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7:18-25) 하나뿐인 제사장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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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뿐인 대제사장
2001년 11월 25일 22강
본문 말씀: 히브리서 7:18-25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7:20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7: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7: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우리 자신이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인간은 "내가 어떻게 하면 기쁘게 살 수 있느냐?"입니다. 여기서 '살 수 있느냐?'라는 것에 유의해 봐야 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양보 못하겠다는 의지는 다부집니다.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은, "인간은 어떻게 하면 죽을 때에도 한없이 기뻐하며 죽을 수 있느냐?"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관심을 내 비춥니다. 즉 "죽는 것 보다 더 큰 기쁨을 가져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인간들의 기쁨을 갖는 방식은, 지금 살고 있는 나를 계속 더 살게 해 줄 때만 성립하는 방식입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아있다면 그것으로 나에게 계속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쨌든 살아남는 것이 남는 것이다"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이 좋아도 내가 죽어버리면 다 소용없는 개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바로 내가 이처럼 오래 살기 위해서 사람들은 '착한 일 열심히 하기, 교회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기'에 나섭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서 그 착함에 대한 보상과 적절한 대가를 받아 그것으로 인해 내가 더 오래 이 땅에 버텨 살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니까, "옳다구나. 하나님께서 이 산더미 같은 율법을 내려 준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이것을 준수하게 하여 준수하는 자에게만 이것을 덜 준수한 사람보다 더 복되고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기 위함이구나"라고 여긴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기쁘게 하는 방식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어떤 행운과 힘을 획득하고 그것으로 자기 자신이 이 땅에 더 오래 살만한 토대가 될 때, 비로소 인간은 기쁨을 얻게 되는 겁니다. 순전히 자기 중심주의이지요.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내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최종 관심이 결국 자기 자신의 살아있는 여부에 쏠린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말한 겁니다.
따라서 만약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고 여긴다면 그동안 모아놓은 기쁨도 사라지고 불안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비극으로 인해 자기 목숨이 위태로울 수가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 19에 보면, 율법을 주신 당사자이신 하나님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라고 말입니다. 온전해야 복을 받아 오래 산다고 믿고 있는 인간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온전함은 물 건너갔다"는 겁니다. 그 어떤 순종과 지킴도 온전함과 전혀 무관하다는 겁니다. 비록 남들과 비교해서 보다 온전히 순종한 것 같지만 하나님에게는 어림도 없는 짓입니다.
그렇다면 왜 온전하지도 못할 것을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2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
즉 온전할 수 있는 경우는 인간의 손으로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출발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도만이 구원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바탕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미리 계시를 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기도란 예배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받아진 후에나 가능한 겁니다. 하늘에 신이 있고 지상에 말 할 줄 아는 인간이 있다고 해서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사장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이 세상에 원래부터 남기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사를 통해 구현된 어린양의 정신입니다. 대신 심판 받으신 희생 정신이지요. 하나님은 이 정신만이 범죄 한 이 세상 안에서 유일한 의로움으로 계속 확장시키고 싶은 겁니다. 인간의 기도란 사전에 자기가 오래 살고 싶은 의도에서 자기가 이 땅에 살만한 조건들을 기도 제목으로 뽑아내지요. 마치 장보려 가기 전에 장볼 거리를 적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확대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저지하고 싶은 대상이 될 뿐입니다. 죄가 자꾸 퍼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25절에서 말씀하시는 바, 예수님이 기도함으로서 우리가 온전히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전에 이미 예수님 자신이 드린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열납 될 경우에만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제사장이 드린 제사나 예배들은 열납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제사장이라는 인간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기에 그들의 행위도 온전치 못하는 법입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죽고 계속해서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해서 그 일을 한다는 것이 바로 이점을 증명한다고 오늘 본문 2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많다는 것은 그 어느 인간도 온전치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온전합니까? 예수님의 기도가 온전함을 줄 수 있는 효과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전에 그 분이 드린 예배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룬 예배인가를 먼저 성립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점을 보기 위해 이사야 53장으로 잠시 돌아가 봅시다. 이사야 53:12 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메시야가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대목이 나오지요.
