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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8:1-5) 모형과 그림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8:1-5) 모형과 그림자

정인순 2010. 9. 5. 10:49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24강-히8장,1-5(모형과,그림자)-heb011209.mp3

 

 

모형과 그림자

 

2001년 12월 9일 24강

 

오늘 말씀 : 히브리서 8:1-5

8: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8:2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8: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찌니라

8: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교회라는 것이 사도행전에 20장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세워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피로 세워졌기에 교회에 오게 되면 피를 흘린 그 현장감을 맛보아야 합니다.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내력이 상기되어야 합니다.

 

장례식장에서 까불지 못하지요. 그것은 누구에게나 아까운 목숨이 사라진 자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울지요. 그 없어진 생명과 목숨이 아쉬워서 그러합니다. 마치 자신의 목숨이 날라 간 경우의 안타까운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의 목숨도 잃게 되면 숙연해진 법인데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의 목숨 잃어버림을 기리는 곳이기에 더욱 마음가짐이 정돈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부활의 기쁨으로 해소되어야 한다고 합니다만,

 

부활, 부활의 기쁨이란 잃어버린 자기 생명을 도로 찾은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은 예수님 안에서 아예 벌써 잃어버렸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기에 더욱 엄숙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 생명을 예수님의 도움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초조와 불안이 동반되는 가짜 부활이요 가짜 기쁨입니다.

 

사람이 복음의 기쁨이 없을 때는 억지로라도 유사 기쁨을 조작해 내는 법입니다. 진정 예수님에게 내 생명을 통째로 빼앗겨서 차라리 홀가분하다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내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기쁨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자기 목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기쁨 말입니다. 해방된 즐거움과 편안함이 주어질 때, 이 기쁨의 공로는, 부활을 믿어주는 자기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생명의 피를 흘려주신 주님의 십자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의 자기 피'로 세웠다는 말은 자기 목숨 때문에 걱정한다든지 괴로워하는 경우에서 벗어났으니 이런 걱정을 멈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 단체에는 없습니다.

 

자, 그러면 위의 이야기가 어떤 상황일까요? 지금 북쪽에 북한 나라가 있는 것이 실제 상황이듯이 말입니다. 성경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을 주시겠다는 뜻을 위하여 있는 겁니다. 사람이 이기주의자가 되면 갈수록 사랑의 대상이 하나, 둘 씩 떼어내어 버립니다.

 

처음에는 아내를 떼 내다가 나중에는 자식 그리고 하나님마저 귀찮아서 떼 내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그저 진리 없이도 한평생 버티어 보자'라는 식입니다. 소위 무 진리주의입니다. 갈데 까지 가보는 겁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8:8-9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오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런데 이 말씀이 진리요 실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무 진리주의자들의 종말은 낭패가 되는 거죠. 우리는 미리 앞당겨서 진리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진리를 품고 살지 않으면 그것이 짐승입니다. 아침에 눈떠서 직장 가서 일하다가 저녁에 피곤에 절린 채 이불에 엎어져 그냥 자는 식입니다. 자기 딴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사노라 하겠지만 이것은 마치 산산조각 난 거울의 한 파편을 쥐고 그것으로 진리를 보고자 하는 자와 같습니다.

 

진리를 알려면 모든 인간 각자의 경험과 체험과 지식을 능가해서 전체를 통합하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3:9-11에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리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시대에는 그 진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16:25-26에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진리는 오늘날 공개되었습니다.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고 서로 견주지 말고 "하나님은 무어라고 진리를 공개했느냐?" 여기에 초점이 모아져야 합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진리를 안고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5절에서는 진리의 나타남을 다음의 두 낱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모형과 그림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모형이라는 말은 원형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림자라는 말은 실체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설계사무소에 가보면 설계사가 지을 빌딩을 미리 모형으로 고객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객이 이 모형에 들어가서 살 때만 나중에 실제로 있는 빌딩에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빌딩을 가질 소유주가 미리 자신의 것을 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모형입니다.

