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9:23-28) 죄사함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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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사함 2002년 1월 20일 29강
본문 말씀 : 히 9:23-28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우리가 특정 인물에게 몸과 마음까지 다 맡긴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있어 모험입니다. 만약 그분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면 그 낭패를 우리가 어떻게 다 감당하렵니까? 참으로 무모한 짓입니다.
이 사회라는 것은 서로 사귀더라도 간, 쓸개 다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적당선까지만 용납하다가 쓰면 뱉아버리고 달면 삼키는 식으로 사는 것이 요령입니다. 상대로 하여금 너무 깊숙이 개입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겁니다. 사도행전 16:31에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네와 네 집을 구원하리라" 했는데 만약 특정 인물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렵니까?
그러니까 요즈음 사람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전적으로 안믿는 것이 교회 내에서의 요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가볍게 알고 지내는 사이로 지내지요"에 머물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 몇 명과 산에 올라 가셨는데 갑자기 산 위의 세계가 영광스럽게 변했습니다.
베드로는 좋아서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고 제안했지만 구름 위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목하라는 겁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니 너희들은 저의 말을 들으라!" 참으로 베드로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베드로는 예수님과 헤어지는 최후의 순간에 와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맙니다. 다시는 안 볼 사람인 것처럼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했을까요? 저는 그것은 베드로를 둘러싼 '사회'라고 보고 싶습니다.
베드로에게는 기존 사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따랐지만 기존의 사회도 항상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 사회에는 자기를 주시하는 많은 눈들이 있었습니다. 그 눈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간 쓸개 다 내어놓고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인생을 내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간, 쓸개 다 맡긴 사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와같지 않습니까? 아까 설교 전에 불렀던 찬송가 139장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 마리아처럼 새벽에 주께로 옵니다 빈 무덤 내게 보이사 날 가르치소서"
여러분, 그 당시 마리아에게는 나름대로 사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척이나 할 일도 많고 자기 일에 부지런할 필요가 있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는 자기 사회 속에서도 예수님이라는 특정 인물을 만나기 위해 새벽에 무덤을 찾아옵니다. 무슨 낙을 보겠다고 말입니다. 모든 것을 맡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신앙이란 교회 조직원 되는 것도 아니라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란 특정 인물을 만나기 위해 나오는 겁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회가 주는 압박감이나 중압감이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돈이 얼마나 큰 힘으로 작용합니까! 예수님의 은총보다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사회의 힘이 더 크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런 압력 속에서도 과연 우리가 예수님이 더 의지할 만한 분으로 느껴집니까? 믿음이란 진공 속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라는 엄청난 무게 안에서 제대로 밝혀집니다.
"정말 예수님, 저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하고 진지하게 묻는 물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아니라 '나의 예수'입니다. 교회란 사회에 붙어있는 하나의 부속 기관입니다. 교회 들어오기 싶습니다. 마치 관공소 들어가는 것이 쉬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특정 인물인 예수님에게 자기 인생을 맡긴다는 것은 기적적인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교회가 사회인 이상 '교회 사회'라는 곳도 참으로 무서운 곳입니다. 큰 압력으로 개인을 누릅니다. 그러나 특정 인물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과연 그 예수라는 특정 인물이 우리에게 믿음직한 일을 해 내실 분일까요? 우리는 이 점을 본문을 통해서 알아봐야 합니다.
26절에 보면,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라는 특정 인물이 '죄를 없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세상의 권력 기관에서 죄를 없게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라는 특정 인물되시는 분만이 홀로 해주시는 일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마리아는 새벽에 주님을 뵙기 위해서 온 겁니다.
우리가 평생 지은 죄를 모두 다 말입니다. 이 말이 진리라면 우리는 땡 잡은 자가 되고 이 말이 거짓이라면 예수님보다 더 큰 사기꾼은 없을 것입니다. 관권은 과연 실제로 죄를 없애주느냐 아니냐입니다.
