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4;1-3 / 처소 본문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112070.WMA
|
처소
2002년 11월 20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4;1-3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너희도 있게 하리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에 큰 짐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왜 그런 것이 생기는지도 모릅니다. 웃음 끝 자락에도 그 짐이 느껴지고 울음 뒤에는 그 짐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큰 짐을 평생 짊어지고 가는 것 같습니다.
그 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마음에 딱 맞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 틈에서 생겨나는 겁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그러나 몇 발자국 못가서 장해물이 등장하고 몇 시간 못가서 틀어지기 일 수입니다.
세상 만사가 내 뜻대로 내 원대로 안되니 여기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딱 맞는 세상을 찾게 됩니다. 이 희망이 곧 무거운 짐이 되어 안겨옵니다. "이렇게 꼭 되어야 할텐데, 그래야만 되는데. 그렇게 안되면 나는 곤란한데"하는 생각이 큰 짐을 만듭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 한계입니다.
한계를 느끼는 동시에 그 한계마저 뛰어넘고자 하는 숙제를 계속 스스로에게 짊어지우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든 무의식 속에서 행운의 신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자기 몸에 딱 맞는 좋은 세상에 들어가서 살기를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실제적으로 그 멋진 세계가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무거운 인생의 짐을 어디다 풀어놓을 것입니까? 인간들의 고민이 여기 있습니다. 천국을 그리워하고 극락을 그리워하지만 막상 그 세계에서 오지 않는다면, 아니 아예 애초부터 존재한 적도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마 그저 희망은 희망으로만 끝날 뿐입니다. 짐을 짐대로 생기고 그 짐을 안심놓고 풀어놓을 세상은 오지 않으니 남은 것은 희망이 아닌 절망 신세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진정 '망했다'라고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처지는 이런 처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안 망한 인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다 망한 인생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전 생을 바치기로 마음 먹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은 곧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이제 자기를 떠나려 합니다. 희망과 헤어져야 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것은 절망입니다.
예수님에게 삶의 전부를 바친 베드로에게도 희망이 사라질 판인데 다른 인간들도 오죽하겠습니까? 애초부터 헛된 희망으로 격려받다가 그것마저 무용지물이 되는 죽음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헤어지기를 요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있을 처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생의 무거운 짐을 풀어놓을 자리가 베드로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있을 천국 자리가 없다는 말은 베드로의 인생은 곧 실패작이라는 말입니다. 그동안 베드로가 노력하고 수고했던 모든 것이 베드로 본인의 인생을 성공적인 인생으로 바꾸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매일 같이 자기 직장에서, 가정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자기에게는 헛짓입니다. 자신을 안 망하게 하는데 하등 도움이 안되는 일들입니다.
뿐만아니라 자기를 안 망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예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무슨 활동, 무슨 일을 했더라도 모두 자신을 망하게 한 일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한 하늘 나라의 처소가 그 활동으로 장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실제 현실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뜻이 알려지게 된다는 점이 불신자들과의 차이점입니다. 예를 들면, 욥기에서는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욥이요 다른 부류는 욥의 친구들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이야기를 못알아 듣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안 망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직 망했다고 느끼는 것은 아직도 딛고 일어 설만한 것들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에게는 하나님께서 마귀를 시켜 모두 철거시켰습니다. 욥의 밑바닥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진정 인생으로서 망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욥은 낱낱이 보여줍니다.
거기에 비해서 욥의 친구는 아직도 안 망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는 신앙과 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큰 소리칠 건강도 남아 있습니다. 남들로부터 '존경스럽다'고 이야기 들을 만한 환경을 그들은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정반대 사정에 놓여 있습니다. 따로 '나의 것'이고 여거서 건질만한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자식도 다 잃었을뿐아니라 아내마저 곁에서 그를 저주합니다. 자기 신체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 앉아서 욥은 생각합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하고 말입니다. 고난받는 욥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참 실체입니다. 다른 실체는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믿고 의지해서는 아니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망해야 될 것이 인간입니다. 무거운 짐이 늘 평생을 따라 다니지만 그것을 부려놓은 입장이 못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근심하지 말라".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위로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자신의 일에만 매여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근심거리는 스스로 처리하기에 바쁩니다.
주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위로로서 해결하고픈 믿음조차 없습니다. 주님만 고대하다가 생긴 절망적 상황조차 그들에게는 낯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나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욥과 같은 참된 절망의 절차를 갖게 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자기에게 위로가 되지 못함을 절감하는 심령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위로가 그 성도에게는 큰 기쁨이 되기 위한 조치입니다. 왜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께서 친히 그 처소를 장만하시고자 제자들 곁을 떠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에수님은 구름타고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 약속이 지켜질까요? 만약 안 오시면 성도는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 3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의 공백은 그냥 예수님께서 손놓고 아무 것도 안하시는 기간이 아니라 열심히 성도가 거할 처소를 만들기 기간입니다.
즉 인간들 편에서 볼 때, 그저 '오셨다' '떠나셨다' '안 보이신다' '다시 오실지는 확실치 않다'는 식으로 느껴지겠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어차피 인간에게는 절망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함께 있으나 없으나 그들에게 처소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 처소 만드는 작업을 해야지'. '야, 이제 다 만들었다. 다시 내려와서 내 백성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지'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자신의 마음가짐을 예수님 입장으로 뒤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고 싶은 자에게만 한해서 예수님의 "다시 올께"가 유효합니다.
그리고 이것도 단순히 예수님과 잠시 헤어졌다가 나중에 다시 만난다는 개별적인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처소 만드는 작업을 위해 자신들은 이 세상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될 임무로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동참하고 있는 겁니다.
즉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게 만드는 것도 주님이 하시는 '처소 만들기' 작업의 일환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냥 예수님을 고대할 것이 아니라 왜 나 자신은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의 처소를 장만할 수 없을 정도로 망해야만 하는 존재인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종교 생활이란 곧장 습관화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특별히 은혜 받았다고 여기는 성경 지식이나 대목을 따로 챙겨서 그것 가지고 자기 신앙을 길게 관리하려는 실수를 범하기 싶습니다.
예를 들면, 한때 특별히 은혜되었다고 여기는 찬송가를 부를 때는 전에 은혜 받았다고 여긴 그 때 상황을 의도적으로 재현하려고 합니다. 그 때 감동받은 대목에 와서는 아예 신앙적 연기까지 하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다 버린 태도가 아닙니다.
도리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실을 다시 버려서 스스로 딛고 일어설 만한 그 어떤 여지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근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위로가 제대로 된 '큰 위로'로 다가 올 것이 아닙니까 "근심하지 말라. 다시 오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의 몫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짊어 진 큰 짐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사라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한복음 14:8-14 / 예수님 안 (0) | 2013.12.28 |
|---|---|
| 요한복음 14:4-9 / 길 (0) | 2013.12.28 |
| 요한복음 13:36-38 / 베드로의 목숨 (0) | 2013.12.28 |
| 요한복음 13:31-35 / 새 계명 (0) | 2013.12.28 |
| 요한복음 13 : 21-30 / 예수님의 지시 (0) | 2013.12.2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