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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7:26-28) 속죄 제물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7:26-28) 속죄 제물

정인순 2010. 9. 5. 10:47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23강-히7장,26-28(속죄제물)-heb011202.mp3

 

 

이근호

 

속죄 제물

2001년 12월 2일 23강

본문 말씀 : 히브리서 7:26-28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28절 끝에 보면,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온전하다'라는 말이 얼마나 하기 힘들고 듣기 힘든 말이라는 것은 살아가면서 절감하게 됩니다. 물론 온전하고 싶어도 주변 상황이 자신을 온전하도록 가만두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여러분을 보고 "당신은 참으로 완벽하고 온전하고 완전한 분입니다"라는 평가를 내려준다면 정말 송구스럽기 그지없지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자신을 스스로 평가해보면, 자신의 흠이 종기 커지는 것처럼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간다는 것은 우리들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에 정반대가 되는 본성입니다. 우리는 살고 싶습니다. 안 죽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죽어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반발하게 됩니다. 안 죽게 하는 방법을 모두 다 동원하겠지요. 그러니 자연적으로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로 변모되어 갑니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선 살고 보자는 식입니다. 선과 악의 구분도 살고자 하는 의욕 앞에서는 2선으로 밀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과연 이런 모습이 우리 스스로 판단해도 온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겁니다.

 

자... 그런데 이 온전하지 못한 우리와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보는 것 그 사이에 뭐가 놓이게 되는가 하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부족한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온전한 분이라고 제시된 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분만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을 믿는 겁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온전한 자'로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리 생각에, "그것 참 쉬운 일이구나" 라고 여길 것입니다. 썩어 가는 고목이 생생한 나무를 기대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쓰러져야 될 자가 안 쓰러지고 그 썩은 고목이 스스로 바로 서보겠다고 우기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날라 가 버리고 자존심과 고집만 남게 됩니다.

 

영화에서 화살 한 대 맞고 쓰러지는 역을 맡은 엑스트라가 있다고 칩시다. 그냥 각본대로 화살 한 대 맞고 쓰러지면 그만인데 무슨 고집이 그리 센지, 쓰러지지 않고 자꾸만 카메라 앞에서 얼른거리면서 오래 끄는 겁니다. "나도 일종의 배우이다" 이거죠. 일종의 오기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영화를 완성하기 위하여 쓰러질 시기에 쓰러져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인공입니다. 예수님만이 온전하고 그 외의 모든 인간은 온전치 못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입니다. 흔히 엑스트라면서도 주연급이라고 나서는 인물들이 있지요. 목사 입네. 장로 입네 하고 말입니다. 절대로 그들의 주장에 농락 당해서는 아니 됩니다. 직분이 그 인간을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의 숱한 제사장과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 이 관계가 분명히 드러나겠지요. 오늘 본문 27절 앞과 28절을 상호 비교해 보면 이렇습니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옛날 제사장들의 활동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참으로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거룩한 성자처럼 보일 것입니다. 사실은 제사장들이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약점을 가진 사람이로다"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나는 이 일을 하는 가운데서 여전히 죄를 지니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를 알기 위하여 율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제사장 되게 했고 뽑히게 했다는 겁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교회에 봉사를 많이 한다든지, 헌금을 많이 한다든지, 전도를 많이 한다든지, 기도를 많이 하는 그 인간에 대해서 특별히 의미를 두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본인들이 얼마나 부족하고 온전치 못한 죄인인 가를 통감하고 있는데 자꾸만 옆에서 그 사람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차별적으로 우등한 인물로 부추겨 줘버리면 그것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의지할 분을 바로 보지 못하고 그저 인간을 통해서 뭔가 하늘에 손이라도 닿고자 하는 불 신앙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허무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허무란 "가치 있는 것이 아닌" 상태를 말합니다. 무가치하게 될 때 그것을 허무한 것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온전치 못한 인간에게 허무를 가르치기 위하여 '죽음'이라는 것을 동원시키십니다. '속죄 제', 혹은 '제사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과 우리가 얼마나 허무한 존재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죽음을 체득하고, 죽음에 동참시키고, 죽음을 앞당겨서 실시함으로서 우리들이 죽을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허무를 가르치십니다.