 

즉 모형이란 이미 구원 속에 들어온 자가 자신의 세계가 어떠한 것이지를 구경해 보라는 겁니다. 그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붙들고 섬기는 자가 있다면 정신 분열증 환자가 같습니다. 만약 어떤 부인이 실종된 자기 남편을 그리워하며 남편이 신던 구두나 남편이 입던 옷 같은 것들은 제단에 놓고서 제사를 드릴 때 마침 실종된 남편이 도로 돌아왔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여인이 실체가 된 남편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그 제단 위에 있는 남편의 물건만 섬긴다면 바로 이것이 정신 분열증 증세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골로새서 2:15-17에 보면 나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모형과 그림자를 합쳐서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율법 안에는 십일조 제도도 들어있고 안식일 제도도 들어 있고 양 바쳐서 제사 드리는 것도 들어 있고 그리고 대제사장 제도도 들어 있습니다. 대제사장 제도를 기껏 그림자 안에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아직도 안식일 제도나 주일 성수나 십일조 제도나 예배 참석을 통한 구원을 얻겠다고 나선다면 이것이 바로 정신분열증 환자와 같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실체나 원형을 안 보고 그림자나 모형을 붙들고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사람들은 이런 모형이나 그림자 섬기는 것을 더 선호하니 웬 일입니까?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을 못 믿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15에 보면,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십자가 사건이 나오지요. 이 십자가가 어떻게 해서 승리했다는 말입니까? 이 내용이 역시 골로새서 2:11-12에 나와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즉 성도는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 죽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사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비로소 사는 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사실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또한 들은 적이 있더라도 믿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감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못 믿으니까 50년, 60년을 교회 다녀도 맹탕이 되는 겁니다. 아무 것도 알고 사는 것이 없었기에 그저 율법에 준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사는 것으로 신앙 생활을 대신하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이런 믿음이 아예 없는 자를 율법적으로 잘 포장해서 마치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간주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도 못 가면서 천국 갈 수 있다고 여기니 이 얼마나 큰 절망입니까!

 

성경에서 막는 것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고 천국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형 되시고 실체 되시는 분을 사랑하고 교제해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입니다. 실종된 남편의 아내 입장이라면 남편이 살아 돌아 왔으면 그 순간부터 제사상 집어치우고 실제로 살아 있는 남편과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 됩니다. 비록 우리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4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이상스럽고 낯설게 보이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제사장 직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실체이고 원형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모형과 그림자 붙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산 사람하고 사귀기 바빠야지 왜 엉뚱한 종교 생활이라는 것을 다듬어 가지고 그것을 쥐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과거 인물이 아닙니다. 물론 이순신 장군은 옛날 인물입니다. 그 사람은 영웅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실재적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과 지금 이 순간 교제하고 사랑하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어떤 교회 생활을 헛고생입니다.

 

지금 살아 계신 예수님은 2000년 전에 흘렸던 자신의 십자가의 피를 가지고 오늘날의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십니다. 교회 안에는 이 피만이 흠뻑 증거 되어야 합니다. 이 피를 믿는 자가 그 날로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돌아가실 때에 그 옆에 같이 십자가 달렸던 한 강도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예수님, 하나님 나라에 가실 때 저도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여러분 이것이 바로 사귐입니다.

 

그 강도가 구원받은 것은 실체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귐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질 때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는 것을 붙들고 있는 것 다 치우고 그 자리에 십자가의 구원의 효력을 믿는 사귐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 모형과 그림자(히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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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8: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 8:2)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히 8: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히 8: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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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

교회라는 것이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세워졌다고 되어있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피로 세워졌기 때문에, 교회에 오게 되면 피를 흘린 그 현장감을 맛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즉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내력이 상기되어야 하는데, 즉 왜 주님께서는 피를 흘려야만 했는지, 그것으로 가득해야만 교회라는 겁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장례식장에 가보면 사람들이 까불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아까운 목숨이 방금 사라졌기에, 그래서 그런 자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런 자가 관 속에 누워있는데, 물론 사람들은 그렇게 목숨을 잃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만,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돌아가신 분의 가족들은 우는데, 그 없어진 생명과 목숨이 너무 아쉬워서 말이죠. 마치 자신의 목숨이 날아간 것처럼 안타까워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목숨이 이렇게나 소중한데, 그러니 그 사람의 목숨도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냐는 말이죠. 다들 거기에 공감을 하는데, 만약에 자기가 그렇게 관 속에 누워있다고 하면 얼마나 괴롭겠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의 목숨도 잃게 되면 모두가 다 숙연해진 법인데, 하물며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잃어버린 것을 기리는 곳이기에, 더욱 더 마음가짐이 정돈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슬픔을 주고 돌아가셨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부활의 기쁨으로 해소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큰 기쁨이라는 것은, 반드시 무엇을 겪어야 하는고 하니, 자기의 목숨보다도 주님의 목숨이 더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때 큰 기쁨이 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 덕분에 내 목숨을 챙기자” 라고 하면 큰 기쁨이 아닌데, 그것은 여전히 이기주의라는 말이죠. 하지만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나타났다고 하는, 즉 “내 목숨보다도 주님의 목숨이 더 귀하다” 라는 것을 깨달을 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숨을 이용해서 자기 목숨을 더 길게 연장하려고 하는, 그런 식으로 나온다고 하면, 그것을 초조와 불안을 동반한 기쁨이기에 진정한 기쁨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제대로 된 기쁨이 없어서 억지로 만들어낸 유사 기쁨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목숨보다도 더 귀한 것이 주어졌기에, 이제 자기 목숨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기쁨, 자기가 자기 목숨을 붙잡으려고 한 평생을 아등바등 살아왔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기쁨, 그렇게 해방이 되었다고 하는 그 즐거움,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너무나도 감사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기쁨이라는 말이죠.

