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7:4-10) 십일조와 허리 본문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20강-히7장,4-10(허리와,십일조)-heb01111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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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허리 2001년 11월 11일 20강
본문 말씀 : 히브리서 7:4-10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성경은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 성이 상당히 건방지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여타의 많은 종교도 있고 많은 경전도 있는데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내세워버리면 자동적으로 다른 종교, 다른 경전은 비 진리인 셈이 됩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살기 바쁘다보니 진리까지 생각할 여력이 두지 않기 마련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러한 풍토에 대해서 언급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노아 홍수가 있기 전에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 우주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존재하기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 홍수라는 진리로 인해 그 우주는 소멸되었습니다.
당신들이 죽는 것과 나도 죽는 것도 다 진리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비록 죽어도 진리는 남습니다. 그만큼 진리는 결국 진리 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서는 말합니다. 지금의 사람들도 노아 홍수 때와 같이 사람들이 안일하게 산다는 겁니다. 우주는 변치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불의 심판이 이 역사를 파멸시킬 거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7:22-2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선지자 노릇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많이 행하는 것을 진리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법이 진리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법이란, 왜 예수님이 메시야이며 왜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 행하자"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왜 구약 율법의 십일조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율법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십일조를 언급하면서 몇 가지 연관되는 것들이 나옵니다. '허리'라는 말씀도 나오고, '레위 족속'이라는 말씀도 나오고, '멜기세덱'이라는 말씀도 나오고, '아브라함'이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십일조의 담긴 뜻이 나옵니다. 즉 왜 구약 때의 십일조 율법이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말하지 않을 수 없는가 하는 점을 말입니다.
먼저 레위 족속과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봅시다.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여기에 보면, '허리'라는 말이 나오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35: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즉 이스라엘이라는 인물이 된 야곱의 허리에서 많은 국민과 많은 왕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많은 국민과 많은 왕은 어디 들어있는 겁니까? 이미 야곱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것이 허리라는 배출구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허리'라는 말은 결코 분화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출처가 '따로 따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원질 안에 예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동양식으로 말하지만 '허리'란 '배'를 뜻합니다. 아무리 후손들이 번식해도 모두 선조의 뱃속에 이미 담겨 있었던 존재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레위 족속이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내린 그 약속에 다 담겨 있는 일이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자가 이삭이고 그 이삭의 허리에서 나온 자가 야곱이고 그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자 중의 하나가 레위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레위 지파는 아브라함의 허리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레위 지파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이미 구약 이스라엘 국민들이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했는데 이 십일조를 받는 레위지파는 이미 죽은 아브라함의 허리에 속해 있는 지파라는 겁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그냥 "너희들 십일조 하라"고만 말하면 간단한 이야기를 왜 복잡하게 여러 장치를 동원하는 걸까요? 그것은 "십일조 하라"가 십일조의 의미가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누가 누구에게 십일조를 했느냐를 살펴보는 것이 십일조의 진정한 의의라는 겁니다.
구약 때에 백성들은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했습니다. 왜 그들에게 십일조를 줍니까? 하나님께 드리면 될 터인데 왜 레위 지파에게 주는 걸까요? 그들이 과연 돈 받을 자격이라도 있나요? 이점에 대해서는 민수기 18장에서 길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민수기 18:21-24에 보면,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지파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전체가 사죄의 은총을 입는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씻어줄 자격자가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오늘 본문 7:10의 말씀처럼 그들은 단지 아브라함의 허리에 놓여 있다는 입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레위 지파가 하고 있는 일은 누구의 허리 안에서 일하고 있는 것 밖에 안됩니다. 누구의 허리입니까? 아브라함의 허리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 지파에 드린 십일조는 사실상 레위지파에 드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바친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과연 십일조를 받을 자격이라도 되나요? 오늘 읽은 본문 7-8절에 보면,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복 받을 모든 자의 최고 정점에 놓여 있는 분입니다. 자기 허리 안에서 모든 구원받을 자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죠.
