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7:1-3) 하나님의 아들 본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19강-히7장,1-3(하나님의,아들)-heb011104.mp3
|
이근호
하나님의 아들 2001년 11월 4일 19강
본문 말씀 : 히브리서 7:1-3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성경에 보니 하나님이 계시고 또 누가 계신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도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믿어야 되고 하나님의 아들도 믿어야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만 믿고 아들은 안 믿어도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만 믿고 하나님은 안 믿어도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믿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걱정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 복음 8장에 보니 아들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고 여겼던 유대인들을 보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악마의 자손들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은 어떤 것을 믿는 자일까요? 하나님의 아들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로 하나님이 아들이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현재 인간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으로는 지옥밖에 갈 데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해서입니다. 자기 딴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막상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분을 살해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애초부터 가짜였고 거짓의 앞잡이였던 것입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자기가 만든 성전을 앞장세우고, 자기가 행했던 기도와 헌금과 구제와 전도와 병 고침을 앞장세우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했습니다. "나도 잘났는데, 나도 이 정도 하면 괜찮은 인간인데, 내가 뭐가 부족해서 그분의 공로에만 무릎을 꿇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재의 존재 자로 간주해서 십자가에서 처단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로마서 10:2-3절은 다음과 같이 보고 있습니다. "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 유대인들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하늘나라 가는데, 나도 양심이 있지 죄인의 몸으로 어찌 들어 갈 수가 있는가. 뭔가 성의를 보여야지. 따라서 내 나름대로 소담한 의를 축적해서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보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큰 오해입니다.
미국 뉴욕의 110층 짜리 건물에 비행기가 충돌 될 때, 사람들은 계단으로 해서 내려왔습니다. 엘레베이트가 고장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엘레베이트 없으면 높은 데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식으로 하나님 나라까지 쏙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등산합니까? 이 엘리베이트는 일종의 두레박입니다. 위에서 두레박이 안 내려오는 한 밑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이 두레박은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맹세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늘 편에서 오신 분이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 그래야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멜기세덱, 살렘, 아브라함이라는 잘 못 듣던 인물이나 지명이 나옵니다. 이런 것은 두레박 장치를 위해 동원된 장치들입니다. 인간들의 의를 인정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반대로 아무런 의가 없음에도 이들을 건져낼 수 있음을 말해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우리에게 복 주려는 장치입니다.
창세기 14:19절에 보면,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하늘 편에 속한 자가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야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복을 주옵소서!"라고 말하는 것도 그만한 자격자가 되어야 되지 아무나 이런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완벽한 의를 지니고 있어야 복 받는 자도 의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 멜기세덱이 평생을 다 가도록 잊지 못할 인물입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서는 예수님이 이 멜기세덱과 같은 분입니다. 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의의 왕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시대에는 왕 제도보다는 민주주의 제도 정착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각자 작은 왕들이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될 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자로서 왕을 내세우십니다. 왕 제도란, 왕의 자질 여부에 따라 백성들의 운명도 덩달아 달라지는 관계에 있게 됩니다. 왕이 의로우면 그 밑에 있는 백성들도 덩달아 하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옛적부터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그 메시야가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나타나실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거리를 가실 때, 몇 몇 문둥 병자들이 다음과 같이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입니다. 비록 자신의 형편은 저주받은 몸이지만 메시야로서의 왕의 백성이 된다면 이 저주가 풀린다는 겁니다. 물론 그 문둥 병자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런 관계가 왕과 백성의 관계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있어 의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의의 왕이란 자기 백성들에게는 자기 의를 공유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정 우리에게 왕이 계시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진해서 왕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이고 행복인지! "너는 왕 없지? 나에게 왕이 있단 말이야"하고 얼마든지 자랑할 만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때에 길가에 "우리의 구원의 왕이시여"하고 노래부르면 종려나무 흔들어주던 아이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제대로 된 왕을 고대했습니다. 시답지 않은 왕말고 완벽한 의로운 왕을 그들은 고대했습니다. 바로 이 의의 왕이 두레박 장치 속에 담긴 내용입니다.
