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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8:6-12) 새언약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8:6-12) 새언약

정인순 2010. 9. 5. 10:54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25강-히8장,6-12(새언약)-heb011216.mp3

 

 

새 언약

 

이근호

2001년 12월 16일 25강

 

본문 말씀: 히브리서 8: 6-13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성경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해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꾸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달라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이런 요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꼭 바뀌어져야 합니까?"라는 불만이 먼저 튀어나오기 십상입니다.

 

과연 달라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마음이 이미 있는데 하나님이 요구하신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바꿀 의사가 생기겠습니까? 남들 보기에 "그만하면 됐다"하고 인정받아온 생활인데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해서 단번에 바꿀 용의가 되어 있는지 없는지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변화된다는 것은 항상 기적적인 일입니다. "그냥 살아 온대로 살래"하는 것이 편해 보이지만 그러나 끝 지점은 지옥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지옥가지 않으려면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 여러분은 기다립니다. 부자가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간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달라지지 않으면 파멸입니다. 여러분의 대하는 저의 심정은 이러합니다.

 

즉 기차 역 플랫폼에서 열차를 함께 타고 갈 동료를 기다리는 심정입니다. 11시에 기차가 떠날 시간이 가까이 오는데 왜 아직 기차를 타야 될 동료가 안보일 때의 그 답답함으로 여러분을 대합니다. 그 기차가 바로 천국으로 가는 기차입니다. 그런데 더욱 답답하게 만드는 일은, 기차 타러 온 사람들도 기차를 보고서는 아직도 집에 더 좋고 귀하고 소중한 것이 있는 양 도로 집으로 돌아가 버리더란 말입니다.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채 천국 기차를 타려고 왔다가 되돌아 가버린 것입니다. 당장 천국 가는 기차조차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환장하지요.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이라는 계속해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고 이야기하십니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성경을 대하면서도 이것이 왜 '더 좋은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좋기는 뭐가 좋아"하는 식입니다. 여러분은 한평생 사시면서 온갖 좋다는 것은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골프가 좋다, 오피스텔이 좋다, 유학 가는 것이 좋다, 공부 잘하는 자식이 좋다, 날 사랑해주는 남편이 좋다, 등 등 각양 좋은 것을 머리 속에 정리되어 있을 것입니다. 부자가 좋다는 것은 누구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부자가 지옥 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문턱에서 심판 주로 계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들 하는 것에 대해서 "좋기는 뭐가 더 좋단 말이야!"하고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진짜 좋은 것은 여기 있어"라고 새 언약을 제시하십니다. 지옥에 안 빠지고 천국 가는 것이 좋은 것이지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의견입니다.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좋은 것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좋은 것'이 좋은 값을 못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좋은 것을 이 우주로 퍼뜨리고 싶어하십니다. 모기 약 에프 킬러 뿌리듯이 말입니다. 새벽에 나가보면 안개가 밀려옵니다. 마치 배후에서 누가 빗자루 질 하는 것 같이 밀려봅니다. 소리 없이 퍼집니다. 소리 없이 세상을 휘감습니다.

 

진짜 좋은 것은 예수님 배에서 나옵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초막절 날 유대인들은 행사를 벌립니다. 실로암 못 가의 물을 퍼와서 성전 제단에서 흘러 내려가게 합니다. 장차 하나님의 생명수가 이처럼 제단에서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했습니다.

 

즉 무대 위에서 하얀 드라이 아이스가 온 무대에 퍼지듯이 하나님의 좋은 것이 계속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세상보다 더 좋은 것이 말입니다. 이 좋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입니다. 새로운 약속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이 우주를 지배한 원리입니다. 새로운 약속이 있다는 말은 옛날 약속도 있었더라 하는 말도 되지요. 그런데 그 옛 약속은 없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니.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천국 가라고 주신 것인데 첫 번째 것이 있었고 두 번째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 언약 가지고는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첫 언약을 어디서 받았는가 하는 점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시내 산에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옛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약속을 대표로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이 모세입니다. 마치 학교 졸업식장에서 학생 대표로 상장 받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 사람이 뭔가 가지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돌판 입니다.

