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5:22-27 / 죄와 보혜사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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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보혜사 2003년 1월 15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5:22-27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15: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15: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15: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한 말을 응하게 하려함이니라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죄'라는 말이 나옵니다. 죄에 대해서는 누구나 거북스러워합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죄란 될 수 있는대로 감추고 싶어합니다. 왜 죄를 감추고 싶어할까요?
그것은 사람들이란 잘난 맛으로 살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장점들을 개발해서 나열해 놓고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그 사람의 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찬물을 끼얹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는 서로들 "쉬 쉬"하면서 못본척 넘어가 주는 것이 상호간의 예의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사회에서 환영받으려면 이 원칙을 준수해야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이런 원칙으로 뭉쳐져 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이 원칙에 대드는 인간이 있다면 그 사회에서 배척받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런 원칙으로 밀어 붙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직접 이 인간 사회에 내방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영접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었다고 장담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소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죄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상한 그런 하나님 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기 저기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예수님은 더욱 더 강하게 그들의 죄를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여기서 잠시 우리의 현재 사정으로 되돌아와 봅시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번 일요일 낮 예배 때 우리 교회를 방문한다고 칩시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환영할 분위기로 화기애애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교인들 하나 하나에게 축복의 말씀을 능력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교회에 오셔서 온 교인들을 모두 한 줄로 세워고서는 한 사람 한사람마다 전부 죄만 잔뜩 지적하시고서는 그 다음날 구름타고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칩시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경험을 하고서 뒷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화가 나 있겠습니까 아니면 도리어 속이 다 시원하시겠습니까?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일이 교인들을 불러다가 "훌륭하다, 잘했다"고 칭찬만 하시고 돌아가셨다면 남아 있는 우리네들 마음이 후련하겠습니까 아니면 허탈해지겠습니까? 아마 허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별없는 허영심이 우리의 마음을 부풀려놓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학교 교육에서, 학생들에게 칭찬을 남발하게 되면 학생들은 자기 주제 파악이 안되어 자만에 빠지기 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속제제물이 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따라서 속죄제물이 은총으로 작용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본질이 죄인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은혜란 죄가 넘치는 곳에 더욱 넘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은혜가 속죄제물이라는 낚시의 미끼라면 전적인 죄 의식만이 그 미끼와 고리를 형성하게 됩니다. 만약 죄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평생 은혜라는 것도 모르는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은혜와 연결되지 않았다는 말은 구원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의가 아니라 죄입니다. 이 점을 인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모조리 죄만을 지적해 주신다면 우리로서는 최고의 축복을 받은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은혜가 은혜답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은 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칭찬만 잔뜩하시고 떠나신다면 오히려 우리의 본질과 어긋나는 이중 생활에 짓눌려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의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본질을 분명히 폭로하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으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나옵니다.
즉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전에 인간 세계에서는 될 수 있는대로 인간의 본질을 죄가 아닌 것으로 간주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칭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오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판국에 예수님이 임하고 나니 그 모든 생각 자체가 죄악된 사고 구조로 들통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사람들은 나름대로 선과 악의 기준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준에 의해서 사람들은 될 수 있는대로 죄를 멀리하고 선과 가까이 하려고 노력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선을 향한 마음 성향을 스스로 착한 마음이라고 장담했던 것입니다. 즉 선과 악에 대한 제대로 된 기준을 내세우며 살아보겠다고 마음 먹는 것 자체가 의로운 마음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일방적인 의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등장하고부터는 도리어 그런 생각 자체도 죄악된 것으로 판정된다는 겁니다. 이제 그 인간적인 기준을 포기하라는 것이 예수님 생각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임을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과연 인간들이 기준의 자기 생각을 쉽게 버리고 이러한 기준을 가볍게 받아드릴까요?
그럴 능력은 인간들에게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이에게는 자신이 본질상 아예 죄인이며 의로운 면은 전혀 없다는 생각이 생기는 겁니까?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다른 분의 능력입니다.
이 '다른 분'을 오늘 본문에서는 '보혜사'라고 하십니다. 2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혜사란 옆에서 돌보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능력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다고 한다면 구태여 예수님께서 따로 보혜사를 우리 곁에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기존의 모든 인간들이 내세우는 의와 죄의 기준을 단호하게 철회하고 그 대신 예수님의 기준을 손쉽게 받아들이게 된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하게 된 사람입니다.
23-24절에 보면, 누구든지 정상적으로는 예수님을 미워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관찰입니다. 또 인간이 당연히 예수님을 미워해야지만 하나님의 예언하신 그 말씀이 실효성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원리가 매우 단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이 죄인이라는 예수님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본인의 능력이 아니라 순전히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예수님의 견해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하고 기존의 다른 사람과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거론하고 나오는 모든 설교라는 것은, 반드시 "왜 인간은 죄인 일 수 밖에 없는가?"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지적해 들어가시면서 자신의 은혜의 선물의 가치를 더높이는 전략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설교를 해보면 기이한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의로운 성과를 챙기고 싶어 노력한다는 현상 말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자신이 죄인됨을 알고, 보혜사의 능력과 인도하심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이런 모순된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까?
이 사람들은 실제로 성령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그러합니다. 즉 죄인인 척을 하는 사람이요, 성령을 받은 척을 하고 있는 사람이요,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척을 하고 있으면서 달리 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구원됨의 여부를 자신의 착함과 의로움에서 증거를 찾아 확인해 보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예수님의 죽으심은, 전적인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소 죄인인 자를 겨냥해서 죽으신 것이 됩니다.
즉 모든 것이 죄가 되는 사람을 위한 대속의 제물이 아니라, 군데 군데 죄악된 행도과 실수를 저지르는 불완전한 사람을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는 셈이 됩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요 진정한 예수님의 뜻도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약점 부분만 보충해 주시려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은 전적 무능력합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스스로의 판단력에 의한 주어지는 결실이 아닙니다. 오로지 성령만이 인간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됨을 깨닫게 해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부터 제대로 모르는채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일러준 바, 곧 그것이 우리의 본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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