계속 본문을 보게 되면 다음 구절이 나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대목을 읽고 어떤 느낌이 옵니까? 지상에 있는 희노애락을 잠재우지 않습니까? 기쁨, 노함과, 고통과 즐거움 같은 것과는 완벽하게 초월했다는 감이 오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일종의 무풍지대입니다.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고 변함도 없는 적막함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란스럽게 흔들어대도 변함이 없는 완벽한 구원 장치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끔씩 다림이 질을 해 보지요. 다림이 질을 하기 전에는 옷이 구겨지고 돌출 된 부분도 있고 곳곳에 주름이 쳐져 있지요. 그런데 일단 다림이 질을 쭉 하고 나면, "어, 주름진 것이 다 어디 갔지?"하고 놀랄 지경입니다. 깨끗하고 반듯합니다. 표면은 너무나 매끈해서 어디가 시작인지 끝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멜기세덱이 이와 같은 분입니다.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습니다. 희․노․애․락의 소용돌이에서 완전히 초월해져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두레박입니다. 이제 며칠 안 있으면 수능시험이 있습니다. 수험생을 있는 집안에서는 긴장 상태로 돌입되어 있습니다. 마치 수능시험 이후에는 천국이라도 올 것같이 말입니다. 과연 수능시험 이후에는 천국의 나날입니까? 수능시험에 전부를 건 것 같이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일종의 희노애락의 소용돌이지요.
예수님을 봐도 평강의 왕이 아니라 불안감을 유발시키는 왕으로 여깁니다. 정말 이러한 긴장과 긴장으로 이어지는 이 인생 자체를 다리미로 확 밀어버리면 안되겠습니까? 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너무나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희노애락에 휩싸이는 분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주름져 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세상 변화에 맥을 못 추는 것은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착하고 선하고 존재인데 이런 변화쯤이야 못 이기나"하는 오기에 늘 충만해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그만 실수나 잘못에도 대단히 민감해져 있습니다. "혹시 나의 실수로 인해 하나님이 나의 위신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을까. 지금까지 유지해온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나쁜 사람의 이미지로 바뀌지는 않을까"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 만사가 이런 자기 뜻을 뒷받침 해 줍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절대로 성질 안 내어야지"라는 각오가 몇 시간 갑니까? 이러한 투철한 책임감과 의로운 면에서 남에게 지지 않겠다는 자기 의가 자신을 망칩니다. 부부싸움도 자기 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됩니다.
예수님은 어느 정도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느냐 하면, 희노애락으로 인해 생겨 버린 성질과 죄악들을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우리에게 복 주십니다. 마치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복 주듯이 말입니다.
어떤 분은 걱정하기를, "예수님이 복 주는 일은 안 하게 되면 어쩌지?" 하시겠지만 그런 걱정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니 "항상 제사장"으로 계신다고 하십니다. 제사장은 자기 잘 난 맛에 사는 분이 아닙니다. "죄는 다 가져 오란 말이야!"라는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의 제사장은 죄인을 부르러 온 사람입니다. 의인은 거부하시는 분입니다. 건강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배척하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 역할을 모독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자를 "믿는다, 혹은 의지한다" 할 때에는 예수님의 의가 우리 의로 넘어오는 겁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과 더불어 또 하나의 낯선 개념을 거론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입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예수님의 제사장 직에 대한 불필요성입니다. "예수님을 구태여 믿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자신들의 성의와 정성으로도 얼마든지 의로워질 수 있는데 말이야" 하면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을 무효화시키는데 이들 악마는 주력합니다. 신앙 생활에서 예수님을 있으나 마나 하는 분으로 취급하고자 합니다.
요한 복음 8:42-44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마귀냐 아니냐를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느냐 아니하느냐로 가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두 종류로 분류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과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받은 사람의 특징은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앞장세웁니다. "내 구원은 순전히 예수님 덕분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내 힘으로, 내가 잘나서, 나의 기도 덕분으로 복도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대로서 기도에 관해서도 악령 받은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원하는 바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같은 형제들이기에 각자의 관심사에 대해서 합심해서 기도해서 서로 서로 위로하는 그런 기도 공동체가 됩시다. 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봤습니다만 주기도문에서 분명히 자기 죄에 대한 기도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예수님께서 죄 용서를 해주셨는데 우리 마음 중심에는 내가 솟아 올라오는 겁니다. 기도란 바로 이 자기 중심주의를 철거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자기 포부나 뜻이나 야망도 철거당해야 하겠지요.
