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9:15-22) 유언과 죽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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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유언과 죽음 2002년 1월 13일 28강
본문 말씀: 히브리서 9:15-22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성경이나 책을 볼 때에, "내가 살아있으니 이런 글들을 주시는구나"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글에 담긴 내용과 살아 있는 내 안에 들어 있는 어떤 힘이 합세하여 글의 내용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아 있는 대상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만약에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면 그 공로가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합니까? 당연히 말씀을 주신 분에게로 돌아가겠지요. 말씀 자체의 효력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교과서만 던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 중간마다 시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교과서 내용을 잘 이해하고 너의 능력이 어느 정도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예 죽어버린 자에게 교과서 던져주고 시험치지는 않습니다. 그들 고유의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이런 죽은 자에게는 성경이든 책이든 교과서를 던져 주지 않는 것이 옳겠지요. 만약에 그들에게 던져주는 행위도 도리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던져주십니다. 왜요? 이점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에스겔 37장에 잠시 들릴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데리고 해골들만 가득한 골짜기로 가십니다. 거기에는 '산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묻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뜻밖의 질문입니다. 너무나도 상식에 맞지 않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기가 임하니까 점차 점차 힘줄이 생기며 나중에는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일부로 선지자에게 보여주시는 이유는, 장차 참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백성은 꼭 이런 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육체로 아니되고 이성과 지식으로 구원이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해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해야지만 하나님을 위한 군대가 됩니다.
자... 이런 이야기가 지금 이 성경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던져 주십니다. "자 이해가 되느냐?"고 물으시면서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하는 자라야 "예,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저도 이 골짜기의 해골과 같은 존재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아는 식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면 이 에스겔 37장의 이야기를 거부하겠지요. 우리가 아는 '죽음'이란 '종결 지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것이 없는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이미 끝난 마당에 무엇을 새삼스럽게 시작한 단 말입니까?
우리가 평소에 미미하나마 숨이 붙어 있을 때에나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힘을 내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이지 아예 숨이 끊어진 다음에야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났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종교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도 이 죽은 인생에 대해 어떻게 손쓸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 밖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또 다른 예는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천사가 아브라함의 가족에 아기가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브라함의 처 사라는 몰래 웃었습니다. 자기 태가 이미 죽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기에 새삼 아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이 말도 안되는 비상식적인 말에 사라는 웃음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이 사라의 반응에 놓치지 않고 중요한 사항으로 삼습니다. "네가 웃었지?"하고 다꾸칩니다. 사라의 웃음이 별게 아니라면 결코 아기 이름 이삭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단순히 아들 하나 주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의 일이란 웃음거리 밖에 안된다는 그 의식을 하나님은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태가 죽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라에게 있어 나올 수 있는 것은 웃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이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그가 한 것은 하갈이라는 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 일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죽음의 흔적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끝났습니다. 손 떼야 합니다.
진정한 구원이란 이처럼 인간의 힘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됩니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재주를 발휘 할 기회를 주는 식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우리를 밑에서 바쳐주는 또 다른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을 믿어야 하는데 그 내막이 오늘 본문입니다. 19-20절에 보면,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냥 말씀만 던져주면 되지 왜 그들의 머리 위에 피를 뿌립니까? 그리고 뿌리더라도 향수나 물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피를 뿌립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크나 큰 모독입니다. 피를 뿌리는 이유는 이러합니다. 말씀을 지켜내느냐 아니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정작 "나는 누구인가?"하는 문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피를 뿌리면서 뜻을 전달합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몸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기껏 자기 변신의 연속입니다. 가끔 옛 고향에 가보면 이미 고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향이 구성되려면 같이 놀던 친구도 어려 있어야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젊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조건은 더 이상 구비될 수 없습니다. 고향이 깨어져 있는 겁니다. 그 때부터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여기는 직업을 갖고 일을 하지만 곧 얼마 안가서 그 일로서 진정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확정지을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니 불안하고 불안하기에 새로운 일을 구상해서 자기를 규정해 보려고 애쓰다가 한평생을 마감하고 매장되기 위해 이 세상에서 물러갑니다.
