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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1:45-53 / 생명과 죄인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1:45-53 / 생명과 죄인

정인순 2013. 12. 28. 21:09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81457.mp3

 

 

이근호

 

생명과 죄인

2002년 8월 14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1:45-53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1: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우리가 알기에도 이 땅에서 예수님은 많은 도움과 착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사람들이나 권세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후원해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선한 일에 대한 대가라는 것이 예수님을 죽여 없애겠다고 나섭니다. 우리가 예수님 입장에 한 번 되어 봅시다. 그러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성의와 정성을 다하여 이웃을 위하여 희생적 삶을 살았건만 완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 은혜를 악으로 갚겠다고 나섭니다.

정말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의 심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당시 집권자들이나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의한 것은 실은 하나님의 원대한 스케줄대로 진척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인간적인 면으로 봐서는 대중들에게 등돌림을 당한 것이 참으로 섭섭하겠지만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일을 제대로 추진해 가는 한 과정이 됩니다.

 

오늘 본문 50-51절에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것을 미리 말함이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 터져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도 실은 하나님께서 꾸준히 실행하는 작업의 일부로서 그들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마태복음 5:11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이 성경 속에 그냥 박혀 있을 때는 "믿습니다, 믿습니다"하고 장담하다가 막상 참으로 이 말씀이 현실로 우리 성도에게 실시될 때는 그저 뒤틀리는 심사를 가지게 마련입니다. "하필이면 나입니까?"하는 식으로 반발심이 튀어나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아직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 보통 인간들이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규정할 때 어떤 식으로 합니까? 주로 남과 비교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아, 저 사람은 나보다도 낫구나"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면서도 또는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못하다"하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인간은 같은 인간들 끼리 행한 것들을 내어놓고 견주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알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자신의 모습은 외부의 권위있는 분에 의해서 걸정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 중에는 자신이 남자이면서도 여자 아이 노릇하기를 더 좋하하고 반대로 여자 아이이면서도 남자 아이들 하고 놀기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애말고 외부에 있는 있는 인물 즉 엄마가 남자 옷을 입혀 그 애는 무조건 사내 아이요, 여자 옷을 입혀주면 무조건 딸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자아상이 있을 지라도 우리 외부에 계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진정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이 제시하는 인간상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를 높여 자아상으로 삼는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과 같은 인간이 됩니다.

 

즉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에 조금이라도 방해물이 된다고 싶으면 가차없이 공격하려 들 것입니다. 예수가 되었든 하나님이 되었던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파악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는 그 방식의 의미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겁니다. 즉 우리 성도가 얼마나 못났으면 죄없으신 분이 대신 죽어야 될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건지시는데 취한 조치가 바로 한 사람을 대신 죽이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버림받았습니다. 그 분이 왜 하나님 자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습니까? 그것은 그 분에게 이전에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이 바로 우리들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들이 자신들의 죄를 그대로 지닌채 하나님 앞에서 섰다고 여깁시다. 우리에게 주어질 평가와 조치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천 번, 만 번 버림 받고 또 버림 받아도 마땅한 존재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가 당할 저주와 버림받음과 정죄당하심을 홀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는 사실을 통해 진정 우리 자신의 본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자아의 모습을 외면하고 다른 면으로 자기 자신을 정립하고자 한다면 결국 예수님을 불필요하게 여겨 차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세사장과 권력자들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이 죄인에게 어떤 것으로 접속하는 가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좋은 한 예가 열왕기상 17:10에 보면 나옵니다. 엘리야 선지가 시대입니다. 사르밧 동네에 한 과부와 한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온통 가물어서 그 가족도 굶어 죽기로 작정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떡을 해먹으려고 할 때에 갑자기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만약 그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나에게 떡을 해주면 앞으로 가뭄이 계속되는한 이 가정만큼은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닳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과부가 이 말씀을 믿고 마지막 남은 가루로 떡을 해서 엘리야가 잡수시도록 하니 과연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밀가루와 기름이 계속 생겨났습니다. 아마 그 과부는 이것이 하나님이 내리신 생명의 축복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를 보내어 계속 자기 가족을 살려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귀한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이시는 겁니까? 선지자를 보내어 풍부한 밀가루와 기름으로 그 가족을 살리겠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이제와서 그렇게 살리고자 하는 아들을 친히 죽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 아들의 어머니는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보고 하는 말이, 내 아들을 죽이기 위해 당신이 왔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여러분, 밀가루와 기름을 계속해서 제공받는 것이 과연 생명입니까? 과부는 아직도 하나님이 염두해 놓으신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왜 몰랐을까요? 그것은 진정한 생명이란 진정한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나의 죽음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죽어야 마땅한 가치에 불과함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존재이기에 계속 살아야만 한다는 그 고집이 무너져야만 합니다.

 

항상 그만 살고 죽을 수 있는 대상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 엘리야 선지자는 그 과부 가정을 죽이려 온 것이 아니라 살리려 왔습니다. 살리기 위해서는 기존 자기 생명의 집착 정신을 파괴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그저 고요히 죽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식으로 남은 세월을 보내는 순한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사무엘하 11:21에 보면, 다윗은 남의 아내를 간음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간음한 그 여인의 남편인 우리아 장군까지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시편 51편에 보니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를 구원해 내십니다.

 

이 다윗의 경우에서의 생명과 죄의 만남은 곧 다윗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희생물과 다윗의 살인 의지와의 만남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자와 죄인의 만남입니다. 인간의 살고자하는 의욕은 본인의 의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타인을 살해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배출됩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조기에 죽이겠다는 대제사장의 제안과 거기에 동조하게 될 민중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와는 딴 동네의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성은 현재 우리가 지닌 동일한 인간성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미화하기 바쁘고, 자신을 멋진 사람, 잘난 인간으로 상상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보고 말하기를, "네가 그런 마음을 지녔기에 늘 살인자 될 소양이 가득하다"고 찔려댄다면 우리는 그 사람마저 살해하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모르고 자신이 상상한 자아상으로 평생을 버티려고 하다보니 진정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자아상을 잊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도록 하나님께서 계획 잡아놓으신 것은, 진짜 자기 백성들만이 그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본질을 파악해주기 위함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알게 된 생명, 그리고 다윗이 알게 된 생명, 이 모두는 죄를 더욱 죄되게 해서 구원이라는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함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아직도 밀가루 통에 밀가루를 채워주는 일이나 기름병에 기름이나 채워주는 식으로 축복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죽여서도 되는 자를 그냥 죽이시지 않으시고 되레 사랑으로 건져놓으시는 것이 사랑이요 생명인 것을 아는 자가 진정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고 예수님을 이용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예수님의 생명인 것을 우리가 자랑스럽게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