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9:11-14) 하늘의 세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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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하늘의 세계 2002년 1월 6일 27강
본문 말씀 : 히브리서 9:11-14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지시해서 지은 성전이 두 구조로 나누어 졌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소는 인간이 이를 수 있는 한계입니다. 하지만 지성소에는 못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그 지성소는 하늘 나라의 측면을 말하기 때문이죠.
자, 하늘에서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점을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 대해서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들이 주로 관심을 쏟고 있는 이 세상은 손으로 지은 것의 진열이요 창조에 속한 것들의 변형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자기 힘으로 직접 만들어 낸 것을 감상하면서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뭐든지 행함이 없이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드는 재료는 모두 창조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행함이란 이미 있는 것들을 재조립하고 변형해서 개조하기 위해 주력합니다. 장사하는 것이나 공직에 잇어 행정하는 것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모두 이 창조 내에 있는 것들에 대한 재 정리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소식은 이런 창조 세계와 전혀 상관없습니다.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창조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을 누가 관심이나 두겠습니까? 여기서 성령님이 작용하는 대목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이 눈이나 귀나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하늘의 것을 알게 하십니다.
무엇을 알게 해주십니까? 오늘 본문 12-14절을 알게 해주십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바로 이 내용 자체가 성령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내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손을 놓고, 그리고 창조 세계의 움직임보다 이 내용을 그대로 수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함이란 기껏 창조에 속한 일에 불과합니다. 이런 행함의식으로 종교를 만들어도 그 종교는 여전히 인간의 손과 두뇌에서 나온 헛된 망상에 불과합니다. 왜 하나님은 피조 세계에 속한 것으로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지 그 내막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3:21-2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하늘이 열리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의 정보는 하늘이 열려야 가능합니다. 하늘이 열리지 아니하면 하늘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선지자들에게는 조금씩 하늘의 정보에 대해서 계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하나님, 그 자체가 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맛뵈기로 하늘에 대해서 우리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다릅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 속한 일과 그 내용들이 남김없이 이 시대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다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자에서 태어난 중에 세례 요한보다 위대한 자가 없다. 그러나 천국에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하늘의 소식이 예수님을 통해서 전부가 다 전달된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거기에 대해 어떤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는 것을 믿는 겁니다." 정말 제대로 답변한 것입니다.
이미 하늘에 관해서 모든 것이 알려진 이 마당에서 진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뜻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늘 나라의 소식의 핵심이 왜 죄 사함인가?' 하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33:2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그리고 사사기 13장에 삼손의 아버지가 나옵니다. 삼손을 낳기 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죽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럴 때 아내가 말하기를, "우리를 죽지 않기 위해 우리보고 제사를 드렸다"고 위로해줍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하나님을 뵈오면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도 어두워서 오늘날 인간들은 자신이 크게 죄인인 줄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누구도 죽게 됩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에 차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정결함과 거룩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종교을 가지고 창조에 속한 것들을 더 많이 얻기 위하여 제 멋대로 신에게 영광돌리겠다고 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 아는 것이 있다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를 통해서 보면 이러한 인간들의 생각은 모두 헛수고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살기가 등등하고 의기 양하게 예수믿는 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굳게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자청하는 예수와 그 추종자들은 참 여호와 종교를 위태롭게 하는 이단이기에 척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신앙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이 세계의 현실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라고 자신만만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환해지면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옆에 같이 가던 사람은 증언하기를 그 때 우뢰가 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그 개인에게는 우뢰가 아니라 누군가가 자기를 지적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물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이 순간 사울이라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이 정립해 놓은 현실과 진리에 대해서 재정립해야 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옳은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다 엉터리였습니다. 그저 인간들이 상상해낸 그런 종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인간의 두뇌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버려야 합니다. 하늘의 모든 것은 오로지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직접 방문한 적이 있는 바로 그 분입니다. 