 

그 돌판 에는 하나님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모세가 쓴 것도 아니요 다른 명필가 가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판 에다 글씨 박아 넣었다는 말은, 약속의 내용은 그 어떤 경우라도 변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딱딱한 돌 속에 묻힌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변하지 않는 약속의 내용을 전부 지켜야 구원받는 겁니다. 자신의 의지력과 절제력과 지식을 다 동원해서 말입니다.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변치 않는 하나님의 요구에 도전했지요. 이 말씀대로 다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나선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애써봤자 하나님은 그들의 공로를 인정해 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 입장에서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피조물이라면 피조물답게 창조주를 위하여 말씀을 지켜야 될 터인데 그것이 아니라 피조물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말씀에 도전한 것입니다. 즉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주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세로서 말씀을 지켜야 될 것을, 이들은 정성과 마음과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노리고 말씀을 준수하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마음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 1-6절에 보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의도가 우선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다는 그 복이 탐이 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탐심을 가지고 무슨 하나님이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남보다 더 뛰어난 자신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마저도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런 정신자세로는 진정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되지 못합니다.

 

안동 지역에 수몰지역이 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을 보면서 그 수몰지역을 걸어 갈 때를 생각합니다. 댐이 만들어져 물이 차기 전까지는 그 마을에 예배당도 있어도 절간도 있었고 성당도 있었고 최씨 집도 있고 박씨 집도 있었습니다. 우체국도 있고 농협 지소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물이 차일 때까지는 서로 자기가 낫느니 네가 못하니 하니 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물이 그 마음을 수 십 미터 수심으로 덮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예배당이나 성당이나 절간이나 다 폐허가 되어 물 속에 고요히 수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옛 언약을 통해 인간들은 자신들이 최고라고 여길만한 복을 따내기 위한 인간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해도 진정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최씨라는 가문보다, 박씨라는 집안보다 더 중요하고 더 지배적으로 충만한 것이 바로 물이다 는 사실을 아는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바로 이 덮치는 물처럼 덮쳐오는 것이 새 언약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나타날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고 주물이고 떠밀어도 그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달라져야 함을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좋다, 아깝다, 소중하다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귀한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아는 자로 바뀌어져 합니다.

 

본문 10절에 보니 새 언약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즉 옛날에 돌 판에 새기시든 그 손으로 직접 성도의 마음 판을 마치 옛날 돌 판으로 간주해서 새겨 주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위력입니다. 오늘날 학교 교육을 아무리 엄하게 하고 감동스럽게 해도 사람의 마음 속까지 영원히 교사가 장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기능이고 기술이나 채워줄 뿐입니다.

 

하지만 새 언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효과는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즉 진짜로 새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전국에 어디가도 주가 누구신가를 잊고 살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주를 제대로 알고 미워하고 싫어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예 주님을 사랑하는 돌 판이 마음 판에 박혀 있는 형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도가 아는 주님은 어떤 주님입니까? 1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즉 새 언약의 주님은 어떤 주님이냐 하면, 우리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우리의 죄를 다시 기억치 아니하시는 그러한 주님으로 알아보고 사랑한다는 겁니다. 물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죄 용서해주시는 주님이 별로 이 세상에서 쓸모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마치 물 들어오기 전의 수몰지역에서는 개별적인 자기 이득이 전부라고 여기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물로 다 뒤덮어보세요. 그런 차이 성이 무어거리 대수입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세계에서 무사히 빠져 나왔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이미 알아차리고 사는 자가 바로 변화된 자입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덜 좋고를 제대로 아는 자입니다. 정말 용서받음이 돌 판처럼 영구에 내 마음 속에 박혔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 겁니까. 앞에서 10년 살던, 50년까지 이어져 살던 상관없이 이미 용서받은 채로 살고 있을 터인데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의 새 언약은 안개처럼 우리 곁에 이미 와서 덮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방한다고 물러 갈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세계를 내려 깔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긴다는 이 원리보다 더 당연한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더 없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직도 의지할 만 것이 남아 있습니까? 이 철없음을 이 자리에서 고쳐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5. 새 언약(히 8: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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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 8: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히 8:8)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히 8:9)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히 8: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히 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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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야 하느니라 !!