하지만 불안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뒤의 세계도 또한 더욱 불안합니다. 피, 죽음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첫 출발시키는 출발점인 동시에 우리가 도착해야 될 도착지점을 뜻합니다. 구원의 시작도, 그리고 끝도 피 안에 머뭅니다. 예수님의 피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피로 끝납니다.
오늘 본문 16-17절에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어렵고 심오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거워하고 꼴보기 싫어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평소에 예수가 뭐라고 주장했던 것은 죽여 버리면 모든 것이 휴지 조각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니 이것이 유언이 되어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는 겁니다. 피의 시대가 열린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서 산 사람의 행세를 하겠다는 모든 인간들의 까부는 행위를 일시에 부정해 버립니다. 진짜 인생은 이 피 앞에서 밝혀집니다. "나는 사실 죽은 자이구나"를 확정되는 것이 이 피 앞에서입니다.
다른 인생관을 더 이상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변신을 획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무의미한 일입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만들어 나가는 나를 바라보지 말고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은혜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자아로서 살아갑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바치고 있는 바탕이 따로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결코 매일 매일이 우리 힘으로 살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8. 유언과 죽음(히 9: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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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에게 던지는 말씀 !!
우리가 성경말씀을 볼 때, “내가 살아있으니까 이런 말씀을 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왜 그런 생각이 들까요? 그것은 그 글에 담긴 내용과, 살아있는 자기 안에 들어있는 어떤 힘이 합세해서 글의 내용을 실천에 옮길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아있는 대상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은 자로 간주를 하시고 성경말씀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말씀으로 인해서 다시 살아났다면, 그러면 그 공로가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합니까? 당연히 말씀을 주신 분에게로 돌아가겠죠. 즉 말씀자체의 효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동일한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자기가 살아있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는지, 아니면 말씀을 지키지도 못하고 결국 무덤 속으로 매장되어야하는, 그런 죽어있는 자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는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이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줍니까? 달랑 교과서만 주는 것이 아닌데, 중간 중간마다 시험이란 것이 있어요. 만약에 교과서를 주고 “이제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라고 한다면 시험을 왜 치겠습니까? 시험이라는 것은, “너희들이 과연 학교에서 내준 교과서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라는 것을 측정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존재에게 성경말씀을 주시는 경우라면,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아직까지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잠재되어있다는 것을 긍정하고 인정해줄 때만, 그럴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서는 시험을 치는데, “왜 시키는 데로 하지 않았는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 장례식장에 가면, 거기에는 이미 가루가 되어서 안치되어있는 분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성경말씀이나 교과를 던져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예 죽어버린 자에게는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고유의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아무리 주어도 전혀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죽은 자들에게는 성경이나 교과서를 주지 않는 것이 옳은데, 만약에 그들에게 던져주면, 그런 행위도 도리어 이상한 일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던져주시는데, 왜 그렇습니까? 이점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에스겔서 37장을 잠시 들릴 필요가 있습니다.
에스겔야, 여기 해골들이 보이느냐?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데리고 해골들만 가득한 골짜기로 가십니다. 거기는 ‘산다’ 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묻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라고 말이죠. 전혀 뜻밖의 질문인데, 전혀 상식에 맞지 않는 질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지시는데, 그러니 에스겔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묵묵부답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생기가 임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점차 해골에 힘줄이 생기면서, 나중에는 사람이 되고 큰 군대가 되었다는 겁니다. ‘미이라2’ 라는 영화에 보면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 어떤 능력이 임하니 미이라가 살아난다는 말이죠(ㅋㅋ).
(겔 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 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그렇다면 이것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지막 때에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 백성은 어떠하다는 겁니까? 반드시 이런 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것은 성신이 임해야만 하는데, 인간의 육체로 안 되고, 이성과 지식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죠. 인간은 해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래서 성신이 임해야만 하나님을 위한 군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성령이 임한 자들만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이렇게 미리 앞당겨서 보여준다는 겁니다.
이것이 믿어지는가?
이런 이야기가 지금 이 성경에 나와있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던져주십니다. 즉 “이게 이해가 되는가? 이것이 믿어지는가? 이것을 너의 인생관으로 삼으면서 살아갈 용의가 있는가?” 라고 물으신다는 말이죠. 따라서 오직 성령이 임한 자라야 “예,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저도 이 골짜기의 해골과 같은 존재입니다” 라고 대답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기존의 우리 인간들이 아는 ‘죽음’ 이라는 개념이라면, 이 에스겔서 37장의 이야기는 당연히 거부될 수밖에 없겠지요. 우리가 아는 죽음이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종결을 지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어떻게 해볼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미 끝난 마당에 무엇을 새삼스럽게 시작하느냐는 말이죠.
