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0:1-7) 제사와 한 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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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제사와 한 몸
2002년 1월 27일 30강
본문 말씀: 히 10:1-7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성경은 처음부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상호 싸우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신 것을 아는데 그러면 뱀의 후손은 누구입니까? 보나마나 예수님 빼놓고 전부 다 이겠지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 음밀한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중심점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느냐"하는데 있습니다. 중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이고 우리는 우리 중심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을 재편성하고 이끄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대적하고 싶은 충동을 갖고 살아갑니다. 축구 경기의 중심은 공에 있기에 그 공을 서로 뺏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식으로 죄사함의 대책을 마련해 주어도, 자기 중심에 서 있는 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라면 하늘에서 돈다발이나 내려줄 것이지 쓸데없이 죄사함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느냐"하고 불만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중심으로 봤을 때 죄사함보다 돈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몸'을 따로 준비하셨다는 겁니다.
왜 우리가 평소에 성경은 보지 싫어합니까? 그것은 내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구태어 하나님의 중심까지 관심 갖기 싫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일방적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쓰여져 있기에 나 중심이 빠져 있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중심 싸움입니다.
우리들의 간곡한 기도는 이것입니다. "왜 내 중심의 원대로 안 해 줍니까?" 거기에 비해 예수님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들로 하여금 이 예수님의 중심을 믿게 하옵소서"이지요. 서로 다르지요? 소세지를 사면 거기에는 비닐이 덮여 있습니다. 이 비닐를 벗겨내어야 맛있는 속살을 먹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이나 세상을 볼 때도 하나님은 비닐 같은 것이 벗겨 지기를 원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비닐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먼저 와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중심의 껍질은 벗겨지고 속살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 관심사가 됩니다. "진정 나는 누구냐?"라고 말입니다.
2절에 보면,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옛적부터 쭉 제사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미흡함을 낳더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깨닫게 하는 방향으로 제사가 반복되어 온 것입니다. 이것이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서 불만스러운 결과가 나오면 우선 이런 생각부터 먼저 떠오르지요. "꼭 내가 이 일을 해야할 이유라도 있나?"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고 신경 쓸 것이 많은데 제사가 응답이 될까 아니될까 하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주어진 것에 대한 반발심이죠. "하나님한테 제사 안드려도 그만이지.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말이야"라는 분노도 치밀게 됩니다.
신약 성경에서 아무리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강조를 하셔도 성경을 보는 우리가 중요치 않게 여기면 그만 아닐까요? 이것은 구약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오시는 하나님의 전체 작업을 몰라서 그러합니다. 영화를 끝부터 보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전체도 처음부터 보셔야 합니다.
속죄제와 번제에 대해서 구약에서 이렇게 설명 해 주고 있습니다. 레위기 1:4에 보면,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찌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번제를 드리면 죄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신기한 장치입니까! 너무나도 신기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놓고 장난 치시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없앨 수 있는 방도를 성경을 통해서 주셨다는 데서 다른 책 하고는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레위기 5:13에 보면, "제사장이 그가 이 중에 하나를 범하여 얻은 허물을 위하여 속한 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그 나머지는 소제물 같이 제사장에게 돌릴찌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없앤다고 아무리 제물을 정성스럽게 드려도 제사장이 알아서 주관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노력이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사장이 우리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독보적인 위치에 있음이 드러납니다.
세상의 모든 사상과 책 속에는 무엇 일이든지 본인 하기 나름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만이 이점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제사장 앞에서 기가 팍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린 제물 만이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 죄에 대해서 인간적인 고의성이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레위기 4:13-14에 보면,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찌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레위기 4:22-23에도 있습니다.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수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여기에 보면 제사를 드려야만 하는 죄가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보여줍니다.
자기 딴에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을 했는데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비쳐보니 그것이 잘못이라고 나타날 때, 바로 이것이 제사 드려서 해결해야 될 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 제사란, 죄라고 규정되면 항상 되풀이해서 뒤따라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와 있듯이, 개인적인 속죄제를 수시로 드려왔더라도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드리는 대속죄일의 제사를 보게 되면 아직도 우리들에게는 남아 있는 죄가 있었구나 하는 점을 알게 됩니다. 왜 이처럼 죄가 자꾸만 추가되는 것일까요?
