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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7:11-17) 레위지파와 유대지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7:11-17) 레위지파와 유대지파

정인순 2010. 9. 5. 10:45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21강-히7장,11-17(레위지파와,유대지파)-heb011118.mp3

 

 

 

레위 지파와 유대 지파

2001년 11월 18일 21강

 

본문 말씀: 히브리서 7:11-17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7: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7: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7: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7: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7: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7:17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에 관해서 사도들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서 다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나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투명하고 깨끗하게 말입니다. 사랑의 전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갈보리 언덕에 올라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볼 생각은 안하고 그 밑에서 세상 적인 사랑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안경 낀 사람들은 아시다시피 겨울철에 안경에 생애가 끼면 앞에 흐릿해져서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갈보리 언덕에서 다 보이셨는데도 불구하고 세상 적인 사랑에 마음을 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앞에 나올 때는 초가 녹듯이 나름대로 사랑은 다 녹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끗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깨끗한 사랑은 깨끗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의 말씀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위로부터 오시는 깨끗한 사랑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땅에서 인간들이 만들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저분한 사랑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사랑은 멜기세덱 계통의 유다 지파를 말하고 땅의 것은 아론 계통의 레위 지파입니다. 11절에 보면, "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라고 되어 있지요.

 

왜 하나님은 한가지 방식이 아니라 두 가지 방식으로 뜻을 나타내었을까요? 백성들은 이미 율법을 받게 되었습니다. 받았을 때의 이들의 마음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주신 것은 이것을 지켜 행하면 복을 주기 위함이 분명해. 야 신난다. 열심히 지키야지"라는 마음입니다. 또 이 율법 안에서 레위 지파가 담당해야 하는 제사법도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 이 제사법대로 실행에 옮기면 죄마저 씻을 수 있는 거야. 그래 열심히 제사 드리야지"라는 마음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율법 안에는 그 어디에도 레위 지파 말고 또 다른 지파에서 제사장이 다시 나와야 된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레위 지파, 즉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로 간주했습니다. 혹시나 다른 지파에서 나와야 된다는 점을 하나님이 언급만 하셨더라도 오로지 율법 만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4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 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세가 말하지 않는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일을 추진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구원의 주님께서 레위 지파를 의도적으로 피해서 유다 지파를 통해 오셨다는 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즉 레위 지파는 육체와 상관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모세에게 율법을 주었고 레위 지파들로 하여금 제사장 직분을 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와는 따로 유대 지파를 통해서 구원의 주님이 태어나신 것은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설명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러니까 유다 지파 입장에서 레위 지파의 일을 재삼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레위 지파에서 레위 지파를 설명하는 것을 옳은 설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레위 지파를 설명해야 옳은 겁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의 차원에서 '육체와 상관된 법'을 바라보아야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이 한 가지 방식에서 죽자고 매달려 있는 자들은 오늘 본문의 12절 말씀을 거부할 것입니다.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즉 율법은 변해야 될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자고 율법을 지켜야 지만 구원이 된다고 여기는 자들은 헛 다리 집고 신앙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내렸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이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은 이 세상의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4:22-26에 나옵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여기에 보면, 대단히 신기한 말이 나오지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늘에 어머니가 없는 자들도 이 세상에 있다는 겁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구분합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의 직접 주신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로 구분된다는 겁니다.

 