모든 것이 다 끝났기 때문에 땅에 매장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면 안방에 모셔놓고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겠죠. 하지만 이미 인간의 능력범위를 벗어났기에, 그래서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뭔가가 불연 듯 나타나서 실현이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도 우리가 평소에 미미하나마 숨이 붙어있을 때나,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힘을 내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이지, 아예 숨이 끊어진 다음에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습니까?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은 종교에 관한 문제가 아닌데, 종교도 이 죽은 인생에 대해서는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는 말이죠.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 밖에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사라와 웃음 !!
또 다른 예는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일인데,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천사가 아브라함과 그 아내에게 아기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브라함의 처인 사라는 몰래 웃었는데, 왜냐하면 자기 태가 이미 죽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그래서 새삼 아기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그게 운동을 하고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됩니까? 전혀 안 된다는 겁니다.
(창 18: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창 18: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창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조금 전에 ‘죽었다’ 라는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손을 뗐다는 겁니다. 손으로 주무르고 말고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만약에 응급전문의가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죽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러니 아무리 천사라도 그렇지, 찾아와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말을 하니, 사라는 웃음이 나올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천사가 사라가 아직 생산능력이 있을 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겁니까? 하나님은 왜 그런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럴 때 천사가 와서 예언을 하고, 그러면 자기들은 자식을 만들어서 낳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적인 상식인데, 일단 자가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보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신앙이라고 알고 있는데, 지금도 다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고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웃음은, 모든 지고선(至高善)에 대한 도박이다 !!
아무튼 천사가 와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사라가 듣고 그만 웃었는데, 그런데 이 ‘웃음’ 이라는 것을 ‘데리다’ 라는 철학자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웃음은 모든 지고선(至高善)에 대한 도박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즉 웃음은 아주 거룩하신 분에 대한 부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악마의 장난이라고 했는데, 옴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 라는 책에 보면 그런 게 나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는 비극은 있지만 희극은 없는데, 성화된 사람은 절대로 웃지 않는다는 말이죠. 웃음은 농담이고, 신을 허무하게 만드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사라가 웃었는데, 사실은 아브라함도 웃었는데 말이죠. 이것은 바로 “나도 한 신앙을 합니다. 시켜주시기만 하면 합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천사들은 바로 이 사라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그만 중요한 사항으로 삼아버렸다는 겁니다. 사라의 웃음을 가지고 말이죠.
그래서 천사가 “어, 네가 웃었지?” 라고 하면서 다그치는데, 사실 이것은 야단을 친다기보다는 “그래, 웃어라. 그게 인간종교의 극치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교회에 다니는 것은 결국 농담인데, 물론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볍다는 겁니다. 중요하지는 않다는 말이죠.
만약 사라의 웃음이 별 것이 아니라면 결코 아기의 이름이 ‘이삭’, 즉 웃음이 될 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만큼 하나님께서 단순히 아들 하나를 주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은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라고 하는, 그런 의식을 하나님은 놓치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독일교회에는 교인이 한 명도 없어요 !!
얼마 전에 독일에 갔다온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교회에 교인이 한 명도 없다는 겁니다. 물론 독일은 온 국민이 다 신자이어야 하기에 세례를 받기는 받았는데, 하지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니 아예 설교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렇게 사람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연세가 많은 분들이 나오기 때문에 목사가 설교는 했다는 겁니다. 물론 메인 건물인 본당에서 모인 것이 아니고, 그것은 관광용이고, 옆에 있는 부속건물에서 모였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모임조차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토요일 휴무제에 있는 겁니까? 그 원인을 어떤 사람은 신앙이 나태해져서 그렇다고 하는데, 경제활동을 하다가보니 너무 바빠서 그렇다고 하는 분도 있고 말이죠. 그러니 일요일에 쉬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을 위해서 준비를 하다가보니 더 바쁘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분석은 잘못된 것인데, 과거에 백 명, 천 명이 나올 때도 원래는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지금의 독일교회는 교인들이 없어서 설교를 하는 목사가 할 일이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너무 설교를 많이 했기 때문에 힘들었다는 겁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밤새도록 설교를 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말씀이 좋아서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말이죠.
