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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6:13-20) 맹세의 성취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6:13-20) 맹세의 성취

정인순 2010. 9. 5. 10:02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18강-히6장,13-20(맹세의,성취)-heb011028.mp3

 

 

이근호

 

맹세의 성취

2001년 10월 2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13-20

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6: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6: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구원의 근거로서 오늘 본문이 제시한 것은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맹세하심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이루는데 있어 어느 구석에도 인간들의 공로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인간을 배제시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 바라새인들과 사두개인 및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신경을 바짝 쓰고 있었던 점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힘으로 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에게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이 율법을 가지고 자신의 구원을 이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제시한 구원의 근거는 따로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26-28절에 보면,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이 구원의 근거요 예수님의 흘리신 그 피가 구원의 근거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그 어떤 노력이나 수고도 구원의 근거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살이 찢겨지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인간의 노력과 땀과 희생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의 근거로 인해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와 살이 자신들의 구원방식을 막는 장애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32-33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사도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만이 구원의 근거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간결하고 단순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것을 복잡하고 혼잡스럽게 만듭니다. 잡스럽고 요란스러운 것을 섞여 넣어야 된다고 목사들이 교인들보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주장들을 허용해 주면 안됩니다. 이들은 교회 내를 경쟁의 장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경쟁을 유발할 수 있는 것들을 섞어 넣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그것을 구원의 근거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들은 복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교인들을 통해서 자신과 가족이 생존하고 살찌우기 위해 이런 수법을 쓰는 겁니다. 교인들끼리 싸움을 붙여놓고 그런 와중에서 교회와 더불어 자신이 배불리려 합니다. 옛날 어린이 라디오 방송에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누가 누가 잘하나"입니다. 교회를 이런 시합하는 분위기로 몰아가고자 합니다. "누가 단시간 내에서 권사나 장로로 진급하는가?"에 관심 갖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참된 천국은 이런 식이 아닙니다. 올바른 성도는 자신이 썼던 면류관마저 벗어서 하나님 발 앞에 던지면서,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이것은 오직 주께서 쓰셔야 합당합니다. 모든 만사가 다 주님의 인도로 된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맹세를 이루신 것에 대한 당연한 대우입니다.

 

