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5:7-8 / 친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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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친구 2003년 1월 1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5:7-8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진해서 다른 사람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설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가 되겠다는 말은 스승 되기를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제자보다 분명 높은 자리입니다. 따라서 낮은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제자 자리를 스승 자리보다 더 선호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동기는 본인도 하나님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란 온 우주에서 최고의 자리입니다. 이 최고의 자리에 대한 염원은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다 새겨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이란 더 높은 자리를 탐내게 되어 있고 그 자리를 쟁취하게 되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권력의 자리에 앉았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신의 자리마저 차지하지 않았기에 그것으로 인해 늘 불만스럽기 마련입니다. 즉 "왜 세상은 내 원대로 움직이지 않는가? 내가 하나님이라면 세상을 이런 식으로 경영 안 할텐데, 아니 짜증나 하나님은 지금 뭣하시고 계시냐"하고 불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죄로 물든 심성의 결핍증세입니다. 아무리 높은 권세의 자리에 앉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자리는 내 제자가 되는 그것으로 족하고"고 말입니다. 제자란 결코 스승의 자리를 추월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의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 뽑으심과 그들이 하게 될 일에 대해서 나열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4-25에 보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스승과 함께 고생하고 싶어서 자진해서 제자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아무나에게 돌아갈 수 없는 엄청 큰 축복의 자리를 주시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되는 것이 그토록 큰 행운인 것입니까? 이 점의 해답은 하나님의 포도나무 경작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오로지 포도나무 한 그루에만 집중하십니다.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도나무 과실이라는 것이 어떤 것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이 염두에 둔 포도나무란 오직 이스라엘 뿐입니다. 따라서 과실이라는 것도 이 이스라엘됨과 상관있습니다.
마태복음 10:5-6에 보면,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보내시는 12제자란, 오로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기 위해서만 활동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양을 몽땅 되찾게 되면 이로서 완벽한 이스라엘은 회복되는 것입니다. 오직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온전한 제 모습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과실이란 이 온전한 하나됨에 합류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온전한 하나 됨을 에베소서 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결코 '여러 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몸입니다.
이 하나의 몸이 되기 위해 여러 가지 속성도 역시 하나 뿐입니다. 에베소서 4:4-6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그런데 이 하나됨을 어떤 식으로 성사될까요? 그 방식도 에베소서 4:7-8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즉 그리스도 몸의 하나됨의 작업은 인간들의 재량이나 재주나 열심히나 지혜의 능력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선물로 보내어주시는 은혜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만 포도나무의 과실은 포도나무 자체에서만 나오는 능력의 산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제자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을 제대로 소화시켜 과실을 맺을 수 있는 능력은 본인들의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그 점에 대해서 요한복음 15:14-15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언질을 주십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만큼 제자들을 혼자 둘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원래 종이란 일을 제대로 못했을 때는 거기에 상당한 징벌과 혹독한 책임을 묻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일상적인 종에 머물고 말 때에 과연 그들이 예수님의 일을 제대로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요? 도저히 가능치 못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욱 더 확실한 관계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지면, 어떤 가게에 종업원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주인은 그 종업원을 단지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여러 가지 일을 시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르쳐도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마땅히 그 종업원을 책임을 지고 그 가게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사랑입니까? 어느날 주인이 그 종업원을 불러 놓고 하는 말이 "이제부터는 너를 내 가게 종업원으로 간주하지 않고 차라리 내 친구로 간주하겠다"고 합니다." 만약 종업원이 일을 잘 처리하고 자립적으로 놔두어도 얼마든지 주인의 마음에 흡족하다면 구태여 새삼스럽게 친구라는 사랑의 관계로 재수립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의도적으로 친구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사랑이라는 계명을 언급하시는 그 취지가 1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라는 개념은, '목숨을 바치기까지 사랑해 주는 자'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 보시기에 제자들이란 그들의 자체적인 열성이나 양심이나 능력에 맡겨서 과실 맺는 일을 성사시킬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겁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의 일과는 정반대의 성과만을 낳는 죄인들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종과 주인의 관계로만 맺어 그들의 일에 책임을 묻는 식으로 과실 맺는 것이 성사될 리가 없고 예수님이 자진해서 그들의 과오를 전부 책임지는 친구가 되셔야 합니다. 제자들이 하는 일을 무슨 일이든지 포도나무의 과실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됨'이 제자들이 요청해서 성사된 관계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을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어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 위상을 친구 수준으로 좀 낮추어 주시기를 기대한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해서 예수님께서 친구로 자청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제자들을 위해 목숨 바치는 친구도 나섰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들은 더욱 철저히 자신의 무능과 무조건적인 죄인됨을 절감해야 합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예상한 것보다 더 비관적인 신세라는 선언이 곧 "이제 너희를 친구로 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 취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도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즉 예수님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안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불러주었다고해서 관계가 보다 편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요한복음 15:16에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결코 제자들이 스스로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맡기신 일을 잘하기 위해 예수님을 선택했다든지 아니면 먼저 예수님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 생각해서 전도의 과실을 맺지 아니하면 천국 자녀가 아닐 것이라고 여겨 과실 맺기 시합에 나가서 열심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완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했다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과실이란, 다음과 같은 고백을 진심에서 할 수 있는 자라야만 합니다. 즉 "제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저를 택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은 정말 예수님의 선택된 사랑을 받은 자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 과실 맺기 방식은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몸도 하요, 믿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라는 그 원칙과 일치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제자들의 고백도 이런 식이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궁극적인 노림수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의(義)'를 고수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 의' 자기 행함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그것은 자기 행함으로 실행에 옮겨서 남의 것과는 차이나는 자기만의 의가 따로 존재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악마가 남길 지옥의 과실입니다. 이런 자가 교회와서 하는 고백은 이런 겁니다.
"예수님이 지시하시고 목사님께서 권면하신 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전도의 과실을 맺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분명 천국의 자녀가 맞지요. 그지요?"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자기 의를 붙잡고 살아가는 지옥 백성입니다.
천국 백성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에 붙잡혀 살아갑니다. 이 관계가 곧 포도나무와 과실의 관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신 사랑의 은혜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신앙적 능력과 도덕적 실행 능력을 바라보는 것이 악마의 속임수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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