쉬운 예를 들면, 양극 전선과 음극 전선을 만나면 그 사이에서 불꽃이 튀면서 방전이 일어납니다. 하늘을 양극이라고 보고 땅을 음극이라고 보면, 음극의 대표자로서 아브라함이 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서 있습니까? 7절에 보니,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높으신 분으로부터 복 받기 위해 서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복을 주기 위해 하늘 쪽에서 나타나신 분은 누구입니까? 그 분은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그분은 죽지 않는 분을 대표로 합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죽을 자들을 대표로 하고 마주 서 있습니다. 과연 죽을 자가 어떻게 해서 영생을 얻습니까? 자기에게 찾아온 그 죽지 않을 세계에 속한 자로부터 복을 받으면 되는 겁니다. 결코 먼저 아브라함이 십일조 하니까 그것을 보고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브라함이 하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기에 그 마음의 증거로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친 겁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자리에 서 있었던 자입니다. 아브라함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허리에 있는 모든 자도 지금 멜기세덱 앞에 서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 허리에 들어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복을 받기는 받은 겁니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 4절입니다.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즉 아브라함은 자신이 얻은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으로 멜기세덱 제사장에서 십일조로서 바쳤는데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복 주신 그 결과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정신은 곧 그 나머지조차 애초부터 우리로 인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민수기 18:12-13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결국 십일조란 "복은 하늘에서 오며 우리는 그 분 덕분에 이런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라도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만난 그 사실은 대대로 이어오면서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 반복되어야 됩니다. 백성들은 레위 지파에게 드림으로 그 사실을 반복시킵니다. 마치 옛날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통한 복을 기억해서 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이럴 때 레위지파는 마치 멜기세덱의 위치에 있고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위치의 입장에 놓인 셈이 됩니다.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은 언제까지 이어집니까? 요한복음 5:39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통한 축복에 대한 고백과 증명 행위는 예수님에 와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대체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받아서 그 바친 것을 근거로 그 다음 그 사람을 구원해 준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요구하거나 받지 않으시고 도리어 무상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내 놓았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입니다. 사죄의 피요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율법은 다 이루신 것입니다. 무엇인가 더 보태거나 보충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아예 십일조를 안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도 십일조 하는 행위는 마치 십자가 앞에서 양을 잡아 복을 얻어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지칭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새삼스럽게 또 어린양을 잡겠습니까? 말도 안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십가가 지셨으면 더 이상 십일조는 해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하게 되면 그것은 십자가의 수고를 헛되게 만드는 짓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받고 우리보고 우리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피를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저주는 없습니다. 평생 복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예수님의 허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했어도 그것은 곧 아브라함에게 한 것이 되고 이는 또한 백성들이 아브라함처럼 멜기세덱에게 한 것이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허리'라는 말 보다 다른 확실한 말을 성경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안'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 허리'가 아니라 그냥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로마서 8:1-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지요.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3:26-27에 보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즉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살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점을 우려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10-1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당부한 점을 유의합시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당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율법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4-5에 이 말씀이 나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십일조라는 것도 율법에 속하는 겁니다.
헌금을 하실 때에는 고린도후서 8장의 말씀처럼, 억지로 말고 자발적으로 은혜에 대해 느낀 대로 하시면 됩니다. 소득의 10%을 헌금한 것은 그냥 헌금이지 결코 십일조는 아닙니다. 5%도 헌금도 헌금이지 결코 십일조의 반이 아닙니다. 교회는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법이 있으면 안됩니다. 천국은 법은 없고 사랑만 있습니다. 법이 있게 되면 교회 내에 계급이 생깁니다. 즉 법을 가르치는 계층과 배우는 계층으로 나뉘어져 버립니다. 가르치는 계층만 그만한 권위를 갖겠다고 나설 것이 뻔합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법을 좋아하고 십일조와 각종 법에 매이기를 원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거나 사랑하기보다는 자기를 사랑해서 찜찜하고, 께름칙하고 재수 옴 붙을 만한 것은 사전에 제거시키고자 교회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되면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 그 자체입니다. 즉 사람들이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신세가 복을 받아 풍족하고 매사가 편안하기만을 기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얼마나 이기주의입니까. 바로 이런 교회를 천국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헌금을 얼마를 하든 그 누구로부터 간섭받거나 압력 받지 말기 바랍니다. 헌금은 하나님과 그 개인과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서 이미 하늘의 복을 받았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하나님이 하신 진리보다 자신의 행함을 더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리를 믿기보다 자신을 더 믿는 이 거꾸로 된 신앙을 버리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구득영
20. 십일조와 허리(히 7:4-10)
-------------------------------------------- (히 7: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히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히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히 7: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히 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히 7: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히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
성경은 자신 만만하게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러한 진리성이 상당히 건방지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이 세상에 여타의 다른 많은 종교도 있고 많은 경전도 있는데, 성경이 예수님을 앞장세우면서 “이것만이 진리다!” 라고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그만 진리가 확정되어 버린다고 하면, 자동적으로 다른 종교나 다른 경전은 그만 비진리인 셈이 되고 말겠죠. 왜냐하면 그것들은 예수님에는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은 그만 파멸에 이르고 만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세상이 왜 소멸되는고 하니,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런 풍토에 대해서 언급해 놓은 것이 있어요. 노아 홍수가 있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했는데,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 우주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라고 여겼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하늘에서 그만 홍수가 내려와서 멸망을 당했다는 겁니다.
