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1: 32- 44 / 예수님의 능력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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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능력 2002년 8월 7일 본문 말씀 : 요한복음 11: 32- 44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민망히 여기사 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11: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하더라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성경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안믿고 안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을 그 내용을 알면서도 안 믿게 되면 그 불신으로 인해 책임추궁이 대단하게 무서울 것이라고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안믿고 모르는채 하고 싶을 정도로 예수님은 대단한 일을 하시고 엄청난 말씀들을 나열하십니다. 보통 주부들이 장바구니 들고 시장에 나가게 되면 자신이 원하는 물건만을 골라서 장바구니에 담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만약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으로부터 100억을 그냥 주겠다고 한다면 기겁을 하고 그냥 피해버릴 것입니다.
그저 받기에 너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콩나물 값이나 오이나 양파같은 것은 기를 쓰면서 값을 깍으려고 합니다. 그런 값싼 채소들은 자신의 경제력으로 감당하다고 믿기 때문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 골라서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도움을 얻고자 합니다. 그래놓고 그것을 '믿음'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마치 자기가 감당할 만한 채소류만 사서 장바구니에 담는 주부의 태도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일은 이 인간 세계에서 감히 예상도 못할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그 일하심을 보고서도 그대로 수용 안하게 되면 담박이라도 불신앙자로 낙인 찍일 것만 같은 불안감도 아울러 줄 수 있습니다. 그대로 믿고 따르기에는 자신의 전부를 다 예수님을 위해 바쳐야 격이 맞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과연 참 신앙이 어떤 것인지는 제대로 파악케 합니다.
오늘 본문 32절에 보면 마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에게 따지고 듭니다. 예수님께서 진작 일찍 오셨더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예수님을 원망하고 또 웁니다. 뿐만아니라 주위에 있던 유대인들도 덩달아 웁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문제는 이런 마음 자세로서 예수님을 대하고 예수님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본인이 이런 인간들의 태도를 보고 울어버립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왜 우시는지 그 심정을 동참되는 심정을 가져야 참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8:21-22에 보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부친이 죽었는데 그 최후를 자식이 거두어주는 것이 천륜이요 인륜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도발적인 말씀을 해버립니다.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고 너를 나를 따르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이 인간 세계에서 무엇을 남기고 어떤 일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고린도후서 5:17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 혹은 '새 것'이라는 것은 어떤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겁니까? 골로새서 1:16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기에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가기 위해 창조된 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취지를 모르고 마리아 가족과 주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치성에 의심을 품으면서 크게 실망했다는 식으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례식장에서 우시는 것은 마리아의 아픔에 동참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감잡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의 무지가 답답해서 우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아쉬운 점에 대해서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주부들이 장바구니에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찬거리만 담듯이 인간들이 예수님을 보는 눈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만 죽음이 찾아드니 그 오빠의 죽음을 인간들은 감당할 수 없어 예수님에게 실망감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 이러한 태도를 갖는 인간의 모습은 원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란 태어났다고 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치 있는 인간입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인간만이 하나님보시기에 참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점을 인간들이 모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나타나신 것은 새로운 피조물, 새 존재로 만들어 주기 위함입니다. 기존의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색이 다 드러나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장담하는 자들이 결국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예수님의 힘을 이용하려 했다가 그것마저 실패로 돌아갔을 때 어김없이 예수님에게 대들며 본색을 드러내게 하는 현장을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 현장에서 예수님은 자신만의 행하실 수 있는 새 사건을 일으키시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주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등장시키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돌무덤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군상들과 그리고 돌무덤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과 대비시키는 일을 하시고자 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돌무덤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어떤 유대인들이 이런 소리를 합니다. 37절에 보면,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아무리 소경의 눈을 뜨는 재주가 있다할지라도 사람을 죽지 않게 못한다면 그런 자는 진정 믿을 만한 자로 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 이런 인간이 바로 신이나 예수님을 이용하자는 식으로 대하는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겁니다. 돌무덤에 가까이 오니 마르다가 이번에는 이런 소리를 합니다. "주여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서 썩는 냄새가 납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기에 기껏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으로 여깁니다. 주부들이 장바구니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물건만 담고 집으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이런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현장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보여줍니다. 시체인 나사로보고 이렇게 외칩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은 나사로는 오로지 예수님이 던지신 말씀의 능력으로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은 나흘이라는 부패의 시간마저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단단히 동여맨 베옷도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의 불신앙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 것이 된 자만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자녀이요 신앙입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살까에 대해서 궁금하십니까? 다시 살아난 나사로에게 물어보세요. 그가 무어라고 답변하겠습니까? "저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살아났습니다. 이것만 증거할 따름입니다"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41-42절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즉 처음부터 그리고 평소에도 예수님은 그만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들 앞에서 하나님께 새삼스럽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시는 것은 예수님에게 이만한 능력이 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인정받은 것임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립니다마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인간은 예수님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났기에 온전히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이렇듯 충격적인 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전부를 버리지 않은채 믿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정상이 아님을 확실히 아셔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과연 우리 자신이 참 인간이며 참 신앙인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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