그러면 예수라는 특정 인물이 죄를 없애주기 전에는 어떤 식으로 죄 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까? 22절에 보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 같은 제물의 피가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3절에 보니, 이런 것들은 모형이라는 겁니다. 원형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겁니다. 그 하늘에 있는 그 원형인 제물은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이 점을 마리아가 알고 새벽에, 대통령이나 경찰 서장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뵈로 간 겁니다. 전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맡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저보고 무어라고 하느냐 하면, "목사님은 너무 죄에 빠져 있습니다"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은혜를 거론합니다. 여러분, 죄에 관심이 없는채 나오는 은혜가 과연 제대로 된 은혜일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죄는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겁니다. 그만큼 판단 능력과 개선의 능력을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주의입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그만큼 예수님이 믿음직 스럽지 못하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어디서 문제가 있느냐 하면, 죄 관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3절에 보니, 정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죄란 정결치 못한 것을 두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란, 기껏 자기가 실수했는 것, 부도덕한 것, 잠시 무례하고 무지하게 행동 한 것, 담배 피우는 것, 술 마시는 것 같은 것일 줄 압니다.
참된 정결은 직접 하나님과 만났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고백된 것을 보고 알아야 합니다. 인간들끼리 정결을 따지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레위기 10장 3절에 보면 하나의 사건이 나옵니다. 나답과 아비후라는 제사장은 평소대로 하나님께 분향하기 위해 성소에 들어섰다가 향로에서 나온 불에 의해 현장에서 그만 타 죽고 말았습니다. 이게 정결이고 거룩입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라고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앞에 나오는 작자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거룩한 분인 지를 확신시키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직접 만났던 그들이 보여주는 거룩이요 정결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정결이나 거룩에 대해서 양보나 포기가 없습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6:1-6절에 보니, 갑자기 그 성전에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사야 선지자는 꼼짝도 못하면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화로다 나여, 부정한 백성들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다 뵙다니! 나는 망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정결은 우리에게 사망입니다. 우리가 죽는 이유가 정결키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 점을 잘 아시는고로 자기가 따로 뽑아내 놓은 자를 위해 아들을 보내사 단번에 죄 문제를 해결케 했습니다. 피를 흘림으로 말입니다. 과연 돈이 우리의 죄를 없이 할 수 있습니까? 목사되면 죄도 같이 없어집니까? 특정 교단이나 교회가 우리의 죄를 없이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제가 정결키 못한 죄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술 끊는 것 담배 끊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죄를 없앨 방도를 여러분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한 번 끄집어 내어 보세요. 없습니다! 마리아 시대의 사회는 예수 믿으면 체포되어 죽는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새벽에 예수님을 뵈올려고 했습니다.
그 힘이 무엇일까요? 돈과 권세를 이긴 힘이 무엇일까요? 돈과 사회나 권세를 뚫고 주님의 얼굴을 뵈오려는 힘이 바로 죄 사함의 능력입니다. 죄를 없애주신다면 내가 무슨 짓인들 못할까! 예수님은 백성들의 죄를 지기 위해서 발가벗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다했습니다. 팔 다리 잘라지는 것보다 지옥 안가는 것이 낫습니다. 신앙이란 이처럼 특정 인물과 관련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주가 아니라 어머니 주가 아니라 나의 주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가만히 보니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원형되시는 분이 오셔서 죄 없앨 자에게 죄 없이 하기 위한 사전 조치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26절에 보니, '세상 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점을 인정 안하겠지요. 인류의 세계는 영원히 영원히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구태여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기에 이 쯤에서 전을 거두려고 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왜 세상이 끝이 나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죽이 맞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하시는 일에 동의할까요? 28절에 보니, '죄와 상관없는 자'가 등장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여러분 이 시나리오를 믿습니까? 이 28절이나 단순히 경전에 나와 있는 짧은 문장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실제 세상 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의 또 오심은 죄와 상관없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4-17에 보면,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두려워서 이런 시나리오에 전부를 못거는 겁니까? 이미 우리에게 달리 방도도 없고 대안도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라는 특정 인물에게 모든 것을 맡긴 그 평안을 저들에게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9. 죄사함(히 9: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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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정 인물에게 자기 몸과 마음을 다 맡긴다는 것은, 그것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엄청난 모험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 낭패를 어떻게 감당합니까? 그러니 그런 것은 참으로 무모한 짓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사회라는 것은, 서로 사귀더라도 간과 쓸개를 다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선까지만 서로 용납하다가, 그래서 쓰면 뱉어버리고 달면 삼키는 것이 바로 살아가는 요령입니다. 상대로 하여금 자기에게 대해서 너무 깊숙이 개입하도록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죠.