예를 들면 골로새서 3: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자, 우리의 기도 제목이 이미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뚜렷한 기도 제목을 걷어치우고 거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에 관련된 기도 제목을 따로 뽑아내는데 치중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기도 제목을 합세해서 정당화 시켜 주려고 애씁니다. 저런 이런 모임을 '악마의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정말 기도의 응답은 회개뿐입니다. "하나님, 또 제 중심주의였나이다."하고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고 악마의 공동체에서 벌리는 기도는, 그 응답 여부를 놓고 나름대로 평가하기를 "결국 우리들의 기도 덕분에 복을 받아내었다"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응답한 것을 봐서 누가 뭐래도 나는 완전히 의인되었음에 틀림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완벽하고 철저하게 예수님은 빼내어버린 겁니다. 남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과연 이토록 대단하고 훌륭한 존재이구나"
여러분, 과연 예수님 없이도 훌륭해지는 그런 사람되고 싶습니까? 구약 성경 전도서 3장에 보면,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도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도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때'를 거저 지나 갈 수밖에 없는 '한 때'로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거기에다 목숨을 걸지 마세요. 하나님 아들의 세상 보는 관점입니다.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지만 멜기세덱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56절에 보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 하늘 나라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직접 만나고 보니 너무 기뻤습니다. 그동안 인간 세상의 희노애락에 휩싸여 살았던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확실해 했겠지요. 아브라함의 아들 중심의 세계가 그토록 좋을지 미쳐 몰랐을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아들 중심의 세계뿐입니다. 골로새서 1: 13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짜 여러분이 성령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아들을 최고로 여기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의, 자기 똑똑함, 자기 대단함을 마치 신앙 인처럼 여겼지만 사실은 악령의 역사인 것을 알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예수님만 보고서는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구득영
19. 하나님의 아들(히 7:1-3)
--------------------------------------- (히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아들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 !!
성경에 보니 하나님이 계시고 또 누가 계신고 하니, 하나님의 아들도 계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도 믿어야 되고 하나님의 아들도 믿어야 되는가? 그게 아니면 하나님만 믿고 아들은 안 믿어도 되는가? 아니면 아들만 믿고 하나님은 안 믿어도 되는가?” 라는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믿는 우리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혼란스러운데, 하지만 이점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니까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들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즉 아들만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요 8: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고 여겼던 유대인들을 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들은 악마의 자손들이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유대인들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소리인데 말이죠.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면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은 어떤 것을 믿는 자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만 의지하는 자인데, 그런 쪽으로 마음이 끌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부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현재 인간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으로는 지옥밖에 달리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보다 철저하게 확인시켜 주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물론 자기들 딴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막상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자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만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애초부터 아예 가짜였고 거짓의 앞잡이였음이 드러났다는 말이죠.
예수는, 부재의 존재자 !!
이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만든 성전을 앞장세우고, 자기들이 행했던 기도와 헌금과 구제와 전도와 병 고침을 앞장세우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자 했다는 겁니다. 즉 “나도 잘났는데, 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인간인데,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그분의 공로에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이해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부재의 존재자’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을 존재할 필요가 없는 인물로 간주해서 십자가에서 처단했다는 말이죠.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을 제쳐두고 하나님을 믿어서 복을 받고 천국에 가려는 것이 바로 ‘기독교’ 라는 이름의 종교단체라는 겁니다. 그들의 행위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이죠.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로마서 10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2절과 3절입니다.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히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오히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칭찬입니까?
그렇다면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유대인들의 경우에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는데, 그래도 양심이 있지 죄인의 몸으로 어찌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뭔가 성의를 보여야지. 도시락도 좀 싸고, 음료수를 사고, 그렇게 뭔가 우리 나름대로 소담.한 의를 축적해서,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보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큰 오해라는 말이죠.
이번에 미국 뉴욕의 110층 짜리 건물에 비행기가 충돌되었을 때, 사람들은 계단으로 해서 내려왔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말이죠. 그것은 올라가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높은 곳까지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 나라까지 들어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어디 등산을 합니까?
