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9:38-42 / 예수님의 장례 본문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3061899.WMA
|
예수님의 장례 2003년 6월 18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9:38-42 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19: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19:41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무덤이 있는지라 19:42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장례란 죽은 이에 대한 인간으로서 마지막 예의입니다. 그냥 들짐승의 뜯겨 먹히게 할 수는 없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마지막까지 갖추어 주자는 의도에서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장례 치르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요 예수님을 흠모하던 여인들도 아닙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제자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요셉과 그리고 전에 몰래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성실하게 수행하게 됩니다.
이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서는 육의 한계를 보여주었던 사람입니다. 자기 딴에 참으로 예수님에게 예의를 갖추고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인정하고 싶다는 의사까지 비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니고데모에데 말씀하기를, "사람이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유대인의 선생이면서 이것도 모르느냐"고 책망도 받은 자입니다.
그 니고데모가 오늘 본문에서 또 다시 육으로서 할 수 있는 전부를 보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성심성의껏 애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통할 수 있는 터널은 없습니다. 꽉 막혀 있습니다. 육적으로 아무리 미덕을 보여도 그것을 영의 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와 원인이 무엇일까요? 육의 사람들에 의한 예수님의 장례치름은 인간의 육체가 죽음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는 점을 확실히 말해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달리 이야기합니다. 즉 인간의 육은 율법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한계에 갇혀 있다고 말입니다.
이 점은 성경을 아는 자들에게만 아는 이야기입니다. 민수기 19:11-13에 보면,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그는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죽은 시체를 만진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지 못하고 부정스러운 자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법을 내리시는 걸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영생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그 영생이신 하나님께서 동거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거하게 되는 백성은 결코 죽음의 흔적과는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흔적이 그냥 남아있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동거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순수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는 참으로 인간에게 무리한 요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의 흔적을 내내 달고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땀, 소변, 기타 인간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거룩의 세계를 더럽히는 부정스러운 것들입니다.
물론 그 때마다 씻는다고 씻지만 궁극적으로 죽음의 더러운 흔적으로 인간에게 떠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율법도 떠나지 않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죽게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이 우주 어느 한 구석에 박혀 있다할지라도 율법의 조항은 그를 향해 날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어이 그 인간의 죄를 끄집어내어 죽게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없이 인간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다 율법의 표적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셉과 니고데모의 눈에는 예수님도 자기네들과 같은 그냥 육체를 지닌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의 장례를 치르면서 인간으로 해 줄 수 있는 최후의 예우를 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마침 유월절 예비날이었습니다. 물론 그 다음날까지 장례가 이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축제일에 죽음의 장례식이 벌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은 영원히 율법의 저주를 온 몸으로 받아야만 할까요?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서원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나실인은 시체를 만져서는 아니됩니다. 즉 죽음의 흔적은 지워지고 생명의 모습만 드러내며 헌신해야 할 사람입니다.
율법은 바로 이처럼 생명이 인간에게 있을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죽음의 흔적은 지우면 됩니다. 어떻게 지울까요? 아예 생명 자체만 있는 세계를 시작하면 됩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과 율법의 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죽음의 원인을 율법하고 상관없이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인간의 죽음을 반드시 율법과 관련지어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가 전혀 율법로부터의 정죄 당하지 않는 세계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성도를 가지고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로마서 7:4에 보면,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와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란 서로 반대되는 세계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부활 세계에 놓인 자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에 해당됩니다.
히브리서 9:27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들이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으신 법칙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따라서 안죽겠다는 식으로 이 세상을 버티는 것은 의미없는 일입니다. 심판을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24에 나오는 말씀과 같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마지막 심판의 시기에 찾아오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찾아오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를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옯겨놓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을 갖는 것 자체가 율법과 부활을 관계를 제대로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개인적인 죽음에서의 부활이 아닙니다. 율법의 정죄로부터부터 저주 당할 운명에 놓여 있는 자들을 위한 첫 번째 부활입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이 더 이상 정죄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도 없고 따라서 죽음도 없는 세계를 만드신 것입니다.
성도가 더 이상 율법에 대해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근거와 이유는 놀랍게도 성도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란 예언과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가 곧 율법과 성도가 헤어지는 자리입니다.
물론 율법이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들을 품고 살아가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선을 행해도 그 선을 행한다고 자부하는 그 현장에 어느새 악도 같이 등장됩니다. 교만과 자만과 상대방에 대한 멸시와 무시는 한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로소 우리가 온전히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율법의 정죄를 받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율법으로부터 정죄를 받는 입장이라면 결코 그런 사람은 여전히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자입니다.
요한복음 5:24의 말씀처럼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느니라"에 해당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알아야 될 것은 바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저 자신의 소원이나 성취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신에게 비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현재 우리가 어떠한 신분에 놓여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성도로 하여금 더 이상 율법로부터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가 어떤 차이가 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육은 아무리해도 영이 될 수 없습니다.
정중하고 신사적으로 예수님을 위한다고해서 그것이 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보면서 우리의 육도 장례되었음을 인정합시다. 육이 장례치른 것은 율법에 대해서 장례치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십일조 안해도 정죄함이 없고, 안식일 안 지켜도 정죄함이 없습니다. 탐내어도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탐내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죄라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 가를 바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한복음 20:11-18 / 너희의 하나님 (0) | 2013.12.28 |
|---|---|
| 요한복음 20:1-10 / 부활 (0) | 2013.12.28 |
| 요한복음 19:31-37 / 십자가에 대한 예언 (0) | 2013.12.28 |
| 요한복음 19:23-30 / 다 이루었다. (0) | 2013.12.28 |
| 요한복음 19:17-22 / 유대인의 왕 (0) | 2013.12.2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