교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

따라서 “교회를 하나님의 피로 세웠다” 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는 더 이상 자기 목숨 때문에 걱정한다든지 괴로워하는, 그런 부질없는 짓들은 멈춰달라는 겁니다. 그런 것에서 발생되는 초조와 공포와 불안과 같은 것은, 그런 것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교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참으로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과연 그러한가?” 라는 것인데, 방금 이야기한 것이 실제적이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피로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이 넘쳐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목숨을 유지하려고 더 이상 안절부절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과연 실제적인 상황이냐는 말이죠.

지금 아프간에서 전쟁을 벌리고 있고, 또한 북한이 저렇게 위협적으로 있다는 것이 실제상황이듯이, 정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책임진다고 하는 것도 역시 실제적인 상황이냐는 말이죠. 그러니 만약에 우리가 그 내막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그러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안함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겁니다.

성경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일종의 호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기주의자가 되면, 가면 갈수록 그 사랑의 대상을 하나 둘 씩 떼내어버리는데, 처음에는 남편을 떼내고, 나중에는 자식, 그리고 하나님마저도 귀찮아서 떼내고자 한다는 말이죠.

진리 없이도 한 평생을 버티어보자 !!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그저 진리 없이도 한 평생을 버티어보자” 라는 식인데, 즉 ‘무(無)진리주의자’로서, 그들은 “갈 데까지 한 번 가보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8절과 9절입니다.

(마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 8절에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라고 하는데, 이 말씀이 곧 진리이고 실제상황인데, 그러면 무진리주의자들은 그만 낭패를 맞게 됩니다. 그들은 “진리가 어디에 있어? 나중에 다 알게 되겠지. 진리를 미리 알 필요가 무엇이 있겠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냥 흘러가는 데로, 세월을 따라서 살아가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리 앞당겨서 진리를 안고 살아야 하는데, 진리를 품고 살지 않으면 그야말로 짐승이라는 말이죠. 아침에 눈을 떠서 직장에 가서 일을 하다가, 저녁에는 그만 피곤에 짓눌린 채로 이불에 엎어져서 그냥 잠이 들고 마는 식이라는 겁니다. 술과 담배에 위로를 받으면서 말이죠.

물론 자기 딴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사노라고 하겠지만, 하지만 이것은 마치 산산조각이 난 거울의 파편 하나를 쥐고, 그것으로 진리를 보려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아무리 안다고 해도, 그것은 그냥 자기가 살았던 그 구역과 공간뿐이라는 말이죠. 전체가 어떠한지 전혀 모르는데, 그러니 그게 무슨 진리이냐는 겁니다. 제대로 진리를 알려고 하면, 각자의 경험과 체험과 지식을 능가해서, 전체를 통합해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에베소서 3장 9절에서 11절을 보겠습니다.

(엡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엡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엡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감추었던 비밀을 이제 공개하시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가 살아왔던 그 짧고 좁은 공간, 그게 전부라고 여겼던 것을 버리라는 겁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그 비밀을 알려주시겠다는 말이죠. 자기 가문과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그런 개인적 생각은 포기하라는 겁니다. 전체를 봐야지, 조각난 한 조각의 거울을 들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죠.

로마서 16장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25절에서 27절입니다.