이 엘리베이터는 일종의 두레박인데, 위에서 두레박이 내려오지 않는 이상은 밑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으로 가는 데는 계단이 없다는 겁니다. 이 두레박을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맹세’ 라고 했는데 말이죠. 하늘에서 오신 분이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그래야 우리는 그 두레박을 타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창세기 14장의 내용이 나오는데, 먼저 1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히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멜기세덱과 김대중 !!
여기에 멜기세덱, 살렘 왕, 하나님의 제사장, 아브라함 등등, 우리가 평소에 잘 듣지 못하던 인물이나 지명이 나옵니다. 우리는 부시나 김대중이나 김영삼은 알지만, 이런 것은 잘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두레박 장치를 위해서 동원된 것들인데 말이죠.
그런데 부시나 김대중이나 김영삼과 같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났는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지, 얼마나 자기 의를 채우는지, 그런 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주 듣던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의 의를 인정해주기 위한 것들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우리에게 아무런 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건져낼 수 있음을 말해주기 위한 인물들이라는 겁니다. 즉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한 장치인데, 그게 멜기세덱, 살렘 왕, 하나님의 제사장, 아브라함 등등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
창세기 14장 19절에 보면,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라고 합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하늘 편에 속한 자가 나타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이, “하나님 아버지, 제가 누구인지 알지요? 저는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입니다. 저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여기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라고 한다는 말이죠.
(창 14: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데,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는 겁니다. 그런데 “복을 주옵소서!” 라고 말하는 것도, 그만한 자격자가 되어야 하는데, 아무나 이런 위치에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복을 받으라고 해도, 그게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말을 하는 본인이 그런 자격이 되어야, 상대방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먼저 자기가 완벽한 의인이 되어야 남도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죄도 없이 완벽한 의인이 되어야만, 그래서 그 의가 복으로 넘겨오게 될 때, 비록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고 살아가지만, 그 죄를 용서받고 의인으로 탈바꿈을 하면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그 구원의 장치, 즉 두레박을 위해서 일부러 오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아브라함 시대에는 누구인고 하니,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던 멜기세덱이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이 멜기세덱이 평생을 다 가도록 잊지 못할, 천국에 가서도 잊지 못할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서는 예수님이 멜기세덱과 같은 분이라는 말이죠.
구원의 두레박, 멜기세덱 !!
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데, 구원의 두레박에 대해서 말이죠. 어떻게 소개하는고 하니, “첫째, 의의 왕이요” 라고 합니다. 즉 혼자서 그분이 의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리고 왕이라는 것은, 그 왕의 수하에 있는 자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왕의 은총을 받는다는 겁니다.
(히 7: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사실 이런 게 어려운데, 왜냐하면 요즈음 시대는 왕 제도가 아닌 민주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래서 모두가 각자 작은 왕들이고, 사람 위에 사람이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다는 식이죠. 그러니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될 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왕이 있는 나라는 그렇지가 않은데, 왕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은총을 내리게 되면, 그 사람은 왕의 부귀영화에 같이 포함된다는 겁니다.
그게 왕 제도인데, 그러니 왕 하나가 잘 되면 백성들도 같이 잘 되고, 반면에 왕이 엉터리면 백성들도 다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 대신에 그 나라의 모든 땅과 백성들의 목숨이 누구 손에 있는고 하니, 왕의 손에 놓이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왕 제도라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이 그리스도가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왕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소경 둘이 뭐라고 했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는데, 물론 제자들은 조용히 하라고 야단을 쳤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왕이시여, 우리가 당신의 신하가 되고 싶습니다. 비록 우리가 저주를 받았지만, 당신은 위대한 왕이지 않습니까?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가 나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비록 자신들은 저주를 받은 몸이지만, 왕의 백성이 된다면 그 저주가 풀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침을 받았는데, 바로 이런 관계가 왕과 백성의 관계라는 말이죠.
