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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3:36-38 / 베드로의 목숨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3:36-38 / 베드로의 목숨

정인순 2013. 12. 28. 22:25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111369.WMA

 

 

베드로의 목숨

2002년 11월 13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3:36-38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보통 세상의 종교들은 교주가 살아있을 동안에 가르친 교훈이나 설교를 통해서 인생의 통찰을 배우고 익히고 훈련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의 설교나 기적이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본인의 죽으심이 중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흔히 일반인들의 평소에 관심두는 관심사하고 전혀 상관없는 대화를 예수님과 베드로가 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그저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일상생활에 관심을 둡니다.

 

김장철 같으면 배추 다듬는 이야기나, 젓갈 고르기 같은 이야기와 입시철이면 진학 이야기가 주된 화제거리이고, T.V 드라마에서는 주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주종입니다.

그리고 뉴스는 북한의 핵문제와 대통령 선거에 관한 이야기로 장식됩니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일단 사람이 계속 살아있기를 원하기에 나눌 수 있는 대화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나는 어떻게하면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생존을 겨냥하는 대화가 아니라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입니다.

 

그러니 소박하게 일상적인 삶에 자족하려는 사람에게는 오늘 본문이 심적 부담을 주게 됩니다. 성경은 이처럼 일상적인 평범한 삶에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 본문 뿐만아니라 히브리서 11장 35-3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여기 이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쪽으로 당기게 합니까? 히브리서11장에서는 단순히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그 믿음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그 분은 예수님입니다. 과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여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흔히 인생을 연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연극이 다 끝나고 난 뒤 배우들은 분장실에서 그간 자신들이 뒤집어 썼던 위장 도구들을 어지럽게 벗어놓습니다. 우리가 그 현장을 잠시 생각해 볼 때, 인생이란 모두 자신의 속살을 가리는 연극 위장들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연극이 끝나는 시점에 와서는 모두 어지럽게 다 벗어놓게 되고 그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죽음을 자진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연극 분장을 벗어놓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말합니다. 결국 나중에 벗게 될 위장을 지금 주님의 위하여 과감히 벗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노력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나름대로 목적한 바가 있어 그렇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떤 목적을 달성했을 때에는 갑자기 허무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손을 중요시 여기는 어떤 뼈대 있는 집안에 한 색시가 시집을 갔습니다.

 

일찍감치 딸은 낳았지만 그 뒤 몇 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갖지 못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은 은근히 그 며느리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시집온 며느리도 자기 명예가 걸린 문제라서 모든 신경을 오직 아들 낳기에 매달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몇 년 뒤 실제로 아들을 낳아주었습니다. 집안 어른들과 주위 사람들은 그 며느리보고 "장하다. 너는 그리고 우리 집안에 큰 일을 해주었단다"라고 칭찬이 늘어집니다. 일단 그 며느리도 자기 자신이 대견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들을 안고 우쭐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얼마가지 않습니다. "과연 나는 무엇인가? 이 뼈대 있는 집안에 아들 낳아주려고 시집에 매여 있는 존재가 고작 내 인생의 전부인가?"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 여인은 만족스러워 할 만한 자아찾기에 나서게 될 것입니다. 타인이 아니라 시집 가문이 아니라 정말 내가 원하는 '나'가 될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모든 노고와 수고란 자기 목숨을 영원히 만족케 할 그 대상을 찾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다보니 어떤 목표가 달성되었다고해서 그것에 마냥 머무는 것이 인간들이 아닌 것입니다.

 

내부에서부터 새롭게 형성된 허탈과 허무가 종전까지의 기쁨을 몰아내고 차지해 버립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허무와 허탈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다시 새로운 목적을 수립하고 그것을 달성하는데 자신의 목숨과 명예를 걸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 목숨이란 궁극적이고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을 획득할 때 써먹기 위한 마지막 카드인 셈입니다. 정말 죽어도 좋을 만한 것이 있을 때, 자신의 목숨을 소비해서라도 목숨보다 더 귀한 그것과 맞바뀌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다시는 허무해지지 않고 허탈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 있어서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으로 보였습니다.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한 분이고 영원히 자신을 보호하고 책임질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기에 과감히 자기 목숨마저 내놓으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신앙이라고 보았습니다.

 

신앙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 목숨에 연연하는 것은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신앙이라고 볼 수 없고 도리어 자기 목숨을 믿는 신앙에 불과합니다. 즉 자기 자신에게 신도가 되고 교인이 되는 셈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자신이 믿는 그 대상이 자신이 목숨보다 다 훨등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하찮은 대상을 믿는다면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의 대상과 장난치며 노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친목계 계원과 같은 관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자진해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것은 예수님과는 떨어져서는 도저히 못살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러한 결심을 예수님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오늘 본문 38절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즉 베드로의 비상한 각오는 예수님이 보실 때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도리어 부정하고 부인하는 고백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최후로 내놓는 순교 카드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죽으심의 눈으로 볼 때는 그 안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도리어 모독하고 불신하는 독소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닭이 운다는 것은 닭이 울기 전의 베드로의 모습은 닭이 울고 난 뒤에 그 실상이 제대로 밝혀진다는 겁니다. 닭 울기 전에 제안된 베드로의 순교 각오의 실체는 사실은 예수님에 대한 거부의 몸짓에 불과한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베드로나 어느 인간의 목숨들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사실은 심판과 정죄와 저주의 대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 내밀 카드치고는 아무 쓸모없는 걸레 같은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어느 삼촌이 자기 조카에게 선심을 씁니다. "얘야 네가 공부를 잘했기에 이 삼촌이 기분이 썩 좋구나. 이 돈 다발이 보이지 내가 너에게 특별히 용돈으로 다 주겠다. 가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돈 다발을 받은 조카가 하는 말이, "죄송합니다. 삼촌 이 돈다발 도로 가져가세요. 이 돈을 모조리 위조지폐입니다. 삼촌은 이제부터 경찰서에 수감되어야 할 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선심쓸 가치도 없는 돈 다발을 가지고 그 삼촌은 자기 딴에 조카에게 최대로 성의를 표한 겁니다.

 

베드로가 이와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우리가 영생을 얻는데 있어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우리 목숨을 바치면 그것이 효력을 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망을 이기는 것은 우리 목숨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몸과 죽으심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5:55-57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님의 설교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여기서 사망조차 꺽어버리게 하시는 능력이 나옵니다. 우리의 헌신보다 주님의 헌신을 찬양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더 민감합니다. 그것도 분에 차지 아니하면 곧잘 허탈해합니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