성경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요구하데, 즉 ‘바꾸어라’ 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런 성경의 요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바꿀 것인가?” 라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꼭 바뀌어져야 합니까?” 라고 하는 강한 불만이 먼저 튀어나오기 십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과연 바꿀 마음이 있는가?” 라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죠.

여러분, 과연 달라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들을 생활을 청산할 용의가 되어있느냐는 말이죠. 이미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름 인정을 받으면서 잘 살아왔는데, 그런데 과연 하나님이 요구하신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그것을 바꿀 의사가 생기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변화가 된다는 것은 항상 기적적인 일인데, 왜냐하면 사람은 과거의 것을 계속 이어져 가려고 하지, 달라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생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나는 그냥 살아 온대로 살래” 라고 하면서 버티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 끝 지점은 언제나 지옥으로 이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하면 바뀌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우리가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데, 부자가 지옥에 가고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간다는 것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달라지지 않으면 결국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이라는 말이죠.

제가 목사로서 여러분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떠한고 하니까, 플랫폼에서 기차를 함께 타고 갈 동료를 기다리는 심정입니다. 이제 기차가 떠날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런데 아직도 같이 기차를 타고 가야할 동료가 보이지 않을 때의 그 답답함이라는 말이죠.

그 기차가 바로 천국으로 가는 기차인데, 그런데 더욱 답답하게 만드는 일은, 기차를 타려고 온 사람들도 기차를 보고서도, 아직도 집에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이 있는지 몰라도 다시 돌아가 버리더라는 말이죠. 그러니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채로 천국에 가는 기차를 타려고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장에 천국에 가는 기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히 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더 좋은 약속 !!

여기에 보면 ‘더 좋은 약속’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야, 더 좋은 것이 있다” 라고 말씀을 하신다는 말이죠. 참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 쪽에서 제시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 성경말씀을 대하면서도, 이게 왜 더 좋은 것인지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좋기는 뭐가 좋아?”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한 평생을 살면서 온갖 좋다는 것은 다 경험했을 겁니다. “골프가 좋다. 오피스텔이 좋다. 아파트가 좋다. 유학을 가는 것이 좋다. 공부를 잘하는 자식이 좋다. 나를 사랑해주는 남편이 좋다” 라고, 그런 각양 좋은 것들이 머리 속에 정리가 되어있을 겁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것이고, 또한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부자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있는 사실인데, 그러나 성경에 보면 부자가 지옥에 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문턱에서 심판주로 계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야, 좋기는 뭐가 더 좋단 말이야? 진짜로 좋은 것은 여기에 있다” 라고 하시는데, 즉 지옥에 빠지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 이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좋은 것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알려주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위치에 있는, 즉 자기 직장과 가정과 사회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에게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는 말이죠. 우리는 해외여행이 좋고, 동창회가 좋고, 망년회가 좋고,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은지 모르는데, 그러니 정작 성경에서 좋다고 하는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좋다고 하는 것을 이 세상에 퍼트리고 싶어하시는데,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든지, 거기에 상관없이 이 좋은 것을 퍼뜨리고 싶어하신다는 겁니다. 마치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마구 뿌려지듯이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뿌리고 싶어하시고, 언약을 뿌리고 싶어하신다는 겁니다.

왜 우리가 새벽에 나가보면 안개가 밀려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마치 배후에서 누군가가 빗자루질을 하는 것과 같이 밀려온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소리도 없이 퍼지는데, 온 세상을 휘감는다는 말이죠. 그런 뭔가의 흐름, 그것을 부어주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들이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지옥에 간 놈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다. 그러니 그런 것 말고, 내가 뿌리는 진짜 좋은 것을 받아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 좋은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데, 예수님의 배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초막절에 유대인들은 행사를 벌리죠. 실로암 연못가의 물을 퍼와서 성전제단에 부어서, 거기서부터 물리 흘러서 내려가게 합니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생명수가 이처럼 제단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물을 붓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계속해서 흘러나리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렇게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성령의 생수인데, 그러니 이 세상의 것보다 다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날마다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아하, 이렇게 좋은 것이 나에게 선물로 주어졌구나” 라는 것을 말이죠. 그것이 날마다 새롭게 흘러나오고,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그 좋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인데, 즉 ‘새 언약’ 이라는 겁니다. 이 새로운 약속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더 귀한 것인데, 그리고 영원히 이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라는 말이죠. 새로운 약속이 있다는 말은 옛날에 약속도 있었다는 말인데, 그런데 이제 그 옛날 약속은 없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첫 번째 언약, 두 번째 언약 !!