다른 하나님은 다 가짜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다'는 사실을 기초로 해서 제대로 현실과 진리를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사울이 아니라 사도 바울, 즉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종이 되어 우리 앞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이 현실성을 편지를 통해서 곳곳에 전했습니다. 로마서가 그러하고, 갈라디아서가 그러하고, 고린도전후서 그러하고, 그리고 이 히브리서가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전해 줍니다. 손으로 지은 것이나 창조에 속한 것으로 구원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 창조 세계에 속한 것들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제는 염소의 피나 송아지의 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게 하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종족들은 추상적인 신을 염두에 두고 그 중매자로 죽은 조상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조상한테 제사지내고 잘하면 현세에 복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추가적으로 알기 전에 자신이 누군가 하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피만 비로소 깨끗해 질 수 있음을 믿는다면 겁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래 나 죄인이다. 하지만 나를 깨끗게 하신 예수님이 있다"고 나선다면 뭐가 두렵습니까? 혹시나 사도 바울이 너무 교만해 질봐야 하나님은 그 몸에 가시를 둘 정도로 사도 바울은 삼층천까지 보고 온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이 창조 세계 속한 것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를 가지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자기 주제 파악이 되면 겁나는 것이 없이 됩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신경 쓰지 마시고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을 통해 알려진 바를 우리는 믿고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 손으로 한 것에 애착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현실적인 행함임을 알게 되었사오니 우선 자기 자신부터 제대로 파악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7. 하늘의 세계(히 9:11-14)
----------------------------------- (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지시해서 지은 성전이 두 개의 구조로 나누어져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성소이고, 다른 하나는 지성소인데, 여기서 성소는 인간들이 이를 수 있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성소까지는 들어가지만 지성소에는 들어가지를 못하는데, 왜냐하면 이 지성소는 감히 인간들이 넘어설 수 없는 하늘나라의 측면을 말해주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인간들만이 사는 세상, 즉 인간들끼리 서로 교제하고 사랑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인간들의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내막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나님 쪽에서 성의를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을 하셨다는 것이죠. 고맙게도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눈으로 봐서 알 수 있습니까?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눈으로 봐서도 안 되고, 들을 수도 없고, 그리고 마음으로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겁니다. 완전히 차단되어있다는 말이죠. 요즘은 잘만 하면 북한에도 갈 수 있는데, 그러니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성경에는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하늘나라의 내막을 알려주시는 성령 !!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그게 바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은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을 이야기하는데, 그 성령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생전에 들어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꿈꾸지도 못했던, 그런 하늘나라의 내막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보게 하고, 믿게 하고, 수용하도록 조치하는, 그런 역할을 하시는 하나님을 성령이라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목사님, 성령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12절을 보겠습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염소와 송아지의 피는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염소와 송아지는 우리 인간이 얼마든지 잡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조치를 취하십니까?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13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히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여기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라고 하는데, 그리고 14절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라고 하고 말이죠. 바로 이런 사실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이 성령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기껏해야 염소를 잡고 송아지를 잡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데, 즉 예배당을 짓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손으로 짓지 아니한 !!
그것을 오늘 본문 11절에서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이라고 하는데, 즉 손을 놓으라고 한다는 말이죠. 사람이 뭔가 손으로 만들어내면, 음식을 만들든지 집을 짓든지 하면, 그렇게 인간의 육체를 동원해서, 그렇게 행함으로 자기 실적과 업적을 낼 수 있다는 말이죠.
(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얼마 전에 미국에서 100층이 넘는 무역센터빌딩이 무너졌는데, 그 건물이 무너지기 이전에 얼마나 대단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어릴 때 잠실의 아파트 단지를 보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15만명의 엄청난 인구를 집을 지어서 모두 다 넣어놓았다는 겁니다. 시골에서는 초가집을 하나 짓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렇게 대규모의 아파트를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냐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손을 놓으라고 하시는데, 그러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하늘에 속한 것이란 말이죠. 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기들이 만든 위대한 문명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데, 피라미드나 바벨탑을, 그리고 자기 손수 헌금해서 지은 예배당을 죽어도 놓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거기에 매료되고 환장을 하는데, 그런 것에 인생을 살아가는 보람을 느낀다는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닌데,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이 있고, 손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말이죠. 사람이 손수 무엇을 하게 되면, 나중에 돌아오는 것은 깊은 허탈과 허무함인데, 뭔가 할 때는 기쁨을 주는 것 같으면, 돌아서면 다 떠나게 된다는 겁니다.