(롬 16: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롬 16: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롬 16: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 26절에 보면,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의 비밀을 이제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으로 너희에게 전한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창세 이전부터 감추었던 비밀인데, 이제 그것을 공개하겠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우연히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한 평생 나름대로 익혀왔던 인생관이 있는데, 물론 자기도 있고 말이죠. 그렇다면 두 고집이 만났다고 하면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할 것이 뻔한데,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로마서에서, 에베소서에서 뭐라고 하느냐는 말이죠. 바로 그 비밀, 감추었던 하나님의 계시가 별똥별처럼 톡 하고 튄 것이 바로 ‘우리’ 라는 존재라는 겁니다. 어느 나라의 어느 가정에서 우리 자신이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그것은 우연히 아니라 하나님의 창세 전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증인으로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예레미야서 1장에 보면, “내가 너를 어미의 복중에 있기 이전에 이미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예레미야가 태어난 것은 이미 그가 모친의 뱃속에 있기도 이전부터,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그는 반드시 태어나야만 했다는 겁니다.

(렘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그러므로 우리가 “내가 잘났다. 니가 잘났다” 라고 하면서 서로의 것으로 폼을 잡고 견주지를 말고, “하나님은 진리를 무엇이라고 공개했느냐?” 라고 하는, 바로 여기에 모든 초점이 다 모아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을 때 죽더라도, 진리를 알고 죽어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 5절에서는, 놀랍게도 이 진리의 나타남에 대해서 두 개의 단어를 가지고 소개하고 있는데, 제가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모형과 그림자 !!

여기에 보면 ‘모형’과 ‘그림자’ 라는 두 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모형이라는 말은 원형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모형이 함부로 설치고 까불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원형이 따로 있으니 말이죠. 그리고 그림자라는 말은 실체가 따로 있다는 의미이라는 것이죠.

왜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가보면, 앞으로 지을 아파트를 미리 모형으로 만들어서 고객에게 보여주는데, 그러면 고객이 이 모형에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앞으로 손님이 들어가서 살 아파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라고 하는 차원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 모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형이 곧 자기가 살 아파트는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먼저 모형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원형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모형이란 것은, 이미 구원 속에 들어온 자에게, 자신의 세계가 어떠한 것이지를 구경해보라는 겁니다. 그것은 그림자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자를 붙들고 섬기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 분열증 환자와도 같다는 겁니다. 실체는 따로 있으니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부인이 실종된 자기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평소에 남편이 신던 구두나 남편이 입던 옷과 같은 것들은 제단에 놓고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그런데 마침 실종된 남편이 다시 돌아왔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여인은 돌아온 남편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그 제단 위에 있는 남편의 물건들만 고집을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죠.

방금 이야기한 것이 골로새서 2장에 나오는데, 14절에서 17절입니다.

(골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즉 진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왜 모형과 그림자를 사용하시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문제가 된다는 말이죠. 구약 때 이야기한 모든 것은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인데, 그런데 계속해서 이런 것을 섬기는 자들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형과 그림자를 합치면, 곧 ‘율법’ !!

이 모형과 그림자를 합쳐서 ‘율법’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율법적이라는 것은 “이것을 지키면 자동적으로 복이 온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율법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까, 십일조 제도도 들어있고, 안식일 제도도 들어있고, 양을 바쳐서 제사를 드리는 것도 들어있고, 그리고 대제사장 제도도 들어있다는 겁니다. 즉 대제사장 제도를 모형과 그림자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직도 안식일 제도나 십일조 제도, 즉 주일성수나 예배참석을 통해서 구원을 얻겠다고 나선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정신분열증 환자와도 같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실체나 원형을 바라보지 않고 그림자나 모형을 붙들고 섬기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믿음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인데, 그런데 목사들은 무슨 짓을 합니까? 그런 믿음이 없는 자들을 천국에 가는 사람으로 전환시켜주기 위해서, 모형과 그림자를 마치 원형처럼 나열을 시켜놓고, “이대로 하시면 천국에 갑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원형과 실체보다는 모형과 그림자를 섬기는 것을 더욱 선호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왜 모형과 그림자를 더 좋아합니까?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이죠.

언제 안식일이 있었나?

하지만 17절에 보면, 분명히 이런 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이미 지나갔다는 말이죠. 그리고 몸은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고 하니, 14절에는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라고 하는데, 즉 찢어서 없애버렸다는 겁니다. “언제 안식일이 있었나?”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15절에서,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여기에 십자가 사건이 나와있지요. 이 십자가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피로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의 사건이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현장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그 진리가 계속해서 통해야 한다는 말이죠.