 

왜 우리가 허무를 앞당겨 알아야 합니까? 그래야 지만 우리가 쓰러져 가는 고목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도 나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어떤 임금님이 혼인 잔치를 열고 사람들에게 참석하라고 통고했습니다. 그런데 초청 받은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참석을 안 합니다. 어떤 이는 밭을 샀기에 가봐야 한다고 했고 어떤 이는 장사한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장가가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참석을 하지 않는다고 다른 성경에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서 임금님은 크게 노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자신들 보기에는 밭을 사는 것이나 장사하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고 장가가는 것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보지만 그러나 임금님의 혼인 잔치 앞에서 모두다 무가치하고 허무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천국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시시하게 여기는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금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내가 따로 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순간에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죽는 마당에 있다면, 밭을 사는 일이든지, 내가 장가가는 일이든지, 장사하는 일이 전혀 가치 있게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것을 허무한 것으로 돌릴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누가 자신을 허무한 존재로 볼 줄 아느냐?"를 탐색하는 과정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별게 아닙니다. 보험 관계나 친구 관계나 사업 관계 가족 관계나 모두 다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여기는 경우에서만 성사됩니다. 타인과의 관계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경우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최종적으로 보여주자는 것이 하나님의 속죄제사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진정 사랑의 관계입니까? 아니면 의무감입니까? 보험자와 가입자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입니까 아니면 책임감입니까?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옳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런 질문을 예수님에게 합니다. "예수님,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는 것이 하나님의 뜻 맞지요?" 예수님께서 맞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사랑'에 대해서 본인이 실천 할 수 있다고 여기고 문제는 '이웃'이 누군가 하는 점만 알면 된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또 묻기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이웃을 설명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누가 네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되묻습니다. 즉 어떤 강도 만나 사람이 거반 죽게 되었을 때에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 인도 그냥 지나갔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웃은 누가 결정짓느냐 하면,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만약 사랑을 모른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웃도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누가 사랑을 알겠습니까?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것이 인간들인데 말입니다. 참으로 자신이 허무한 죄인인 줄 안다면 그때야 비로소 주위에 있는 모든 자가 자기에게 사랑을 부여하는 이웃으로 보이겠지요.

 

자신의 온전함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이 필요한 존재로 자신을 허무하게 보는 그 자체에서 이웃 관계가 성사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은 속죄 제사를 제사장 당사자들에게 먼저 실시케 했습니다. 제사장이 자신을 위하여 먼저 속죄제물을 드린다는 것이 레위기 9:8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아론이 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여러분, 제사장이 속죄 제물이 되는 송아지를 잡을 때 그냥 잡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따뜻한 손으로 송아지 머리에다 먼저 안수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송아지의 죽음이 곧 자신의 죽음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운명의 실체가 이제 이 송아지가 보여줍니다. 송아지의 저주스러운 최후는 곧 제사장 자신의 저주스러운 최후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실체가 곧 허무인 것을 알게 됩니다. 송아지의 죽음,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제사장은 결코 온전치 못한 인간임을 분명히 합니다.

 

하지만 이 온전치 못한 인간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죽은 제물의 온전함을 온전함으로 받아주시는 동시에 그 사실을 믿는 자도 온전하다고 간주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와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21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본문 28절을 다시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약점 있는 제사장과 약점이 없으신 예수님의 온전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약점 있는 제사장의 거룩한 일은 결코 본인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온전케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온전하신 가요? 2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바로 이러한 온전함이 예수님을 믿는 자도 역시 온전케 해주십니다.

 

사람들은 자존심이 있어서 예수님의 온전함으로 만족케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온전함으로 버티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온전함에 대해서 전해서 사람들은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묻기를,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찾고자해도 원래 선택된 자가 아니면 구원받지 못합니까?"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러합니다.