(벧후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벧후 3: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 3: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들은 그렇게 되기 직전까지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 세상은 이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영원토록 흘러간다는 겁니다. 역사가 소멸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자연은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진행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왜 노아 홍수라는 심판을 내렸는고 하니, 이 세상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것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으면 ?
그러니 그들은 잘못 살았는데, 이 베드로후서 3장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불이 떨어지는 것을 모르고, 그때 노아 홍수로서 멸망을 당할 때처럼, 그렇게 이 세상은 흘러간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 진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리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의심마저 드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인데, 진리가 없어도 얼마든지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오늘날의 시대상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하는데, 왜 홍수심판이 일어났는지, 왜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지를 말이죠. 그것은 바로 진리 따로, 자기가 사는 것 따로, 그렇게 따로 따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진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소개할 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정말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다 이야기하셨는데, 그런데도 인간들은 그것을 받아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인간들은 뭔가 자기 일상에서 신기하고 독특한 것을 원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7장 22절과 23절을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2절에 보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만 보자면, “아하, 주의 종이라고 하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이구나” 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게 획기적인 것이기에 말이죠.
그런데 23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배척하는 자들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만의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선지자 노릇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진리라고 간주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다른 기준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법이 곧 진리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법이라는 것은, “왜 예수님이 메시야이며, 왜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법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볼 때, 우리도 진리를 알고 싶다고 하면, 그러면 어떤 획기적인 일이 일어나고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선지자 노릇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되면 실패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누구를 거쳐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믿어야 하는데, 즉 직접 예수님과의 독자적인 관계, 그 중간에 무엇인가가 들어가면 안 되는데, 교회부흥과 같은 것이 끼어 들어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권능과 기적을 통해서 교회가 커지는 것에 의미를 두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들은 다 삭제를 당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진리라고 하면, 그 진리를 의지하면 된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노아를 말을 믿지 않아서 물로 멸망을 당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불의 심판이 남아있습니다. 그때는 노아의 방주이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인데, 그게 전부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도무지 관심이 없는데, 물론 믿는 것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귀는 사람들이 많아서 정신이 없는데, 거기에 예수님까지 사귀려고 하니까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런 분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믿으면 되는 것이지, 지금은 도저히 그럴 여유가 없다는 말이죠.
십일조는, 예수님이 진리임을 확인해주는 것 !!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권능과 기적으로 요란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용하게 다가오는데, 그게 말씀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 말씀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인데, 여기에 보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고 하니, 십일조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십일조라는 것은 예수님이 진리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해주는 것인데, 왜 구약율법의 십일조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율법인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진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구약에서 십일조를 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고 하니까, 구약의 십일조와 오늘날의 예수님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그것만 파악하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 그러면 먼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것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
오늘 본문에서는 십일조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소개를 해주는데, 즉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 십일조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해준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적어도 “십일조를 하라” 라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십일조를 해서 천국에 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즉 십일조를 행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진리는 예수님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의지하면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의지하고 또 십일조를 하고,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에 대한 훼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십일조는 예수님이 오시고 난 다음에는 할 필요도 없고, 아니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난 다음에 십일조는 이제 없는데, 그런데도 계속해서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양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는데, 그런데 왜 양을 잡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이루셨다는 것에 대해서 미심쩍어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기어이 자기가 양을 잡아서 구원을 받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십일조라는 것은 구약의 율법이 완성될 때 이미 없어진 것인데, 사도바울의 서신에 십일조를 하라는 것이 나옵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어린양을 잡으라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을 잡으면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곧 어린양이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말라기서, ‘예수님이 곧 십일조’ !!