해골들이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 신기할 뿐 !!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왜 과거에 백 명이 모일 때도 교인이 한 명도 없었는고 하니,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큰 실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 명이 모일 때도 있었으니 말이죠. 그러면 그 천 명에 비하면 백 명이 모인다는 것이 얼마나 아쉬우냐는 것이죠. 물론 천 명을 기준으로 삼아도 잘못이고 말이죠.
그러니 기준은 하나밖에 없는데, “오고 싶어도 하나님이 막으시면 올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정답인데, 왜 그렇습니까? 만약에 “죽은 자가 왜 살아나지를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는 겁니다. 아니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납니까? 살아나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독일의 교회 교인들이 죽은 해골들이라면, 해그 골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정답인데, 그런데도 놀랍게도 교회에 나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으로 그때만 나오게 해주었기 때문에 나왔다는 것이죠. 복음을 들으라고 말이죠.
그렇게 해골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데, 주5일 근무라서 모두들 놀러간다고 교회에 나오지를 못하네” 라고 한다면,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성경말씀과 전혀 맞지 않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장로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좁은 문으로 가야하는데, 그런데 그 좁은 문은 찾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죠.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를 못했는데, 왜 찾는 이가 적으냐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교인들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또한 숨어서도 예배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게 후사도시대인데 말이죠. 어떤 사람은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서 스스로 사자굴에 가기도 했는데, 먼저 죽으려고 자기 몸을 사자의 입에 들이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런 시절에 비해서 천 명이 모이면 괜찮은 교회입니까? 기준은 무엇인고 하니까, 사자에게 물리든 말든, 천 명이 오든 백 명이 오든, 항상 신앙은 무엇인고 하니까, “저는 천국에 가지 않아도 당연한데, 그런데 천국에 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것인데, 과연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는 겁니다.
바로 그게 중요한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애인을 따라서 교회에 오고,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오고, 그런 사람들은 어차피 떠날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몸이 집에서 예배당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은 산책이나 등산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자기가 알아서 이동을 시키면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이동을 해봐야 세상인데, 주님 안이 아니라는 겁니다. 은혜 바깥에 있다가 은혜 안으로 들어와야 하고, 성령 바깥에 있다가 성령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인데,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독일교회는 교인들이 없기에 목사가 설교를 빼버리고, 전례, 즉 의식만 행하는데, 혹시 오면 떡 하나 먹고 집에 가라는 겁니다. 그냥 가버리면 너무 섭섭하니 말이죠.
너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
제가 아브라함 이야기를 했고, 에스겔서 37장을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어떤 식으로 하십니까? “너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결국 너는 죽는데, 그러니 지금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뭔가 바쳐주는 힘이 있을 때 살아있는 것이지, 그것을 빼버리면 그만 털석 주저앉고 만다는 겁니다. 왜 공사장에 가보면, 밑에서 뭔가 바쳐주니 위에서 패널을 깔아놓고 인부들이 일을 하는데, 그것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밑으로 내려앉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그러니 우리가 교회에 오나 오지 않으나 밑에서 뭔가가 바쳐주는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누가 아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나 스스로는 할 수 없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해” 라는 것을 항상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그 말씀이 납득이 된다는 말이죠. 새삼스럽게 시험을 칠 이유가 없는데, 그런 사람에게 마지막 심판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매일같이 시험을 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말이죠. 천국에 가는 것도 은혜, 구원을 받는 것도 은혜, 그 모든 것이 다 은혜라고 여기면서 고개를 마구 끄덕이고 있는데, 시험은 무슨 시험이냐는 겁니다. 이미 정답 안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이 무지 어려운데, 19절과 20절을 보겠습니다.
(히 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히 9: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그런데 피는 왜 뿌리는가?
여러분, 이것이 왜 어렵습니까? 말씀을 주시고는 백성들에게 피는 왜 뿌리느냐는 겁니다. 말씀을 주셨다면, “지켜야 한다. 알았으면 집에 가라” 라고 하면서 끝을 내면 되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향수도 아니고 피를 왜 뿌리느냐는 말이죠.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크나 큰 모독인데 말이죠.