 

선택되지 않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온전함을 이야기하면 본인이 알아서 그런 예수를 멀리하고자 합니다. 본인이 스스로 떨어져 나가고자 하지요. 그래서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에 갈라디아서 1:10에 나오는 이런 말씀이 성립됩니다. 즉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들은 자신이 허무하다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가 썩은 고목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자신이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는 말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하든 스스로 온전해져서 구원되고자 합니다. 이들은 속죄제 되는 십자가 앞에서 다시 서야 될 자들입니다. 거기에서 자기 대신 죽어 가는 예수님의 처참한 최후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최후의 모습이 자신의 본 모습인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 분이 내 대신 죽지 않았으면 나의 온전함도 없다"는 사실에 느끼고 감격해야 합니다. 허무를 아는 자가 진정 사랑을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온전한 자라고 하나님이 평가하실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놔두고 자신의 위대함으로 치닫는 거짓 믿음을 제거해 주시고 주님의 온전하심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3. 속죄제물(히 7: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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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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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28절에 보면, “맹세의 말씀은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리고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25절에도 보면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라고, 그렇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온전하다’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 ‘온전하다’ 라는 말이 얼마나 하기 힘들고 또한 듣기도 힘든 말인지, 그것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실감하게 됩니다. 과연 자기 자신은 온전한지, 목사님은 온전한지, 장로님은 온전한지 말이죠. 신앙생활을 40년을 하고 50년을 하게 되면 온전하게 되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아무리 우리 자신이 온전하고 싶어도, 주변의 상황들이 전혀 우리 자신을 온전하도록 가만두지 않다는 것을, 그것을 우리는 온 피부로 느끼면서 실감하게 된다는 말이죠. 때에 따라서, 감정에 따라서, 사람은 마음은 너무나 바뀌기가 쉬운데, 마치 풍랑에 출렁이는 파도와 같다는 겁니다.

당신은 온전합니다 !!

그런데 누군가가 자기에게, “당신은 참으로 말씀대로 살아가는 완벽하고 온전한 분입니다” 라는 평가를 내려준다면 어떻겠습니까? 정말로 송구하기가 짝이 없는데, 고맙기도 하고 말이죠. 하지만 주위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평가해주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평가해보면, 자기의 흠이, 그게 마치 종기처럼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특히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죽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에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살고 싶은데, 그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고 싶은데, 결코 죽지 않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자기 하나 편하기 위해서 남들에게 대한 예우도 다 내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것은 자기 스스로 보기에도 전혀 온전치 못한 것인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우리에게 온전하다는 평가를 넘겨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온전치 못한 자기 자신과, 온전하다고 하는 성경말씀 사이에는 갭이 생기는데, 물론 우리는 메우지를 못하는데, 바로 그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믿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믿음이란 것은, 날마다 자기를 바라볼 때, 자기는 온전치 못하고 죄만 더 짓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다는 것을 제시한 분이 있는데, 그분은 곧 말씀인데, 육신이 되신 분이란 겁니다. 그분이 예수님인데, 그분은 온전하고, 그리고 그분을 믿는 자도 역시 하나님께서 온전한 것으로 간주해주겠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제시한 최고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것이 참 쉬운 일처럼 여겨지는데, 그 완전하고 온전하신 분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이죠. 마치 썩어 가는 고목이 생생한 나무에 기대듯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쓰러져야 될 자가 쓰러지지 않고, 즉 썩은 고목이 쓰러지지 않고 스스로 서보겠다고 우기는데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믿음은 그만 날아가 버리고, 자기 자존심과 고집만 남게 된다는 말이죠.

나도 배우다 !!

예를 들어서, 영화를 찍는데 화살을 한 대 맞고서 쓰러지는 역할을 맡은 엑스트라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냥 각본대로 화살을 한 대 맞고 쓰러지면 되는데, 그런데 무슨 고집이 그리 센지, 쓰러지지 않고 자꾸만 카메라 앞에서 얼른거리면서 시간을 오래 끄는 겁니다. 즉 “나도 배우다” 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오기인데,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쓰러질 시기에 쓰러져 주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영화의 완성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만을 돋보이려고 한다면, 그러면 영화의 완성도는 자연스럽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만드시는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인공인데, 예수님만이 온전하고 그 외의 모든 인간은 온전치 못함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우리가 너무나 못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것을 드러내는 하나님이 만드신 거대한 파노라마이고 작품이라는 겁니다. 그 작품에 우리가 엑스트라로 뽑혔다는 말이죠.

