데, 그러니 “우리가 누구인가?” 하면서 찾아가는 작업이 곧 하나님의 작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라고 하는 그 ‘우리’에 동의한다고 하면, 하지만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착한 일을 해도 자기가 알아서 해야하지, 즉 “고생은 예수님이 하시고, 거룩은 우리가 얻고” 라는 것은, 그것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런 사람은 그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일종의 균열인데, 짝 짝 갈라진다는 겁니다. 자기는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하나님의 원수를 사랑하고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보다 원수를 함께 하기를 좋아했고, 그 원수와 헤어지기를 거절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떤 것이 하나님의 원수인가?

그러면 어떤 것이 하나님의 원수인지, 그것을 말씀드리고 오늘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여기서 사도행전 2장을 보겠는데, 29절에서 33절입니다.

(행 2: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행 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우리가 악마라고 하면 아주 무섭고 괴팍하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인품이 고상하고 자비롭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악마가 무엇에 대해서만 발작을 하는고 하니, “위에 계신 분이 자신의 영으로 죽을 우리가 살린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거부를 한다는 겁니다.

왜 우리가 악마와 친구가 되는고 하니, 악마는 너무나 우리의 마음을 잘 알고, 우리에게 잘해준다는 겁니다. 우리의 인격을 최대한으로 존중해주고 위해준다는 말이죠. 즉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행복할 자격이 있어. 너는 신이 될 수 있어”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대로 있는 다윗의 무덤 !!

그런데 여기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다윗은 무덤에 그대로 있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다윗은 능가할 수 없다면, 그 어떤 인간도 다윗과 같은 신세다” 라는 겁니다. 다윗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여전히 그 시신은 묘지 안에 있는데,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율법대로 한다고 하면 다윗조차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한 몸, 즉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가 없이는, 다윗이 아닌 그 누구라도 거룩함을 얻을 수 없고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점을 학교에서 이야기주지 않는데, 이 세상에서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은 이미 악마가 장악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는 악마에 대해서, 악마가 만들어낸 인식 때문에 속고 있다는 말이죠. 마귀가 만든 마귀의 상은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멘’이나 ‘엑소시스트’와 같은 영화에 보면 악마가 나오는데, 목이 360도가 돌아가고 말이죠. 신부가 나타나서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악마는 “니나 물러가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악마가 만든, 악마를 보여주는 영화인데, 거기에 속아넘어가라고 말이죠.

쉽게 말해서, “너는 잘할 수 있어” 라고 하는 것은 악마의 속삭임이고, “너는 무료야. 니가 싫던 좋던 간에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 아냐. 너의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야”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인데, 그러니 우리는 미안해하고 고마워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나서 그 율법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마귀와 단짝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는데, 탐내지 말라고 하면 탐내지 않을 수 있는데,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면 할 수 있는데, 나는 할 수 있는데, 나는 할 수 있단 말이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무덤으로 인도하는 것인데, 그래서 아직도 다윗의 무덤이 그대로 있다는 말이죠. 결국 우리의 인생은 죽음으로 간다는 겁니다. 아무리 마귀가 우리에게 친절하게 잘해주어도, 그것이 결코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인생은 곧 광야, 그러나 !!

여러분, 광야에서 과연 가능한 것이 무엇일까요? 광야는 그야말로 모든 가능성을 다 없애버리고, 모든 것이 다 엉터리임을 드러낸다는 말이죠. 그래서 광야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오직 주님의 가능하심을, 즉 주님의 인생을 우리에게 무료로 나주어 주신다는 말이죠.

오늘날 우리가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야말로 광야에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것으로 하나님에게 바치려고 하지 말고, 우리의 인생 자체를 대패로 밀듯이 밀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어차피 주님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니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좀 더 넓게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잘했니 못했니,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렇게 후회를 하면서도 또한 자기의 것을 다듬어 가는데, 그렇게 힘든 인생을 자초해서 살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인생에서 벗어나서, 늘 미안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21 오전 12시에 마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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