이것은 이사야 53:10에 나오는 속건 제물의 완성으로 인한 열매입니다.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즉 메시야가 여호와의 뜻을 성취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성취했습니까? 이사야 53:5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즉 대신 죽으신 분이 우리말고 예수님으로 국한되고 대신 찔리신 것도 우리 인간 중의 어느 사람이 아니라 바로 유일하게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따라서 그 분만의 기도가 우리 성도를 온전한 구원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에게만 이런 특권이 주어지는 걸까요? 오늘 본문에 보니 그에게는 하나님의 맹세가 있었다는 겁니다. 21절에 보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구약의 제사장들로 하나님의 지시나 소명에 의해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특정 한 인물에 대해서 맹세하신 것은 아닙니다. 제사장 직분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했지만 특정인간에게 영원한 보증을 하신 것은 그 분은 따로 존재합니다. '맹세한다'는 표현은 오로지 영원한 메시야에게만 붙어 있습니다.
시편 110:4에 이 대목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따라서 인간들이 자신의 행함을 겨냥해서 내세우는 맹세같은 것은 아예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맹세는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상에 분명하게 완성되었습니다. 따로 인간의 맹세 같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여전히 자신의 오기를 앞세워서 기도를 통해 성취되기를 밀어붙입니다. '기독교가 불교를 이기기' 라든지, '우리 교회 부흥하기'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은 그런 인간의 오기나 자존심이 걸려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이 왜 2000년에 일어난 겁니까? 이제 그런 것에서 벗어나서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오래 살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죽음조차 꺽지 못할 엄청난 기쁨이다는 것을 증거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신 정신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 정신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은 배설하면서 알 수 있는 겁니다.
마가복음 7:20-23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바로 이 많은 죄를 위하여 대신 찔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할 일은 평생이 다 가도록 자기 속에 이런 것들이 한정 없이 들어 있음을 파악하고 이런 죄 때문에 주님이 직접 우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 주심으로 온전히 구원됨을 두고두고 아는데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죽음조차 이 기쁨을 뺏아 가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하는 신앙 생활을 하지 말게 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똑바로 보면서 그것에서 출발하는 신앙 생활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2. 하나뿐인 제사장(히 7: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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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우리가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서로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기쁘게 살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즉 “살 수 있는가?” 라는 것에 유의해서 본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제한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이죠.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어떻게 하면 죽을 때에도 한없이 기뻐하며 죽을 수 있는가?” 라는 것으로 인간에게 관심을 나타냅니다. 즉 “죽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가져라. 그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넘겨주시고자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기쁨의 원천을 이 땅에서 찾는다고 하면, 그러면 죽으면 그것은 곧 슬픔으로 변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허무하게 공중분해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쁨을 찾아도 어떤 기쁨을 찾아야하는고 하니까, 죽음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쁨, 살더라도 그런 기쁨, 또한 죽더라도 그런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라는 겁니다.
인간 제사장, 너는 죽잖아 !!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 제사장에 대해서 한 마디로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너는 죽잖아. 너는 영원하지 못하잖아. 그러니 그런 제사장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죽음조차도 능가할 수 있는 것을 계속 제공해주어야, 그게 온전한 제사장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볼 때, 우리 인간은 죽고 없어진다는 것 때문에, 도무지 사람들에게는 믿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이 정도면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 그게 우리 인간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이상한 말씀이 나오는데, 즉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라고 말이죠.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키라고 준 것인데, 그러면 인간은 율법대로 살았다고 장담을 하는데, 그런데 그 율법의 내용이나 지키겠다고 하는 인간들이나, 그 어느 것도 온전하게 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히 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이것은 바로,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어떤 노력을 했던지 간에, 그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온전치 못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온전치 못하다는 것은, 자기에게 완벽한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그게 사람에게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에서 “율법이 온전치 못하다” 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너희 기쁨의 원천을 다른 것에서 찾아야한다” 라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엄청나게 많은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이 나와있는데, 마치 백화점에서 바겐세일을 할 때 물건을 엄청나게 진열해놓듯이 말이죠. 하나님의 지시가 한 두 개가 아닌데, 무지무지하게 많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수많은 말씀 앞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자기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면서, 그것을 일일이 다 지켜보려는 의도도 자연적으로 발생이 된다는 말이죠. 즉 “내일을 이것을 지키고, 모레는 저것을 지켜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지킨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할 수 없는데, 즉 “내가 지켰다는 행위가 나를 책임질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항상 불안정하고 불안한데, 그러면 전혀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코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보가 무슨 이런 심보가 다 있나?” 라고 하는데, 아니 사람을 약을 올려도 유분수지, 지키지도 못할 것을 지키지도 못하는 것을 주기는 왜 주시느냐는 말이죠. 즉 “지켜라. 그런데 지켜도 온전치 못하지?” 라고, 그렇게 나중에 뒤통수를 치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심술궂게 일을 하시느냐는 겁니다.
