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9:31-37 / 십자가에 대한 예언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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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대한 예언 2003년 6월 11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9:31-37
19: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19: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19: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19: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19: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만약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으시거든 이렇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거저 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의 인품이나 가진 것 가지고 따시시지 않고 말입니다.
무엇을 주시는가 하고 묻는다면 오직 영생을 그저 주신다고 답변해 주시면 됩니다. 자신이 성도가 되었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자꾸 주시려고 한다는 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가진 것으로 하나님에 나서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거부의식입니다.
사람이 가지게 되면 그만큼 긴장하게 됩니다. 긴장이란 인간이 '자기 지키기'의 일환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다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그 생명이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에게 전달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누구로부터 고급 전자제품을 선물로 받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설명서가 붙게 됩니다. 고가의 전자제품이기에 설명서대로 잘 취급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잘못 다루어 고장내면 그 비싼 가치는 하나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선물을 주실 때는 설명서를 붙인채 보내오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미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가지고 사람들의 요란스럽게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창으로 엎구리를 찌르지 않나 어떤 이는 다리를 꺽으려고 시도하다가 그만두지를 않나 또 어떤 이는 이 광경을 보고서 하나님의 예언된대로 그 분이 바로 메시야 맞다는 식으로 정리하기도 합니다. 이미 돌아가시 예수님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새삼스럽게 왜 이런 작업들이 일어나야만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오게 되는가를 밝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수를 사형시키기 위한 형틀입니다. 즉 죽이기 위한 기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이란 철저한 죽음, 완전한 죽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과연 죄수가 완전히 숨이 끊어졌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게 됩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도 숨이 안끊어지고 도로 살아남을 가능성을 완벽하게 없게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입니다. 가사 상태에 놓이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은 이 철저한 죽음이 전제될 때만 우리 성도에게 전달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참된 생명이란 철저한 죽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5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여기서 '꺾으신 뼈'라는 말은 제물의 완전한 죽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제물이 완전히 죽은 것이 어떻게해서 성도에게는 '즐겁고 기쁜 소식'이 되고 그 뼈로 왜 즐거워해야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회사에서 보너스를 두둑히 받은 것으로 즐거워해야 하고, 병원에서 퇴원한 것으로 즐거워해야 하고, 신부감을 만난 것을 가지고 즐거워해야 하고, 교회에 교인수가 부쩍 부쩍 불어나는 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맞는 이야기아 아닐까요?
우리가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참된 성도가 무엇으로 인하여 슬퍼하고 있는가를 우선 알아봐야 합니다. 시편 51:3-5에 보면,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 생각에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인간들 손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가능성 때문에 보람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불가능한 일을 눈치 채게 되면 곧장 슬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말하기를,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본인의 힘으로 해결 불가능한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과연 죄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죄 가운데 그냥 그대로 죽을 수 밖에는 없는가? 하는 점이 성도의 최대의 관심사가 됩니다.
하나님쪽에서 뭔가 조치를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쪽에서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단순히 동물의 희생 제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생명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다윗 자신을 제사의 수혜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 제물이 희생제물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시편 51편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찾아와서 다윗의 죄를 지적했을 때 예언한 예언입니다.
만약 다윗이 그저 동침만 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그 제사의 제물로 인해 저를 용서해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다가올 때 비로소 그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즉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죄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아는 수준에서의 죄인됨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란, 단순히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발언만 하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어떤 입장에 있음도 미리 말씀하시는 자입니다.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이 찾아 왔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로 인하여 저 제물이 희생되었군요. 만약 하나님께서 그냥 제사를 드려라고 했다면 저도 얼마든지 번제와 속죄제를 무한정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당에서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바로 '상한 심령' 그 자체임을 알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나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은 예수'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의 피는 기껏 주술적인 미신 기능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마치 잉크병에서 잉크 찍어 내듯이, 인간들의 죄짓고 난 뒤에 편리한대로 예수님의 피를 찍어내어 자기 마음에 바르면서 죄씻음의 효과를 보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기껏 죄 씻어주는 하인으로서 이 땅에 나타나신 것 밖에 안됩니다. 다윗은, 제물의 꺾어진 뼈를 자신의 죄로 인해 그 뼈가 꺾이도록 원인제공 했다는 점을 절실하게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꺾여진 뼈가 아니라 꺾여지지 않는 뼈로서 예언을 성취한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34편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거기 19-22절을 보면,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시편 51편에 의하면 자기 백성의 죄로 인해 예수님은 희생제물이 되셔야 하기에 반드시 뼈가 꺾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시편 34편에 의하면, 그분의 의인이기에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심으로 인해 절대로 꺾여서는 아니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양쪽편에 같이 사형집행을 당했던 자들은 어지없이 뼈가 꺾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뼈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같이 죽음을 당하지만 강도들의 죽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의인으로서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설명해 주는 설명서와 같은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뼈가 꺾여서는 아니될 의인을 인간들은 꺾이도록 시도하므로서 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중심으로 예수님을 죽게 한 인간들의 행위는 결코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 악한 것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51편에 의하면 참된 성도만이 제물의 죽음에 자신도 죄로서 가담하고 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소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두 가지 사실이 모두 들어있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죄없는 의로운 분으로 억울하게 죽으셨다는 사실과, 이렇게 예수님을 죽게 만든 원인 제공자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고백하는 자만이 참된 성도로서 희생 제물의 효과를 누리게 된다는 사이 바로 그것입니다.
특히 "찌른 자도 볼 것이요"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스가랴 12:1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취지는 딴 게 아니라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자신의 과오로 인해 애매하게 죽으신 자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마치 자기 집 맏이가 죽은 것과 같은 슬품으로 통곡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가 "찌른 자도 볼 것이요"라는 말씀은, 예수님에게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던 그 로마 군병의 소속과 인적 사항을 파악해서 나중에 그 놈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복수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비록 그러한 정황은 철없는 로마 군병이 연출했지만 진정한 성도같으면 예수님을 창으로 찔려 죽인 당사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예언을 말합니다.
생명은 이런 식으로 성도에게 다가옵니다. 성도로 하여금 자신이 애초에 죄인으로 태어났음을 고백케 하는 식으로 생명은 작용하십니다. 이런 회개의 열매가 아닌 생명은 생명이 아닙니다. 주술이요 미신적 효과를 노리는 사이비 믿음입니다. 그저 천국 가는데 예수님의 피를 이용해보겠다는 심보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저질러서 발생된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마치 우리네 집 맏이가 죽은 것과 같은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 생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죄로 인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하나님에게 죄밖에 드린 것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오히려 아드님의 생명을 주시니 다만 황공할 뿐입니다. 늘 자숙하는 자세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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