오늘 본문 7절에서,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라고 합니다. 그러니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천국에 가라고 주신 것인데, 그것이 첫 번째 것이 있었고 두 번째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첫 번째 언약을 가지고는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말이죠. 물론 그게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도저히 온전히 지킬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히 8: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약속이라는 것을 주셨는데, 그런데 첫 번째 약속으로는 그게 안 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그 첫 번째 언약을 어디서 받았는지가 나와있다는 말이죠.

(히 8:9)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첫 번째의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는데, 그때 하나님의 약속을 대표로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마치 졸업식장에서 학생대표로서 졸업장을 받는 식으로, 그렇게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모세가 뭔가를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왔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바로 ‘돌판’ 이라는 겁니다. 그 돌판에는 하나님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그게 모세가 쓴 것이 아니고, 물론 유명한 명필가가 가서 쓴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직접 쓰셨다는 겁니다. ‘모세’ 라는 옛날 영화에 보면 그게 실감나게 나오는데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글씨를 새겼다는 말은, “약속의 내용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변하지 않는다. 반드시 이대로 이 세상과 온 우주를 다스리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자기 확답을 의미하는데, 마치 딱딱한 돌 속에 새겨진 글씨처럼 말이죠. 물론 인간들도 각자 좋아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은 자기 취향이고,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계획하신 것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잡아 가지고 있으면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 라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냐는 겁니다. 자기의 끝이 어떻게 끝나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면서 말이죠.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은 안개처럼 몰려오고 있는데, 우리 인간이 좋아하던 싫어하던 간에 온 세상을 뒤엎고 있다는 겁니다.

안동댐을 아십니까?

그래서 저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할 때마다, 안동댐으로 인해서 그만 물이 차버린 그 수몰지역을 떠올립니다. 그곳이 수몰되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예배당도 있었고, 절간도 있었고, 성당도 있었고, 최씨 집도 있고, 박씨 집도 있었는데, 물론 우체국과 농협지소도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물이 차기 이전까지는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하면서 싸우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드디어 방송을 합니다. “이제 이 마을이 물에 잡깁니다. 그러니 한 달 안으로 모두들 이사를 가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교회의 목사가 “하나님, 안 됩니다. 저는 이 교회를 도저히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순교를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으냐는 겁니다. 그렇게 신부님도 기도하고, 스님도 기도를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버틸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게 교회든 성당이든 절간이든 간에, 이제는 모두 다 놓고 떠나야만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한 달 뒤에 물이 그 마을을 수 십 미터 수심으로 뒤덮게 되면, 교회든 성당이든 절간이든, 최씨 집이든 박씨 집이든 간에, 기존의 그런 구분들은 이제 모두가 물 속에 고요히 수장이 된다는 말이죠. 즉 물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약속을 이렇게 생각하는데, 우리는 인간들이 서로 직업이 무엇이고, 생긴 것이 어떠하고. 그리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런 구분들이 있겠지만, 하지만 하나님의 그 약속 앞에서는 모두가 수몰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물을 의식해야만 하는데, 그것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목사나 신부나 스님도 버티려고 하겠지요. 특히 최씨 집안은 더욱 그렇지 싶은데, 보통 고집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변해야 하는데, 예배당보다도, 최씨라는 가문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 지배적으로 충만한 것, 그것이 바로 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으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면 왜 좋은지를 알려고 해야하는데, 그런데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주님 앞에서, 도대체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모르면, 제 아무리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악수를 하고, 그리고 식사를 대접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까지 우리가 좋다고 붙잡고 있던 것들을, 즉 자기 가문, 자기 예배당, 자기 절간, 그렇게 각자가 자기에게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자식이 귀하고 자기 직장이 귀하고, 그렇게 우리는 얼마나 귀한 것들은 많은지 모르는데, 귀하고 소중한 것들이 너무 너무 많다는 말이죠.