“제사를 지내라. 제사장을 세워라” 라고 할 때는 무슨 의도이고,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것을 지켰냐? 지키지 못했지. 그러면 구원은 없어!” 라고 하신다는 것은,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즉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라고 못을 박아놔야, 그 다음에 “온전한 것은 따로 있단다. 온전한 것은 여기에 있어”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법을 지켜서 행하겠다고 하는 의도를 포기하고,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믿음의 대상을 새롭게 발견하는 그 기쁨, 그게 제사장의 죽음보다도 더 위대한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믿음의 대상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자꾸만 우리 인간의 죽음을 들고 나오는 이유가 있는데, 사람의 기쁨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이 최고의 기쁨인데, 남들은 다 죽어도 자기만은 살았다고 하는 말이죠. 이것이 하나의 희열인데, 자기가 태어난 것도 기적이듯이 살았다는 것도 역시나 기적인데, 이것보다도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데카르트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이죠. 그는 일명 벽난로의 철학자인데, 벽난로를 보면서 “이것이 저기에 있다. 여기에 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아닐 수도 있고, 자기가 착각할 수도 있고, 꿈속을 헤맬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것은 기쁨으로 잡을 것이 되지를 못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이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생각하는 ‘나’, 그 ‘나’는 아무리 의심을 해도 의심할 수가 없는, 그런 확실한 기쁨의 원천으로 보았다는 말이죠.
물론 이것은 철학자들이 고상하게 이야기한 것이고, 보다 실감나게 이야기를 하면, 왜 미국서부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나쁜 놈들을 기관총으로 다 쏘아 죽이고, 마지막에 다 떨어진 런닝을 입고 “나는 살아남았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영화가 드디어 끝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관객들은 감동을 받는데,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이 남는 것이니 말이죠. “아무튼 살아남아야 해. 살아남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어” 라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는 착해야하고, 그래야 저주를 받지 않으니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남들보다 오래 살기 위해서는 착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먹고 마시는 것, 사고 파는 것, 그 모든 행위가 남들은 죽어도 자기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조금 더 확장되면, 남들 집구석은 무너져도 자기 집구석은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게 더 넓어지면, 다른 민족과 국가는 망해도 대한민국은 잘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회사는 망해도 자기 회사는 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속에 자기가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데카르트는 인간의 본성을 진솔하게 그대로 잘 보여주었는데, 사람은 무엇인고 하니까, 어떤 목적하는 바가 있는데, 그게 바로 자기 본성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라는 것인데, 인간은 모두가 다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살기 위해서는 착해야하고, 착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니가 아무리 말씀에 순종해도, 고분고분해도, 그게 너를 온전케 하지 못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그야말로 우리는 부실공사라는 말이죠.
온전치 못하다는 것은, 우리를 약올리기 위해서 하는 말씀이 아니고, “믿어서 온전해야지, 왜 율법을 행해서 온전케 되려고 하는가?” 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기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음흉한 속셈을 드러내는 것인데, 즉 “하나님, 저 집사는 기도하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를 열심히 해서 살아남았습니다. 제가 대견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기쁨이, 그 다음날에 바빠서 제대로 기도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 오늘 사업이 꼬였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해서 그런 줄로 압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비난을 했던 저 집사는 기도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니 저도 내일을 기도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정말로 왕짜증이 나네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되면 자기 기쁨, 즉 태어났다고 하는 그 기쁨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우고 기도원에 간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든, 불교든, 그런 것에 상관없이 진정한 아버지의 뜻은 모르고, 자기의 욕구와 욕심에 기초해서, 그게 기독교든 불교든 간에, 그 위에 차곡차곡 쌓아서 올려놓았다는 말이죠.
신앙인가? 이기주의인가?