만약 율법을 육체의 행함으로 관계해서 그것을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하늘에 어머니가 없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세상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그 율법에 따라 나타난 사람들이지 하늘의 약속을 따라 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불교 신자나 비 기독교인들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성령을 찾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구원되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정말 율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사람에게서 율법이란, 오직 하늘의 어머니에 의해서만 태어난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즉 아까 우리는 레위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라는 말씀을 보았지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율법을 주시고서는 "율법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점을 하늘에 어머니가 되는 자만 압니다. 다른 사람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것 행해서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다"라는 것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을 보내시지 마시고 그 때에 이미 예수님을 미리 보내시지 않았는가?"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율법에 준한 자들이 먼저 내려와야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능하다는 점이 확연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들의 무능 성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큰사랑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또 우리 마음 속에는 그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거부하고 미워하고 저주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중에 하나님의 법을 거부하는 마음이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것은 율법이 미리 주어져야 지만 밝혀집니다. 예를 들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우리는 이런 지시가 옳고 선한 줄 알지만 곧장 타협에 나섭니다. "하나님, 너무 심하십니다. 좀 쉬엄쉬엄 기도하는 것으로 저는 받아드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지킬만한 것들만 성경에 서 뽑아내어서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관과 신앙 생활 지침서로 삼아 버립니다. "하나님 이것까지만 저는 지키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식으로 살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저의 사정을 충분히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을 말씀하시려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몹시 걱정이 되어서 다름과 같이 대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구원받을 자가 과연 나올 수 있는지 걱정됩니다?"하는 식의 반발을 곧장 나타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바로 이런 정신이 오늘 본문 16절의 말씀입니다. 즉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의 핵심 내용과 일치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지파로 메시야를 보내셨다는 말은, 레위 지파 시절처럼 인간의 행함이 가미되어야 구원된다는 말이 아니라 '무궁한 생명의 작용'으로만 구원된다는 말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면, 옛날 출애굽 할 때에 홍해가 갈라진 것, 여러분이 잘 아시죠? 그 갈라진 바다 사이로 바닷길이 열렸습니다. 자기 그 길을 가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해야 마땅합니까? 혹시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저의 튼튼하고 굵은 다리를 보세요. 이 바닷길을 저의 단단한 두 다리로 열심히 걷고 있으니 저의 구원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율법적 생각입니다. 자신의 육체의 능력과 자신의 구원과 연관시키고자 하는 자입니다. 종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라 말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하나님이 친히 베푸셔서 열어주신 이 길을 가면서 저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능력만을 감사합니다"라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육체적 능력과 자신의 구원과 관련시키지 않기 때문이죠.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이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 언덕 위로 올라갈 생각을 안하고 있습니까? 혹시 자신의 선함이나 착함 행실에 잔뜩 기대를 가지고 남을 기죽이고 그리고 남들로부터 사랑 받고 싶어서 그런 모습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이러한 잡스러운 사랑의 생각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끗하게 봅시다. 세상 적인 인간들은 나름대로 법을 만들어 갖고 다닙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짝도 소용없는 짓입니다. 하나님 사랑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 앞에는 법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법칙, 혹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계명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마시고 사랑만 받아들이고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전부를 보여주었는데 왜 우리는 자꾸만 기피만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차라리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하나님의 거룩한 법으로 정죄 해 주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을 깨끗하게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구득영

21. 레위지파와 유대지파(히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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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히 7: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히 7: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히 7: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히 7: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히 7: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히 7:17)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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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해서 사도들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서 다 나타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나오면서 우리 자신이 나름대로 생각한 그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자비일 것이다” 라고 우리 나름대로 여겼던 것을 말이죠.

그런 것들이 십자가 앞에서 다 녹아져야 하는데,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도 역시 모두 녹아져 없어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들이 놓여있게 되면, 하나님의 그 십자가 사랑을 투명하고 깨끗하게 바라볼 수가 없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이렇게 안경을 쓰고 있는데 여기에 성애가 끼면 어떻게 됩니까? 특히 겨울철에 집안에 있다가 바깥으로 나가면 앞이 잘 보이지 않지요? 마차가지로 우리는 십자가의 그 하나님 사랑을 깨끗하게 보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뭔가 흐릿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이 세상에 많이 걸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지저분하게 늘려있기 때문에, 갈보리 언덕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그 밑에서 이 세상의 사랑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계통을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먼저 하나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깨끗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 땅에서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저분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즉 깨끗한 사랑과 지저분한 사랑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두 가지를 소개해주시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멸시와 천대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지저분한 사랑 때문이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우리의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집착으로 인해서, 주님의 사랑이 사랑 값을 하지 못하고 짓밟혔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레위지파와 유다지파 !!

오늘 본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는 아론 계통의 레위지파의 제사장이고, 다른 하나는 멜기세덱 계통의 유다지파의 제사장라는 겁니다. 그게 11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법 긴 문장인데, 그리고 어렵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한국사람이기에 성경에 나오는 이런 문화에 대해서 익숙하지를 못한데, 아론 계통의 레위지파, 또한 멜기세덱 계통의 유다지파와 같은, 이런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이런 용어부터 설명을 해드림으로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살펴보려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의 이런 사정도 하나님께서 잘 아시니, 해결해줄 줄로 믿고 이런 번거러움을 한 번 통과해보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법을 주셨는데, 그런데 그 법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너희가 이런 이런 식으로 제사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 라는 것이 포함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옛날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법인데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지키면 복을 받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지키려고 애를 썼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물론 그 법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 하지만 법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또 다른 법이 마음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 들통나게 된다는 겁니다.