여러분, 교회 내에서는 그 어떤 경쟁도 필요치 않습니다. 여기 나무 십자가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양편에 쓰레기 봉지 들고 오셨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과부와 고아를 돌봐주시고자 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병자들을 다 고쳐 주시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었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물만 보면 그 위로 걸어다녔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일체 식사 준비는 안하고 예수님이 늘 기도해서 얻은 음식만 먹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표적을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말씀하시기를, "요나의 표적 이외에 다른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요나의 표적이 다름 아닌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구원의 근거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일평생이 바로 이 요나의 표적을 완성시키기 위한 활동이었습니다. 다른 활동은 없습니다. 어떤 중풍 환자는 병에서 나았지만 그는 병에서 나은 것이 아니라 죄에서 나았다는 증거로서만 중풍 병에서 나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바로 받아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서 같이 십자가 달려 죽어가던 강도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저를 기억해 주옵소서"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구원의 근거로서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간단하고 간결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본문에 아브라함이라는 분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보통 우리들과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실제로 창세기 15:5-6에 보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말 그 당시,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로 자식조차도 없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붙잡으시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퍼부어 주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받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런 믿음이 없었기에 예수님 앞에서 다 걸려 넘어졌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보면, 이런 믿음까지 인간의 행함의 하나로 보지 않고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 즉 선물로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인간의 의도를 배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14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즉 하나님 자신의 맹세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 스스로 지켜내는 그 맹세로서 아브라함에게 다가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맹세 지키라고 명령하거나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자기 맹세로서 끝까지 몰고 가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구원은 아브라함 자신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맹세를 지키신 그 결과가 결국 '아브라함 구원'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마치 축구 선수가 공을 요리조리 드리블하고 결국 슛 골인하듯이 말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보고 묻기를,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물으면 그 사람이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기 맹세 때문입니다"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쏟아진 숱은 축복은 순전한 하나님의 일방적 맹세의 결과입니다. 지금 오늘날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축복이란 자식의 생산이나 재산의 증식이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죄 씻음에서 오는 영생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약속에 대해 맹세로서 다가오는 겁니까? 그것은 보통 인간 사회에서 인간들끼리 하는 맹세와 같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16절에 나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여기에 보면. 사람들은 반드시 성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기보다 더 위대하고 힘있고 실현 가능성 있는 인물을 거론합니다. 즉 "내가 제시한 약속은 반드시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맹세'라는 표현을 쓰신 것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소리 안하고 이 맹세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맹세하지 않은 걸까요? 그것은 인간이 하는 모든 맹세는 인간 스스로의 자존심과 자기 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오기와 자신의 긍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임의로 뜻을 제정해 놓고 높으신 하나님은 들먹이는 것입니다. "얘야 봐라 나는 저 율법을 반드시 지켜냄으로서 내가 얼마나 성화되고 성숙되고 하나님도 인정해 주는 신앙의 소유자인 것을 보여 줄게"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33-36절을 통해 일체 맹세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대목은 이러합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여기에 보면 " 헛맹세를 하지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라는 인간들의 주장이 나오지요? 오늘날 교회 사기꾼들이 하는 수작이 늘 이런 식입니다. 자식을 신학교 보내라고 서약한 것을 반드시 지키고, 교회에 작정 헌금한 그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경우는 오로지 하나님이 자신의 맹세를 이루기 위한 재료들이지 결코 인간들의 자기 오기나 자기의 신앙심을 측정해 보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세상의 움직임을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증거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의 맹세의 초점은 오직 '제사장 직' 에 쏠려 있습니다. 제사장직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유일한 통로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인간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맹세의 작품인 대제사장 직을 통해서만 인간은 구원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에서는 이직을 '영혼의 닻'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닻이란 어는 한 지점에 고정적으로 매여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란 아무리 세월을 많이 먹어도 자존심이나 오기의 활동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맹세와 충돌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영혼의 닻이 필요합니다. 닻이란 어느 정도까지는 활동하는데 있는 융통성이 허용되지만 궁극적으로 닻까지 뽑히지는 않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대 제사장 직을 닻처럼 여깁니다. 비록 우리 인간이 죽을 때까지 완벽하지는 않지만 끝까지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구원의 닻입니다. 십자가의 피 흘리신 사건은 이미 하나님의 맹세 성취의 차원에서 일어나 버린 사건이기에 그 어떤 경우에도 그 효과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자만이 영생의 닻이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남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맹세보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맹세만 내세울 수 있는 믿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구득영

 

18. 맹세의 성취(히 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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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히 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히 6: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히 6: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히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히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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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근거 !!

인간의 행함은 구원을 받는데는 전혀 들어갈 수 없는데, 자기가 교회에서 어떻게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런 개인적이고 도덕적 행동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는 손톱만큼도 포함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지금은 어떻게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하지만 어떤 새로운 환경에 부딪치게 되면 그동안 숨겨져 있던 더러운 속성들이 다 폭발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30년을 참아내고 60년을 참아낸다고 해서 그게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언젠가는 터져 나온다는 말이죠.

