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3:31-35 / 새 계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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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새 계명 2002년 11월 6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3:31-35
13: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13: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13: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보통 계명이라고 한다면 계명을 받은 자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지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계명 주는 분으로만 여긴다면 그 사람의 구원문제는 예수님 손에 떠나 있는 셈이 됩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될 입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자기 말고는 달리 자기를 대신해서 맡아 줄 위인은 없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이런 판국에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던져주셨기에 제자들의 운명은 제자들 본인의 책임으로 넘어온 것처럼 이해되기 쉽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던져주신 새 계명이란, 실은 현재 인간 사회를 계명처럼 지켜지고 있는 바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겁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 사랑'입니다. 이미 인간들은 '사랑'으로 행동합니다. 너나 할 것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본인들이 행동하는 것도 사랑받기 위함이요 남들이 원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언어와 손짓과 발짓까지도 사랑을 얻기 위한 노력입니다. 사랑이라면 이미 인간들이 익히 아는 바요 평소에 해왔던 행동의 원리처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흔한 사랑이 하필이면 새삼스럽게 새 계명으로 다시 주어지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의 사랑이란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영광과 연관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자기를 숭배하고 싶은 본능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사랑을 포기할 줄 모릅니다. 드라마나 소설이나 영화는 노래에도 거의 모두 이런 사랑 타령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비록 돈이 있어도 사랑없이는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나의 존재를 좋은 것으로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즉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것처럼 남들도 나를 존중해 달라는 겁니다. 그럴 때는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 세계에서는 이런 자기애에 대해서 당연시 여깁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문제점도 없다고 여깁니다.
사람이 사는 보람이 여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귀히 여기는 것이 사는 재미라고 봅니다. 그 외에 다른 재미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의 이런 면에 같이 동의할까요? 만약 동의하신다면 새삼스럽게 예수님을 통해서 '새 계명'이라는 것을 내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흔해 빠진 것이 사랑이요 평소에 인간을 분주하게 행하도록 만드는 것도 사랑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새 계명을 언급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길게 말씀하시는 대목이 있다는 것을 눈 여겨봐야 합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에 관한 겁니다. 32-33절에 보면,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면 그냥 '사랑많이 하라'고 하시면 되는데 왜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먼저 거론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현재 인간들이 행하고 있는 사랑 가지고는 전혀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광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딴에 사랑을 열심히 실행한다고 해봤자 모두 자신의 영광으로 귀결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해서는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리어 저주만 받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러면 인간이 이런 자신의 취약점이 무엇 때문에 생기게 된 것입니까? 이 점을 밝혀주는 것이 요한복음 12:23-25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들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라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인간들이 나름대로 '사랑'이라는 행위를 하고 있음을 아십니다. 그것도 자기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까지 사랑했던 그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 도리어 미워하라는 겁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예수님 말씀에 근거해서 죽도록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에 대한 구원의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국 이것도 또한 궁극적으로 자기 사랑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고 하셨는가 하면, 이미 사랑의 대상이 따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의 사랑은 모두 자기 영광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아드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받는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23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영광'을 거론하고 계시는 겁니다. 즉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사람들이 기대해야 될 영광될 분이 따로 존재해 있다는 겁니다. 그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영광받으면 그것으로 족한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사랑은 당연히 예수님에게만 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인간들의 모든 사랑 행위의 목적지점은 오직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진정 예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자라면 마땅히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모습이 비쳐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은 어떻게 주어집니까? 인간이 그 영생을 획득하려고 그 어떤 시도를 하지 않는데도 주어진단 말입니까? 요한복음 12:24에서는 이것을 '열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과가 먹고 싶다고해서 직접 본인이 사과나무가 되지 못하는 법입니다. 사과는 사과 나무의 열매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겁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생명을 '열매'로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맺게 하는 씨앗은 인간들 본인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이것만해도 성도가 자신을 미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보다 더 솔직한 내막은 요한일서 4:9-10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아예 우리 인간은 죽은 자로 간주하고 계시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자기 딴에 이 세상에서 큰 일하고 있는 사람처럼 비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까지 통하지 않습니다. 오죽 우리가 죽어 있는 자였으면 오로지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서만 우리를 살리려 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인간의 사랑은 하늘에까지 도달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미 죽은 자의 사랑이 무슨 영광이 되갰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이 꼭 삽입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있습니까? 사랑은 순전히 하나님의 작품으로만 한정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제물' 되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제물'이 갖는 느낌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나서서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만큼 혼자서 손해볼 데로 손해봤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 누가 혼자 크게 희생당했을 때, 우리는 흔히 '제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셨다는 말은 다른 그 어떤 인간의 희생이나 노력이나 거룩한 행위도 결코 진정한 '제물'로서 가치가 없다는 말이고 따라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랑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제물되심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화목케' 하시는 제물입니다. 따라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만 있다는 겁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보면,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주신 것은 사실상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제공할 생명의 열매됨을 뜻하십니다.
제자들 모두가 각자 자기를 미워하고 결코 자신들이 영광받을 위인이 아님을 같이 아는 가운데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을 공유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요 새로운 계명입니다. 앞으로 이러한 능력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할 때 실현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보지 않을 때 우리의 가벼워짐을 느낍니다. 천사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공로만 쳐다보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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