그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 이라고 불렀는데, 그것도 열심이 있는 신앙이라고 말이죠. 그렇게 오해를 하면서 살아왔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것은, “인간이 그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더러운 이기주의인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바로 그것을 들통내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은 온전치 못하다는 말이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온전한 기쁨을 얻을 수가 없는데, 물론 스스로 자기를 때리는, 그런 자학하는 기쁨은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말이죠. 즉 매조키스트와 같은 말이죠. 그러니 결국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믿으면서도 교회에 와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이용해먹은 것인데, 그런데 믿는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용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 엄마와 아빠를 이용한 것인가요? 아이가 먼저 태어나서, 엄마와 아빠를 결혼을 시킨 겁니까? 그러니 이것이 말도 안 되는데, 그러니 하나님을 이용해먹겠다는 것도 역시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그런 환상 속에 있는 것을 두고 ‘신앙’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정말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모순과 어려움 속에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
여기에는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라고 하는데, 그런데 앞의 19절에서는 “온전치 못하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먼저 제시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온전한 것을 제시하는데, 그 온전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쪽에서 제공해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종교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예수님이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라는 겁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간절히 기도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온전함의 출발점이, 자기가 어떻게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열심히 기도한 덕분에, 그분으로 인해서, 그 결과로서 온전치 못한 우리가 온전해졌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오늘 본문말씀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온전해졌다고 하면,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그 입에서는 무슨 소리가 나오는고 하니, “저는 부족하여도, 주님의 은혜로 인해서 구원이 되었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사람 앞에서도, 헌금을 많이 한다는 사람 앞에서도, 봉사를 많이 한다는 사람 앞에서도, 물론 목사 앞에서도 말이죠.
그러므로 “제가 온전한 것은 제가 열심히 기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목사가 열심히 기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이 언제나 살아서 쉬지 않고 기도하신 덕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는 것이 거침없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쁨을 자기 행동의 결과를 가지고 측정하는데, 물론 때로는 기뻐할 수 있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돌아서면 말도 못하게 슬퍼하는데, 또한 괴로워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치고 말이죠. 자기만 괴롭힙니까? 술을 마시고 와서 온 집안식구를 다 괴롭힌다는 겁니다. 잠자는 아이까지 깨워서 말이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기쁨의 원천을 자기를 기준으로 삼으니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는 오는 기쁨은 없고, 기쁨도 자기가 만들어야하고, 물론 슬픔도 그렇고 말이죠. 자기가 하기에 따라서 기뻐할 수도 있고 또 슬퍼할 수도 있다고 하는 고리 속에 놓여있으니, 그것은 자기의 행함을 믿는 것이지, 자기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차라리 조폭처럼 솔직하게 “나는 내 주먹을 믿는다” 라고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의 기도를 믿고, 자기의 봉사를 믿고, 자기의 헌금을 믿는 것, 그것은 바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던 바알 종교이고, 아세라 종교라는 말이죠. 욕구의 합리화, 욕구의 정당화, 즉 ‘자기 의’ 라는 겁니다.
기도는, 온전한 제사가 이루어질 때 !!
그래서 성경에서는 방금 이야기한, 율법, 온전치 못함, 온전한 기도, 온전한 구원, 바로 이러한 짧고 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구약이라는 긴긴 이야기를 우리에게 펼쳐놓았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도 시편에 보면 무슨 말씀이 나오는고 하니, “기도라는 것은 온전한 제사가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공식을 시편에 넣어놓았다는 말이죠.
(시 141: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그러니 온전한 기도는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예배의 근거가 있을 때, 그것이 온전한 기도가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기도를 하는데, 그런데 그 기도가 무조건 응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제사를 드렸을 때, 그때 화목제물에 의해서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 그때의 기도가 다른 사람에게 그 효과로서 전가될 수 있다는 겁니다.
참 복잡한데, 우리 한국사람의 토대에서 보면 짜증나는 이야기인데 말이죠. “목사님,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제가 여기에 있는데, 그러면 제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이시면 되는데, 무엇이 그렇게 복잡합니까? 제가 입이 있는데, 그러니 부르겠습니다. 시편에도 입을 크게 벌리라고 하는데,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왜 되지 않는고 하니,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땅의 남의 땅의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창조세계인데, 따라서 이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예배를 통해서 죄가 정화가 된 상태에서만, 그런 상태를 확정시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말이죠.