그런데 엑스트라이면서도 주연급이라고 나서는 인물들이 있죠. 엑스트라이면서도 주인공 역할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데, “목사 입네, 장로 입네”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절대로 그들의 주장에 농락을 당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직분이 그 인간을 온전케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들은 악역인데, “아하, 목사가 되어서도 저렇게 나쁜 짓을 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장로가 되어서도 전혀 변하지를 않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장로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아니면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모두가 엑스트라라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의 직분에 더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만이 홀로 생명나무가 되시는가?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홀로 주인공이 되시는지, 나머지는 모두 다 쓰러져 가는 고목이고, 왜 예수님만이 생기가 도는 살아있는 나무인지, 왜 예수님만이 홀로 생명나무가 되시는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늘 본문말씀이 있다는 말이죠.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도 훌륭하지만 옛날 구약시대의 수많은 제사장들이 소명을 받아서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습니까? 땅도 없고 가족도 버리고, 오직 온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충성을 다했던 그들을 무시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만이 홀로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말씀 28절을 보겠습니다.

(히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제사장은 약점투성이 !!

여기에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제사장들이 열심히 제사를 드리는데, 그것이 백성들이 보기에는 거룩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제사장들도 역시 거룩한 자들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제사장들이 자기들이 잘나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약점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이 일을 하는 것과 무관하게,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율법에 의해서 그들이 제사장으로 뽑혀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 기도를 열심히 한다든지, 전도를 열심히 한다든지, 교회봉사를 열심히 한다는 것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겁니다. 정작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렇게 전도를 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달으면서 하고 하는데, 그런데 정작 주위에서 어떻게 바라봅니까? 그야말로 위대하게, 마치 손만 내밀면 하늘과 맞닿을 성자처럼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자기는 하나님이 손을 잡을 가치도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그야말로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그것을 전도를 하면서, 또한 기도를 하면서, 그리고 열심히 봉사를 하면서 그야말로 절감하고 있는데,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를 하고 곡해를 하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정말로 자기가 의지해야할 대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남들을 통해서 자기가 어느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그렇게 해서 자기 위치를 지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즉 자기 합리화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이죠.

‘허무’를 몰라서 그렇다 !!

저는 이것을 두고, “그것은 허무를 몰라서 그렇다” 라고 하고 싶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허무와는 거리가 먼 것이고, 그런데 허무를 느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보아왔던 것에 대해서 가치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곧 허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무를 어떻게 말씀하시는고 하니, 그것을 지지난 시간부터 했는데 말이죠. 27절에 보면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라고 하는데, 즉 속죄제를 드리는데, 그렇게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하나님은 그 허무를 우리에게 가르친다는 말이죠.

(히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쉽게 말해서,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체득하게 하시고, 죽음에 동참시킴으로서, 이 세상은 죽을 세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서, 우리에게 허무를 체험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미리 앞당겨서 허무를 알아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지신이 쓰러져 가는 고목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인데, 그렇게 함으로서 믿는 자를 더 높이 부각시킨다는 겁니다.

이 속죄제물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겠는데,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16절에서 20절입니다.

(눅 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눅 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눅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바쁘다 바빠 !!

어떤 임금님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핑계를 대면서 참석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밭을 샀기 때문에, 장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그리고 장가를 가야하기 때문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농사를 짓는 것과 장사를 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습니까? 당연히 각자의 일이 더 가치가 있다고 여기겠죠. 그리고 장가를 가는 경우에도, 자기가 장가를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임금님이 자기 아들의 잔치에 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 사람이 사람이 농사를 짓던 장사를 하던 장가를 가던, 그것이 이 혼인잔치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임금님이 하는 일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허무하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임금님은 크게 노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임금님, 즉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천국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시시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그것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즉 우리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여전히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포기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누가 자기 자신을 허무한 존재로 볼 줄 아는가?