평생 자식을 키우다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임종을 맞이할 때, 한 평생을 살면서 참 고생도 많이 하고 애도 많이 썼는데, 눈물도 많이 흘렸고 말이죠. 물론 보람도 있지만 지긋지긋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는 것인데, 자기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보다도 이것이 더 시급한 문제라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극락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은 얼마든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있다는 말이죠. 이슬람교의 교리에 보면 천국에 대해서 상세하게 나오는데, 오아시스인데 야자수 나무가 있고 여자들도 있다는 말이죠. 그들이 사막에 살면서, “이랬으면 참 좋겠다” 라고 하는 모든 것은 다 거기에 넣어놓았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나누어주는 책자에 보면, 그 그림들이 어떻습니까? 완전히 최고의 골프장을 그려놓았는데, 이것은 인간들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만화처럼, 동화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겁니다.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석양과 늘어진 야자수와 밀려오는 파도소리와 고운 모래알 속에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일광욕이나 즐기면서 살고 싶은, 그게 인간들이 상상하는 낙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이 이 땅에서 조립해서 만들어낸 것인데, 그러면 그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염소가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서 더러운 우리가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게 곧 복음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것을 소홀히 합니까? 결코 소홀히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인간의 상상력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것인지, 정말이지 하늘나라가 그러한 것인지,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혹시 기독교인들이 조작해낸 것은 아니냐는 말이죠.
이제 그 과정을 설명해드리겠는데, 누가복음 3장 21절과 22절입니다.
(눅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눅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며 !!
여기 21절에서 ‘하늘이 열리며’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의 정보는 하늘이 열려야 가능한데, 하늘이 열리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겁니다. 하늘이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는 닫혀있었는데, 물론 야곱과 같은 특수한 인물에겐 잠깐 열리기도 했지만 말이죠. 하지만 그 내막 전부를 다 쏟아 붓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셨을 때뿐이라는 겁니다.
물론 선지자들에게도 조금씩 하늘의 정보가 계시되어 왔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하나님, 그 자체가 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은 맛보기로서 하늘에 대해서 우리에게 전달했는데,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다르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렸는데, 그때 하늘 속한 일과 그 내용들이 남김없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 드러났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여자에서 태어난 중에 세례요한보다도 위대한 자가 없다. 그러나 천국에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도 크다” 라고 말이죠. 세례요한이 위대한 선지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선지자가 받은 하늘나라에 대한 정보의 양은,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전부를 보는 것과 맛보기로 보는 것과는 서로 같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눅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선지자는 인간인데, 그러니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부분과 그 내용에 대해서만 전달할 뿐인데,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인데, 하나님과 영광을 공유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제 하늘나라에 대해서 모를 것이 없는데, 완벽하게 다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왜 하늘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고 하니,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것에 대해서 너무나 애착을 가지고 한 평생 정신을 집중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한다고 해서,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받는다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우리에게 전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달했기에, 그래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모든 것은 다 챙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즉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오고, 그 성령이 우리의 성령이 될 때, 그러면 우리가 모든 것을 수용하게 된다는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리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예수님은 옛날 사람이고, 우리는 21세기 사람인데, 도대체 그 예수님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하시는 분이 있다고 하면, 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겁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생각에는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데, 그러니 그 하나님 이외에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자기의 신앙심으로는 그런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이외에 인간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는 용서치 않고 잡아서 죽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고 봉사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척결하기로 다짐을 하고, 실제로 그런 일에 종사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날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을 잡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큰 광채가 나면서 사울 개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같이 있던 다른 사람들은 천둥소리밖에 듣지 못했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여기서 사울이라는 사람은 현실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을 다시 정리해야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현실세계가 어떻게 짜여져 있으며, 어떤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지, 그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하는 지점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죠.
분명히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죄수라고, 자기는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옛날에는 여호와를 믿던 게 현실이었고, 지금은 무엇인고 하니,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지금 자기가 만난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란 것을, 그렇게 새롭게 현실을 재정립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추상적 하나님을 멀리하자 !!
제가 설교와 강의를 하면서 여러 번 강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제발 사울처럼 추상적인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은 굳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그것은 우리의 증조 할머니가 믿던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런 하나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 수가 있는데, 수학자든, 물리학자든, 자기 분야를 열심히 공부하다가 보면 다들 느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과거에 차범근 선수가 골을 넣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곤 했는데,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의 양심과 기억 속에 들어있는 전능하신 존재자인데, 그러니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자기 상상에 매료된 것이란 말이죠. 즉 추상적인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일종의 꿈인데, 그래서 제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공격을 하면서 신학생들이나 목사님들에게 강의를 하는데,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은 버려달라는 겁니다. 중들이 넘어져도 “아이쿠, 하나님!”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애국가에도 나오는 하나님인데, 성경에도 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안다고 했고 말이죠.
