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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2:20-26 / 사랑의 열매 (한 알의 밀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2:20-26 / 사랑의 열매 (한 알의 밀알)

정인순 2013. 12. 28. 21:13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90460.mp3

 

 

 

사랑의 열매

2002년 9월 4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2:20-26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12: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하나이다 하니

12: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은 절박하게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안일하게 말씀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오직 모든 말씀의 바탕에 자신의 목숨이 깔려 있습니다. 그 정도로 절박하고 엄중하게 들어야 될 말씀입니다.

 

자, 그러면 어떤 자만이 이런 절박성을 감지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난 뒤에는 본인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시대에서 이런 절박함을 누가 갖고 있을까요? 그것은 "나는 망한 존재이다"고 느끼는 사람일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같이 더 이상 이 세상에 그 어떤 희망도 갖지 않을 사람일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제각기 자신들이 자랑할 만한 능력 같은 것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큰 능력자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한 번 죄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늘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가 나중에 비록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권위있게 비칠지라도 본인은 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라는 그 바탕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해서 그는 핍박받고 배척당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남김없이 전할 수 있었습니다.

 

즉 회개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에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는 법입니다. 남들 앞에서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의 반응을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게 절박함과 엄중함이 있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 걸면서 들려주시는 그 절박한 말씀의 엄중함을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당부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봐도, 절박하고 엄중하기 짝이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25절에 보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성경을 펼치면서도 자기의 행동으로 지켜낼만한 것들에 뽑아서 그것으로서 자신이 신자임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를 보고서는 술을 이미 끊은 사람은 내심 흐뭇해하기 쉽상입니다. 하나님도 당연히 자기편이라는 의식이 들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25절의 말씀을 들고 나오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라고요? 장로 장립식이나 목사 안수식에서 참석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사람이 장로된 것과 목사된 것을 부러워하면서 축하해 줍니다. 그러나 그런 때도, "나는 정말 나 자신이 밉습니다. 이 장로직도 미워합니다. 이 목사직도 미워합니다"고 외치는 자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왜 이런 부담되는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선입견이 삐뚤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즉 그냥 "예수를 믿으면 천국가니까 다들 믿어라"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얼마든지 아무 부담도 없는 "자신은 예수를 믿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기 쉬울 것입니다.

 

사람 하나 새로 사귀는 것이 무어거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실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 믿기를 함부로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즉 화로다 망하게 된 자아를 비로소 알고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달리 이야기 하자면 성도에게는 사랑의 대상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일 수 없고 따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미워하란다고해서 그 '자기 미움'으로 천국에 가고자 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수시로 금식과 회개하는 것과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아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를 계속 요청하는 행사를 벌렸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구원됩니까?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구원의 능력이 따로 나온다는 겁니다. 어떻게 나옵니까? 열매라는 차원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목숨이 남을 구원하는 열매로 나오는 것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된 존재"들의 죽음은 그저 자기 죄 값의 길로 갈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본인만 이 악한 세상에서 탈출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로움이나 자신의 훌륭하심과 착하심을 과시해서 인간들을 기죽이려고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얻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열매를 낳는 씨앗이기에 죽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이 요한복음 10:15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런데 과연 이 방식이 성공할까요? 성공했음을 무엇으로 알까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어떤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겠다고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에 나온 내용입니다. 즉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온다는 것은 곧 아버지 뜻의 성취로 보고 또 예수님께서 제대로 메시야로서 영광받는 증거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0:16에 보면, 이 내용이 나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여기에 보면, '우리에 들지 않는 다른 양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 양들이 어떻게 구원받는단 말입니까? 자기 목숨들을 미워하기 위해서 스스로 학대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유념해야 합니다. 즉 양과 목자 사이에는 인도받는 자와 친히 인도하는 자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스스로 자결한다고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나서자, 예수님은 말렸습니다. 천국에 네가 있을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처소가 마련되면 그 때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는 방식으로 구원하신 겁니다.

 

즉 성도가 스스로 노력하고 애써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의 인도하심으로 인도받아 구원되는 겁니다. 누가 이 말씀을 기쁘게 믿고 따르겠습니까? 요한복음 10:26-28에 보면,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양은 목자를 알아보고 목자는 양을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선행되어 있기에 성도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즉 성도의 사랑의 대상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24-25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부인해야지만 구원해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하는 신앙의 영웅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예수님 사랑하다보니 자기 사랑할 마음의 여유가 없게 하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성도를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만든 작품이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결코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지 않겠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사랑하기 보다는 자기 변명에 급급한 저희들의 잘못된 신앙 버릇을 청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