말이 조금 어려운데,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의로운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이라는 하나의 불씨와도 같은 주셔서, 그 불씨가 퍼트려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그 처음의 불씨가 어린양이 대신해서 죽는 희생이고, 그러면 기도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즉 복음이 퍼져나가는 그 영역 안에서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방인인 우리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남들이 죽던 말던 간에 자기만 잘 되면 그만인데, 그러니 결국은 자기가 신이라는 겁니다.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고,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자기 영역만 넓혀지고 확정되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된다는 겁니다.
갓바위는 되더라 !!
여기 팔공산에 갓바위가 왜 있는데, 그것이 왜 인기가 있습니까? “뭔가 되더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거기에다가 자기를 일치시키는 것인데, “갓바위는 되더라” 라는 것에서, “나는 되더라” 라는 것으로 말이죠. 즉 “나는 가치가 있어. 그러니 가치가 있는 나도 할 수가 있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우상은 자기와의 일치인데, 그러니 ‘부처의 잔잔한 미소’ 라는 것은, 그 잔잔한 미소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부처만 잔잔한 미소를 가지고 있는가? 나도 그런 미소가 있다” 라는 겁니다. 같은 신으로서, 그런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어려운 말로 ‘객체화’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갓바위가 인기가 있다는 것은, 그런 갓바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중요하다는 것인데, 바꿔 말하면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살아있을 때만 예수가 의미가 있고 교회가 의미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그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면, 자기도 하나님을 죽이려고 복수에 나서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반발의 공간 !!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회가 있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복수다” 라고 했는데, 인간의 신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라는 겁니다. 얼마나 속에 맺힌 것이 있으면, 신을 향해서 노골적으로 반발을 하겠냐는 말이죠.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기도하는데 저의 소원을 외면할 것입니까? 이것은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라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반발의 공간이 바로 교회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자기 아들이 남긴 그 놀라운 사랑의 일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봅니까? “물론 당신이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줄 아는데, 나도 조금은 할 줄 안다” 라고, 우리 인간은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1등이고 자기는 2등이라는 식인데, 그러니 자기도 열심히 하면 1등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하면 자기도 40일 금식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실제로 자기가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기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신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 절대화를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데, 그러니 오늘날은 교회가 그야말로 마약이라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인데, 그런데 마약은 무엇입니까?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그런데 신앙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지 않아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이미 완성했기 때문에 말이죠.
마약은 자기가 알아서 어떻게 구입해서 맞고 해야 하는데, 비용도 많이 들고 말이죠. 하지만 신앙은 저쪽에서 해주는 것이기에, 자기가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것이, 교회에 나오는 그때는 기쁨이 있는데, 그런데 집에 돌아가면 짜증이 나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마약처럼 여기기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죠.
제사와 기도 !!
예배가 먼저 있고 난 다음에, 그 예배의 정신을 확정시키는 곳에만 기도가 들어가는데, 그러니 거기에 자기의 포부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 나는 위대해야 한다” 라는 것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왜 자기 욕심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런 것을 정당화하느냐는 겁니다. 그게 과연 기도냐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교회의 부흥, 그게 무슨 기도제목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죠. 불교를 이기기, 그런 것이 무슨 기도제목이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불교를 이겨서 무엇을 할 것이냐는 말이죠.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이미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그 온전한 예배로 인해서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를 바라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의 종교적 열매에 집착하고 만지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물론 콩으로 메주를 만들고 할 때는 만지고 주무르고 해야하지만, 자기의 종교적 열매를 가지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이사야서 53장 12절입니다.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가, 기도하였느니라 !!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본문인데, 여기 마지막에 보면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기도라는 것을 어디서 끄집어내는고 하니, 앞의 10절에 보면 속건제물이 나오는데, 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물을 먼저 받으심으로서, 그 제사가 효과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있어야, 제사를 드린 담당자인 제사장이 기도를 해야 응답이 되고, 그래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조금 복잡한데, 이것을 쉽게 해보면,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 5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먼저 일이 일어나야만, 그 다음에 여기에 참여하신 유일한 제사장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줄 때, 그분의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은 그 효과를 우리가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25절에서 이야기하는,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라는,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됩니까?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했다고 기도를 합니까? 우리가 언제 남을 위해서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기도하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오늘 하나님에게 구할 것이 무엇이지?” 라고 하면서, 마치 주부가 시장을 보듯이 말이죠. 돼지고기 반근, 잡채 1봉지, 콩나물 1봉지,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게 금요철야기도인데, 즉 “내가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는가?” 라는 것이 기도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맹세와 제사장 !!
