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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4:16-24 / 성령과 사랑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4:16-24 / 성령과 사랑

정인순 2013. 12. 28. 22:30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121173.WMA

 

성령과 사랑

2002년 12월 11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4:16-24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하시리니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순박하다'는 것이 요즈음에 와서는 바보와 같은 뜻으로 쓰여질 정도입니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순박함이 통하겠습니까.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자라면 '순박'이라는 표현을 붙여주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농촌이든, 도시든 가리지 않고 소식들이 바로 바로 전달되는 시대에서 세상 물정에 어둡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순박하게 사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소위 신앙 생활이라는 것에도 영향을 줍니다.

 

과연 요즈음 시대에도 순박하게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저 요령껏 믿는 척 하는 선에서 멈쳐야 할까요? 사실은 요령껏 믿든 순박하게 믿든 그런 것을 선택할만한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신앙인을 설명하시면서 조금도 타협없이 자신의 뜻을 순박스럽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한 번 읽어보세요. 예수님은 전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참으로 바쁘게 살고 지내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점을 전혀 고려해 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뜻만을 나열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단언하십니다. 사람의 형편을 전혀 고려해 주지 않으시고 밀어붙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이나 신앙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뜻을 조립해서 구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으로만 성립된다면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거처를 함께 함'입니다. 즉 신앙 상태라는 것이 따로 따로 독립된 상황에서 주고 받고 하는 거래가 아니라 같은 처소에서 함께 살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됨'에서 한발자욱도 떨어져 나가지 못합니다. 누구 누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성사될 수 없는 일입니다.

 

흔히 유사한 형태로 '사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도 그 중심은 오로지 '자기됨'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처'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낯선 말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기껏 힘들여 가며 최선의 노력을 다해봤자 함께하는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정욕만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시지만 인간에게도 이미 '사랑'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요한일서 2:15-17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사랑은 따로 있고 세상에서 오는 사랑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온 사랑은 항상 개인적인 정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도, 예수님과 함께 있겠다는 포부도 모두 자신의 욕심 달성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이 이룰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되려면 하늘로부터 온 사랑이 따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점이 바로 현대인에게 참으로 황당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손으로 해낸다고 자부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이 요구하는 바는 너무나도 요원하고 벅차보입니다.

 

인간 세계에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겁니다. 과연 예수님은 세상 물정을 너무나도 모르기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의외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던집니다.

 

또 누군가가 오신다는 겁니다. 그 분은 '다른 보혜사'입니다. 왜 이 분이 꼭 오셔야만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오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 곁을 잠시 떠나야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의 처지란 마치 이 세상에서 고아처럼 되어버리고 맙니다. 돌볼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도 또한 현대인들에게는 의아한 점입니다.

 

제자들은 분명 성인들이요, 그들은 3년간이나 예수님에게 철저하게 배운 사람입니다. 신앙이 뭔지, 진리가 뭔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더라도 자신들이 알아서 잘 처신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거처를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 이외는 가당치도 않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 처지가 아닙니다. 비록 제자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다고해서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천국도 아니요 구원도 못되는 겁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구원은 하나님과 함께 할 여건 조성에 의해서 결정 날 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제자들이 과연 합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합류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처를 함께 하실 때는 조건이 따르기 때문에 그 조건만 충족하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 조건을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사랑이 있는 곳에서 항상 거기에 계시다는 겁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바를 같이 봅시다. 요한일서 4:16-19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먼저 한 사랑이 곧 예수님을 통해서 구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화목제물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전부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성도 사이에는 사랑이 없으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가운데 끼어 들어오십니다. 따라서 누가 참 성도인가 아닌가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부에 따라 확인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을 이해못하는 자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성령님의 역할이 분명해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영이란 지속적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사랑에 관해서 계속 제자들을 권고하시는 영이십니다.

 

왜 진리가 오직 예수님만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기도하신 덕분으로 제자들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다같이 이 세상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입니다.

 

나름대로 욕심에 의한 사랑으로 자기됨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기보다는 자기 욕심에 묻혀서 홀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즉 누구든지 자기를 좋아하고 사랑이고 진리라고 여기고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면 나쁜 자이고 비진리처럼 여깁니다.

 

항상 자기 중심으로 삽니다. 이런 마음 상태로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여기에 성령님께서 들이닥치십니다. 그 분은 진리, 곧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일러줍니다. 그 행하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야만 했던 희생적인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순박하게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순박하게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참으로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고 찾아주신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날마다 바라보면서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귀한 것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음을 새삼스럽게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