구약의 말라기서에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는 것은, 십일조를 하면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이 곧 십일조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데, 거기에 무슨 십일조를 하고 말고 하느냐는 말이죠.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기에, 그것이 너무 시시하고 쉬워 보이기에, 그래서 자기 쪽에서 뭔가를 해야한다는 여긴다는 겁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그렇게 쉽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십일조를 한다는 겁니다.
조금 더 나가보면, 그렇게 십일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혹시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재수가 없어서 자기 사업이나 가정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지 몰라서, 그런 액땜 차원에서 십일조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목사들이 그것을 유도하는데, 그래야 장사가 되기 때문에 말이죠.
성도가 아닌, 예수님이 귀하기에 !!
하지만 교회는 천국이 되어야 하는데, 천국이 무엇입니까? 법이 없는 것이 천국이라는 겁니다. 법이 없으면 계급도 없는데, 천국에는 예수님의 사랑과 그 용서하심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예수 안에서 모이는 것은, 그것은 성도가 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귀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용서가 있는 것이 곧 교회이고 천국인데, 그러니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용서는 베푸는 것인데, 만약에 무엇을 요구하면 법이 들어가는데, 즉 “너는 왜 이것을 하지 않았어?” 라고 말이죠. 용서는 그런 것을 일체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는 조직사회가 되고 계급이 있으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법이 있게 되면 가르치는 자가 있고 받는 자가 있기 때문에 계급이 생긴다는 겁니다. 가르치는 자의 권위가 생기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천국의 모습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지 않으려고 하면,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십일조에 대해서 왜 그렇게 무지했는고 하니까,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교회에 관심이 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저 교회는 어떻게 저렇게 부흥했지? 아하, 십일조를 열심히 해서 그렇구나” 라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나옵니까? “나도 십일조를 열심히 해서 저런 복을 받아야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남을 따라가는 것인데, 진리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복 받을 것은 챙기고, 반면에 저주를 받을 것은 제거하고, 그렇게 자기 몸 하나를 챙기겠다고 하는 너무나도 이기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십일조를 이용하고 교인들은 거기에 호응한다는 말이죠. 좋은 것이 좋다고, 그래서 십일조를 한다는 겁니다. 하지 않으려고 하니 뭔가가 좀 찜찜하고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6절에서 8절을 보겠습니다. (히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히 7: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히 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복을 받은 증거로서의 십일조 !!
여기 7절에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십일조를 한 대가로 복을 받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은 “지금 복을 받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증거로서 십일조를 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때는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이기 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라는 것을 십일조를 통해서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말이죠.
그러면 지금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복을 받은 자라는 것이,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확인이 된다는 겁니다. 십일조를 하라는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옛날의 그 십일조 기능을 다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복을 주고 복을 받는 관계가, 옛날에는 십일조를 하는 관계로 증명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그게 증명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는 복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는 자기 수입의 십분의 일을 헌금하던, 백분의 일을 헌금하던, 이제는 그것이 하나님과 자기의 개인적인 관계인데, 목사나 다른 사람이 간섭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십일조가 아닌, 10퍼센트 !!
그러니 이제는 자기 수입의 10퍼센트를 내면, 그것은 십일조가 아니고 그냥 10퍼센트를 내는 겁니다. 20퍼센트를 내도 그렇고 말이죠. 이것은 고린도후서 8장의 말씀처럼, 억지가 아닌 자발적으로 하는데, 받은 은혜의 분량대로 헌금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법이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억지가 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천국이 아닌 지옥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 8: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십일조를 완성했는지,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몇 가지 관련이 되는 용어들이 나옵니다. ‘허리’ 라는 말씀도 나오고, ‘레위 족속’ 이라는 말씀도 나오고, ‘멜기세덱’ 이라는 말씀도 나오고, ‘아브라함’ 이라는 말씀도 나온다는 말이죠.
(히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히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레위 족보와 아브라함 !!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십일조에 담긴 뜻이 나온다는 겁니다. 즉 구약 때의 십일조라는 율법이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지, 그러한 점에 대해서 말이죠. 그렇다면 먼저 레위 족보와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10절에 보면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라고 합니다. 일단 멜기세덱은 제쳐두고, 레위 족보와 아브라함과의 관계의 경우인데 말이죠. 이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는지, 그 과정에 관한 설명이라는 겁니다.