그런데 만약 이 순간에 자기가 죽는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지금 자기가 죽는 마당이라고 하면, 밭을 사는 일이라든지, 장사를 하는 일이라든지, 그리고 장가를 가는 일이 전혀 가치가 있게 와닿지는 않을 겁니다. 모든 것을 다 허무한 것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비유는 무엇인고 하니, “누가 자기 자신을 허무한 존재로 볼 줄 아는가?” 라는 것을 찾아내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닙니다. 친구 관계나 사업 관계나 가족 관계나, 모두가 다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여기는 경우에만 성사가 됩니다. 타인과의 관계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데,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경우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제시한 속죄제물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너는 죽어 마땅하다” 라고 하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속죄제사’ 라는 겁니다.

네가 사랑을 아는가?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고 과시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뭐라고 질문하는고 하니, “예수님,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지요?”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 맞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자기가 잘 알아서 실천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러니 이제는 이웃이 누구인지, 그것만 알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시 묻기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했다는 겁니다.

(눅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럴 때 예수님은 이웃을 설명해 주시는 게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셨는데, 즉 “사랑을 모르면 이웃은 없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즉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너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따라서 이웃은 누가 결정을 하는고 하면, 사랑을 받은 자만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만약에 사랑을 모른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이웃도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그 사랑을 알겠습니까? 전혀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것이 인간들인데 말이죠.

그러니 모두가 다 이용대상일 뿐인데,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성령님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네가 사랑을 아는가?” 라는 겁니다. 그 사랑을 모른다고 하면 모두가 이해득실 관계에 놓여있을 뿐인데, 인간관계가 다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 라는 것이, 그게 심지어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성립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 자식이니까 사랑한다는 겁니다. 남의 자식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 것은 다 책임감에서 나오는 것인데, 즉 사회적인 통념에 부합되기 위한 노력이란 것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참으로 자기 자신이 허무한 죄인인 줄을 안다면, 그래서 지금의 부모를 만나고 자식을 만난 것이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면, 즉 “나는 허무한 존재인데, 이런 부모를 허락한 것이 웬 은혜인가?” 라고 말이죠.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의 허무를 깨닫고 새롭게 이웃을 정립하게 된다고 하면, 그게 진정한 이웃사랑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없어요. 물론 한 순간은 그럴 수도 있는데, 5초 정도는 말이죠. 하지만 그 5초가 지나면 또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아요. “그래도 너보다는 내가 잘났어”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허무를 안다는 것은, 허무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온전한 것인데, 그래서 시편 136편에서 뭐라고 합니까?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이 정말로 감사합니까? 비가 많이 와서 난리가 나면 몰라도, 평소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 136:8)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예수님 외에 온전한 사람은 없어 !!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온전하다고 하시면서 보내신 것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결코 온전치 못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온전치 못한 인간이 기도를 해도 온전한 기도가 될 수 없고, 헌금을 해도 온전한 헌금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하라’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교회자체의 탐욕입니다. 그러니 제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도록 내버려두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자식을 키우는데, 아이가 학교에 갔다와서 얼마나 엄마를 귀찮게 하는지 몰라요. 엄마도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너무 피곤한데, 그런데 계속해서 아이가 반찬 투정을 하고, 옷 투정을 한다고 하면, 그리고 신랑도 잔소리를 마구 해대면 어떻게 되겠냐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이 혹시 그러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기도하지 마세요” 라고 들릴까 싶어서 염려가 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죠. 기도는 그 뜻을 자기가 챙기고 만드는 것이 아닌데, 온전한 기도는 언제나 정해져있는데, 그것은 바로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그게 온전한 기도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온전하지 못한데, 그러니 기도는 온전한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의 마음은 전혀 온전치 못하고,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데, 그래서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간에 그저 이용만 해먹으려고 하는 마음을 먹은 채로 하나님에게 나와서는, “하나님, 이것을 왜 해주지 않습니까? 저것을 왜 해주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 얼마나 속이 상하겠느냐는 겁니다.