그동안 자기는 자기가 스스로 도덕군자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게 하루아침에 다 깨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는 근거를 어디에 두고 살았느냐는 것인데, 인격적인 완전성, 혹은 교회에서 쌓은 업적들, 그런 것들에 두지 않았느냐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믿음이 없으니 자기 실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붙잡아놓은 것에 불과하니 말이죠. 즉 “남들보다는 이것만큼은 나는 믿음의 근거로 삼고 싶다” 라고 하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것들은 붙잡아놓던 붙잡아놓지 않던 간에, 처음부터 구원의 근거는 전혀 아니었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데,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근거에 대해서, 우리가 쌓는 업적이나 덕행이나 종교적인 실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별개로 준비해놓으신 것이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살던 당시에 유대인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는 근거를 어디에 두었는고 하니, 자기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얼마나 많이 지키느냐에 따라서, 바로 그것을 자기들 구원의 근거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에서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딱 그들 앞에 서고부터는, 그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 걸려서 넘어졌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나름대로 장작만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들에게는 정작 믿어야하는 십자가가 오히려 장애물로서 작용했다는 말이죠.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나쁜 짓만 하다가 십자가의 동기생으로 죽었던 강도는, 그 십자가를 보고 온 몸으로 받아들였는데, 물론 어느 쪽의 강도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는 기억해주세요” 라고 했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알았다. 니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것 이상 무엇을 더 원하느냐는 겁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의 온 몸으로 다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넓은 것, 그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런 마음 외에 다른 마음은 전혀 필요치 않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맹세하심 덕분에 !!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맹세하심 때문이다” 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그 맹세가 우리 속에서 실현이 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천국에 도착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도 하나님의 자기 맹세성취로 인한 결과인데, 그 덕분이라는 말이죠. 그 열매가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 자신의 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일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도처럼 밀어내신다는 겁니다. 마치 연어가 바다에서 부화하기 위해서 자기가 태어났던 강줄기로 다시 올라오듯이 말이죠. 그렇게 연어를 상류로 밀어내는 힘과 같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밀어내시는데,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의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마치 목자가 양 떼를 몰고 가듯이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해서 천국에 왔다고 하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주님 덕분에 천국에 왔습니다. 그러니 제가 머리에 쓰고 있는 이 면류관도 저의 것이 아니니 반납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의 발 앞에 던지면서, “이것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데, 그렇게 볼 때 우리가 어렵게 생각했던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지 모르는데, 그야말로 간단하고 간결하다는 겁니다. 어떤 복잡한 딜레마도 거기에 끼어들 이유가 없는데, 그것을 우리가 용납해서도 안 되고 말이죠.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우리의 단순한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재산을 노리는 세력이 있어서 그러한데, 교회를 키우겠다든지, 자기의 배를 채우겠다든지, 그렇게 뭔가 노리는 세력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 것이 상주해있기 때문에, 이 간단하고 심플한 복음이 그만 혼잡스럽게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혼잡스럽게 오셨습니까?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니, “나를 믿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간단합니까? “자, 먹어라. 이것은 나의 찢겨진 살이다. 그리고 마셔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피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엇이 복잡하냐는 말이죠.

그런데 왜 잡스러운 것이 끼어 들도록 허용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성경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면서 종교적인 폼을 잡고 종교적인 활동에 마음을 다 빼앗겨서, 그러니 교회당이 그만 무슨 오락장이나 연회장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누가 누가 잘하나?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라디오에 무슨 프로가 있었는고 하니, ‘누가 누가 잘하나?’ 라는 것이 있었는데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제목이 참 기분이 나쁜데, 그때는 몰랐다는 말이죠. 그것이 일종의 노래 부르기 대회였는데,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지금 교회가 마치 ‘누가 누가 잘하나?’ 라는 시합을 하는 것 같다는 겁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런 ‘누가 누가 잘하나?’ 라는 것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여기 앞에 이렇게 십자가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저는 강대상에 이런 십자가를 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아무튼 있으니 이렇게 활용을 하기는 하는데 말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이제부터는 ‘누가 누가 잘하나?’ 라는 것은 일체 없기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맹세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만 이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맹세 속에 우리의 맹세를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런 사람이 요즘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들 경쟁체제라서 교회도 교회끼리 비교하고, 교회 안에서도 누가 빨리 장로가 되는지, 그런 경쟁의식이 대단한데, 그러니 그런 것을 누가 초월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라고 나올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누가 나오는고 하니, 13절과 14절입니다.

(히 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히 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아브라함의 등장 !!

여기에 우리와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즉 아브라함이 나온다는 겁니다. 13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브라함과 약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과 약속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 자신이 행한 일이 하나도 나오지를 않는데, 즉 아브라함이 “내가 어떤 일을 행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 것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그냥 받은 것인데, 하나님의 약속을 그냥 받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맹세조차도 아브라함의 행동여부에 따라서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그 복 자체도, 그것도 아브라함에게 흥정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제쳐놓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맹세한 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결과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는 쪽으로, 그렇게 되도록 우주만물을 다 조치하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은 이러한 사실을 믿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믿음은 인간의 행함에 포함되지를 않는데, 행함의 주체는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모든 일을 이루시는 행함의 주체가 따로 있는데, 자기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에 한해서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경우에는 이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뭐라고 합니까? “믿음 자체도 성령의 열매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인데, 물론 우리는 “그래도 믿는 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입을 막기 위해서 믿음조차도 갈라디아서 3장이나 로마서 4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믿음은 은혜로 오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데, 로마서 9장도 역시 그러하고 말이죠.