(히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물론 우리는 그게 멜기세덱에서 아브라함으로,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레위로, 그리고 그 레위지파에게서 일반 백성들에게로 흘러간 것으로 이해를 하는데 말이죠. 그것을 오늘 본문은 거기서 이삭과 야곱은 떼어내고, 아브라함에게서 레위지파로 간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에서 아브라함으로, 그리고 레위지파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멜기세덱은 떼어내고 먼저 아브라함과 레위지파 이야기를 하는데, 그리고 그것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레위지파에게 바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데, 그 당시 백성들이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내는데, 그런데 그것은 레위지파에게 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레위지파가 아니고 왜 아브라함에게 내는고 하니, 레위지파는 원래 레위지파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속에는, 즉 하나님의 맹세 속에 나중에 레위지파는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레위지파가 보여주는 것은, 아브라함은 죽어도 여전히 살았다는 겁니다. 레위지파가 살아있으니 말이죠. 그러니 십일조를 아브라함에게 바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레위지파가 있다는 겁니다. 즉 “십일조를 내라. - 왜요? - 우리는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났거든. - 예, 잘 알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무엇이기에 십일조를 받습니까? 레위지파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다고 하는데, 이 ‘허리’ 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따로 분리되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배 안에 있다” 라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
창세기 35장 11절에 보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라고 하는데, 즉 이스라엘이란 인물이 된 야곱의 허리에서 많은 국민과 많은 왕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인데, 그리고 그것이 허리에서 나온 것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창 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성경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라’ 라는 것이 없는데, 그래서 “빛이 있어라” 라고 하면, 빛이 “있을까? 말까?” 라는 것을 고민하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있게 된다” 라는 겁니다. 그 명령이 곧 현실이 된다는 말이죠.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하면, 자기가 듣고 결정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말씀 자체가 능력이 되어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고 하면, 성령이 임한 사람은 그렇게 기도하게 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능력인데, 그런데 이것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니 그만 위선자가 되고 만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인간의 윤리와 도덕인데, 그것으로 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레위지파의 역할은, 허리역할 !!
이렇게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왕들과 국민들이 나온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많은 국민들과 많은 왕들은 어디 들어있는 겁니까? 이미 야곱 안에 담겨있는데, 그것이 이 허리라는 배출구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터져 나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지파의 역할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증거하고, 또한 배출하는 허리역할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은 무엇이기에 십일조를 받습니까?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멜기세덱인데, 아브라함은 땅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데, 그래서 이삭과 야곱 등이 줄줄이 그 밑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구원을 받는 자의 대표자로서 아브라함이라는 말이죠.
쉬운 예를 들어보면, 양극 전선과 음극 전선이 만나면 그 사이에서 불꽃이 튀면서 방전이 일어나요. 여기서 하늘을 양극이라고 보고 땅을 음극이라고 보면, 그 음극의 끝에 대표자로서 아브라함이 서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들은 아브라함에 뒤에 줄줄이 서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허리, 즉 그의 배에서 나왔으니 말이죠.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만남 !!
그런데 이쪽 하늘의 끝에는 누가 서있는고 하니까, 멜기세덱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나이가 왜 만났습니까? 결투를 하기 위해서 만났습니까? 그것이 바로 7절에 나오는,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 라는 것인데, 즉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아, 내가 복을 줄게” 라고 하면, 아브라함은 “예,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그런 관계라는 말이죠.
그러니 아브라함은 “저는 이렇게 복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즉 복을 보여주는 증거자로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후손들이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하는 그 법은 무엇인고 하니, 옛날의 멜기세덱과의 아브라함의 만남을 재현하는 것이죠. “일방적으로 복을,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는 것을 말이죠. 바로 그것을 계속해서 되풀이라는 것이 십일조를 내는 것이고, 또한 받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요한복음 5장의 말씀처럼 구약의 율법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인데, 십일조를 비롯해서 그 모든 것이 말이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위치에 있는 분인지, 무슨 일을 하는 분인지, 그것을 구약에서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미리 율법으로 보여준다는 겁니다.
(요 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러면 구약 때에 백성들은 왜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께 드리면 될 터인데 왜 레위지파에게 주는 것일까요? 그들이 과연 돈 받을 자격이라도 있는 겁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민수기 18장에서 길게 설명해 놓았는데, 21절에서 24절입니다.