(마 20: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 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마 20: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마 20: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 20: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오늘날 이 시대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현대인들은 왕이 없다는 겁니다. 각자가 다들 왕인데, 그런 훈련을 받으면서 우리는 살아왔다는 말이죠. 왕이 있다는 것은, “엄매, 기죽어!” 라는 것과도 같은데, 그래서 아무리 잘나도 왕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왕의 제도 가지고 있는 국가인 영국의 경우에, 그 국가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여왕이여, 영원하소서!” 라고 하는데, 왕 제도에 있어서는 왕이 최고라는 겁니다. 왕만 잘되면 거기에 소속된 백성들은 저절로 잘 된다는 겁니다. 왕의 은총을 받아서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나의 왕이시여!”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나는 당신의 쫄따구입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졸병이 된 것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너희들이 왕이 없지? 나는 왕이 있다. 너희들은 외롭지? 나는 하나도 외롭지 않다” 라는 겁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대우도 받지 못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감사하고 좋아했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때, 비록 초라한 나귀를 탔지만, 길가에서 “우리 구원의 왕이시여!” 라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주던 아이들을 기억합니까? 그들은 제대로 된 왕을 고대했는데, 완벽하고 의로운 왕을 말이죠. 인간들의 왕이 아닌 진짜 왕, 완벽한 자기 의로서 축복하는 왕을 말이죠. 그렇게 구원의 두레박이라는 말이죠.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7절입니다. 여기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라고 하는데, 여러분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옵니까?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무풍지대(無風地帶) !!
지상에 있는 희노애락을 잠재우는 것 같지 않습니까? 기쁨, 노함, 고통과 즐거움과 같은 것은 완벽하게 초월했다는 느낌이 오지 않느냐는 겁니다. 여기는 일종의 무풍지대인데,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전혀 변함도 없는, 적막함과 같다는 말이죠. 이 세상이 아무리 요란스럽게 흔들어대도 변함이 없는 완벽한 구원장치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가끔씩 다림질을 해보지요. 다림질을 하기 이전에는 옷이 구겨지고 돌출이 된 부분도 있고, 곳곳에 주름이 쳐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단 다림질을 하고 나면, “아니 주름진 것이 다 어디로 갔지?” 라고 하면서 놀랄 지경입니다. 깨끗하고 반듯한데, 표면은 너무나 매끈해서 어디가 시작인지 끝인지도 모르게 된다는 겁니다.
멜기세덱이 바로 이와 같은 분인데,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다는 말이죠. 희노애락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하루는 웃다가, 하루는 울다가, 우리는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런데 거기서 완전히 초월해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분이 멜기세덱인데, 즉 구원의 두레박이라는 겁니다.
이제 며칠이 안 있으면 수능시험이 있는데, 수험생을 있는 집안에서는 이미 긴장 상태로 돌입하고 있는데, 마치 수능시험 이후에는 천국이라도 올 것같이 말이죠. 과연 수능시험 이후에는 천국의 나날입니까? 하지만 그렇게 수능시험에 전부를 건 것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종의 희노애락의 소용돌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보더라도 평강의 왕이 아니라 불안감을 유발시키는 왕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이런 긴장과 긴장으로 이어지는 인생 자체를 그만 다리미로 확 밀어버리면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괜찮지 않겠습니까?
멜기세덱과 하나님의 아들 !!
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너무나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희노애락에 휩싸이는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존재 자체가 주름져 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죠.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우리 인간들이 세상 변화에 맥을 추지 못하는 것은, 왜 슬펐다가 기뻤다가 하는고 하니, 그것은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착하고 선하고 존재인데, 이런 변화쯤이야 이기지 못하겠나?” 라고 하는 오기에 늘 충만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조그만 실수나 잘못에도 대단히 민감해져 있는데, “혹시 나의 실수로 인해서 하나님이 나의 위신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을까? 지금까지 유지해온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나쁜 이미지로 바뀌지는 않을까?” 라고 하면서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전혀 완벽하지도 못하면서, 마치 완벽한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 세상 만사가 이런 자기 뜻을 뒷받침해 줍니까? 어림도 없어요. “절대로 성질을 내지 말아야지” 라고 하는 각오가 몇 시간을 갑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죠. 이러한 투철한 책임감, 또한 남에게 지지 않겠다는 자기 의가 자신을 망친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람을 자기를 위선자로 만들고 인생을 힘들게 한다는 말이죠. 즉 “너는 어느 정도로 착하지? 나는 이 정도로 착하다. 내가 이겼다. 이만하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부부싸움도 자기 의의 대립으로 인해서 발생된다는 겁니다.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라는 것으로 말이죠.