그래, 우리가 한 번 지켜보자 !!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귀하다는 것들과 하나님의 약속을 대비시켜보았습니까? 하나님이 첫 번째 언약을 주었을 때, 즉 십계명을 주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지킬 것이라고 하면서 두 팔을 걷어 부쳤는데, 즉 말씀대로 다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고 나섰다는 겁니다. 돌판에 새겨진 그 변함이 없는 문자를 말이죠. 물론 뒤에 십계명뿐만이 아니라 율법이 더 주어졌는데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좋아라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좋아라고 지키더라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마음이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신명기 28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6절입니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교회에 다니고, 지옥에 가고 !!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말씀이 나오는데, 심방을 할 때마다 목사들이 들고 다니는 보물단지인데 말이죠.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다마다 “그래, 지켜서 복을 따내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니가 뭐가 잘났다고 복을 따낸다는 것인가? 그러니까 너는 달라지지 않았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반드시 지켜서 나의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 라는 사고방식이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런 상태에서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니,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을 압니까? 약속을 압니까? 마음은 전혀 달라지지를 않고 욕심만 그대로 간직한 채로, 그냥 교회에 와서 목사의 말을 듣고 축복이나 따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인간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실컷 교회에 다니고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교회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지옥에 지옥으로 잠시 장소이동을 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면, 즉 세상이라는 지옥에서 교회라는 이름의 지옥으로 오게 되면, 그것이 무슨 구원이냐는 겁니다. 마음이 바뀌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그 마음이 그대로이니 교회라는 새로운 이름의 지옥에 온 것이란 말이죠. 마음 자체가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신명기 28장에도 나오듯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자기들 딴에는 지켰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지키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전부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지키는 사람은 없더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오직 주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세로 주어진 말씀을 지켜야만 하는데, 즉 피조물이라면 피조물답게 창조주를 위하여 말씀을 지켜야 하는데, 그런데 다들 지킨다고 하지만, 그렇게 지키는 자들이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그것을 윤리적 종교적으로 지키려고 하니, 그것이 하나의 힘으로, 권력으로, 자랑거리로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는 말이죠. 즉 “내가 이렇게 지켰더니만 복을 받았다” 라는 것을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런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더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그야말로 교회에 다니고 지옥에 가는 꼴인데, 그러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보험을 실컷 들고도 아무 것도 받지를 못하는 말이죠.

새 언약은, 돌판이 아닌 마음판 !!

그러면 새 언약은 무엇인고 하니, 과거에는 돌판에 새겼는데, 이제는 그 돌판은 걷어치우고, 이제는 돌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판에 하나님께서 직접 새겨주신다는 겁니다. 마음판에 말이죠.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10절입니다.

(히 8: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여기에 보면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돌판에다 새기고, 그 다음에는 마음판에 새기고, 둘 다 그렇게 새기니 변함이 없다는 것은 동일하다는 말이죠. 처음에는 돌판에 새겼기에, 그 돌판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과 의지력으로 실천을 해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옛날 약속이고, 그러면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아예 지킬 필요도 없이 우리의 마음에다가 “주님은 나의 창조주이고 구세주입니다” 라는 것을, 그것은 언제 어디서든지 잊지 않도록 만들어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그게 곧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 즉 ‘새 언약’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일일이 다 가르쳐주어야 하는 겁니까? 그래야 어떻게 알 수 있는 겁니까? 그것이 아닌데, 여기서 오늘 본문 11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히 8: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다 나를 앎이니라 !!