피를 뿌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말씀을 지켜내는가? 아닌가?” 라는 문제가 아니라, “정작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면서 자기 뜻을 전달하시는데, 즉 “너희들은 이미 죽은 몸이다” 라는 겁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기껏 자기 변신의 연속인데, 그래서 어릴 때 살던 고향에 가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이미 고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고향이 제대로 구성이 되려면 같이 놀던 친구도 어려 있어야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젊어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이미 깨어진 고향 !!
그러나 그런 조건은 더 이상 구비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다들 돌아가시고, 친구들은 모두가 구부정하게 늙어있다는 말이죠. 고향은 그렇게 깨어져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알기 위한 작업인데, 그러한 몸부림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어느 정도의 인간인지 측정하기 위해서 공부도 해보고, 직업도 가져보는 겁니다. 그렇게 공부도 하고 직업도 바꿔보는 것을 학자들은 ‘시황(?)’ 이라고 하는데, ‘나’ 라는 것을 빈칸으로 두고 거기에 아무 것이나 넣어본다는 말이죠.
장사를 하면 장사의 귀재라는 소리를 듣고, 농사를 지으면 천재 농사꾼이라는 소라를 듣고, 공직에 나가면 청렴결백하다고 칭찬을 듣고, 그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 때까지, 늘 거기에 자기를 집어넣어 본다는 겁니다. 즉 장로가 되면 아주 인품이 좋은 장로, 목사가 되면 교인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목사,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생이라는 것은 고향을 상실했기에, 자기가 누구인지 확정지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그것을 ‘정체성’ 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알기 위해서 계속해서 바꿔본다는 말이죠. 그래서 늘 불안하다는 겁니다.
인간은, 빈칸을 미끄러지듯이 떠돌아다니는 부유물 !!
그것이 현대철학에서 밝혀낸 인간인데, 즉 인간은 빈칸을 미끄러지듯이 떠돌아다니는 부유물과도 같다는 말이죠. 마치 기름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니듯이, 그렇게 떠돌아다닌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향이 없는 인간에게, 아버지와 같이 위에서 들리는 큰 소리는, 즉 국가의 법과 같은 것은 매우 짜증나고 귀찮다는 말이죠.
그것은 곧 억압인데, 그러니 그것이 싫어서 또 다른 직장을 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억압을 당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그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싫어서 빠져 나오면 그만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래서 계속해서 이리 저리로 떠돌아다닌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떠돌다가 결국 어디로 갑니까? 청춘의 꿈도 이루지 못하고 그만 늙어 가는데, 그렇게 늙으면 온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것이 자식에게 손을 벌려서 살려달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는 해방이 되었다고 여겼지만, 나이가 들면 남의 보호를 받아야하고 기대야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고향은 깨어져있으니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니 불안하고, 그렇게 불안한 채로 죽음까지 맞이하려고 하니 그 죽음의 세계가 더욱 더 불안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껏 내세우는 것이 “나는 교회를 50년 다녔다. 나는 목사다. 나는 장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빈칸을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피로 끝 !!
그럴 것 같으면 애초부터 언약의 피에 젖어서, “너는 죽어야해. 너는 피를 흘려야해. 너는 피 속에서 존재해. 피가 너를 지배해” 라고 하는, 그 언약의 피를 받아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피를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다 뿌린다는 말이죠. “그 어떤 인간도 죄인이 아닌 인간이 없고, 그 어떤 인간도 죽지 않을 인간이 없다.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떠돌아다녔는가?” 라는 겁니다.
여러분, 피 안에서는 은폐(?)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피가 우리의 출발지점인 동시에 도착지점이기 때문에 말이죠. 구원의 시작도 그 끝도 모두가 피 안에 머무는데, 즉 예수님의 피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피로 끝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언약의 피라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을 보겠습니다.