사도행전 16장 31절에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네와 네 집을 구원하리라” 라고 했는데, 그런데 만약에 특정 인물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요즈음 사람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전적으로 믿지 않는데, 그리고 그게 교회 내에서의 요령이 되고 말았는데, 즉 “그냥 가볍게 아는 사이로 지냅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행 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 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 세 명이 산에 올라갔는데, 그들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인데, 소위 제자들의 임원진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산 위에 올라가니 갑자기 산 위의 세계가 영광스럽게 변했는데, 예수님의 얼굴과 해와 같이 빛났다는 말이죠.
그러자 베드로는 너무 좋아서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구름 위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주목하라고 하는데, 즉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들은 저의 말을 들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산 위에서 베드로는 참으로 놀라운 체험을 했는데, 그러면 산밑에 내려가서는 그 어떤 일이 생겨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지 싶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그렇게 따르겠다고 하던 베드로가, 그만 예수님과 헤어지는 결정적인 최후의 순간에 와서는 어떻게 나옵니까?
베드로는 그만 예수님을 배신하고 마는데, 즉 한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자입니다” 라고 하니, 베드로는 “나는 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그것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게 했을까요? 과연 무슨 세력이 작동해서 그렇게 되었느냐는 겁니다.
(마 26: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마 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베드로를 둘러싼 ‘사회’ !!
저는 그것은 베드로를 둘러싼 ‘사회’ 라고 보고 싶은데, 베드로가 몸을 담고 살아가던 사회의 수많은 눈들이 베드로로 하여금 배신자의 고백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그 눈들을 무시할 수 없었는데, 간과 쓸개를 다 내어놓고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자기 인생을 내맡길 수는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을 다 맡긴 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사회라는 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보다 우리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겁니다. 평소 베드로는 자기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여기니, 이제 서로 비교를 해보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서 같이 죽을 것인가? 이 사회에 일원이 되어서 그대로 주저앉아서 살 것인가?” 라고 말이죠.
여기서 베드로는 사회를 선택했는데, 그러니 성경은 인간의 허허실실을 낱낱이 다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백설공주가 보았던 거울보다 더 또렷하게 우리의 내부까지 다 드러낸다는 말이죠. 참 백설공주가 아니고 왕비의 거울인데(ㅋㅋ), 그 왕비가 거울을 보고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자 거울이 뭐라고 합니까? 혹시 왕비가 열을 받아서 자기를 깰까 싶어서 말을 돌리는데, “왕궁에서는 왕비님이 제일 예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왕비가 다시 물으니, 솔직하게 뭐라고 합니까? “저기 숲 속에 있는 백설공주가 제일 예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거울도 눈치를 보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역시 이런 눈치 저런 눈치를 보면서 예수님을 믿는 척을 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특정 개인에게 자기의 목숨을 맡길 정도의 믿음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고서야 발생되지 않는 현상이라는 말이죠.
마리아처럼 새벽에 !!