레위기 5:1절과 4절을 보게 되면 다소 이해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라고 1절에 나와 있으면 "혹 누구든지 무심중에 입으로 맹세를 발하여 악을 하리라 하든지 선을 하리라 하면 그 사람의 무심중에 맹세를 발하여 말한 것이 어떠한 일이든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4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사람이 자신도 모르고 맹세 같은 것을 내 뱉을 수가 있습니다. 잘해 보겠다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악한 일을 해볼까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무심코 내뱉은 맹세 조차도 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하루에도 몇 번씩 죄를 짓게 되는 겁니까? 또 젊은 때는 도무지 허물이라고 이해 안되든 것도 연세가 많아지면서 죄라고 느껴지면 빠진 그 죄 항목을 위하여 속죄제를 또 드려야 할 판입니다.
예를 들면, 디모데전서 6:7-8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 말씀을 젊을 때에 보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부터 먼저 나올 것입니다. 너무 가혹하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설교 처음에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 중심적이지 못하고 우리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많아서 세상을 떠날 쯤 되어 신앙적인 눈으로 지난 날을 돌아보면, 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줄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젊은 날의 죄지은 것을 위하여 새삼스럽게 속제죄를 드려야 할까요? 그래야 마음의 짐을 들게 될까요?
실제로 일상적인 생활에서 이웃집 사람을 미워하고 교회에 오게 되면 괜히 하나님에게 미안해서 헌금에다 돈 1000원을 더 얹게 되지요. 그렇다면 이웃 사람과 한바탕 싸우고 난 뒤에는 얼마나 더 헌금해야 마음이 후련하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추가적으로 드러나는 죄에 대해서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뭔가 단번에 죄를 다 해결할 길은 없을까요? 바로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그림자요 모형의 입장에서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니 한 몸을 하나님이 예비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이 한 몸으로 인하여 단번에 모든 죄가 다 해결되어 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대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이 '단번에 드리는 제사'의 의미를 늘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자에게 이 제사의 효과가 해당됩니까? 시편 51:16-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왜 하나님은 번제나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십니까? 속죄라는 것이 집단적으로 해결 지을 문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본인에게만 적용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매사에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탓으로 돌리는 그런 자에 한해서만 단번에 대신 드린 속죄 제사의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더욱 알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악취미 때문에 그러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할 만반의 대책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민수기 23:2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용서해 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발람이라는 이방 선지자가 감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라인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갔던 적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타고 가는 당나귀의 입을 열어서라도 그 발람 선지자를 책망하시게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이 되어 살면, 자기 변명만 나열되지 결코 자기 죄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이렇게 되면 단번에 드린 한 몸도 귀한 줄 모르게 됩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이렇게 핀트가 어긋나서야 되겠습니까? 자기 중심으로 살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하고 그만 싸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최고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0. 제사와 한 몸(히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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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처음부터 전쟁터 !!
성경은 처음부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우는 식으로 되어있는데, 창세기 3장부터 이미 인류의 역사를 그렇게 잡아놓고 있다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란 것은 아는데, 그러면 뱀의 후손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보나마나 예수님을 빼놓고 전부가 되겠지요. 그러니 서로가 싸울 수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인류의 역사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도 예수님과 대적해서 싸우려고 하는 악마에게 속해서 살아왔었는데, 아직도 그런 속성이 우리 내부에 남아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과 우리가 싸우면 어떤 논쟁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중심’에 관한 문제인데, 즉 “하나님은 예수님이 중심이고, 우리는 내가 중심이다” 라는 겁니다.
‘중심’ 싸움 !!
