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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2:44-50 / 심판과 구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2:44-50 / 심판과 구원

정인순 2013. 12. 28. 21:45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100964.WMA

 

 

이근호

 

심판과 구원

2002년 10월 9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2:44-50

 

12: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전하는 명령이 곧 영생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러하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일방적으로 들렸겠습니까?

 

남은 의견은 전혀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순전히 자기 생각만 개진하려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의 내용도 또한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봅니다. 게다가 말씀의 내용도 극단에서 극단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서로 잘지내 좋은 세상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생결단을 내자는 식으로 달려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심판'이라든지 '구원'이라는 표현이 그러합니다. 47절에 보면,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씀만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유화적인 태도를 잠시 보이는 것 같지만 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심판하는 이'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심판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 자신이 먼저 세상을 구원하려 오셨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만 구원이 되는 새로운 심판 행위가 있음을 알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이 세상은 무슨 심판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 요한복음 1장을 잠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으로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왜 꼭 육신이 되셔야 했습니까? 그냥 하늘에 계시지 않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16에 보면, '은혜 위에 은혜'라고 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하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왜 구태여 은혜가 곧 개입되어야 합니까? 그냥 하늘에서 말씀을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하늘에게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17에 나와 있듯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기 성향에 부합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실컷 지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칭찬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들을 저주 아래 두기 위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달리 말씀드려서 '저주 아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원래 인간은 저주 아래 있었는데 율법이 가미되면서 그 저주성을 분명해진 것입니다.

 

구원을 받겠다고요?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두고서 요한복음 1:18에서는 '은혜 위에 은혜'라는 부르는 겁니다. 율법을 지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은혜로만 구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로 오셨다는 말은 새로운 율법을 추가하려 오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곧 인간쪽에서 행한 것으로 구원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제공되는 그 은혜로만 구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인간들이 이 은혜를 거부하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말씀을 거부하면 그것은 곧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로 오신 분, 즉 선물에다 또 선물로 오신 분이기에 어지간하면 누구나 쉽게 믿을 것 같지요, 그저 주는 공짜라는데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스럽게 사람들은 예수님을 밀쳐버립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일방적이고 자기 입장만 강요하기에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게 됩니다. 은혜 위에 은혜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멀리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49절에 보면,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긴장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명령하시고 주신 말씀이 과연 무엇인지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잊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지 못하면 행여 심판받지 않을까요? "그저 예수님만 믿자!" 하는 것만 기억하고 있지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는 금방 생각해 내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열심히 나선 마당에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우리는 다 믿게 될꺼야"라고 안일하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지금부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몇 가지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을 죽자고 믿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예수님 입에서 말씀이 떨어지자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까요? 우선 요한복음 6:60절을 보겠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그리고 66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어떻게 이런 사태가 일어납니까?"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이런 질타를 하십니다. 요한복음 6:61를 보면,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사람들의 마음에 걸리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은혜 위에 은혜가 되시는 그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가질 수 밖에 없을까요? 인간들 마음 속에는, 자기 구원은 자기 행함으로 달성해야만 한다는 속성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지적하면서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즉 구원의 출발점이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는 제자들, 즉 군중들이 상당히 이해하기 힘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저희들도 다시 한 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6:53-54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이 말씀은 일체 인간쪽에서 출발되는 면이 없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 쪽에서, 혹은 예수님 쪽에서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이 런 점 때문에 결국 많은 군중들은 떠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 때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눈을 돌립니다. 너희들은 왜 안가는지 아니냐? 하십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 자신에게 보내지 아니하면 결코 예수님 자신에게 올 자가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실이 사람들에게 엄청 스트레스를 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예수님 쪽에서 봐서는 그야말로 제대로 '은혜 위에 은혜'가 되는 방식이 되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솜씨로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도를 예수님께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심성 속에는 이런 방식 외에 전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자기 심성을 깨끗하게 정리 정돈 시켜 놓고 난 뒤, 그다음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속에 영접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온전히 영생을 확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자기 마음이 나쁜 생각이나 나쁜 방향으로 잠깐 순간이라도 기울었다고 한다면 그 영생은 도로 자기를 떠날 가능성이 항상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0:28절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즉 빼앗기지 않는 영생만이 참으로 영생답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영생은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확보될 수가 없는 겁니다. 순전히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주셔야 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저런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들은 도저히 이해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이건 하나님이건 말씀을 하시면 충실히 실천에 옮기기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하신다는 말씀이 요한복음 10:29절의 경우에 보면, "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라고 나오니 어떻게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할지 난감해 주는 겁니다.

 

그 해답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2:46절에서 이런 상태를 '어두움'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즉 이 세상은 순전히 어두움 뿐입니다. 어두움이 제가 알아서 어두움을 철거하면 그것은 어두움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은 자기 힘으로 어두움을 철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이 일방적으로 들어오게 되면 일순간 어두우은 빛의 세계로 바뀝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얼마나 간단한 이치입니까! 단 하나님이 보내신 양에게만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이 원래 어두었음을 믿게 하시고 오로지 예수님이 들어오시므로 빛의 자녀가 된 것을 알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