교회는 하나님의 피만 있으면 충분해 !!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세웠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피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또한 그 속에는 모든 율법도 찢어버렸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 십자가가 어떻게 해서 승리를 했다는 겁니까? 그 내용이 역시 11절과 12절에 나와있다는 말이죠.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십자가를 믿게 되면,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비로소 사는 것인데, 즉 “너는 죽었지만, 하나님이 살려주셨기에 새로 살아났다” 라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안에 들어있고, 십자가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는 율법을 찢어버려도 된다는 겁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

그런데 사람들은 왜 율법에 대해서 안정감을 느낍니까? 그러니 이 12절의 말씀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믿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손에 잡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구약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데, 즉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모형이나 그림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그냥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을 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어느 교회의 남전도회의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는데, 남전도회니 다들 나이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살면서 교회에 열심히 다닌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나는 60년을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 것말고, 도대체 무엇을 쥐고 있었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20년을 더 살아서 그 나이가 80이 되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골로새서 2장의 이 말씀에 대해서 아는 바도 없고, 물론 들은 적이 있더라도 믿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전혀 감도 잡지를 못하고 있는데, 이것을 믿을 수 없으니, 아무리 50년을 교회에 다니고 60년을 다녀도 다들 맹탕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게 정작 본인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자기가 가진 것도 없는데, 그만 그 있던 것마저도 없애버리니 말이죠.

아무 것도 알면서 살아가는 것이 없기에, 그저 율법에 준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대신하겠다는 말이죠. 그러면 목사는 목사대로 믿음이 없는 자를 율법적으로 잘 포장을 해서, 마치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간주를 해주는데, 그러니 천국도 가지 못하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기니, 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이냐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나 장로나 교인들이나, 모두가 다들 똑같다는 말이죠.

원형이신 분과 교제를 해야 !!

성경에서 막아버리는 천국을, 그것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원형이고 실체가 되시는 분을 사랑하고 교제를 해야합니다. 이것이 곧 전부라는 말이죠. 전에는 남편이 죽은 줄로 알고 제사를 지냈지만, 그러나 이제 남편이 살아서 돌아왔다면, 계속 제사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여보, 내가 여기에 왔소” 라고 하면,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우고 당장에 그 남편의 품에 안기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당신은 저리 꺼지소”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죠. 모형과 그림자를 계속해서 섬기겠다는 것은 실체를 믿지 않겠다는 것인데, 실체가 와도 모형과 그림자가 더 땡긴다는 말이죠. 십일조를 하고 주일성수를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자기는 더 좋다는 겁니다. 십일조를 하면 그 나머지는 자기 것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주면 월요일부터 토요일은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원형과 실체가 되시는 분을 전혀 사랑하는 것이 아닌데, 그저 자기밖에 모르고 살아가는데, 그런데 죽으면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니 겁이 나서 마치 보험에 드는 식으로 교회에 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원형과의 사귐이 있어야 하는데, 즉 모형과 그림자인 율법은 확 밀어버리고 실체와 교제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물론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기에 수군거릴 수도 있는데, 전혀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니 말이죠.

오늘 본문에 보면 낯설게 보이는 말씀이 나오는데, 4절입니다.

(히 8: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제사장직을 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 본인이 그 실체이고 원형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만 믿으면 되는데, 새삼스럽게 모형과 그림자를 붙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산 사람과 사귀기에 바빠야지, 왜 엉뚱한 종교생활이라는 것을 하느냐는 겁니다. 왜 그런 것을 다듬어서 꼭 쥐고 있느냐는 말이죠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지금도 실제적으로 계시는 분 !!