우리는 예수님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 중심으로 이 세상을 재편성하고 이끄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대적하고 싶은 충동을 가지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대항하고 버티려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마치 축구경기에서 그 중심은 공에 있기에, 그래서 모두가 그 공을 서로 뺏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멍청한 사람이 공을 22개를 주어서 각자가 차도록 하지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로 공을 빼앗으려고 싸우지도 않고 참 좋을까요? 그런 겁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축구경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축구경기는 공이 하나라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그래서 그 공이 가는 곳마다 선수들이 그 공 때문에 모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심이 되는 공을 상대방 팀에서 서로 빼앗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한 몸’을 중심으로 !!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누구 중심인고 하니, 우리 중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중심은 따로 있는데, 그래서 5절에 보면,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한 몸’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중심이라는 겁니다.
(히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그러니 앞으로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는 이 한 몸을 중심으로 하시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이 세상을 재편성을 하시겠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자기가 중심이 되려고 하는데, 그러니 이 중심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왜 성경말씀을 잘 보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나’ 중심이기 때문에, 스포츠 신문은 봐도 성경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구태여 하나님의 중심까지 관심을 가지기 싫다는 겁니다. 성경은 일방적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쓰여져 있기에, ‘나’ 중심이 빠져있는데, 그러니 신앙이란 것은 곧 ‘중심싸움’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간곡한 기도는 이것인데, 즉 “왜 내 중심의 원대로 해주지를 않습니까?” 라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저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이 예수 중심임을 믿게 하옵소서. 내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옵소서” 라는 것이죠. 지금도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그러니 서로가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름 궁금한 그 원초적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엉뚱한 것을 중심으로 삼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말씀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에 오셔서, 자기 중심이 아닌 예수님 중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해주셔야 한다는 말이죠.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야 !!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나서 벌어진 현상이 무엇인고 하니,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는데, 즉 세상을 다시 본다는 겁니다. 장님이 되었다가 눈을 다시 떴다는 말이죠. 이전에는 자기 중심으로 이 세상을 보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게 예수님 중심이란 것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제대로’ 라는 것은 신자의 입장에서 그런 것이지,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왜 소시지를 사면 거기에는 비닐이 덮여있죠? 이 비닐을 벗겨내어야 맛있는 속살을 먹을 수 있어요. 제가 한 번은 소시지를 사서, 껍질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먹으려고 하다가 좀 고생을 했는데, 그게 표시가 잘 나지 않아서 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과 이 세상을 볼 때도, 하나님은 그런 비닐과 같은 것이 벗겨지기를 원하시는데, ‘나’ 중심적인 비닐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자기 중심의 껍질은 벗겨지고 속살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러내게 될 때, 그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됩니다. 즉 “진정 나는 누구냐?” 라고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제사는 뭔가 미흡해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옛날부터 계속해서 제사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뭔가 미흡함을 낳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게 하는 방향으로 제사가 반복되어 왔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자기가 큰마음을 먹고 예배에 참석하면 일이 술술 풀려야 하는데, 그런데 일이 자꾸만 꼬이고 꼬이더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그림자이고 모형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 말씀을 보더라도 우리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됩니까? “우리가 제사를 왜 드려야하며, 죄를 깨닫는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왜 그렇게 중요한가?” 라는 겁니다. 왜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느냐는 말이죠. 제사를 드리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 문제냐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5절에 보면,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한 몸을 예비한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고 시급한 문제냐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중요한 것들도 많이 있지 싶은데 말이죠. 그냥 하늘에서 돈을, 마치 펑펑 눈이 오듯이 그렇게 내려주시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제사를 잘 드리다가 한 번 정도 빠질 수도 있고, 그리고 굳이 드리지 않아도 무엇이 문제냐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드린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문제도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계속해서 뭔가 찜찜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우리를 위해서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보다는 역시 돈벼락이 제일로 좋다는 말이죠.
그래서 신약성경이 그만큼 어려운데,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아무리 톤을 높여서 잔소리를 늘어놓아도, 보는 우리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봐야할 책들이 많이 있는데, 굳이 이런 성경까지 그렇게 봐야하느냐는 겁니다. 봐도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는데 말이죠.