방금 제가 쉽게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인간의 맹세’ 라고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맹세는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21절에서 25절을 보겠습니다.
(히 7: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히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 7: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히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여기 21절에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라고 하는데, 성경이 참으로 어렵죠? 우리가 평소에 듣지 못하던 이야기를 자꾸 하고 있다는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맹세가 없이 제사장이 되었고, 반면에 예수님은 맹세로 제사장이 되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그 제사장 직분은 영원하다는 겁니다.
어렵지만 조금만 더 참으시고, 여기서 시편 110편 4절을 보겠습니다.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오직 예수님만이 맹세로 제사장 직분을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옛날에 그들이 제사장이 될 때 그냥 된 것이 아니라, 다들 하나님의 맹세로, 하나님의 지시로 된 것이 아닙니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다 맹세가 없이 되었다” 라고 일괄적으로 처리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맹세로 되었다” 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따라서 아론의 자손들이 다들 제사장이 되었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희들은 맹세도 없이 되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바꿀 리는 없고, 그러니 이게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는 말이죠.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맹세라는 말조차도 쓸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구약의 제사장들로 하나님의 지시나 소명에 의해서 되었는데, 그러나 특정한 어떤 인물에 대해서 맹세하신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제사장 직분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이 지시를 했지만, 특정한 인간에게 영원한 보증을 하신 분은 따로 존재하는데, 즉 ‘맹세한다’ 라는 표현은 오직 영원한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만 붙여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과 맹세와 같은 것은 온전치 못한 것이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제가 목사인데, 흔히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갈 때 하는 맹세가 있습니다. 찬송가에도 있는 것처럼,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라고 하는데, 물론 그때는 그렇게 했었는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본전생각이 난다는 겁니다.
신학교에 공납금을 낸 것도 아깝고, 사람을 다루는 노하우를 배운 것도 버리기가 아깝고, 그래서 점점 더 자신의 존재를 더 확실하게 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나가는데, 그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온전치 못하기에, 누구나 다 그렇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믿고, 소명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자기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전혀 하나님의 맹세한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전혀 없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지어낸 것이란 말이죠.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말씀하시기에 !!
그러니 우리는 사람이 지어낸 것과 하나님께서 지목해서 말씀하신 것을 구별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물론 사람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믿기가 쉽고, 반면에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말씀하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시하기 쉬운데 말이죠.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오직 말씀에 근거해서 믿어야 그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말씀을 괜히 하신 것이 아닌데, 히브리서 7장의 이 말씀을 말이죠. 그것도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믿는다고 하는 인간들의 내면에는 가짜 믿음이 가득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는데, 그야말로 온 국민이 다 믿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마귀에게 다 속아넘어갔는데, 그러나 단 한 분, 오직 예수님만은 넘어가지 않았다는 말이죠.
여기서 마가복음 7장을 보겠는데, 18절에서 23절입니다.
(막 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막 7: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막 7: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막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막 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가 착한 줄을 아는데, 특히 청소년 시절에는 말이죠. 자기가 젊었을 때는 “나는 착하게 살아갈 거야” 라고 맹세를 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자기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온갖 것들을 다 쏟아내면서, 자기 속에서 얼마나 더러운 것들이 들어있었는지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아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은 이유도 알게 되는데,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이유를 알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친히 대신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데, 그 이유를 우리는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 22절과 23절에 보면,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가 나오는데, 우리 속에 이런 것들이 가득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자기는 착하게만 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전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밥 먹을 자격도 되지 않습니다 !!
그러니 우리가 이제 해야할 일은 무엇인고 하니, 주기도문에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는데, 즉 “밥 먹을 자격도 되지 않는데, 그런데 살려주신다면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하는데, 즉 “우리는 똑같이 죄인입니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 기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속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기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주여, 그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게 해주시고, 제가 남에게 해꼬지를 한 것을 용서해주시고, 그리고 남이 저에게 한 것도 역시 용서해주소서” 라고, 바로 그런 낮아진 마음으로 살게 해달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오늘밤에 당장 죽어도 너무나도 당연한 죄인인데, 오늘밤에 죽더라도 누구 하나라도 주님에게 항의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말이죠.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온전케 해주신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분, 예수님만을 믿고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생활을 날마다 처음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남들을 흉내내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오직 말씀에서 출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10 오후 4시에 마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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