아까 불렀던 찬송가 139장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마리아처럼 새벽에 주께로 옵니다. 빈 무덤 내게 보이사 날 가르치소서” 라고 말이죠. 그 당시 마리아에게는 나름대로 사회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니 그 사회에서 무척이나 할 일도 많은데, 즉 자기 일에 부지런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는 그런 사회 속에서도 예수님이란 특정 인물을 만나기 위해서 새벽에 무덤을 찾아옵니다. 도대체 무슨 낙을 보겠다고 나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다 맡기기 위해서 나오는 것인데, 그러니 신앙이란 교회의 조직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물론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바로 그것은 특정 인물을 만나기 위해서 나오는 것, 그것이 곧 신앙이란 말이죠.
예수님, 당신이 내 인생을 책임지세요 !!
다시 말해서, “예수님, 당신이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지요?” 라고 하는 물음, 그리고 “나에게 맡겨라. 책임을 져주겠다” 라고 하는 응답, 그것이 바로 신앙이란 겁니다. 교회가 아닌데, 즉 “나의 예수, 나의 주님!” 이라는 겁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새벽에 주님을 찾아가는 것, 그게 곧 신앙이라는 말이죠.
교회란 사회에 붙어있는 하나의 부속기관인데, 그래서 교회에 들어가기가 쉬워요. 관공서에 들어가기가 쉽듯이 말이죠. 물론 경찰서나 세무서는 좀 그렇지만 말이죠(ㅋㅋ). 그러나 특정인물인 예수님에게 자기 인생을 다 맡긴다는 것은, 그것은 기적적인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주님과의 만남이 아니라, 사회의 일부인 교회에 등록을 함으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데, 즉 사회생활의 연장으로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교회가 사회인 이상, ‘교회사회’ 라는 게 참 무서운 곳인데, 큰 압력으로 개인을 누르는데,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저주토록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가 앞서서 예수님을 저주했는데, 즉 “너나 나나 똑같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특정 인물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예수라는 특정 인물이 그런 분이 맞는지를,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하는 겁니다. 여기서 26절을 보겠습니다.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죄를 없애주시는 특정 인물 !!
여기에 보면,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라고 하는데, 즉 예수라는 특정 인물이 죄를 없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세상의 권력 기관에서 죄를 없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예수라는 특정 인물이 되시는 분만이 홀로 해줄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죠.
이 사실을 알았던 마리아는 새벽에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인데, 우리가 평생 지은 죄를 모두 다 없애준다는 말이죠. 만약에 이 말이 진리라면 우리는 땡 잡은 것이고, 이게 거짓이라면 예수님보다 더 큰 사기꾼은 없는데, 그러니 관권은 “과연 실제로 죄를 없애주는가? 아닌가?” 라는 것이죠.
그러면 예수라는 특정 인물이 죄를 없애주기 이전에는 어떤 식으로 죄 씻을 수 있었습니까? 22절에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옛날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제물의 피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제물의 원형은 그리스도 !!
그런데 오늘 본문 23절에 보니, 이런 것들은 ‘모형’ 이라고 하는데, 그 원형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말이죠. 또한 24절에서, “하늘에 있는 제물의 원형은 그리스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점을 마리아가 알고 새벽에, 대통령이나 경찰서장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러 갔다는 것이죠. 전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다 내맡기기 위해서 말이죠.
(히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다시 말해서, 죄를 없애기 위해서 마지막 때에 모형이 아닌 원형이 이 땅에 직접 나타났는데, 그래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내놓고 자기를 따르도록 촉구를 하셨다는 말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제가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죄를 어떻게 제가 알아서 해소하면 안 됩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예수라는 특정 인물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다 맡기기에는 믿음직하지 못하다” 라는 것이죠. 마리아는 연약한 여자라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문제가 어디에 있냐 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죄관(罪觀)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목사님들과 논쟁도 엄청 많이 했는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분들이 뭐라고 하냐 하면, “목사님은 너무 죄에 몰입해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은혜를 거론하는데, 하지만 죄에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은혜일까요? 아무튼 그들의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죄는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라는 것인데, 그만큼 판단능력과 개선능력을 자기가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즉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라는 것이죠.
과연 무엇이 ‘정결’인가?