그것은 구약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오시는 하나님의 전체작업을 몰라서 그러한데, 우리가 영화를 끝부터 보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전체작업도 우리가 처음부터 봐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번제와 속죄제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구약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레위기 1장 4절을 보겠습니다.
(레 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너무나 신기한 번제 !!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번제를 드리면 죄가 없어진다는 말이죠. 이 얼마나 신기한 장치입니까? 그런 장치가 우리 손에 주어졌다는 것인데, 이것은 너무 신기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데리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라는 겁니다. 사실 너무 너무 고마운 것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없앨 수 있는 방도를 성경을 통해서 주셨다는 점에 있어서, 이 성경은 다른 책들하고는 비교조차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기서 레위기 4장 13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레 4:13)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레 4:14)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레 4: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레위기 4장 22절에서 24절에도 나옵니다.
(레 4:22)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레 4:23)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수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레 4:24) 그 수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을지니 이는 속죄제라
이게 참으로 신기한 이야기인데, 어떻게 이렇게 제사를 드리면 죄가 없어지느냐는 겁니다. 110층 짜리 건물이 들어서면 신기한데, 그런데 무너지면 안타깝지요. 마술사가 빈 보자기에서 비둘기를 만들어서 날리는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천원짜리가 만원짜리로 바뀌는 것도 신기하고 말이죠. 하지만 들판에 가면 비둘기가 있고, 은행에 가면 만원짜리가 있는데, 그러니 결국은 그렇게 신기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더니만 우리의 죄가 없어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신기하다는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마술인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착각을 일으키게 하시는 겁니까? 이것은 엄연한 실제상황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레위기 5장 1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레 5:13) 제사장이 그가 이 중에 하나를 범하여 얻은 허물을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그 나머지는 소제물 같이 제사장에게 돌릴지니라
이렇게 보니 옛날부터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뜻은 분명한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명령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완벽한 법을 취소할 수는 없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미처 모르는데, 그런데 나중에 가서는 “아하, 이것이 죄구나” 라고 하면서 깨닫게 될 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그냥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게 해서 없애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죄를 지어서 제물을 바치면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 죄를 없앤다고 하면서 아무리 제물을 정성스럽게 바치고 해도, 그것으로 자기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것은 죄를 전문적으로 씻어주시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제사장’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제사장이 알아서 주관해주지 않는다면, 그 모든 노력들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제사장이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독보적인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평소에는 모든 것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 중심이다” 라고 여기다가,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자기들이 제물을 바치면 그것으로서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나 말고 다른 한 사람, 즉 제사장에 의해서, 그 사람이 해결해주지 않으면, 내 죄가 없어지지 않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까지는 “이 세상은 내 중심이다. 내가 절대자다” 라고 하면서 까불고 설치다가, 자기 죄를 깨닫게 되고 난 다음부터는 그만 어떻게 됩니까? 그만 기가 죽어서, 제물을 들고, 양을 들고, 염소를 들고 제사장에게 간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제사장에게 뭐라고 합니까?
이제는 ‘제사장’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
* 제사장 : 여기에 왜 왔노? * 백 성 : 죄를 지어서 왔습니다. * 제사장 : 그것을 어떻게 알았노? * 백 성 : 처음에는 몰랐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 이게 죄네요. * 제사장 : 그런데 왜 왔노? * 백 성 : 이 죄를 좀 씻어주이소. * 제사장 : 너는 너 중심으로 살지? * 백 성 : 예, 그게 문제였습니다. * 제사장 : 그러면 너 중심을 포기할래? * 백 성 : 예, 포기하고, 이제는 제사장 중심으로 살렵니다. * 제사장 : 그러면 가지고 오너라. * 제사장 :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물에 안수를 하고 제사를 드리면, 그와 동시에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은 자기 중심이 와장창 깨지면서 제사장 중심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돌아서면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의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 제사장이 이 세상을 움직이고 죄를 용서하는 핵심에 서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상당히 귀찮다는 말이죠. 그렇게 제사장에게 제물을 들고 가서 죄 용서를 받았는데, 그런데 집에 가서 생각해보니 3년 전에 지은 죄를 놓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래서 또 제사장에게 가야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가서는 “그만 이것을 빠트렸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다시 제사를 드리고 죄 용서를 받고 집에 왔는데, 그런데 또 다시 다른 죄가, 6년 전에 지은 죄가 생각난다는 겁니다. 마치 콩나물이 자라듯이 자꾸만 죄가 기억이 나고 나온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7장에 보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고 했는데, 그런데 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과 싸우는 것이 하나의 재미가 되어서, 그래서 그게 당연한 줄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나서는 “내가 그때 그 친구를 왜 그렇게 미워했지?” 라고 하는데, 그때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생각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또 제사를 드려야 하느냐는 말이죠.
