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20:11-18 / 너희의 하나님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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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하나님 2003년 7월 2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20:11-18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0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20: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 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하라 하신대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오늘 본문에 보니 참으로 인간의 지혜로 감당 못할 난감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천사가 나타나고, 예수님께서도 다시 나타 나셨습니다. 과연 이 사실을 사실대로 믿어야 합니까? 만약 믿는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포착되지 않는 현실을 아는 사람이기에 겁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이 본문의 사실을 실제 현실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는 수 없는 인간들 끼리 노는데 합류해서 과학적인 인류의 미래상이나 설계하고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부활의 사실을 실제 사실로 알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무지몽매한 일반 인간 사회를 보고서 겁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가 전혀 예수님도 못 알아보고, 두 천사도 못알아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부활이란 단지 사람이 죽었다고 소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있었던 그 목숨이 그대로 되찾는 것이 결코 부할이 아닙니다.
전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하찮은 로마 졸병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뺨 맞고 옷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 그 모습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분으로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못 알아보고 동산지기 줄 알았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존의 인간의 목숨을 연장시켜 주는 형식으로 부활시키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창세기 3:22-24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게 하시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결코 인간 중심으로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저질러 놓은 일은 단지 인간에게만 손해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전부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교회에 다니면서도 자꾸만 개인적인 불행이나 슬픔을 해결받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서는 이제 본인들이 죽게 되었으니까 그저 생명나무 열매만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하리라고 여기는 심성과 같은 뜻이라고 보면 타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생명나무 과실을 치워버린 취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인간이 죄지은 상태로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었다면 영원한 저주입니다. 저주란 개인적인 행동의 잘못에서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염두에 둔 저주의 세계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선악으로만 통치받게 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악마를 다룰 때 이렇게 다루십니다.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불행하고 저주스럽게 사는 것은 선한 일을 많이 못하고 나쁜 짓을 많이해서 그러하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상태로 영원히 살아본들 그 자체가 곧 저주입니다. 인간이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 하고 본래의 하나님의 구상하는 인간상하고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했던 인간은 아예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지 않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세계를 구상하시고 계시냐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 나라의 개시인 부활조차도 선악을 아는 지식과 상관없는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활의 능력으로 휩싸이게 되면 선악을 아는 지식과 상관없는 원리에 둘러싸이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부활의 세계 안에서는 선악을 아는 지식을 버려야 합니다. 부활시에는 모든 성도들은 하늘의 천사와 같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2:30에 보면,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시집아나 장가를 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활의 신분을 따내기 위해 우리 인간들이 갖은 선행과 노력을 기울린다고 달성할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활의 나라에서 허용되는 능력이나 원칙은 인간의 행함의 산물에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행하심에만 근거를 갖고 있을 따름입니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는 선악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인간도 이 선악 원리에 위해서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인간의 서글픈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선악을 아는 지식을 버리게 하십니까? 그 방법은 생명나무 과실의 본질로서 선악과의 본질을 대체해 버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선악을 아는 자는 죽여버리고, 선악의 지식과 무관한 자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7:3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 했습니다. 전에는 생명 나무 과실을 치워버리시더니 이번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부러 죽으셔야만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분명 예수님은 버림받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 때문에 버림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대신 짊어진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이 죄가 바로 근원적으로 선악을 아는 죄입니다. 인간들은 무엇을 해도 자신이 행한 선행으로 복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3:22-24의 원칙을 한시로 놓쳐서는 아니됩니다. 이것 놓치면 다른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분명히 버림받았다고 주장하셨던 그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는 생생하게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선악의 세계가 아닌 영생, 그 자체의 세계에 속한 분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사도 바울도 알았기에 그는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활의 세계가 어떻게 선악의 지식과 상관없이 우리들에게 올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3:36-38에 보면, 베드로와 예수님과 대화가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여기서 베드로는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사용하여 생명나무 과실까지 다 먹겠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말립니다. 말리는 이유는 단 한가지, 그런 상태로 예수님을 따라 순교해봤자, 예수님은 천국이고 베드로는 지옥갑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먼저 천국에 처소를 장만해야 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천국의 처소'란, 예수님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는 그 관계처럼 그런 관계가 제자들에게도 형성되게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의 새능력을 받는 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 혜택에 대해서 오늘 본문 17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 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하라 하신대"
영생은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선물로 그냥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주었다"는 착한 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런 생각까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 합니다. 남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택하심과 사랑 뿐입니다. 영생이란, 그리고 부활의 세계란 이렇게 해서 오직 택한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주신 영생을 크게 감사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부활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면서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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