(갈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여기서 오늘 본문 16절을 보겠습니다.

(히 6: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

여기에 왜 이런 말씀이 있는고 하니,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투로 말씀을 하시는데 말이죠. “사람들아, 너희는 너희들끼리 어떻게 맹세하지? 더 능력이 큰 사람에게 맹세하지? 친구에게 ‘내가 취직을 시켜줄게’ 라고 하면 안 믿지?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대통령이다’ 라고 하면, 그러면 취직이 될 수 있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이 인간 세상에서의 기본방침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어떤 일을 했을 때, 그것이 될지 되지 않을지는, 그것을 누가 더 실효성이 있게 성취할 수 있는지는, 그렇게 큰 자가 있다고 하면, 믿을 만한 자가 있다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청와대가 아니고 동사무소에서 서기가 나와서 어쩌고저쩌고 한다면, 그것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맹세는 자기가 정하지만, 그 맹세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인하여 맹세를 하는 것, 그게 이 세상에서의 보편적인 관계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 말씀을 오늘 본문 여기에다가 집어넣는고 하니, 사람들은 맹세를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면서도,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까, “목사님, 제가 교회가 나왔는데, 저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사람에 의해서 되는 것이지 하나님에 의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행동을 보면 믿음이 그만 깨어져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물론 하나님은 살아있지만, 그래도 사람이 나서야만 일이 된다. 역시 이 세상은 사람에 의해서 일이 진행이 되는데, 이것만은 나는 확신한다” 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교육을 받는데, 그러니 모든 살아가는 것에 그게 기초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 가정은 내가 지킨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고 하는데, 물론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하지만 존재하심만 믿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지 않는데, 하나님에게 자기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에 나와있는, 즉 “하나님은 이런 이런 일을 하신다” 라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하지만 실제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자기 선에서 처리를 해야한다는 여긴다는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그만 익숙해졌는데,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맹세하심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누가 등장을 합니까? 아브라함이 등장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아브라함이 등장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에게 그야말로 난처하기 이를 때 없는 일들만 골라서 보여준다는 겁니다. 난처하기 이를 때 없는 일들만 고르고 골라서 말이죠.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아,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을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니가 믿으니 의인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이것이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우리가 만약에 아브라함이라면 과연 이 약속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게 무슨 중국의 무협소설의 내용도 아니고 말이죠.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 아브라함의 나이도 팔순을 지났다는 말이죠.

(창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리고 창세기 17장으로 가면, 이제 아브라함의 이름이 바뀌는데,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말이죠.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뜻인데, 그런데 정작 그 시점에 아브라함은 자신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는데, 물론 몸종에게서 난 자식은 있었지만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대를 거는 게 아니라,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나님 자신의 맹세를 하나님께서 자신이 전혀 차질이 없이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브라함이 받아들였다는 말이죠.

(창 17: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창 17: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창 17: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창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여기서 마태복음 26장 26절에서 28절을 보겠습니다.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게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인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이것은 내 몸이다. 먹어라. 이것은 내 피다. 마셔라. 그러면 죄 사함을 얻는다”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우리에게 ‘믿어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지금 아브라함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 피를 연구해봐야 지금 우리의 피와 별만 다르지가 않는데, 그러니 그 피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따질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따지면서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따져보면, 예수님의 피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하게 되면, 그렇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윤리와 도덕을 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헌금을 많이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방향으로 말이죠. 그리고 성경을 백독하고, 40일 철야기도를 한다는 것이죠. 이웃을 사랑하고, 죽으면 자기 몸을 기증하고 말이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는 겁니다. 밥 퍼주는 사랑도 하고 말이죠.

그것은 바로 신앙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인데, 너무나도 간결한데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쓰레기 봉지를 들고 환경운동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죽으려고 오셨는데, 오직 그 피와 살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대제사장직 !!