니가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 알아라 !!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까, “니 주제파악을 해라. 니가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 알아라” 라는 것인데, 즉 “니가 기도하는 가운데 얼마나 허무한 것을 붙들고 기도했는지, 이웃사랑은 고사하고 이웃을 짓밟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라” 라는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EBS에서 하는 ‘고대제국의 비밀’ 이라는 다큐를 보았는데, 고대의 이방종교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잘 다루었는데 말이죠. 그때 제사장들이 신에게 어떤 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흥정을 했는지가 나오는데, 즉 “인간제물을 몇 명이나 바치면 비가 오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적들이 쳐들어오면, “노예 500명을 바치면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겠습니까?” 라고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그게 그 당시 성직자들의 일이었는데 말이죠.

종교는 신에 대한 인간의 복수극 !!

그런데 이게 남의 일이 아닌데, 오늘날 교회가 바로 이런 짓들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얼마나 바치면 내 뜻대로 해주겠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래서 저는 그것을 보고 “종교는 신에 대한 인간의 복수극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그것으로 글도 쓰고 있는데 말이죠.

그게 어떤 복수극인고 하니, 자기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 신에 대한 보복으로서, 그래서 신의 이름으로 이용해서 마음껏 자기의 배를 채운다는 겁니다.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를 함으로서, 그렇게 해서 신의 이름으로 얻을 것을 다 얻으면서 신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니 허무를 알아라. 속죄제물을 통해서 너의 주제파악을 하라” 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신의 이름을 빙자해서 하나님에게 땡깡을 부리고 데모를 하는, 바로 그런 장소가 교회이고, 그것이 곧 종교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온전치 못했으면, 얼마나 그 마음이 썩어빠졌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한 수를 더 뜨는데, 교회에 다니지 않음으로서 뭐라고 합니까? “제 고집도 어지간합니다. 하나님도 세지만, 저도 만만치 않아요”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 교회바깥에 있는 인간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허무하기는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제사장이 왜 자기 죄를 위해서 속죄제물을 드려야 하는고 하니까, 그 이유가 레위기 9장에 보면 나오는데, 7절에서 11절입니다.

(레 9:7) 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하되 무릇 여호와의 명대로 하라

(레 9:8) 이에 아론이 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레 9:9)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받들어 주니 아론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단 밑에 쏟고

(레 9:10) 그 속죄제 희생의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을 단 위에 불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고

(레 9:11) 그 고기와 가죽은 진 밖에서 불사르니라

내 대신, 송아지 니가 죽는구나 !!

여기 8절에 보면 “이에 아론이 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라고 합니다. 속죄제물인 송아지를 백성들을 시켜서 잡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직접 잡는데, 그런데 그냥 잡는 것이 아니고, 먼저 자신의 따뜻한 손으로 송아지 머리에 안수를 하고 나서 잡는다는 겁니다.

왜 자기 손을 죽어야 하는 송아지의 머리에 얹는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송아지의 죽음이 곧 자신의 죽음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운명의 실체가 이제 이 송아지가 보여준다는 겁니다. “정작 죽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인데, 그런데 죄도 없는 송아지 니가 죽는구나.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만 죽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우리의 양심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라, 즉 “하나님, 우리 집에 있는 소를 잡아서 바치겠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잡으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간은, 즉 소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죽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는 말이죠. 속죄제물을 잡음으로서 말이죠.

그 속죄제물인 피 흘리는 송아지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인데, 그러니 십자가는 그냥 나무를 가지고서 만든 단순한 사형틀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쳐다보기만 하면 되고 말이죠.

