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2: 9-19 / 심령의 위기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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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의 위기 2002년 8월 28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2: 9-19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2: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2: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2: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줄 생각났더라 12: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2: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요즈음에 와서도 예수님을 열열히 환영할 위인이 있겠습니까? 다들 품위있고 잘나가는 사람들인데 자진해서 맹목적으로 예수님에게 매달려서 살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옛날이고 지금이고 사람들은 세력과 권세의 눈치를 보는 것은 한결 같습니다. 세상의 안목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예수님의 환영장으로 달려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짓처럼 보입니다. 사람이란 더불어 사는 것에 포근함을 느낍니다. 가까운 이웃끼리 잘 지내고 서로 돌보아 주는 데서 삶의 안정감을 갖게 마련입니다. 남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행동도 함께 할 뿐만 아니라 생각과 사상도 심지어 취미도 같이 보조를 맞추는 것이 이웃에 대한 예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만약 남의 눈치도 안보고 유별한 행동을 하려는 것은 그 사회에서 버림받는 큰 손실을 각오해야 만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당시 유대 권세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덕분에 되살아났다는 그 나사로까지 같이 죽이려고 합니다. 험악한 분위기입니다. 기성 세력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예수님에게 달려 가서 "호산아, 이스라엘 왕이시여!"라고 그 분을 환영하는데 합세하는 마음은 과연 어떤 심령일까요?
오늘 본문은, 사로 상반되는 두 세력을 첨예하게 대립시킵니다. 한 쪽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기정 사실화 하고 있고, 또 다른 세력은 군중들을 현혹시키는 그 예수라는 자와 나사로를 제거하려는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리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위도 이해 못하고 있고 또한 군중들의 행위도 이해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려고 합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참으로 엉뚱하게 보입니다. 그 당시 적대세력으로부터 표적이 될만한 행동처럼 보일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군중들의 환호성은 또 뭡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행동이 예수님의 입장을 더욱 위험하게 몰아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 눈에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왕의 흉내를 내는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진정한 왕이 출현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가랴 9:9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권세자들이나 예수님을 환호하는 민중들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들 두 세력의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환호하는 민중들은 그 말씀과 예수라는 인물을 일치 시켜 봤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줄 생각났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도 눈이 있어 군중들이 환호하고 있다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구약 성경에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한 대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군중들의 환호를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영광을 얻기 전에 제자들의 예수님을 보는 태도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고 난 뒤에 예수님을 보는 태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어떻게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요한복음 2:19-22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의 장사치들을 엎어버릴 때 나온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들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무슨 권리를 이런 행동을 하는가? 메시야라면 진정 메시야 다운 증거를 보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말씀이 무슨 뜻일지를 몰랐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군중들이 예수님을 환호하고 또한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보면서도 진정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제자들은 비로소 그 때 그 성전에서 언급하신 예수님 말씀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그 기록의 완성임을 알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제자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한 때의 스승이 아닙니다. 바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모두 예수님을 겨냥한 말씀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기록된 말씀이 바로 큰 확신을 주는 증거가 된 겁니다. 비록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는 자신이 자기를 독려하고 부추기는 식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예수님의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해야 하는 겁니다. 성령님이 임재하게 되면 제자들은 그 때 그 예수님과 늘 함께 살고 다니는 셈이 됩니다. 큰 확신 가운데 말입니다. 이 때부터 제자들은 세상도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 됩니다. 사람이 스스로의 노력과 투쟁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기껏해야 유대인들 수준에 머물고 맙니다.
성경을 열심히 보고 그 내용을 잘 파악해서 예수님과 연결을 시켜보지만 어디까지 또 하나의 추가된 종교 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전적으로 달려가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위의 평판이나 시선을 전적 무시하고 극복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왜 그들의 눈총을 거부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고 예수님 보시기에, 예수님을 왕으로 전적 환영하지 않는 자들은 그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존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을 들녘을 보초서고 있는 허수아비들이 그토록 무섭고 두렵던가요? 참새도 겁내지 않습니다.
혹시 그 허수아비들 중에서 고위 권세자 복장을 한 허수아비나, 재벌처럼 꾸민 허수아비나, 박사 같이 모양새를 낸 허수아비들을 보면 더욱 무섭고 때로는 부럽던가요? 허수아비는 어디까지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사람 취급도 못받고 저주받을 대상일 따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군중들은 전혀 이런 허수아비들을 겁내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라는 문제와 스가랴에 예언된 그 메시야가 바로 자기들 눈 앞에서 나귀새끼 타고 나타나셨다는 사실 뿐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을 다시 봅시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인간들이 개밥 같은 가치도 없는 존재로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정상적인 심령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바로 그 사람 본인의 심령은 현재 위기상황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환영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이 눈치 저 눈치 다 볼 사람입니다. 그저 예수와 아는 사이로만 머물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볍게 무시하고 예수님에게 곧바로 달려갈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 종교 감정이 움직이는 때를 골라서 신과 교제하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기 전의 제자들의 심령 상태와 유사합니다. 성경 지식도 가지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알지만 주위에 둘러싼 세상 권세에 주눅이 잔뜩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의지해서는 아니됩니다. 참된 신앙인은 '기록된 말씀'과 예수님을 바로 연결시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록된 말씀이 기록 된 말씀대로 성취가 되어버렸다는데 뭐가 겁날게 있단 말입니까! 기록된 말씀이 이렇게 엄연히 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제자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강심장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기록된 말씀이 곧 예수님에 의해서 실제로 완성되어 버렸다는 확실한 현실 때문입니다.
즉 그 때 그 나귀새끼 타신 예수님이 자기들과 지금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성령이 있는 성도도 그 때 그 주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그만 주위의 눈치 보지 않고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만을 고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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