누군가가 실제로 왔다가 갔구나 !!
그러니 신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마치 장신구처럼 달고 다니다가 싫어서 버리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왜 예수로부터 새롭게 출발하지를 못하느냐는 겁니다. “아하, 내 머리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누군가가 실제로 왔다가 갔구나” 라고, 우리 인간들만 살고 있다고 여기는 이곳에 말이죠.
그렇게 왔다 가신 분이 하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손을 털어라. 성전을 털어라. 예배당을 털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예배로서, 즉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 진짜 선지자, 진짜 메시야를 두고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분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왜 일반적인 상식 선에서 믿으려고 합니까? 즉 “내가 이렇게 성의를 보이면, 하나님도 양심이 있으면 주시겠지. 받은 것이 있는데 설마 그냥 모른 척을 하겠나?” 라고 하면서,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다 가지고 있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 사람이 사울인데,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만 있으면 되지, 그 하나님만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지, 굳이 예수가 왜 필요한가? 인간은 인간이지,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라고 하면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서 죽이기로 작정을 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도 그렇게 사울처럼 알았고 말이죠.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서, “니가 들은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이방인들에게 전해야한다” 라고 하셨는데, 그때 사울은 소경이 되고 말았는데, 즉 눈을 뜨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사울은 그 이름이 바울로 바뀌면서, 즉 사도바울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는 사람에게 배우지 아니하고 아라바아 광야에 가서는 또 다시 예수님에게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을 낱낱이 적은 것이 곧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등, 그렇다는 겁니다.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그분이 우리에게 알려주었는데, 하늘나라의 정보를 말이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히브리서라는 겁니다.
피조세계에 갇힌 인간들 !!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오늘 본문에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장사를 하든 농사를 짓든 과학을 하든, 인간들이 하는 그 모든 일들이 창조라는 테두리 안에서, 즉 기존 피조세계에 있는 것을 가지고 조립하고 만들어서 주고받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회고 정치고 경제인데, 사람들은 이것이 전부이고, 여기서 뛰어난 놈들은 대우를 받고 살아가는데, 이런 세상에 우리는 평생 길들어져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죽으면 어디로 갈까? 지옥에 가면 안 되지. 그래, 뭔가가 있어야해. 오 신이시여, 나의 영혼을 받으소서” 라고 하면서 종교를 만들었는데,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고 말이죠. 그러니 종교는 일종의 신에 대한 두려움의 소산인데, 연구를 해보면 종교가 없는 민족이 없다는 말이죠.
그 종교를 대리한 사람이 곧 조상이고, 그래서 조상숭배는 모든 종족과 민족의 공통적인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늘의 신과 현재 살고 있는 자기들을 중재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조상인데, 그래서 다들 조상을 잘 섬겨서 복을 받으려고 하는데, 조상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명절에 제 아무리 차가 막히고 해도 고향을 찾아가는데, 조상님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말이죠.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 이야기를 예수님이 언제 하셨느냐는 겁니다. 하늘의 게시를 받은 사도바울이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는 말이죠. 과연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그게 맞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고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벌을 받고 말고 하는 것이 다 기존의 창조에 속한 것인데, 즉 자기 손으로 이룬 것들이 허물어질까 싶어서 두려워서 하는 짓들이라는 겁니다.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거기서 탈피해야 하는데, 상식 선에서 놀지 말고 말이죠.
주님의 용서를 믿는 것이 곧, 신앙 !!
인터넷에 보니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신앙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답변을 보니 제법 길던데, 그것을 요약하면 “자신의 죄를 주님이 용서해 주시는 것을 믿습니까? 그것이 신앙입니다” 라고 말이죠. 정말 제대로 답변을 했다는 겁니다.
저쪽에서 묻는 것은, “내가 무슨 정보를 알아야 합니까? 그러면 제가 알아서 알 테니 정보를 가르쳐 주세요” 라는 겁니다. 그런데 답변은, 그것을 죄로부터 출발을 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서 정보를 더하면 구원을 받는 줄로 알지만,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믿음이 아닌데, 믿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죄를 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부터 수용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물론 자기가 나쁜 짓도 많이 했지만 착한 일도 좀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적인 죄인이라는 아니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러분도 그렇게 우기고 싶지요? 저도 우기고 싶은데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정하다는 겁니다. 감옥소에 갔다왔다고 해서 죄인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정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이게 하늘에서 알려준 것인데, 물론 우리끼리는 큰 죄인과 작은 죄인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의하면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의인은 없고 몽땅 다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이죠.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고 난 다음에, 모세가 다시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인데, 여기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살 자가 없다고 하시는데, 신앙이라는 것을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겁니다.