여기 23절에 보니, ‘정결’ 이라는 말이 나오죠. 정결치 못한 것이 전부가 다 죄인데,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무엇인고 하니, 기껏 자기가 실수하는 것, 부도덕한 것, 잠시 무례하게 행동한 것, 아무 곳에서나 오줌을 누고 담배를 피우는 것, 술 주정을 하는 것 등등, 그런 것 정도로 안다는 겁니다.
요즘 이주일 씨 때문에 금연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담배를 끊으면 죄가 없어지는 겁니까? 그리고 기분이 우울하고 할 때는 콜라로는 해결이 안 되는데, 한 잔 마시고 자면 된다는 겁니다. 술과 담배를 끊는다고 해서 정결이 아닌데, 그러니 인간들이 끄집어내는 정결은 엉터리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참된 정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직접 하나님과 만났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고백되는 것을 보고 알아야 하는데, 그러니 인간들끼리 모여서 서로가 비교를 하면서, “니가 어떻니? 내가 어떻니?” 라고 하면서 정결을 따지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는 겁니다.
레위기 10장 3절에 보면, 하나의 사건이 나옵니다. 나답과 아비후라는 제사장이 평소에 하던 것처럼 하나님께 분향하기 위해 성소에 들어섰다가, 그만 뭔가 일이 잘못되어서 향로에서 나온 불에 의해서 그만 현장에서 타서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바로 이게 정결이고 거룩이라는 말이죠.
(레 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레 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 10: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여기 3절에 보면,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가까이 하는 인간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거룩한 분인지를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계시다고 여기면서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정결은, 우리에게는 사망 !!
이들 나답과 아비후는, 단지 자기들이 향불을 피울 때 다른 불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현장에서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무리 그들이 잘못을 해도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것이 맞다고 여겨지는데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정결이나 거룩에 대해서는 양보나 포기가 전혀 없는데, 그러니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변화산의 예수님의 경우에, 베드로가 그 예수님을 보고는 얼마나 좋았으면 초막 셋을 지겠다고 했겠느냐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 앞에서 다른 누가 감히 정결하다고 하고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누가 감히 거룩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정결은, 인간에게는 사망 !!
그리고 이사야서 6장에 보니, 이사야 선지자가 평소에 자기가 들어가던 성전인데, 그런데 갑자기 그 성전에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이사야 선지자는 그야말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바짝 엎드렸다는 겁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자 그때 불에 달구어진 숯이 날아와서 입술을 지졌는데, 그러자 그의 죄가 사해졌다는 겁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정결은 우리에게는 사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는 이유는, 우리가 전혀 정결치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정결치 못한 인간들이 아무리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도, 양을 잡고 염소를 잡고 해도, 아무리 전도를 하고 기도를 해도, 자기 죄를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베드로가 사회의 힘에 밀려서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했는데, 사실 사회의 힘은 너무나 막강하다는 겁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러면 과연 그 돈이 우리의 죄를 없앨 수 있습니까? 교회직분이 우리의 죄를 없앨 수 있습니까? 목사나 장로가 되면 죄도 같이 없어지는 겁니까? 특정 교단이나 교회가 우리의 죄를 없앨 수 있느냐는 말이죠.
사회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지금 정결치 못한, 즉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술을 끊고 담배를 끊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이런 죄를 없앨 방법아 있다고 하면, 여러분이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한 번 끄집어내어 보세요. 그런 것이 있습니까? 정말로 있습니까? 전혀 없다는 겁니다.
마리아가 살던 사회는, 예수를 믿으면 체포가 되어서 죽던 시대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새벽에 예수님을 만나려고 무덤에 나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힘이 무엇입니까? 돈과 권세를 이기는 힘이 무엇입니까? 돈과 사회의 권세를 뚫고, 오직 주님의 얼굴을 만나려는 힘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죄사함의 능력인데, 죄를 없애주신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발가벗고 돌아가셨는데, 예수님은 맡겨진 모든 일을 다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팔다리가 잘려지는 것보다도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죠.
