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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2:27-33 / 예수님의 기도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2:27-33 / 예수님의 기도

정인순 2013. 12. 28. 21:14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91861.mp3

 

이근호

 

예수님의 기도

2002년 9월 11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2:27-33

 

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하니

12: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12: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초대 교회 교인들은 무엇 때문에 자주 모였습니까? 사회에서 겪은 속상한 일들을 수다로 풀기 위해서 교회로 모였습니까? 아니면 개인 사업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찾기 위해 교회로 모입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은 순전히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하면서 모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23-25에 보면, 예수님이 죽으신 던 날 밤을 생각하면서 떡과 잔을 나누어 들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라면 몇 시간 강의로도 대충 만족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교인들은 이미 아는 지식이나 보충하려고 자주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죽음의 능력이 지속적으로 그들을 장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십자가의 능력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마치 옛날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예수 중심 주의'로 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특이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당연히 '자기 중심 주의'가 되기 마련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러합니다.

 

물론 '자기 중심 주의'자들도 교회에 나가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처럼 흉내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예수란, 단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리라는 기대 때문에 이용물이 될 뿐입니다.

 

인간이란 세상을 자기 위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세상 일이 자기 마음 먹은대로 진행이 안되면 그 분통과 원한을 신에게 퍼붓기 마련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경건한 모습과 충성하는 자세를 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용광로처럼 신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할 도리를 다해 주는데 하나님께서 내 원대로 해 준 것은 없지 않습니까? 도대체 날더러 뭘 더 어떡하란 말입니까?"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나름대로 할 도리를 한답시고 예수에 대한 정보나 지식도 갖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들을 가지고 또 자기의 포부를 달성하는 힘으로 써먹고자 시도합니다.

 

만약 이런 인간들이 초대 교회와 같은 시대적 상황이라면 내놓고 하나님께 항의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에 악한 권세자들이 그리스도를 다 잡아가고 처참하고 죽인다니 우리도 하나님을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뭘 하시는 분입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잘 믿도록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

 

과연 초대 교회들은 이런 불평을 했을까요? 그들에게 있어 세상 권세의 압력은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 자주 모이는데에 전혀 장애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까요?

 

오늘 본문 27-2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초대 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당하는 고통이 단순히 예수님 개인의 고통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어두움의 세계에서 떨어지는 아픔의 원조를 예수님의 고통에서 찾았습니다.

 

즉 예수님의 편치 않는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부로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받들어 어두움의 요소를 지니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섰어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에서는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편치 않는 마음에서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28절에 보면,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초대 교인들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응답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알았습니다.

 

35-3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고통이 결코 헛된 아픔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진짜로 빛의 아들들이 등장되는 계기가 됨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어두움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어두움 세상에 대해서 과연 계속 미련을 갖겠습니까? 이들은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의 의미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간에 어두움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기쁨은 세상에 그 어떤 기쁨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과연 빛의 아들됨을 자주 모이면서 되새겼습니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시던 날 밤을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지식이나 신학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실제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봐도 예수님께서 기도 응답 받는 순간에 주위 사람들은 '우뢰가 울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도 응답은 확실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응답이 확실하다는 말은, 이 어두움의 세계 안에도 빛의 아들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빛의 아들이 오늘날 어떻게 살아가게 됩니까? 이들은 예수님과 동일하게 어두움에서 과감히 떨어져 나가는 아픔이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목사로서 자기 처신과 자기 위치에 평소에 잘 지켜나간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 설교하려 가면서 고의가 아니게 지나가는 행인을 차로 치어 죽였다고 합시다. 그래서 경찰서에 구속되었다고 봅시다.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처럼 느껴지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주의 얼굴을 먹칠을 하고 명예를 더럽히는 일을 발생시킵니까?"하고 원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원망스러운 마음은 평소에 그 목사가 자기 마음 속에 이런 원망이 들어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못한 악한 마음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러한 어두움의 속성이 일어나도 이 속성을 떨치는 아픔이 있게 되는 겁니다.

 

목사가 얼굴을 못들 정도로 치욕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여전히 예수님의 희생과 고통의 가치를 믿게 된 것을 감사하는 기쁨이 있어야 되어야 빛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두움과 빛이 분리되는 아픔은 맨 처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서 겪었던 그 아픔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이 자주 모일 때의 기쁨은 바로 어두움의 세력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입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과 함께 모이는 것은 어두움 세계에서의 출세와 성공과는 족히 비교되지도 안될 정도로 기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기존 세계에서 그 어떤 신체적, 정치적 보복과 핍박을 가해도 그들이 그런 것에 겁을 내겠습니까?

 

저는 이런 모습을 '예수 중심 주의'라고 했습니다. '자기 중심 주의적'인 사람들이 아무리 예수 중심 주의를 흉내내려고 해도 안되는 이유는, 기쁨의 이유는 어두운 세상 것으로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도와주어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주시면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나온다면 이들은 어두운 세상에서 조금만 압박이 가해서 그 원망을 하나님께 돌릴 자들입니다. 즉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미워하는 적대 세력 속에 속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현실은 따로 있습니다. 이 세상 뿐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세상이 빛의 세계와 어두움의 세계로 나눈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이들이 교회 모일 때에 각자의 취향에 따라 모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기뻐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사람과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기뻐서 모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들이 마태복음 18:19의 말씀, 즉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곧이 믿고 더 나아가서 이런 약속을 정말 기뻐하십니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기쁨을 구하지 않는 빛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파악코자할 때 성경에서만 출발점을 삼아야 합니다. 자신이 예상한 교회상에서 출발하면 마귀의 시험에 들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기쁨보다 세상적인 성공을 획득으로 기쁨을 얻고자 할 때는 마귀도 함께 있겠다고 따라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거둔 성공과 악마가 주고자 하는 성공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 중심 주의'입니까 아니면 '자기 중심 주의'입니까? 어두움에서 분리되고 떨어지는 기쁨으로 인해 사소한 모든 세상 일에 미련두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