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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2:1-8 / 가롯 유다와 마리아 (유월절 준비)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2:1-8 / 가롯 유다와 마리아 (유월절 준비)

정인순 2013. 12. 28. 21:11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82158.mp3

 

 

가롯 유다와 마리아

2002년 8월 21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2:1-8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는 두 타입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가롯 유다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이 없는 곳에서 함께 만났다고 한다면 두 사람간의 차이는 그저 개성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혹은 가정 환경이나 성장 과정이 달라서 서로 다른 인생관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더 옳고 누가 덜 옳다고 하는 식으로 판정 지을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이 두 사람이 어떤 행위를 보인다고 생각해 봅시다. 과연 예수님도 그저 각자의 개성 문제에 불과하다고 이해하시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갖는단 말인가! 나름대로 자기 개성있게 살리면 그만이지"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차이나는 것을 자기 만의 개성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와 똑같은 인간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최후에 있을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마다 각기 달라도 심판의 기준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하늘에서 내리시는 심판의 기준은 사람의 다양함을 고려해 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던, 형편이 어떻게되든, 사는 처지가 신앙 생활하기에 곤란하든지 관계없이 심판의 기준은 한결 같습니다.

 

따라서 자신만의 개성 운운 할 것이 아니라 과연 나의 행동과 생각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틀에 맞는 것인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사람이란 어떤 행동을 하면서도 그 배후에는 변명거리를 늘 장만해 놓기 마련입니다. 그 어떤 평가가 들이닥쳐도 나름대로 변명해야 하는 이유 같은 것을 준비해 놓습니다.

 

예를 들면, "살아 생전에 복음은 한 번도 못들어봐서 그래서 복음을 모르고 이렇게 죽게 되었다." 등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런 변명은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본인들이 스스로 다른 기준에 맞추어놓고 개성있게 살아왔던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롯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를 통해서 복음을 접합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단호하게 그 행위를 거부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롯 유다의 품성은 사실 우리 모두의 품성입니다. 흔히 복음, 복음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롯 유다와 같이 복음을 거부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점을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해 우선 가롯 유다의 주장부터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롯 유다와 마리아의 공통점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헌신'했다는 겁니다. 외형상으로 볼 때는 그러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일가 친척을 버리고 자신의 직업까지 포기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사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기댈 곳도 예수님 밖에 없고 의지할 것도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자신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예수님과 더불어 죽겠다고 나선 길입니다. 그는 그동안 예수님의 제자로서 동행하며 병도 고치고 많은 기적을 베풀었던 사람입니다. 누가봐도 그는 '헌신된' 일생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또 그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일반인들의 태도나 행동을 신앙적으로 충고하고 나무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스스로 여긴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하고 나선 겁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마리아야, 그 귀한 것을 단번에 허비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팔아 나에게 맡기면 더많은 가난한 자에게 도움이 줄 수 있지 않겠는가"하고 말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단에 있어 회계 담당입니다. 돈의 출입을 관장합니다. 그러나 그가 노린 것은 예수님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기에게 기대되는 수입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단체가 되어야 한다는 가롯 유다의 주장은 결국 예수님을 앞장 세워놓고 그 예수님을 보고서 기부하는 기부금에 눈독을 둔 사람입니다.

 

이러한 가롯 유다와 같은 심보로 예수를 앞장세우는 행위는 사실상 오늘날 모든 교인들이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사람이란 노동의 댓가를 찾기 마련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일종의 노동으로 여기는 겁니다. 힘들게 예수를 따르고 믿는다면 그만한 반대급부를 당연히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가롯 유다의 제안, 얼른 듣기에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유리하게 작용할 좋은 의견으로 보이지만 그 또한 결국 가롯 유다 개인의 이익과 결부된 발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어떤 마음들을 갖고 예수님을 불러댑니까? 예수를 믿는 그 힘든 노고의 댓가라도 챙겨보겠다는 심보입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를 보세요. 그녀는 값비싼 향수에 일시에 날려 보냈습니다. 이러한 돌발적인 행동은 그녀만의 성격이요 개성입니까?

 

여기에는 가롯 유다가 감히 상상치도 못할 의미가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7절에 보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제가 설교 처음에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말씀드렸지요? 그 기준 앞에서 개성이고 뭐고 소용없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켜 줍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된 행위를 낳는 자만이 심판에서 제외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무슨 마음으로 그 값비싼 예수님의 발에서 떠뜨렸습니까? 요한복음 11장에 보았듯이,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도로 살아났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생명이시고 부활이십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은 허구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참으로 현실에 실제합니다. 마치 마리아의 향수병이 실제하듯이 말입니다. 그 두 실제 사이에는 마리아는 향수를 예수님의 신체에다 과감하게 부어버립니다. 귀하디 귀한 것이라도 더 귀한 것이 존재할 때는 더 귀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면 가리지 않고 소비시켜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즉 향수병에 담긴 향수의 가치는 어느 여인이나 인간의 신체에 바르는 것보다 예수님의 신체를 닦는데 사용되는 것이 향수로서도 최대의 영광스러운 사용인 것입니다. 즉 "비싼 향수가 귀하냐 아니면 진정 예수님의 귀하냐?"하는 식으로 마리아는 대담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생명의 힘, 부활의 힘이야말로 인간들의 비싼 향수의 가치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더욱 더 고귀한 가치를 첨부했습니다. 즉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일보다 더 큰 생명과 부활의 힘을 위해 이제 예수님은 죽으시는 겁니다. 마리아의 귀한 향수가 뿌려진 그 귀한 신체가 보다 더 귀한 대속의 일을 위해 귀하게 희생되는 겁니다. 마치 귀한 향수가 희생되듯이 말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헌신에 그 어떤 반대급부를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그 자체만으로 자기에게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적 태도를 가롯 유다가 보고서는 대뜸 화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라도 그런 마리아 행동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요? 아마 가롯 유다와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위해 경비를 아껴서 가난한 자들에게 배풀면 우리 교회의 이미지가 높아지고 예수님에 대해 좋은 소문이 퍼지면 주의 일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라고 화를 내었을 것입니다. 돈에 미련을 두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핑계대고 사실은 예수 믿는다는 자기 자신의 개성과 명예와 수익을 노리고 있는 심성이 마리아와 같은 행위로 말이맘아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들통나 버리게 된 것입니다. 맞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 만으로만 만족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위 사람들, 일가 친척, 교우, 같은 가족이나 형제, 자매, 자식, 배우자, 부모 할 것없이 다 찡그리게 마련입니다.

 

그동안 예수를 사랑했다고요? 거짓말!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향상을 꾀했겠지요. 복음은 바로 이와같은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그래서 복음 못들었다는 핑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두 가지 타입의 사람은 오늘날 우리 안에 함께 들어있습니다. 본성은 가롯유다이지만 성령께서 충만히 작용하시면 이 가롯 유다의 죄악이 들추어져서 회개케 됩니다. "주여, 주님 만으로 만족케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저희 자신들을 더 사랑한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