이 남편들아 !!
그래서 성경은 “남편들아, 아내의 잘못을 너의 탓으로 받아들여라. 마치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서 희생한 것처럼 말이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내는 잘나고 못나고 하는, 그런 경쟁대상이 아니라, 그 잘못을 남편이 대신해서 흡수할 대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아내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니, 그러한 남편에게 순종하면 되는데, 주님께 순종을 하듯이 그렇게 순종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인데, 그것이 에배소서 5장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것을 아내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제대로 된 남편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니 여자가 기댈 언덕이 없다는 겁니다. 보디가드가 시원찮은데, 그러니 여자는 불안해서 자기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러니 여자가 얼마나 여성답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여자가 남자다워야 하는데, 그런 자기의 본래 모습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아무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느냐 하면, 희노애락으로 인해서 생겨 버린 성질과 죄악들을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다림질을 제대로 했으니 말이죠. 이 세상의 그 어떤 변화, 그 어떤 잘못이라고 해도 그 아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인 예수님에게 “저 사람에게 복을 주어라” 라고 하면, 그러면 예수님은 그 복을 주면 된다는 겁니다. 마치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복을 주듯이 말이죠. 어떤 분은 걱정하기를, “예수님이 복 주는 일을 하지 않으면 어쩌지?” 라고 하는데, 그런 걱정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시게 된다는 겁니다.
항상 제사장으로 !!
오늘 본문 3절에 보니, 항상 제사장으로 계신다고 합니다. 제사장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분이 아닌데, “죄는 다 가져 오란 말이야” 라는 역할을 하신다는 겁니다. 마치 아내의 잘못을 남편이 다 흡수하듯이 말이죠. “창기야, 죄를 가지고 와. 소경아, 죄를 가지고 와” 라고 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그러니 제사장은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는데, 의인은 거부하시는 분입니다. 자기가 건강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배척하시는 분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제사장 역할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달리신 십자가를, 그 피를 모독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은 지옥에 보내버린다는 말이죠.
바로 이러한 분을 “믿는다. 혹은 의지한다” 라고 할 때, 그러면 그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던 의가 우리 의로 넘어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천국에 가게 되는데, 넘어온 예수님의 의 덕분에 말이죠.
이런 일을 하나님의 아들이 하시는데, 그런데 이 일이 결코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여기서 저는 또 하나의 낯선 개념을 거론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바로 마귀입니다. 이 마귀, 즉 악마가 노리는 것은 예수님의 제사장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시비를 건다는 겁니다.
악마에 대해서 !!
제가 방금 멜기세덱, 하나님의 아들, 제사장 이야기를 했는데, 그리고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지난 시간에 했고 말이죠. 그 다음에 할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물론 이런 것은 신문에 나오지 않는데, 이제 악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악마의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구태여 믿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자신들의 성의와 정성으로도 얼마든지 의로워질 수가 있는데 말이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니가 잘났으니, 니가 구원을 받아내라” 라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에 대해서 무효화를 시키는 것이고, 여기에 악마는 주력한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을 있으나 마나하는 분으로 말이죠.
그래서 악령은 헛소리를 하고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악마가 말하는 악마, 즉 엉터리 악마이고, 그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잘 나와있습니다. 42절에서 44절입니다.