이처럼 신앙이란 특정 인물과 관련이 있어야 하는데, 아버지의 주가 아니라, 어머니의 주가 아니라, ‘나’의 주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가만히 보니,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농락을 당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성전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고 하는 것이, 그게 마지막 때에 원형이 되시는 분이 오셔서 죄를 없앨 자에게 죄를 없애기 위한 사전조치들이었다는 겁니다.
이제, 세상 끝 !!
이것은 오늘 본문 26절에 보니, ‘세상 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물론 불신자들은 이 점을 인정하지 않겠지요. 인류의 세계는 영원히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세상 죄를 없애기 위해서 대신 죽으실 거룩한 제물이 나타났기에, 이제 해야할 일이 남아있지 않기에, 이쯤에서 그만 판을 거두려고 하신다는 말이죠. 더 이상 세상이 이어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 세상이 끝나면 천국에 가면 되겠네” 라고 하지 말고, “이 세상이 왜 끝나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아하, 그렇구나. 우리의 죄를 단번에 없애주시려고 어떤 분이 하늘에서 오셨구나. 그러면 이 세상이 끝나야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과 호흡이 맞아야 합니다. 일이 끝났으면 철수하면 되지, 더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의를 할까요? 어떤 사람들과 죽이 맞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죄가 없어진 자들과 맞는데,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 28절에 보니, 죄와 상관이 없는 자들이 등장한다는 말이죠.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죄와 상관이 없는 자들의 등장 !!
여기에 보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시나리오를 맞기는 맞습니까? 이것이 단순히 성경에 나와있는 짧은 문장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실제 상황입니까?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이냐는 말이죠.
성경은 분명히 “죄가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감히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도 여기에 속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두 번째로 나타나시는데, 그러니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죄와 상관이 없는 자들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시나리오인지 모르는데, 사람들이 그냥 무시한다고 해서 없어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게 정말로 맞는 말씀인지, 그렇게 진지하게 묻는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귀하고 소중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에서 17절을 보겠습니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살전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러한 말씀을 심방을 가서 하게 되면, 듣는 분들이 천국에 가는 것만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말고, 먼저 자기가 죄가 없는 자가 되어있는지, 그것에 대해서 먼저 확인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목사로서 묻고 싶다는 말이죠.
이것이 심방이다 !!
* 목사 : 당신은 어떻게 죄가 없는 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교인 : 그것은 예수님이 피를 흘리신 것이 나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오셨기에 그렇습니다. * 목사 : 그러면 당신은 거기에 전부를 걸겠습니까? * 교인 : 그럼요. 당연히 걸겠습니다. * 목사 : 그러면 사회가 주는 압박을 이겨내겠습니까? * 교인 : 사회도, 돈도 중요한데, 하지만 죄를 없애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 목사 : 정말 죄를 없애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교인 : 그렇습니다. 그분은 마리아가 새벽에 만나고자 했던 예수님입니다. * 목사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교인 : 그럼요. 예수님만이 저에게 중요합니다. * 목사 : 정말 그렇습니다. 그분만 믿으면 됩니다. * 교인 : 그렇지요. 그분 때문에 제가 지금 이렇게 살아갑니다. * 목사 : 제가 목사지만, 오히려 은혜를 받고 갑니다. * 교인 :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다음에 또 오세요.
이렇게 되면 누가 심방을 하고 받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데, 이게 곧 성도의 교제라는 겁니다. 반드시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하든지 예수님만 드러나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사회가 주는 압박감에서, 가정에서 주는 압박감에서, 교회가 주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사회가, 가정이, 교회가 죄를 용서해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집사였습니까? 권사였습니까? 그냥 아주머니였다는 말이죠. 우리가 그러한 위치로 돌아가서, 우리가 사귀고 싶고 교제하고 싶은 분은 누구라는 겁니까? 정말 우리의 죄를 몽땅 다 용서해주신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을 그냥 아는 선에서만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말고, 아무도 찾지 않는 새벽이라도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충동이 일어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1,16 오후 5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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