(히 9: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히 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성경이 참 어렵고 심오한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버겁고 너무 꼴보기가 싫어서 “죽여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평소에 예수가 무엇이라고 주장을 했던 간에, 그런 것은 죽여버리면 모든 것이 휴지조각이 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드디어 열린 피의 시대 !!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는데, 즉 “이제는 우리 서로 굿바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니 그것이 유언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피의 시대가 열렸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불안해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렇게 바꾸어가면서 여러 가지를 해보는데, 그래도 여전히 안정감은 없고, 물론 고향도 없고 말이죠. 그렇게 모든 터전을 다 잃어버렸는데, 그럴 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평소에 뭐라고 하더노? 그게 너의 모습이라고 했잖아”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기를 “너의 처에게서 약속의 자녀가 나올 것이다” 라고 하니, 아브라함은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기다렸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으라고 하시는구나” 라고 해서, 자기가 알아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게 이스마엘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짓이 바로 이것인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라” 라고 하니, “그러면 믿지 뭐. 젊었을 때 믿어서 기다리면 되겠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도 돌아서서는 “이제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으니 천국에는 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나는 누구지? 왜 이렇게 불안하지? 앞으로 무엇을 하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 것과, 자기가 사는 것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하나의 종교인데, 예수님의 피를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가 알아서 찍어서 바른다는 겁니다. 언약의 피가 몸 전체를 뒤덮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자기가 바른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 손가락에만 피가 발려져있지, 머리와 온 몸에는 피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니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어주겠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바로 이런 까불락거림, 즉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아서 “하나님, 제 상속자가 맞지요? 이 아이로 인해서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는 게 맞지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해서 낳은 아브라함의 자식은 어떻게 됩니까? 바로 그런 것이 완전히 박살이 나는, 즉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을 했다”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부셔버린다는 겁니다.
없던 아기, 없던 자아 !!
바로 그 부서진 토대 위에 누가 찾아왔습니까? 신약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는데, 그것이 그 당시에는 세 명의 천사들이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없던 아기’가 생겨나야 하는데, 그렇다면 여러분 가운데서 ‘없던 자아’는 과연 무엇인가요? 그러니 여러분의 자아가 아닌, 없던 자아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부활의 자아인데, 이게 우리 속에 들어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의 행함으로 일구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즉 해골인데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죠. 해골인데 살점이 붙고 힘줄이 생겨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버린,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나’, 그러니 이것은 전혀 흔들릴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 덩어리이기 때문에 말이죠. 너무나 안정되어있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언약에 의해서, 즉 예수님의 유언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그런 새로운 자아가 형성된다는 말이죠. 이런 사람은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데, 즉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는 고백을 매일같이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사도바울의 고백인데, 이런 사도바울이 호랑이를 무서워하겠습니까? 돈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무엇을 무서워하겠느냐는 말이죠.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
제가 이전의 교회에 있을 때, 설교시간에 “여러분, 무엇이 무섭습니까?” 라고 하니, 답변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설교를 하면서 던진 질문인데, 제일 앞자리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동안 철학자들이 솔직하게 말하지 않던 것을, 90이 넘은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정답을 이야기하고 말았는데,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한다는 말이죠. 사람이 왜 무서운가요? 그것은 남들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고집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람이 무섭다는 것은, 거기서 더 나가면 자기 체면이, 자기 자존심이 자기 최후의 적이라는 겁니다. 그런 체면과 자존심, 그것이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아직도 자기가 알아서 변화되려고 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을 다듬고 바꿔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 자신에게 그런 것이 있지만, 그런 것은 모두 흙 속에 매장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은 자식의 손에 의해서 흙에 묻혀야만 하는 ‘나’, 그것을 우리가 일찌감치 인정을 하자는 말이죠. 이렇게 지금 이 순간에도 고집을 부리고 있지만, 하지만 아무리 고집이 세어도 죽으면 결국에는 다 꺾이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것은 주님의 언약의 피인데, 머리에, 어깨에, 온 몸에 뿌려지는 그 피, 십자가의 피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새로 생긴 하나님의 백성, 바로 그런 ‘나’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자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종교가 아니고,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자녀, 없는 데서 생긴 그 아기, 우리에는 없는 자아, 그러한 자아를 가지고 안정감이 있게 천국까지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피가 농담이 아닌데, 성령이 오시고 해골이 일어나는 것이 장난이 아닌데,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들만 챙깁니까? 하나님을 상대로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손을 떼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온 몸에 적시면서, ‘살았다’ 라는 것을 실감하는, 그런 십자가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16 오후 9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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