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6:1-4 / 예수님과 제자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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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제자 2003년 1월 29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6:1-4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 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16: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16: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어떻게하면 신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것은 교회 나가는 사람의 중요한 관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상식선에서 하나님을 알면 다 신자가 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공연히 제자들을 선발하신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모델은 예수님 곁에 있는 제자들이 보여주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택함을 받았고 신자가 어떤 운명의 길을 가는지를 우리보다 앞서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신자됨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제자들을 한낱 과거 인물로만 처리하고 오늘날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면 남는 것은 우리들의 구원 의지 뿐입니다. 구원받겠다는 의지가 강렬하다고해서 천국에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을 신자로 행세한다고해서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선택해 주셔야 합니다. 마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재수없는 일이 아니라 행운아 중의 행운아입니다. 왜냐하면 천국가고 싶은 자가 한 둘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되는 행운은 모두의 것이 아닙니다.
사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찜을 당한 자들 뿐입니다. 나머지는 탈락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아보겠다고 열심을 내는 것과 실제로 구원받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 계획안은 너무나도 독단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 자체를 믿을 수 없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은 다른 하나님을 신봉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을 들어가기를 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모두 다 천국의 자녀가 되는 방식 말입니다. 물론 이 방식은 예수님 입장에서 단호하게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거짓 구원관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생각과 기존의 사람들의 생각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는 본문 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예수님도 이미 이런 다툼을 있을 줄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자들이 다름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충실히 살려고 애쓰고 있는 자라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 보아야 합니다. 흔히들 양쪽편이 서로 다투면 우리들은 중간에 나서서 화해시키려고 유도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방식과 기존의 방식이 서로 다툰다면 우리는 어떤 제안을 내놓고 둘 사이를 화해하려고 할까요? 아마 이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신데 그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려 아드님을 보냈기에 이 사실을 하나 더 추가해서 믿으면 이 둘 사이에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라는 중재안을 제시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전혀 예수님의 신자됨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예수님의 신자라면 반드시 예수님 때문에 수난을 받게 되어 있고, 그것도 소위 하나님을 잘 안다는 자들로부터 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참된 신자란, 기존의 하나님관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관을 증거한다는 비난을 한 몸을 듣게 되는 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만약 예수는 믿되, 기존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신의 존재와 모순되지 않은채 단지 추가적으로 하나님의 독생자에 대한 정보을 연결시킬 수 있는 그런 예수로 안다면 그 사람은 전혀 신자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존의 하나님관을 옹호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존의 하나님관 때문에 진짜 하나님을 알리려 오신 자신이 쓸모없는 자로 취급받아 죽게 된다는 사실을 내세우려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자요 참된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를 믿는다는 그 자체가 기존의 하나님관을 과감하게 버리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는, 기존의 하나님관에 철저했던 사람입니다. 보다 더 하나님 뜻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소위 예수당이라는 이단을 처단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내려갔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완전하게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너희들이 참 하나님을 모른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소개하는 하나님관과 기존의 아담의 후예들이 알고 있는 상식적인 하나님관이 따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둘 사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평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곧잘 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인간이든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단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가 아마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 하는 식으로의 변화가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 명확하게 하려면 참된 하나님관을 갖게된 사도 바울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하나님관에는 십자가 사건을 불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나 아니지나 상관없이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천국을 차지하고 계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천국관은 아담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 천국관과 하나님관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 자신이 죽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다른 쪽에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서부터 새로 출발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자신은 이미 죽어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약 상식적으로 단지 하나님의 존재만을 믿고 있다고 여긴다면 이런 고백이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설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인간들의 잠시 잠간 잘못된 오해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 손치더라도 여전히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관을 전부 철거시킬 필요까지는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단지 기존의 하나님관에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그 구원의 요력을 하나 더 첨가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들을 귀를 갖고 있고 눈이 뜨인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십자가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도달한 십자가이기에 나의 진정한 본질은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되는 십자가이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 고백합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신자됨의 모델을 어디서 찾습니까? 혹시 우리네 상식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야기하셨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인줄을 모른다"고 말입니다.
정말 제대로 안다면 사도 바울과 같이 귀와 눈이 동일하게 열려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즉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 목숨의 한계와 무가치성까지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상황이 이토록 극과 극이기에 이점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운명에 수난이 찾아듬을 미리 알려주신 겁니다.
바로 이런 관계가 성립되어 있어야 신자라는 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존의 하나님관을 곧 악마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칭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곧 사탄의 자녀라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과 에수님의 견해 이렇게 극단적으로 차이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인들은 무슨 안일한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로 인해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겁을 내고 있습니다. 대충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추가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첨가는 것으로 구원이 확보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바로 본인, 그 본인 자체를 십자가 사건에서 새로 출발시켜야 하는 존재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출발하지 않고, 즉 자신은 이미 죽은 존재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예수님으로 인해 수난받으려고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보다 더 우선해서 돈 버는 일과 교회 지키는 일 등, 그런 일로 인해 수난을 받고자 자청하고 나섭니다. 왜냐하면 예수보다 돈과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 중요한 일이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존재는 단지 그런 중요한 돈과 교회단체를 지탱해주는 수호자 역할만 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귀가 열리지 않고 눈이 열리지 않는 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인 것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참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출발시키시는 그 예수님의 아버지, 오직 그 신만이 참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 이외는 아무도, 그 누구도 참 하나님을 모르게 됩니다. 다른 이들은 악마를 그저 참 하나님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내세우는 자를 핍박합니다.
그런 짓들을 하면서도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런 일이 곧 참 하나님 보시기에 충성된 자세라고 간주합니다. 만약 지금도 우리가 이런 부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참 신자로 부름을 받지 못한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택함 받았다는 그 자체로서 이미 모든 행운과 복을 미리 다 받은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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