여기서 레위기 5장 1절에서 4절을 보겠습니다.
(레 5:1)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레 5:2) 누구든지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들 무릇 부정한 것을 만졌으면 부지 중에라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레 5:3) 혹시 부지 중에 사람의 부정에 다닥쳤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 (레 5:4) 혹 누구든지 무심 중에 입으로 맹세를 발하여 악을 하리라 하든지 선을 하리라 하면 그 사람의 무심 중에 맹세를 발하여 말한 것이 어떠한 일이든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것이니
혹 누구든지 무심 중에 !!
여기 5절에 보면 “혹 누구든지 무심 중에”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은 빠져나갈 구멍을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맹세와 같은 것을 내뱉을 수 있는데, TV를 보다가 담배에 대한 해악이 나오니, “내가 올해는 담배를 끊어야지”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무심코 내뱉은 맹세조차도 죄라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마태복음 18장에도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라고 하는데, 우리는 자기 중심이기에 자기가 알아서 죄를 짓고 자기가 알아서 변명을 하는데, “인간이니, 그 정도면 되었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는 겁니다.
(마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것이 자기 중심일 때는 그러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돌아서게 되면, 그 어떤 인간도 허물과 죄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지금은 모르지만, 5년 후에 10년 후에 그 어떤 죄가 생각나고 또 튀어나올지 누가 아느냐는 겁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그리고 인간은 온전치가 못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온전치 못한 인간을 율법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니, 그 율법도 역시 온전치 못하다는 겁니다. 그런 온전치 못한 인간을 온전하게 하려고 하면, 그야말로 완벽한 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단번에 !!
그것을 오늘 본문 2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단번에 정결케 되어” 라고, 즉 ‘단번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젤콤’ 이라고,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을 단번에 처리한다는 말이죠(ㅋㅋ). 우리 몸 속의 균은 그게 가능하지만, 그런데 죄 문제는 우리 선에서 어떻게 처리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이웃집 사람과 그만 말다툼을 하고 말았는데, 그러면 교회에 오면 괜히 미안해서 드리던 헌금에 돈 1000원을 더 얹게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머리채를 잡고 한바탕 실컷 싸우고 나서 교회에 오면 얼마나 더 해야 마음이 후련하겠습니까? 만원을 더 내야하는 겁니까?
이처럼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그게 추가적으로 드러나는 죄에 대해서 전혀 대책이 없어요. 우리의 능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생각날 때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단번에’ 죄를 해결할 길은 없느냐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히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 10: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여기 3절에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라고 하는데, 즉 해마다 드리는 제사가 있다는 겁니다. 즉 대속제일인 7월 10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가서 피를 뿌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평소에 자기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가 있었는데, 그런데 7월 10일에 드리는 제사는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 대속죄일의 제사로 인해서 자기 죄가 생각나도록 한다는 말이죠.
여러분, 이 세상에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장치가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는데,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접촉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우리의 힘으로는 단번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 죄인지, 그 죄의 출처와 근원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죄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해야한다는 말이죠. 사람이 자기 죄를 모르면, 그만 자기가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말을 하는 나귀 !!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의 나귀가 나옵니다. 발람이 자기가 타던 나귀가 말을 듣지 않자 마구 때리는데, 그러자 놀랍게도 그 나귀가 그만 말을 한다는 겁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라고 하면서 말이죠.
