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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4:8-14 / 예수님 안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4:8-14 / 예수님 안

정인순 2013. 12. 28. 22:29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120472.WMA

 

 

예수님 안

2002년 12월 4일

본문 말씀:요한복음 14:8-14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는 대목에 있어서 제자들과의 대화를 계기로 잡아 가르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설명하셔도 우리들이 잘 알아들을 것 같은데 일부러 제자들의 철없는 대화까지 삽입시켜 비교시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바로 곁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대화를 늘 듣던 그들의 입장이 사실 오늘날 우리 입장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빌립은 예수님 곁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너무나도 당돌해 보이는 요구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평소에 늘 궁금하고 아쉬웠던 바를 빌립이 대표해서 유감없이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직접 만나봤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까? 교회를 아무리 열심히 다니고 성경 공부에 정성드려 매진해도 일상에서 쉴새없이 부딪치고 만나는 되는 각종 일들을 보면 자기 마음대로 안풀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이든, 하나님이든, 다 때려 치우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올라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배 참석해서 설교를 들을 때는 정말 자기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있어 실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고 은근히 기대하다가도 세상에 나가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들 속에서 느끼는 바는, 신앙이라는 것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일부러라도 좌절하고 싶어지게 마련입니다.

 

"내가 공들여 다져놓은 인생관이 이만한 사태에도 맥없이 무너지나! 그동안 웬지 교회에게 속고, 나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속았다는 기분이다"라는 마음까지 들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목사나 교우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알기 보다는 차라리 이판사판식으로 직접 하나님 만나 단판짓고 싶은 겁니다.

 

"신이여. 과연 나의 하나님은 진실로 거기 계신 것 맞습니까? 정말 살아계신다면 어서 제 앞에 나타나셔서 직접 저와 상대해 보시기 바랍니다."라는 하소연도 하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직접 뵙겠다고 떼를 쓰는 것은 어떤 결과를 예상하기 때문입니끼? 그것은, 만약 직접 하나님을 만났다고 한다면, 이제부터 그 어떤 경우에도 추호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돈독한 믿음이 유지되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뵜기 때문에 도저히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확고히 잡힐 것이라는 점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확실히 잡힌다면, 세상 풍파가 아무리 거세다 할지라도 온 정신이 멀미날 리는 없으니 이 점이 좋아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토록 좋은 제안을 왜 예수님은 거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빌립의 질문 속에는, 하나님은 예수님과는 별도로 따로 나타나야하며 예수님만으로 확신이 서지 않는 그 빌립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읽으셨기 때문입니다.

 

즉 빌립은 예수님만으로 원에 차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을 늘상 보고 있는 것으로만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심이 들어가 있습니다. "애게 이게 다야?"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원대하고 위대한 하나님은 분명 인간적인 신체를 가진 예수님보다 당연히 더 크신 분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으로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 미흡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예수님보다 더 커야 한다는 이 선입견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취지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오해입니다.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자신의 신체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뵈올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신체는 예수님 뿐입니다. 다른 몸을 가지고서는 하나님 만나면 그것으로 죽음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신체만이 하나님을 만나도 탈이 없는 신체입니다. 다른 인간 몸은 안됩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죄인이 거룩한 분을 만나면 그것으로 죽음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곧 인간이란 하나님에게 요청해서 구원을 따낼 자격이 애초부터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이란, 유일하게 하나님과 관계지을 수 있는 그 예수님께서 초청해 주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구원받고 싶다고해서 구원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고 싶지 않는 사람이 그 누가 있겠습니까!

 

모든 자들이 전부 자신이 영원히 살고 싶어하고 천국가서 복락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꼭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인간들은 나름대로 기본 종교심들이 다 있기에 하나님을 직접 만나뵜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그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해 주리라 장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모두가 죄인이기에 그 누구도 거룩한 분과 함께 거주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예수님에게 부탁한 것은 이러한 자기 주제를 제대로 모르고 나온 소리입니다.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그저 꾸역꾸역 지옥으로 가고 있는 존재가 하나님 만나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요구사항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한 것은 당연한 겁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직접 이 땅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취지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취하신 것은, 예수님 본인 이외에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즉 일반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관계를 통해서 천국행과 지옥행이 갈라진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 밖에는 무조건 지옥 이요, 예수님 무조건 안에는 천국입니다.

 

이러한 기준은, 기존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 그 자체가 정죄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빌립처럼 또다시 하나님을 거론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여전히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직접 이 땅을 방문하신 취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이 됩니다.

 

다시금 말씀드립니다만, 사람은 하나님을 불러내어 상대할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 당시 곁에 동거동락을 같이 했던 제자들은 제 눈으로 똑똑히 예수님의 모든 면을 보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열심히 관찰한다고해서,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직접 뵐 필요가 없구나" 하는 생각까지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빌립은 여전히 따로 하나님을 직접 만나뵙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이어 말씀하시를,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들어있는 사실이 인간의 눈으로 보면 뭔가 보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인간의 물리적인 보는 행위보다 믿음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하고만 일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점에 대해서 오늘 본문 13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오로지 아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겠다는 겁니다. 예수님 이외의 인간은 영광이 안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름으로 영광돌리는 것을 영광으로 간주해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시는 일만이 하나님께 영광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전서 4:11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이 본문에 보면, 분명히 전도를 하고 설교를 하는 행위자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봉사하는 주체자도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그 사람의 행위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봉사하는데 있어 그 사람은 자력적인 힘으로 봉사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내려주시는 그 힘으로만 봉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봉사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는 근거나 봉사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그런 힘을 부여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만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모든 인간들의 몸과, 인간들의 이름을 물리치시고 오로지 아들, 그 아들의 이름으로 행한 일만을 통해서 영광받으시는 겁니다.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안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는 자기 부인이 우선입니다. 자기 이름을 제거한 그 바탕 위에서만 주님의 이름을 깔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얼마나 경건스럽게 기도했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기도는 하나님에게 가증스러운 기도이고 영광스럽지도 않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행위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만 자신의 모든 뜻을 성취코자 하는 분인 동시에 모든 인간의 뜻을 다 물리치는 분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천국은 오직 예수님 안 뿐이며, 예수님 밖은 이유없이 모두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뜻만 고수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오로지 이 뜻만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위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그 뜻과 그 영광성에 대해서 그동안 잘못 생각한 것들이 있다면 다 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