이 대목이 정말 어려운데, 예를 들어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다고 하면, 그것이 옳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누가 다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말씀이 있는 줄을 몰랐을 때는 그냥 살아가면 되었는데, 그런데 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하나님의 잔소리가 계속해서 귀에 들려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우리 마음속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형편상 그렇게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살기가 이렇게 바쁜데, 어떻게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런 변명이 우리 마음속의 일부로 자리를 잡았다가 마구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여보, 난폭운전을 하지 마세요 !!

제가 운전을 하게 되면 아내가 옆자리에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간섭을 하는데, 신호를 지키고 난폭운전을 하지 말라고 말이죠. 그러면 “천천히 신호를 지키면서 갈게” 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다 빨리 가면 저 신호를 제낄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교회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든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면 옆에서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해대는데, 물론 그게 옳은 줄은 알지만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에 다른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이고, 그것이 적용되는 현장이라는 말이죠.

하나님, 제가 참 착하지요?

제가 언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도 자기가 지킬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지킨다는 겁니다. 참으로 비겁한 행동인데, 성경에서 자기가 지키지 못하는 것은 다 빼버린다는 말이죠. 자기에게 만만한 것만 골라서 지키고는 “하나님, 제가 참 착하지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목사가 되면 하는 일이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것인데, 그래서 교인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무엇을 하십니까? 주님께서는 말씀을 보고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왜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자기는 했다는 것인데, 목사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큰 소리를 친다는 겁니다.

그런 목사들을 보면 저는 이렇게 묻고 싶어요? “성경에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데, 그것을 지킵니까? 처나 자식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지킵니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그것을 지킵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데, 그것을 지킵니까? 그리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지킵니까?” 라고 말이죠.

물론 한 때 자기 목숨을 미워한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그렇게 되느냐는 겁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데,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이 든다는 것을 기억하느냐는 말이죠. 혹시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내려오면 그 마음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왔던 마음과, 집에 가서 밥을 할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이죠.

변하는 구원의 방식 !!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것인데, “구원하는 방식은 변한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그 거룩한 말씀이 왜 달라지고 변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설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면, 그래서 제가 신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신학교에 가거든 교수님에게 물어보세요. 왜 아브라함이 오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바로 오지 않고, 아브라함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모세가 오고, 그리고 다윗이 오고, 선지자가 오고, 그렇게 되어야하는지를 물어보세요” 라고 말이죠.

아브라함 다음에 바로 예수님이 오시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왜 모세가 오고 다음에, 1440년 이후에 예수님을 보내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아는 교수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 예수님이 마치 낚시바늘과 같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면, 사실 아브라함도 필요가 없는데, 아무도 필요가 없이 바로 예수님이 오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브라함도 안 돼, 모세도 안 돼 !!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보낸 것이 아닌데, 그러면 어떤 식으로 보내신 겁니까? 먼저 아브라함을 보내시고, 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하시고,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도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모세를 보내서, 그가 비록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돌판을 받았지만, 하지만 돌판을 받으면 무엇을 하느냐는 겁니다. 어디 학생들이 신학기에 새 교과서를 받았다고 해서 그 교과서를 모두 압니까? 그게 머리 속에 다 들어옵니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그 거룩한 뜻을 모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이 구원을 받기 이전에, 먼저 왜 너희들의 행함으로는, 너희들의 선행으로는 구원되지 않는지, 그것부터 먼저 확실하게 알아라” 라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존심이 세다는 것인데, 물론 교회에 나와도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법이 있는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각자의 인생관이 다들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법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데,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내 인생을 꾸려나가는데,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내 인생을 간섭합니까? 저리 가세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설교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끗하고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 그 사랑을 받고자 하는데, 그런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사랑을 흐릿하게 만든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법을 만들어서, “나는 내 방식대로 살겠다” 라고 나오니, 십자가의 그 사랑은 그만 관심 밖으로 나가고 마는데, 그러니 그게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는 겁니다.

다시, ‘두 계통’ !!

설교를 다시 하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방식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두 계통’ 이라고 했는데, 즉 레위계통과 유다계통이라는 겁니다. 먼저는 하늘에서 사랑으로 용서하는 방식과, 그런데 그 이전에 보신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얼마나 착해질 수 있는가?” 라는, 그것을 측정하는 방식을 보내셨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두 가지 방식을 보내서, 그렇게 해서 먼저 우리가 이 땅에서 선하고 착해질 수 있다는 방식은 완전히 ‘꽝’ 이라는 것인데, 즉 “너희들이 아무리 행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행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수많은 일들을 하고 해도, 그런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그 유명한 에디슨은 전구도 발명하고 다른 것들을 수없이 발명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뛰어나고 많은 발명품도 행한 것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는 실컷 한다고 했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행한 것이 전혀 없는데, 아니 행할 수도 없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의 한계이고 실상이라는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이렇게 제사를 드려야한다” 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제사장들은 양을 잡고 해서 열심히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양을 많이 잡았나? 기름도 바치고? 제대로 했지?” 라고 하면, 제사장들은 “예,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라고, 그렇게 판정을 내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하라고 법을 주신 것으로 아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왜 법을 우리게 주셨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온전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물론 너의 껍데기는 온전하고 싶겠지만, 하지만 너 속에는 그 법에 대해서 거부하고 미워하는 속성이 들어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촬영해서 보여주는 역할을 하나님의 법이 한다는 말이죠.