(출 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그리고 사사기 13장에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나오는데, 삼손을 낳기 전인데 말이죠. 그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는데, 이제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인간이 천사를 만나면 죽을 일밖에는 없다는 말이죠. 그럴 때 아내가 말하기를, “우리를 죽지 않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죽일 것 같으면 왜 제사를 드리라고 하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죠.
(삿 13:2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삿 13:22)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삿 13:23)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그 정도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게 되어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제대로 전달된 현실이 바로 이러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오늘날 인간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데,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이 바로 그러한데, 가인을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줄 알았는데, 그런데 가인의 그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게 진짜 하나님의 모습인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드리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친히 자신의 뜻을 우리 인간에게 전달시켜주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런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데, 니가 그것을 믿는가? 믿으면 산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간단하죠. 자기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상식적인 종교와 현실감각을 버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고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개한 것을 진짜 현실로 그대로 수용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 방황하는가?
사람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방황하기 시작하는데, 자기 누구인지 모르니 겁이 나고 두렵고, 그러니 방황을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를 모르니 겁이 나고, 겁이 나니 과도하게 자기를 방어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쪼그라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는 죄인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았다” 라고 하면, 그렇게 살면 창조에 속한 이 세상에서 겁날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창조에 속한 것인데, 인간 행함의 소산물이라는 겁니다. 기껏해야 죄인들의 소산물인데, 왜 그것을 겁을 내느냐는 말이죠.
인간들이 만든 형법에 의해서 예수님은 살해를 당하고, 또한 사도바울은 감옥에 갔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이 두려워했습니까?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분들이 아는 현실세계는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지성소, 즉 하나님의 내용을 가슴에 담아서 살아가기 때문에, 도무지 겁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 일을 당하고서 겁을 내었습니까? 이제 사도바울이 겁을 내는 것은 예수님 밖에 없었는데, 하지만 그게 오히려 자기에게는 기쁨이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온 우주의 비밀을 다 알고 있었으니 말이죠.
고린도후서 10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갔다가 왔는데, 즉 천국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자기가 당하는 수모와 고난은, 그런 것은 오히려 자기는 연약함 가운데서 더 강해졌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신체적으로도 몸에 가시가 있었는데, 그것은 주님이 너무 자고하지 않기 위해서 주셨다고 하는데, 이미 천국을 보았기 때문에 너무 교만하지 말라고 그런 장치를 자기 몸 속에 넣어놓았다는 말이죠.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약의 요셉도, 그가 꿈을 꾸었지만 현실은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요셉은 하늘의 정보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것도 우리가 믿음으로 수용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 주제파악이 되었다고 한다면, 더 이상 무엇이 겁나고 두려우냐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죠.
이제 정리하면 !!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런데 마지막 때에 고맙게도 하늘 문이 열리면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늘의 모든 것을 다 전달하셨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교체를 해야하는데,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 혹은 자기가 상상했던 이야기들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죠.
사람의 구조가 그러한데, 남들에게 들었다고 해서 모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성과 오성이 그것을 번역해서, 자기 욕망에 맞도록 조작해서 믿는다는 겁니다. 그게 칸트가 주장한 것인데, 그러니 아무리 같은 것을 경험해도 사람들마다 각자가 다 다른 것은, 자기에게 맞도록 자기 내부에서 바꿔치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는 남들에게 들었던 것은 청산을 해주시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염소의 피도 아니고, 송아지의 피도 아니고, 옛날에는 그런 그 피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육체에 뿌려서 정결케 해주었는데, 하물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깨끗하기 해주지 못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것은 다 놓쳐도 이것만은 놓치면 안 되는데, 남들이 그 무엇이라고 해도 그런 소리에 절대로 귀를 바짝 세우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 거기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 손으로 만든 것에 애착을 가지고, 창조에 속한, 즉 인간들이 만든 이 사회와 문명에 매료되면서, 동시에 허무와 허탈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늘 문이 열렸사오니, 더 이상 그런 것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늘의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두려움이 없이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15 오전 10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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