그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고상하게 표현하면 ‘대제사장직’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말이죠.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하늘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필히 대제사장이 있어야 구원이 가능한 것이지, 우리가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대제사장직’ 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맹세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고 병든 자를 고치셨는데, 초대교회 때도 그런 기적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런 기적이 없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말이죠.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은 맞는데, 병도 고치셨는데, 또한 불쌍한 고아와 과부도 돌보셨는데, 하지만 모든 병자와 고아와 과부를 다 돌보신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바다만 보면 걸으신 것도 아니고 말이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는데, 그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인데, 거기에 모든 표적의 초점이 다 맞추어져 있다는 겁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중풍병에서 나아서 구원을 얻었지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은 십자가만을 제시하시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대제사장이니 말이죠.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맹세하심 그 자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맹세는 자기 고집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누가 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더 잘 사는가?” 라고 경쟁을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굉장히 맹세를 많이 했다는 겁니다.

맹세하지 말라 !!

그래서 “여보게, 오늘 내가 이 말씀을 지킨다. - 에이, 힘들텐데. - 아냐, 내가 반드시 지킨다. - 그래, 한 번 해봐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왜 남자들이 연초에 마누라에게 그런 약속을 많이 하는데, “여보, 올해는 내가 반드시 술과 담배를 끊는다” 라고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흘을 넘기기가 힘드는데, 연속극을 보다가도 주인공이 담배를 피우면 따라서 피우고 싶다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의 맹세에는 자기 의가 들어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중심으로 평정을 시키는데, 그래서 “맹세하지 말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맹세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자기 자존심이고 자기 긍지가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해놓고는, 그런데 그것이 자기 의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데, 33절을 보겠습니다.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식으로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고 애를 썼는지, 그것을 다 알고 계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를, 어떤 식으로 가르치고 배우는지 다 안다는 말이죠.

그 당시에 어떤 식으로 가르쳤는고 하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보니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지키세요” 라고, 그런 식으로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이 억압을 하고 못살게 굴었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나의 기도와 같은 것인데, 부흥사들이 부흥회를 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이제 통일이 되면 많은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특히 젊은 새댁들은, 그 아이가 여러분의 아이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그 아이를 하나님에게 바칠 용의가 없습니까? 우리 다같이 금식기도를 합시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엄마는 아이에는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중에 고3이 되어서 대학시험을 쳤는데, 그만 학력고사점수가 300점 만점에 299점이 나오면 아까워서 갈등이 생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점수라고 하면 서울대 의대도 얼마든지 갈 수 있으니 말이죠. 반면에 점수가 120점이 나오면 전혀 망설임도 없이 곧 바로 신학교에 보내려고 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왜 그런 짓거리를 합니까? 부흥사가 맹세를 하라고 해서 맹세를 했는데, 그래서 맹세를 지켜야만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자존심인데, 왜 그런 개인의 자존심을 구원을 받는데 집어넣어야 하느냐는 말이죠. 우리 개인의 그런 자존심이, 그게 우리를 구원하는 근거가 결코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순수하게 아브라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비록 자기에게 자식이 하나도 없어도, 아무런 가진 것이 없어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고 복을 주신다고 하는 그 약속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의 방식이 있었는데, 그때는 약속의 땅을 준다는 것이고, 그러면 오늘날에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와 살이, 예수님의 그 제사장직이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복, 즉 영생의 복이라는 말이죠.

마태복음 5장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34절에서 36절입니다.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 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이게 무슨 말씀인고 하니, ‘맹세’ 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을 이루는 도구이지, 우리의 개인적인 자존심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맹세를 하지마. 왜냐하면, 그것은 너의 일이 아냐. 그것은 내 사업이야. 그러니 너는 맹세할 필요가 없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일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자존심은 구겨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의 맹세 속에는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오기와 같은 것이 들어있는데,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고 훼방하는 요소가 된다는 겁니다.

오토바이 인생 !!

제가 며칠 전에 일어난 어떤 교통사고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는데, 그랜져 승용차가 달리다가 그만 지하차도로 떨어져서, 그 지하차도를 달리고 있던 프라이드 승용차를 덮치고 말았는데, 그 프라이드를 몰던 사람이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다행히 그랜즈 승용차를 몰던 사람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병원에 입원을 해있고 말이죠.