십계명에 보면 “탐내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지나가는 좋은 차를 보면 무슨 마음이 듭니까? 그리고 비싼 옷을 보면 무슨 마음이 듭니까? 탐심이 나서 가지고 싶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 모두의 솔직한 마음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은 빼버리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지키지 못하니 말이죠.

그리고는 뭐라고 합니까? 온유와 자비와 양선, 이런 것이 나오면 자기가 할 수 있다는 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을 철저하게 잘 받아서 지킬 수 있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즉 “저는 온유합니다. 화평합니다. 그러니 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혀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데, 자기가 지킬 만한 것만을 골라서, 그것을 자기의 자존심으로 만들어서, “이것은 나의 법이다. 나의 인생관은 이렇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런 사람에게는 전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하지 않는데, 굳이 갈보리 언덕에 올라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헛점을 너무나 잘 아시고 다른 방식을 주셨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오늘 본문 1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다른 방식으로 !!

여기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묻는데,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에게 율법을 주어서 우리가 온전하게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다고 하면, 제사를 잘 드리고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해서 말이죠. 그렇게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 말고 달리 다른 방법을 주실 리가 없다는 겁니다. 율법으로 계속해서 밀고 나가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서 오해하면 안 되는데, 기독교는 지키는 종교가 아니라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만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아주 무서운 말씀이 나오는데, 15절과 16절입니다.

(히 7: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히 7: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너희들은 안 된다 !!

여기 16절에 보면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주면, 즉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의 육체가 그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는 법이 주어졌다고 하면, “나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천당에 간다” 라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이죠.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라고 해서, 그렇게 복음을 전파해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즉 우리 육체에 행할 수 있는 법은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언제나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하지만 하루종일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바쁘면 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시간이 되면 제가 열심히 전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 이것이 저의 법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법도 중요지만, 그 중에서 지킬만한 것만 골라서 지키는 것이 곧 저의 자존심이고 저의 법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법이 어떻게 됩니까?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변명이 어디 하나님에게 통하겠습니까? 전혀 통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로 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만약에 그게 가능했을 것 같으면, 옛날에 아브라함이나 모세, 그리고 선지들이 여기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전문가들이고 도사들이라는 겁니다.

이사야 선자지의 경우에는 발가벗고 복음을 전했는데, 하나님이 주신 계시가 그렇다는 말이죠. 그것도 무려 3년 동안이나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법은 우리 인간이 지킬 수가 없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능력이 바쳐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 라고 말씀하시니, 거기에 대해서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그러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막 10: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막 10: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막 10: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막 10: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막 10: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된 것이니 !!

바로 그렇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이, 그게 오늘 본문 16절에서는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된 것이니” 라는 겁니다. 그런 십자가의 능력이 깨끗하게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갈보리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니라 그 언덕 밑에서 놀기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기 자존심과 자기 철학이 남들에게 칭찬을 받기 때문에, 즉 자기 육체의 행함이 남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게 하는 것들이 줄줄 널려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깨끗한 주님의 사랑을 걸어서 자랑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저분한 자기 재주를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좋아서, 거기에 푹 젖어서 무궁한 생명의 능력은 등한시한다는 겁니다.

성경이 참으로 어려운데, 그런데 알고 보면 또한 쉽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이렇게 기록하지 않고,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 맞지. 나도 착한데, 거기에 더욱 착함을 더해서 예수님을 믿어야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자기가 부활을 믿는 것이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는데, 자기가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냥 주시는 능력이 곧 진짜 능력이라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홍해바다가 갈라졌는데, 그러면 그 바다의 한 가운데를 걸어가는 두 다리의 능력이 구원의 능력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두 다리로 걷기 이전에 이미 홍해바다가 그만 갈라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진짜 능력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능력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제가 이 길을 걸어가니 참 고맙지요?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가 얼마나 착한 인간인지 몰라요. 제 말이 맞지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제가 걸어가 줄게요” 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 영광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믿음이 있는 자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것이 무슨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냥 바다에 빠져서 죽던지 애굽 군사들에게 죽을 수밖에 없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씩씩하게 걸어가는 이 두 다리를 보세요” 라고 하면서 자기 다리를 자랑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란 말이죠.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내렸다는 점을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이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은,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 점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4장에도 나오는데, 22절에서 26절입니다.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두 언약 !!