그러면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자기 자식이 잘 되게 해달라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기도하면 암에서 나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노림수를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볼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암이 없어졌다고 해서, 허무한 것이 허무하지 않은 것으로 바뀔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지독하게 온전치 못했으면,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온전하신 분이 대신 죽어야 하느냐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데, 다른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지 말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뀌더냐?” 라는 겁니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대제사장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 자식이 공부를 잘하고 말도 잘 듣고 성실하고 너무나 착한데, 그런데 그런 자식이 술을 한 잔 했다고 해서 어떻게 때릴 수 있느냐는 겁니다.

(히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에게도 발길질을 함부로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그분을 우리 앞에서 피를 흘리도록, 그의 몸이 부서지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거룩하고 죄 없는 그분을 말이죠. 그리고는 “이것은 너희의 죄를 씻기는 속죄제물이다” 라고 하는 명칭을 달아놓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를 보고 온전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것이 전혀 아닌데, 그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만 하고, 누구를 의지해야만 천국의 시민인지, 그것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확실한 것을 붙잡아야 !!

이런 혼탁한 세대에서 우리가 정리해야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도대체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확실히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확실한 것을 붙잡아야지, 모호한 것을 잡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모호한 것은 아무리 붙잡아도 시간만 허비할 뿐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확실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것을 다 빼버려야 하는데, “누가 착하더라. 누가 괜찮더라” 라는 것은 말이죠. “누가 개척교회를 몇 개를 세웠다고 하더라” 라는 것들은 말이죠. 그러니 확실한 것은 사람의 것이 끼어들지 않은 것인데, 즉 “어느 목사는 설교를 잘하더라. 어느 권사는 기도를 잘하더라” 라는 것들이 말이죠.

왜냐하면 그런 것은 온전치 못한 것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온전한 것만 고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런 온전한 것을 믿음으로서, 우리가 온전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고린도후서 5장이 나오는 내용인데, 21절입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게 확실한 것인데, 더 이상 확실한 것은 없어요. 만약에 괜찮은 교회, 괜찮은 목사, 그런 식으로 나가면 확실한 것을 다 버려놓는 것인데, 깨끗한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적인 것은 다 빼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이 말씀만 드리고 마치겠는데, 오늘 본문 28절입니다.

(히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약점이 있는 제사장, 그리고 온전하신 예수님 !!

율법에 약점이 있는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약점이 없으신 예수님의 온전함과 비교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사장은 온전치 못하기에, 자기가 제사를 드리는 행위로서, 그것을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의로 넘겨줄 자격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목사가 기도를 잘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님이 저렇게 기도를 잘 하시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작 목사 자신은 기도를 하면서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기도를 하면 할수록 자기 욕심만 튀어나오는 것을 알고, 진짜 제대로 기도를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제가 대신해서 기도를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즉 자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진짜 간증이다 !!

이것이 간증이라면 간증인데, 달리 간증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 이러십니까? 저는 십자가를 진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하지 마세요. 주님만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로 그 주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를, 그것을 확실하게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증인인데,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리고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이 결단코 빈 말이 아님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시는지 모르는데, 자기 아들의 목숨까지도 바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과 같은 절실한 마음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전도를 해도 자기 교회에 사람을 채우는 정도이지, 온전한 예수님처럼 자기 목숨을 바치는 일은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정말로 전도를 한다는 것은, 물론 전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어도, 전혀 볼품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지만, 하지만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확실하게 의지해야하는지, 그것만 파악하면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게 전도라는 말이죠.

신에 대한 복수심, 그러나 !!

신에 대한 복수심, 참으로 무시무시한 것이죠. 자기는 따로 가치가 있다고 장담을 하기에, 하나님의 이러한 천국에 대한 초청을, 그것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보다도 시시하다고 여기고 그만 밀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다시 모으게 하시고, 그리고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죽게 된 지점을 앞당겨서, 지금 현장화를 만들어 버리신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죽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의미가 있는가?”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온전치 못한 것을 깨닫게 만들고, 그렇게 자기가 온전치 못하다고 하면, 정말로 온전하신 분은 따로 계신다는 것을 알고,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게 된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은 참으로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건과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일인지, 그것을 제대로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런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속죄제물이 되신 십자가만을, 그것만 사건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11 오후 3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