그래서 기자가 가서 물었는데, 왜 그렇게 급하게 핸들을 꺾었느냐고 말이죠. 그러자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는 갑자기 끼어든 오토바이를 피하려고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물론 거기가 지하차도라는 것은 전혀 몰랐는데, 그리고 사고를 유발시킨 그 오토바이는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죠.

여기는 저는 오토바이를 생각해보았는데, 바로 우리가 그 오토바이처럼 살아왔다는 겁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데, 윤리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도록 말이죠. 우리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는 행동이 2차, 3차로 연결되어서, 남들에게 엄청난 비극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한 평생은 오토바이와 같은,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갔는데,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곳에서는 풍파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철없이 아이가 밤 11시가 넘도록 밤거리를 돌아다니는데, 자기는 나름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집에서는 어떻습니까? 온 가족이 잠도 자지 못하고 아이를 기다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뭐라고 합니까? 친구하고 밤에 거리에서 좀 놀다가 왔는데 무엇이 그렇게 나쁘냐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어른들은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러면 나이가 들면 철이 듭니까? 50이 되어도 50 나름대로의 철없음이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물론 80이 되면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서 자기 밖에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오토바이와 같은 행동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말이죠. 그런 줄 알고 겸손하게 가만히 있으면 모르는데,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또 맹세를 하는데, “아버지, 제가 무엇 무엇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자기 맹세와 오기와 자존심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하나님에게는 자기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마구 대들고, 그것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고, 또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라캉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라캉’ 이라는 학자는 이것을 매우 진솔하게 밝혔는데,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아버지로부터, 주위로부터 구축된 이데올로기를 가지게 되었다” 라고 말이죠. 자식은 원하지도 않는데, 그런데 부모의 소원이 그 자식의 무의식 속에 담기게 되는데, 성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식은 아버지에게 본 때를 보여주기 위해서 상경해서 결국 성공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런데 정작 아버지는 그 사이에 돌아가시고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식은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를 들고 아버지의 무덤에 가서 우는데, “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좋은 날을 보셨을 텐데, 왜 이렇게 일찍 돌아가셨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의 한 평생이 자기 인생이 아니라 아버지의 인생인데, 자기 인생은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원하던 인생을 살았는데, 그러니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죠. 라캉이 그것을 밝혀내었는데, 그것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라고 하는데, 일종의 정신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정신병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런 행세를 어디서 한다는 겁니까? 교회에 나와서는 “하나님 아버지!” 라고 부르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제가 열심히 사는 것을 아버지도 보고 싶지요?” 라고 하는데, 그러니 정작 기도하는 그 내용은 자기 아버지에게 하는 소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는데, 물론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인정하지만 말이죠. 그리고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오기를 마구 부리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실패투성이의 인생인데, 전혀 신앙이 아니라 종교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실패와 되풀이되는 헛된 맹세로서 도배를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죠. 이것보다도 더 큰사랑은 없다는 겁니다.

항상 자기 밖에 모르는 우리의 모습인데, 인간은 항상 자기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철없는 오토바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꾸만 자기 주장만 내세운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깊이 살펴보아야 하는데, 아브라함의 행함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사태를 파악하고 그 사태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죠. 자기가 행한 것이 있어서, 자기가 잘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죠.

이제 끝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고 마치겠는데, 오늘 본문 19절을 보겠습니다.

(히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영혼의 닻 !!

제가 방금 말씀드린 이것을 가지고 여기 19절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영혼의 닻’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닻이 무엇인가요? 닻이란 어는 한 지점에 고정적으로 매여있다는 뜻인데, 그러니 행동반경이 있으면, 뭔가 제한하고 그 이상은 나가지 못하도록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데, 챙겨도 자기 가족만 챙기고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의 행동반경이 닻이 뽑히는 정도까지 가지 않도록, 즉 구원이 뽑혀나갈 정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조치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닻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착함을 믿으면 안 되는데, 아무리 교회에 충성봉사를 해도 그것을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오직 주님이 준비하신 영혼의 닻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남들이 보기에 초라하고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데,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그 강도처럼 죄만 짓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영혼의 닻이 되어서,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있도록 허락하신 줄 압니다. 그러니 저희들도 아브라함처럼 그 사건을 온 몸으로 받아드릴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1,12 오후 3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