이 말씀도 역시나 무지무지하게 어려운데, 이것을 우리가 한 번 풀어보자는 겁니다. 이것이 지식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이 된다는 말이죠.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에게 어머니가 있는데, 그런데 한 쪽의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 하늘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얼마나 어려우냐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한 쪽의 어머니는 어디에 있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어머니인데 말이죠. 그것은 24절에 보면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분류를 시킵니까? 하늘에 계신 어머니에 의해서 낳은 자녀들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았던 율법, 즉 하나님의 법을 붙잡고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 자들도 있다는 겁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는 자들이 왜 생겨났는가?

그러니 하나님을 붙잡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런 율법을 주셨는고, 또한 그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은 그렇게 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그런 불신자들을 우리 주위에다가 배치해놓았다는 겁니다.

여기서 불신자라는 것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법을 주니까, “좋다. 내가 이 법을 지켜서 복도 받고 구원을 받겠다” 라고 하는 자들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신뢰합니까?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자기 육체의 능력을 포기한 적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루에 성경을 3장씩 읽고, 기도는 30분을 하는데, 마치 알라신을 믿은 이슬람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말이죠. “제가 일년에 두 번씩은 꼭 전도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의 종을 섬기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런 분들의 입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그 자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저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만 하고, 자기의 믿음이 좋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아직도 율법이 자기 자신을 친다는 것을 감 잡지 못하는데, 어쩌면 감을 잡았을 수도 있지만, 자기가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옆으로 제쳐놓는다는 겁니다.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청년 !!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어떤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합니까? “저는 모든 말씀을 다 지켰는데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솔직하게 말씀을 하셨는데, 예수님 자신이 곧 영생이니 예수님을 따라오면 영생이 있다는 말이죠. 다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깨끗하게 바라볼 수 없으니 말이죠. 그러자 그 부자청년은 그만 근심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러면 왜 이런 말씀들이 성경말씀에 포함이 되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이 청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임을 자인하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이 청년보다 못한데, 그래도 이 청년은 내놓은 것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것도 없다는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고 하면 율법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즉 다른 계통의 제사장에서 의해서 그게 우리에게 넘어왔다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히 7: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제사장이 예언되지도 않은 유다지파의 등장 !!

참으로 어려운데, ‘유다’는 무엇이고 ‘제사장’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리고 “모세가 말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냐는 말이죠. 원래 제사장이라는 것은 누구의 담당인고 하니, 레위지파인데, 그래서 모세의 시대에는 유다지파에게는 제사장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모든 제사는 레위지파가 담당하고, 다른 지파는 그 혜택만 입을 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모세가 분명히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즉 제사장이 예언도 되지 않은 지파,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인 유다지파에서 제사장이 난 것을 보면, 우리는 율법 전체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은 분명히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영원한 제사장이신 멜기세덱과 같은 분인 예수님이 오셔서, 그분이 우리를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악마를, 그 원수를 이김으로 말미암아서, 그 속에 들어있는 우리를 끄집어내신다는 겁니다. 물론 그 모든 능력은 주님의 능력이고 말이죠.

시편 110편에 보면 유다지파의 한 제사장이 나오는데, 1절에서 4절입니다.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 110: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시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 !!

이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장차 오실 예수님인데, 즉 예수님이 대신해서 원수를 쳐부수고, 그 원수 속에 갇혀있는 우리를 주님의 능력으로, 오직 십자가의 사랑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이 따로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해내신 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해내지 못한 것으로,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겁니다. 요한일서는 그것을 ‘사랑의 계명’ 이라고 하는데, 사랑은 그 사랑을 하는 자가 있고 그 사랑을 받는 자가 있다는 말이죠. 사랑은 준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받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준다고 하는데 왜 먹지도 못하느냐는 말이죠.

이제 우리에게 다른 인생관은 필요가 없는데, 다른 가치관도 필요가 없는데, 물론 다른 철학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늘 깨끗하게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으로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생명의 능력이 우리 육체의 법보다 더 큰 능력임을 알았사오니,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자신이 행한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사랑, 완벽한 사랑, 그 사랑만을 남들에게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9 오전 10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