(민 22: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민 22: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민 22: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저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그만 이 대목에서 고민에 빠지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신학교에서는 뭐라고 가르치는고 하니,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만이 언어와 도구와 불을 사용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말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만의 특징이라는 것인데, 순진하게 그렇게 배웠는데, 물론 지금은 그런 것은 믿지 않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때는 이것이 고민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짐승을 말을 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도 나귀가 말을 한다는 겁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닌데, 만약에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말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모두가 기절을 하지 싶은데, 얼마나 놀라겠느냐는 말이죠. 아마 다음부터는 절대로 강아지를 키우지 않으려고 하지 싶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그렇고, 여기서 만약에 그 나귀의 주인인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자기 뜻대로 하고자 계속해서 나귀를 밀어 부쳤으면, 그래서 자기가 자고자 하는 길로 가려고 했으면 그는 아마도 죽었지 싶은데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까, 여기서 23장 21절을 보겠습니다.
(민 23: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용서해 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발람’ 이라는 이방 선지자가 감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인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타고 가는 당나귀의 입을 열어서라도 그 발람 선지자를 책망토록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낱낱이 끄집어내어서 우리를 망신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제가 설교시간마다 “여러분, 우리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그것을 매일같이 다같이 확인하면서 살아가자는 말이죠.
목사님, 암웨이가 무엇이 나쁩니까?
어제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질문이 올라왔는데, “암웨이를 하는 것이 무엇이 나쁩니까?” 라고 겁니다. 목사로서 답변을 하기가 참으로 곤란했는데, 만약에 자기 교회에 암웨이를 하는 사람들이 없고 다른 교회에 있다면 실컷 공격을 할 수도 있겠는데 말이죠. 물론 그러면 안 되겠지요(ㅋㅋ).
암웨이를 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디모데전서 6장의 말씀처럼,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족한 줄로 알고 한다면, 그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런데 그분들이 과연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이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인데,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죠.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신다는 겁니다. 암웨이를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닌데,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장치는 따로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119 소방관이라고 해도, 그래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데, 그런 가운데서도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아무리 고상한 직업이라고 해도,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죠.
결국 인간은 잊혀진 죄도 깨닫게 해주시는, 그리고 죄를 어떻게 단번에 처리할 수 있는지, 생각이 날 때마다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재미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서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왜 자꾸만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을 무시하느냐는 말이죠.
여기서 시편 51편을 보겠는데, 16절과 17절입니다.
(시 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니 죄를 니가 알렸다 !!
이게 참 유명한 말씀인데, 여기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라고 하는데, 즉 제사가 아닌 상한심령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니가 과연 너의 죄를 아는 상태에서 제사를 드리는가?” 라는 것인데, 달리 말해서 “니 죄를 니가 알렸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므로 이제는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그 모든 것들이 자기 문제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죄를 알아야, 죄 씻음의 장치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심령을 알아주신다는 말이죠. 자기 죄를 앎으로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라고 하면, 어릴 때는 “그것으로 어떻게 사노?” 라고 하다가, 나이가 들면 “인생은 공수래공수거구나. 그 말씀이 맞구나. 그것을 왜 몰랐던고? 그동안 내가 그렇게 먹고 살려고 몸부림친 것이 바로 죄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성경말씀을 봄으로서 자기 죄를 알게 된다는 말이죠. 젊었을 때는 아무리 안다고 해도 흉내만 낼뿐인데,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라고 해도, “너무 그렇게 하지 마세요. 미워할 수도 있지요” 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 ‘한 몸’이 단번에 드리심으로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몸’을 예비하셨는데, 그런데 단번에 드려진 그 한 몸이 우리의 제물이 됨으로서,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우리의 평생동안 짓는 모든 죄가 다 사라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죄까지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하거나 좌절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예비된 한 몸, 단번에 드려진 그분을 주로 여기고 믿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더 이상 자기 중심으로 살려고 하지를 말고, 오직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는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그야말로 좌충우돌을 하면서 어지럽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부터는 중심을 제대로 잡아주셔서, 그것이 우리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님 중심으로 새롭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17 오후 3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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