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4:4-9 / 길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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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2002년 11월 27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4:4-9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안 오셨다고 간주해 볼 때, 그렇다고해서 우리네 생활에 뭔가 달라질 것이 있습니까? 반면에 늘 같이 지내던 식구가 헤어진다든지 사별했다고 한다면 그 때부터 우리들은 밥맛이 떨어지고 더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자신들에게 있어 예수님과 식구들과의 차이나는 것이 뭘까요? 왜 예수님은 우리네 가족들보다 더 가치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평소에 우리들이 진리나 복음을 쳐다보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쏟아부은 정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자기들 식구들에게는 죽도록 정성을 퍼넣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바칩니다. 그러다가 훌쩍 그 배우자나 자식이 떠나버리면 그동안의 정성의 결실이 날라가 버리기에 우리는 어쩔 줄을 모르며 통분해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보다는 집안 식구들이 늘 가까이 있다고 여기고 반면에 예수님은 식구들보다는 멀리 계시다고 보고 있는 셈이 됩니다. 흔히 교회에서 '신앙'이라고 간주되는 행동들을 보게 되면 신앙이 아니라 사사로운 정으로 다져진 관계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마음 맞는 집사들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다가 한쪽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든지 아니면 서울로 이사를 가버리면 그 때부터 갑자기 교회 가기 싫어지는 법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사랑이나 정으로 그 상대를 꽁꽁 묶어두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도마라는 제자가 예수님을 떠나보내면서,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하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과연 신앙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쪽에서 나오는 사사로운 정분에 불과합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셨고 부활이라고 하셨고,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말씀을 들어가면서 동거동락을 해 왔던 터입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예수님께서 훌쩍 자기네 곁을 홀로 떠나신다고 하니 제자들은 그저 예수님을 붙들어 두고 싶은 것입니다.
진리를 자신들의 애정과 인정으로 붙들어 매려고했고, 생명을 자신들의 정성과 하소연으로 붙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은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 자기들을 남겨두고 떠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리고 생명이고 다 놓치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 구원과 생명과 부활과 진리를 인간 속에서 있는 정성이나 사랑으로 붙들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순전히 가짜 생명이요 가짜 부활이요 가짜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나는 길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길이란, 두 마을 사이를 소통시키는 통로를 말합니다. 길이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따로 따로 존재한다는 것과 그 두 세계 사이에서는 끊어지지 않고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길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니까 여기서 인간들은 또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게 됩니다. 즉 길은 예수님이니 우리쪽에서 그 길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말입니다.
일반적인 세상 길도 다 그런 용도로 뚫려져 있는 것이니 이런 생각이 당연하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길은 그런 방식을 허용하는 길이 아니라 도리어 막으시는 길입니다.
흔히 평교인들에게 전도 훈련을 한다고 만들어진 교재를 보면 이런 그림들이 나와 있습니다. 천국과 이 세상을 양분해서 그려놓고서 그 가운데 길게 십자가를 걸쳐 놓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는 천국이요 여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자, 그 가운데 뭐가 놓였지요?
맞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십자가를 밟고 나가면 저 천국에 도달될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설명이 옳은 것입니까? 고해같은 이 세상과 극락같은 저 세상 사이에 다리가 있어 우리 쪽에서 건너가기만 하면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구원 방책은 이 세상에 모든 종교의 공통된 아이디어입니다.
다리의 종류가 각기 다르다고해서 복음이 복음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구원 의지를 인정해주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방종교의 한 변종에 불과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죽어서는 좋은 세상에 살고픈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을 도와주고 격려하는 것은 참된 기독교가 아니라 참된 이방종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주장하기를, 하늘 보좌에 계신 '인자'같은 분이 내려와서 자기네 나라를 영원한 제국으로 번창케 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유대 신학자들도 구약 성경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구원관이 확립되어 있고 길과 진리와 생명과 그리고 메시야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생각들은 항상 인간의 능력 여하에 따라 파악해 낼 수 있고 그 길을 갈수 있는 자질이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약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쪽으로 통하는 길을 늘 인간쪽에서는 막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통솔하는 이스라엘이 요단강 가에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그 강물을 바라본다고해서 그 요단강이 쫙 갈라질까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요단강을 갈라지게 한 것은 이스라엘의 염원도 아니요 구원에 대한 갈구가 아닙니다.
오로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가 강 한가운데 있을 때 강의 물줄기는 끊어져서 그 강은 약속의 땅으로 통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강이 길을 열어 이스라엘 백성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있고 서고 가는 곳이 곧 길,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홍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뒤에서 막강한 애굽 군대가 따라온다고 해서 홍해가 저절로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길이 열려라고 하소연하고 통곡하고 소리치고 찬양한다고 길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모세의 지팡이가 그 홍해의 길을 열게 했습니다.
민중들의 힘이 아니라 택한 종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이 길을 열게 한 것입니다.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처럼, "열려라 콩아, 열려라 강냉이야"하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습니다. "열려야 참깨야"하니까 열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난 여리고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13바퀴를 돌아서 그 성은 무너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천국은 문은 인간쪽에서 볼 때 항상 닫혀 있다는 점을 기억시켰습니다.
하늘 쪽에서 열어주지 아니하면 결코 열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동안의 정을 가지고 예수님이 가시는 그 천국에 합류하고자 사정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나는 길이다"고 하지만 그 길은 인간들쪽에서 찾아낼 수 있는 길도 아니요 딛고 접어들 수 있는 길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닫힌 상태입니다.
단지 하나님쪽에서 볼 때의 길일 뿐입니다. 이 점을 14장 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즉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는 것'만이 구원이 가능합니다. 그 외에 그 어떤 방법으로 불가능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쪽에서 투자하는 사랑이나 정성이나 소원을 거부하는 겁니까?
요한복음 3:31-32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땅에 속한 자들이 하는 그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는 불량품으로 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길이나 진리나 생명이라는 것도 모두 불량품이요 가짜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기껏 땅에서 나온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인간들이 그 정도로 썩은 것입니까?
요한복음 8:23-24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그리고 모든 인간은 단지 죄 가운데 죽어야 될 존재일 따름입니다. 당연히 죽어야될 자들이 구원을 논하든, 무슨 노력을 다해도 그것이 과연 구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접해 오시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인생을 전부를 바친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이제 신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자신이 바친 정성을 믿고 노력을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구원하려 오신다는 이 약속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기까지 했습니다. 그 어떤 환란이나 핍박에도 자기 택한 자를 위한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딛고 만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쪽에서 제시한 그 길만이 하늘로 통하는 길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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