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9:17-22 / 유대인의 왕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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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 2003년 5월 28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9:17-22
19: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곳에 나오시니 19: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19: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19: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하니 19: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인간이 심판하는 자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무관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심판이 얼마나 차이나는 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에서 얼굴을 돌려서는 아니됩니다. 그것은 그 십자가에 매달린 분이 다른 분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자.. 과연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녔을까요? "유대인의 왕이 죽다!" 이것이 그 당시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보는 사람들의 견해였습니다. 그러니까 현 유대나라의 그 실상은 도리어 유대인의 왕을 심판해 버리고 죽이는 나라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염두에 둔 유다나라는 달리 있는 것이 됩니다.
그 관권은 누구를 진정 유대인의 왕으로 삼을 것인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민족 당사자들의 의견은 다릅니다. 진짜 유대왕이 죽은 것이 아니라 유대 왕을 사칭한 가짜가 그 정체가 들통나서 죽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절과 멀리 떨어진 요즈음 사람들이 볼 때에 그 유대왕이 진짜가 되었던 가짜가 되었던 상관없이 단지 어떤 한 사람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그 결과로 십자가에 죽게 되었다는 점 뿐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유대인의 왕이든 아니면 가짜이든 그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태가 그렇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복잡한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십자가 팻말에 빌라도가 무심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놓았던 아니면 예수님의 죄없음을 동정해서 마지막 가는 길에 위로라도 해주겠다는 동정심의 발로에서 나온 조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목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관점에서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걸어오신 모든 행적과 말씀을 해석해야 된다는 점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의 형틀까지 오기까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해오셨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5-7에 보면,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12명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전체 지파를 염두에 둔 조치였습니다. 마치 한 지파당 하나씩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천국 도장을 받게 된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명단이 지파별도 골고루 소속되어 있습니다. 즉 12지파에 궐이 생기거나 지파 누락이 생기면 온전한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는 겁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준 그 축복된 언약과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에서 유대지파를 통해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이미 수립되었다고 공포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 왕되시는 분이 무엇을 하실까요? 요한계시록 5:5에서는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분은 일은 요한계시록 3:7에 다음과 같이 분명히 나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여기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분은 천국 문을 열게 되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유대나라, 즉 유대지파 중심의 나라에서 유대인의 진정한 왕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천국권을 몽땅 한 손에 쥐고 계신 분이 등장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마태복음 10:5-7의 말씀을 다시 조명해 봅시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그리고 말하기를 천국이 가까웠다'고 알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 말씀이 그대로 믿어지십니까? 천국문을 관리하시는 그 왕께서 오셨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로는 천국 갈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 보내신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그 작업 자체가 구약에서 이미 예고된 왕께서 친히 하실 일이라는 겁니다. 즉 천국으로의 잠입이 인간쪽에서 애쓰고 노력한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 몸소 찾아드시고 다가오셔서 천국 복음 소식을 알려주셔야 가능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12제자들을 각 이스라엘 고을마다 파견시키십니다. 마치 12지파 별로 할당된 숫자를 마저 채워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이라는 용어를 예수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 지파의 왕이 오셔서 꼭 이런 일을 왜 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구약 때에 예언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장치 오실 유대인 왕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책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7:24-27에 보면,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즉 12제자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으면 천국은 꿈도 꿀수도 없는 그런 환경에 돌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백성이 되지 않는 자는 그것으로 곧장 지옥 백성으로 들통나는 바입니다.
자... 이토록 완벽하게 오신 진짜 유대인 왕에 대해서 왜 유대백성들은 적대시 한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은 다른 모습의 왕을 고대했기 때문입니다. 장엄하고 화려한 대장군의 모습으로 왕이 도래할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무시했습니다. 다른 민족을 징벌하고 저주하고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지파를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잊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9:28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세상이 새롭게 되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새롭게 된다는 것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유대인의 왕 되심은 예수님의 '인자'되심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초라한 인자, 낮고 천한 모습의 인자, 이런 인자는 곧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어린 양의 역할로 인해 주어진 낮은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참된 백성이라는 이러한 초라한 왕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파악했어야 합니다. 인자되시는 예수님은 그 초라한 모습으로 죄인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메시야됨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12제자들 통해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초라한 모습의 왕을 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기꾼이 유대인의 왕을 사칭하여 민중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자로 간주했습니다. 즉시 조치를 내려야만 하는 사람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수 명패에도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써줄 것을 빌라도에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예수님의 왕되심이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낮고 천한 모습의 예수님의 증인들과 형제들을 통해서 복음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마태복음 25:38-40에 보면,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는 주목하지 않는 세상의 돌아가는 추세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지극히 작게 취급해 버리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진리는 이와같이 누구로부터 쉽게 무시당하고 무관심하게 처리당할 수 밖에 없는 약한 자의 모습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물론 생활고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복음입니다. 따라서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가난하기에 부요한 천국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에도 여전히 복음은 비밀이요, 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들을 수 밖에 없는 소식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제일 견디기 힘든 점은, 복음을 알고 있다고해서 세상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권위가 생기지도 않고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너무나 하찮게 여김을 당하는데서 오는 자존심의 뭉개짐입니다. 복음 안에는 너무 너무 귀한 예수님의 목숨과 생명이 함유되어 있는데 반해 사람들은 그 복음을 너무 너무 값어치 없는 것으로 내팽개치고 짓밟을 때 정말 가슴 속이 황폐해지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는 이런 모습으로 기분 나빠할 자격도 못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동일하게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차라리 혹시 복음을 받아드린 자가 발견되거든 눈물나도록 고맙고 반갑게 대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이가 무시해도 되는 그 하찮은 내용을 자신의 생명의 은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보통 큰 변화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조차 예수님을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취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대신 '진짜 다윗의 뿌리에서 나온 유대인의 왕'이기에 그분이 천국 문을 열어주면 감히 닫을 자 없을 것이요, 그분이 천국문을 닫아버린다면 감히 자기 힘으로 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분의 백성이 된 것은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초라함과 천대받음이 우리 자신께서 전달될 까봐 내심 불안해있던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옵소서. 차라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욕을 얻어 먹게 된 것을 일생의 영광으로 알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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