예수님은 결코 과거의 인물이 아닌데, 물론 이순신 장군은 옛날 인물이고 분명히 영웅이 맞죠. 하지만 그들은 그것말고 무엇이 더 있습니까? 그냥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지금도 실제적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과 지금 이 순간에 교제하고 사귀고 있지 않다면, 그 어떤 것도 다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사귄다는 것이 과연 귀신과 사귀는 것과 같은 것인가요? 이것은 실제상황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는가?” 라고 했는데, 교인들을 보겠느냐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이것은 한 평생을 교회에 다니고 목사가 되고 총회장이 되어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과연 죽을 때가 되어서 주님께서 “지금 너는 무엇을 가지고 있지?” 라고 물으신다면, “예, 저는 80년을 믿었습니다” 라고 하면, 그게 과연 정답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저는 주님만 사랑합니다. 처음에도 주님만 사랑했고, 80년이 된 지금도 주님만 사랑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과거의 인물이지만, 예수님을 결코 과거의 인물이 아닙니다. 저는 그분의 생명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래서 지금 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생명 안에서 죽는 것이기에, 이미 죽은 자가 또 다시 죽는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흠이 되겠습니까?” 라고 한다면, 이게 바로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니냐는 말이죠.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

그러니 이것은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교회생활이나 종교생활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에는 어려운 말씀이 많은데, 여기서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3절을 보겠습니다. 물론 저에게 “이 목사, 당신은 이 말씀대로 살지?” 라고 하면 곤란한데, 이것은 오직 은혜를 받은 자에게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여기 2절에 나오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라는 이 말씀을, 성경 원래의 뜻대로 증거하지 않고, 제가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강요하고 요구를 한다고 하면, 아무리 목사가 이야기를 해도 그런 말은 전혀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율법이 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이 말씀을 보고서,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겠구나” 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전혀 오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율법이 아니고, “누가 기쁨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겠는가?” 라는 것인데,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이죠. 즉 “이것이 바로 실제상황이야. 오늘 죽어도 이 말씀은 진리가 맞아” 라고 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말씀 속에 들어와있다는 말이죠.

월드컵 경기장 주위를 뱅뱅 돌면서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월드컵 경기장 주위만 뱅뱅 돌면서, “참 아름답구나. 잘 지었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축구경기를 모르는 사람이죠. 그런데 막상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바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어떻습니까? “내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마음이 남아있어서 불안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형과 그림자를 붙들고 있는 자들은 “내가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구원을 받지? 무엇을 해야하지?” 라고 하면서, 물론 진리가 옳은 줄은 알고 있지만 그 안에 들어가지를 못해서 전전긍긍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는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당연히 신자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딱 내 이야기네.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 그것을 모르면 바보지”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신자가 맞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는 말이죠.

이미 축구장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도대체 축구장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지?” 라고 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는데, 그러면 “아하, 십자가 사건이 있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는 겁니다.

우리의 탐심과 우상숭배로 인해서 !!

그러면 하나님이 피를 흘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해도, 여전히 땅의 것을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 때문인데, 그리고 5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항상 일어나는 탐심, 즉 우상숭배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교회라는 것을 세우셨다는 겁니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러니까 교회가 탐심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집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가 기준이 되어서, 교회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피를 믿으려고 하니 참 부족합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피를 이야기하니, 부끄러워서 도저히 나오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면, 그런 자들은 율법주의자라는 겁니다. 이들은 모형과 그림자를 자기들이 지켜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모형과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즉 모델하우스라는 것은, 그것에 실제로 들어가서 살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미리 보여주어서 파악을 하도록 도와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가서 살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십자가 사건은 실제상황 !!

실제상황은 2,000년 전에 일어났는데, 그러니 우리가 기를 쓰고 설치지 않아도, 굳이 철야기도를 하지 않아도, 이미 2,000년에 무슨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즉 하나님이 피를 흘리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기에 바빠서 그 사건을 잊어버렸는데,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하고 기도하면서, 그런 모형들만 모아서 제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니는 몇 개를 모았노? 나는 이만큼 모았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 모형을 통해서, 그 모형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2,000년 전에 흘리신 그 피가 지금 나의 모든 죄를 씻어주는구나”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피만 흠뻑 증거되면 되는데, 그 피를 믿는다고 하면 그 날로 구원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 돌아가실 때, 그 옆에 같이 십자가에 달렸던 한 강도가 이런 제안을 했는데, “예수님, 하나님 나라에 가실 때 저도 기억해 주세요” 라고 말이죠. 그때 예수님은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서로 주고 받는 대화, 이것이 곧 사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대화를 우리도 이 자리에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도 역시 강도이니 말이죠. 그런데 그 강도에게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은 곧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인데, 그러한 사귐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할 생각은 하지 않고, 율법주의자들로서, 뭔가 주님에게 요구하고는 도망치기에 바쁜 이기주의자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는 방향을 틀어서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12 오후 4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