(민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민 18:22) 이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민 18:23)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민 18: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왜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바치는가?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이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레위지파는 백성들 중에서 제일 귀한 지파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모든 생산물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으로 바치는데, 그게 12절과 13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민 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민 18:1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그리고 레위기 27장에 보면, 소나 양의 십일조는 숫자를 헤아려서 10번째 되는 것을 바친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십일조를 하는 것을 통해서 그 모든 생산물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 은혜를 주셨다” 라고 하는 증거물인데, 그래서 그들의 땅에 젖과 꿀이 흘러 넘친다는 겁니다.
(레 27: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래서 십일조를 바치는데, 마치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 관계가 어떠한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먼저 바치니 멜기세덱이 준 것이 아니라, 먼저 멜기세덱이 일방적으로 전쟁의 모든 전리품을 주니까, 거기서 십분의 일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저는 이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 이게 무슨 은혜입니까? 이것은 전혀 저의 공로가 아닙니다” 라는 의미에서 말이죠.
(창 14: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 14: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은 자기가 무엇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습니까? 그것을 조금 전에도 보았지만, 오늘 본문 7절에서 ‘높은 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7: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 (히 7: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높은 자’가 뭐예요?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 높은 자를 인정하지 않는데, 사람 위에 사람이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다는 말이죠. “모두가 다 평등하다” 라는 민주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높은 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구를 믿는 게 아니라, 자기 행함과 자기 의가 전부라는 말이죠. 높은 자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데, 그러니 당연히 자기가 낮은 자라고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까, 종교는 좋은 것인데, 그러니 그 중에서 하나 골라잡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 잘 골라잡아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되는데, 그러니 종교를 인간들이 만든 문화라고 본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실은 신이고 뭐고 없고 자기가 최고라는 것이죠.
모든 교육의 내용이 다 그러한데, 높은 자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겁니다. 높은 자를 섬기고, 그분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최고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구에서 무조건 용서를 받고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비록 자기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는데, 그런데 그게 자기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복을 준 높은 자의 위상을 인정했는데, 복을 주어도 그 높은 자가 주어야 하고, 그렇게 복을 줄 때만 자기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높은 자에게 바친 것이 바로 십일조인데,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정신, 즉 높은 자를 인정하는 것, 그게 십일조를 통해서 대대로 하나의 계시로서 전달이 되고 또 전달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의 역사라는 말이죠.
그러면 신약성경은 무엇인고 하니, 그 멜기세덱을 쫓는, 진짜 아브라함이 만났던 멜기세덱의 본체가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십일조를 내란 말이야. 그러면 당신은 천당이야” 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은 그와 반대로 자기의 생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셨다는 겁니다.
예수 안 !!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쳐야 합니까? 무엇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내놓았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곧 진리이고 그게 곧 복이라는 겁니다. 거기에는 저주가 없다는 말이죠.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런 관계, 즉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목숨을 그냥 내어놓는, 영생을 공짜로 주시는, 그러면 그게 공짜인 줄 알고 받아들이면 되는 그 관계, 그것을 신약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언약이라고 했는데, 신약에서는 ‘예수 안’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노아 방주 안이지만, 이제는 예수 안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허리에 레위지파가 있는 것과 동일하게, 지금은 예수님이 그저 주시는 은혜 속에서, 즉 예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만이 높은 자입니다 !!
그렇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높은 자로 인정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높은 자로 인정한 것과 같다는 말이죠.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 26절과 27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율법에 얽매여서 살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 4장 10절과 11절입니다.
(갈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갈 4: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계속해서 4절과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 이제는 율법 안에 있는 자들을 율법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서, 십일조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피를 흘려주셨는데, 그것을 아브라함처럼 복인 줄로 알고 받아들이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그 안에서 그 사랑을 받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이제는 무엇을 하든지 !!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 자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높이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헌금을 하든, 전도를 하든, 무엇을 하든 말이죠.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래서 그 모든 공로를 예수님에게 돌리는데,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선지자 노릇을 하고 병을 고치고 하는, 그게 진리가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이 진리라는 말이죠. 그러니 복 주신 자를 인정하고, 높으신 분을 인정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았던 자들입니다. 남들과 경쟁해서 기가 죽지 않기를 원했고, 그런 명예심에 얽매였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복 주심에, 예수님의 그 용서하심에 감사하면서,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7 오후 8시에 마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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