여기에 보면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가르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학교에서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일종의 기술자 양성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능적인 것이지, 그 사람의 마음까지 장악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아무리 감동과 사랑을 주어도, 그것은 그때뿐이라는 말이죠. 특히 여학교의 경우에, 아무리 선생님이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쳐 주어도, 그들이 졸업해서 결혼을 하면 남편을 생각하지 선생님을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계속해서 생각해주면 더 심각해질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그러니 영원히 그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는 분은 예수님뿐인데, 예수님이 찾아오셔야만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장악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구출을 하려고 하면,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주어도,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바뀌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그것을 지키면 저에게는 어떤 이익이 옵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에게 어떤 보상을 바라면서 말씀에 접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마음자세가 어떤 것인고 하니,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똑같다는 말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가짐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 라고 했으면, 간음하지 않은 것이 그만 자기 자랑거리가 되어서, “나는 간음하지 않았기에 복을 받았다” 라고 나오더라는 겁니다. 마치 자기가 복을 받을 자격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 모르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한 유대인들을 보고 “이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새 언약이라는 것은 주님을 제대로 아는 것인데, 그렇다면 주님은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12절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히 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그러니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라고 해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점검만 하면 되는 것이지 가르쳐줄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이죠. 억지로 때려서라도 믿지 않는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옛 언약에서는 지키는 사람이 “내 의가 축적이 되어서, 남들보다 내가 의를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복을 많이 받을 것이다” 라고 하는 변화되지 못한 썩어빠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자기 이익과 관련을 시키고 있는데, 즉 자기 행함을 스스로 의지할 만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전혀 하나님에게 통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의도 자기 죄를 덮을 만한 의는 없는데, 사람이 제 아무리 착해도 자기를 죄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러면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데, 그 사실은 미국에 가나 중국에 가나 그 어디를 가도 변하지를 않다는 겁니다. 즉 “내가 너를 용서했노라” 라는 게 마음판에 새겨진 사람은 교만하지 않고, 이 세상의 좋은 것을 탐하지 않고, 그런 것으로 인해서 낙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것, 하나님이 좋다고 하셨기에 좋을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아는 것인데, 그러면 그 주님은 어떤 주님입니까? 그분은 바로, 우리의 불의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분이고, 우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런 주님을 우리가 놀랍게도 선물로 받았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주님을 알아서 무엇을 할 겁니까?” 라고 따지는 분도 있는데, 물론 수몰지역에 물이 차기 전에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살아가기에 바쁘니 그런 주님을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물에 잠기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을 지배했다는 것이 드러나는 그날, 주님의 용서보다 더 큰 선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의사가 되고 검사가 되는 것보다도, 아니 물에 잠기는데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죠. 천국과 지옥을 보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남들이 모르는 예수님을 자기가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변함이 없이 자기 마음판에 새겨졌다는 것, 그래서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남은 생애를 살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30년을 더 살던 50년을 더 살던, 이미 용서를 받은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천국에 가도 용서를 받은 자로서 간다는 것, 바로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 도대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냐는 말이죠. 그게 바로 새 언약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옛날의 자기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예수님을 믿고 용서를 받은 것은 기본이 아닙니까? 다 압니다. 그러니 그것 말고, 앞으로 전도를 더 열심히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런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하기가 난처한데, 물론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니 말이죠.

뜨거운 난로가 되자 !!

그래서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겨울이 되면 학교에 난로를 때우는데, 그 난로는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난로가 차가우면 어떻습니까? 상대방을 오히려 더 냉랭하게 만든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남들에게 어떻게 해야할지, 그런 걱정을 하지 말고 자기만 따뜻하면, 남들에게 그 따뜻함을 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만 불에 훨훨 타고 있으면, 학생들이 와서 손도 쬐고 도시락도 얹어놓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만 뜨거우면 된다는 말이죠. 즉 자기부터 먼저 용서받은 그 기쁨이 넘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주위 사람들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을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부터 먼저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뜨거운 난로가 되면, 그것으로 다 되었다는 겁니다. “너희들은 그게 좋지만, 나는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이것이 좋다” 라는 것인데, 물론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다 실천해오셨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믿지 않다가 망했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말씀대로 부활하셨지만, 아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로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게 다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되어있다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에는 유황불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고 거지가 천국에 가는 것도 약속대로 된다는 말이죠. 그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우리를 수몰시키고 있는데, 하나님의 그 약속,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주신다는 그 새로운 언약,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라고 하셨는데, 즉 온 천하를 다 가진다고 해도 자기 목숨이 사라지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새 언약을 기뻐하자 !!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지옥에 가면 안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아무리 기도를 오래하고 헌금을 많이 해도,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다 노림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 유익을 위한 노림수가 말이죠.

그러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좋아야 하는데, 이 복음이 그야말로 기쁜 소식으로 들려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 여기에 대해서 “나를 살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이 되시는 분은 열심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거기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직도 주님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 것처럼 철없이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고, 이 마지막 때에 오직 심판주를 생각하면서 정말 좋은 얻었다고 하는 기쁨으로 살아가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13 오후 4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