(요 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예수님을 마귀를 설명하시면서, 달리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잘난 맛에, 자기가 잘났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악마가 심어준 거짓 진리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마귀냐? 아니냐?” 라는 것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느냐? 아니하느냐?” 라는 것으로 가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은 두 종류인데, 성령을 받은 사람과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앞장세워서, “내 구원은 순전히 예수님 덕분이다” 라는 고백을 하고, 반면에 악령을 받은 자들은, “내 힘으로, 내가 잘나서, 내 기도 덕분으로 복도 받고 구원을 받았다” 라는 주장을 하는데, 그러니 구태여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대로서 기도에 관해서도 악령을 받은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라고 말이죠. “우리는 같은 형제들이기에 각자의 관심사에 대해서 합심해서 기도해서 서로 서로 위로하는 기도의 공동체가 됩시다. 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봤습니다만, 주기도문에 보면 분명히 자기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가 나와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예수님께서 죄 용서를 해주셨는데, 그런데 우리의 마음 중심에는 자꾸만 ‘나’ 라는 것이 솟아올라오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란 바로 이런 자기 중심주의를 제거하기 위함인데, 동시에 자기 포부나 뜻이나 야망도 철거를 당해야 한다는 말이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리고 골로새서 3장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의 기도제목이 이미 성경에 이렇게 또렷하게 나와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기도제목을 걷어치우고 뭐라고 합니까?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번에 우리 아이가 수능을 치는데, 점수가 잘 나오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대로 된 목사라고 하면 그런 기도에 대해서 꾸지람을 해야하는데, 오히려 한 술 더 뜬다는 말이죠. “열심히 기도하시면 서울대학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전문대에 갑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면 교인들은 화답을 하는데, “우리교회는 너무나도 좋은 교회다. 이렇게 아쉬운 것들을 채워주니 말이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누구 하나가 서울대학이라도 들어가면 난리가 난다는 말이죠. 기도의 응답이 되었다는 것인데, 부모의 기도덕분에 서울대학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러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거기에 관련된 기도 제목을 따로 뽑아내는데 치중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기도 제목에 합세해서 정당화시켜 주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모임을 두고 ‘악마의 공동체’ 라고 부르고 싶은데, 누가 뭐라고 해도 악령의 받은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겁니다.
기도의 응답은 회개뿐 !!
정말 기도의 응답은 회개뿐인데, 즉 “하나님, 제가 또 제 중심주의였습니다” 라고 하면서 회개하는 것, 그것 외에는 달리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악마의 공동체에서 벌리는 기도는, 그 응답여부를 놓고 나름 평가하기를, “결국 우리의 기도덕분에 복을 받아내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응답한 것을 봐서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완전히 의인임에 틀림없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여기서 철저히 예수님은 빼내어버린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이것인데, 즉 “‘나’ 라는 것이 과연 이토록 대단하고 훌륭한 존재구나” 라는 겁니다.
왜 우리는 자꾸만 이러한 희노애락에 말려듭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의 때문인데, 즉 “나는 너보다 믿음이 더 좋다” 라는 것인데, 이런 자기의 의로 인한 도취, 하지만 이렇게 인생을 살아보세요.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죄도 짓지 말아야 하고, 실수도 하면 안 되고, 그리고 병에 걸려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완벽해야하니 말이죠.
여러분, 과연 예수님이 없이도 훌륭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전도서 3장에 보면,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도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도 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모든 ‘때’를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는 ‘한 때’로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거기에다가 목숨을 걸지 마세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을 바라보았던 관점이라는 겁니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예수님이 너무 좋아요 !!
오늘 본문에 보면, 멜기세덱은 비록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지만,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의 경우에, 요한복음 8장 56절에 보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어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라고 말이죠.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래서 직접 만나고 나서 너무나도 기뻐했다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 세상의 희노애락에 휩싸여 살았던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는 것이 보다 더 확실해졌다는 말이죠. 아마 아브라함은 아들 중심의 세계가 이토록 좋을지 미처 몰랐을 겁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아들 중심의 세계뿐인데,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3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라고 합니다. 진짜로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최고로 여기는 아들의 나라, 그 나라의 생활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의, 자기 똑똑함, 자기 대단함을 마치 신앙으로 여기면서 우리가 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곧 악령의 역사인데, 그러니 아브라함처럼 예수님만 보고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7 오전 11시에 마침. - 녹취 구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히브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히 7:11-17) 레위지파와 유대지파 (0) | 2010.09.05 |
|---|---|
| (히 7:4-10) 십일조와 허리 (0) | 2010.09.05 |
| (히 6:13-20) 맹세의 성취 (0) | 2010.09.05 |
| (히 6:9-12 ) 사랑과 소망 (0) | 2010.09.05 |
| (히 6장 1-8) 완전한 것 (0) | 2010.09.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