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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1:17-27 / 예수님과 부활 (죽음과 믿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1:17-27 / 예수님과 부활 (죽음과 믿음)

정인순 2013. 12. 28. 21:07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72455.mp3

 

 

예수님과 부활

2002년 7월 24일

본문 말씀 : 요한복음 11:17-27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부활이란 그 전에 사망이라는 상태가 먼저 일어나게 됨을 말해 줍니다. 따라서 사망이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보느냐에 따라 부활도 다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르다와 예수님은 서로 이 사망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의 사망과 부활 의식을 조사해 본다면 어쩌면 오늘날 인간들이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부활과 사망관이 엄청나게 잘못되어 있음을 말해주게 됩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든 '나'라는 존재를 계속 살려보자는 의도로서 사망과 부활을 생각한다면 이는 마르다의 생각인 동시에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방신을 믿고자 하는데도 이런 의도를 가질 것이 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르다와 그리고 유대인들은 은근히 예수님에 대해서 못마땅한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낼 의무가 있고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만약 나사로를 원상복귀 시키지 않으면 그 잘못은 하나님 아들로서의 주님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견해는 다릅니다. 만약 나사로가 진정 죽은 것이라면 현재 살아 있는 너희들도 죽어 있는 셈이 되고 만약 나사로가 살아 있는 거라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도 사나 죽으나 상관없이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입니다.

 

나사로 가족은 죽은 오빠 걱정하고 있는 데 반해서 예수님은 소위 아직 안 죽고 살아있다는 대중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평소에 부활에 대해서 크게 잘못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3-24절에서 보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르다는 오로지 오빠 생환에만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사람이, 특히 성도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 언급한 대목들이 있습니다. 시편 17:15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자...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보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성도가 죽고 난 뒤에 다른 세계가 없는 줄 알았는데 죽음에서 깨나고 보니 전혀 낯선 세계에 도착해 있는데 이 세계가 바로 주님의 세계이고 거기서 그 주님이 찬란한 형상을 보니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을 정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아마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쉽상입니다. "아, 나라는 존재를 계속 살려내려면 주님을 믿으면 되겠구나. 주님을 믿고 죽는 자는 영원히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잠 깨듯이 다시 깨어나는데 그렇게해서 깨어나보면 주님의 영광으로 인해 행복한 영생의 삶을 누리는 혜택을 입는구나"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나'라는 인간의 가치성을 계속 보유하고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 12:2절 같은 말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견해를 갖기 쉽습니다. 거기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죽게 되면 죽은 자 가운데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장차 메시야, 곧 주님이 오시는 마지막 날이 되면 이 모든 것이 다 실현된다는 겁니다. 이런 부활관을 바로 마르다가 같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을 누구로 보느냐 하면 바로 구약 말씀과 구약에서 예언된 그 부활을 성취할 주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활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님께서는 죽음을 만나기 전에 오빠를 살려내지 않았느냐고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21절에서 마르다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게 대들고 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입니다. 나사로는 평소에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했던 자이고 또한 예수님도 나사로를 보고 친구라고 하면서 그 사랑을 인정한 터입니다.

 

그렇다면 젊은 나이에 졸지에 횡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 부활의 주님다운 처신이 아니었습니까? 바로 이 점에 대해서 마르다와 예수님은 서로 의견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현재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리고 제자들이나 유대 사람들은 사망이나 부활 그 자체에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사망이나 부활의 관념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고 예수님은 보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오빠 나사로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친척이나 배우자는 친구가 죽는 것을 사람들은 왜 애통해 합니까? 그것은 평소에 그 사람에게 살 가치가 있었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뭔가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데 그 사람이 죽어버리니 그 가치가 졸지로 공중 분해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아까워서 원상회복을 간곡히 원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따져 봅시다.

 

나사로가 가치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가치 있는 겁니까? 나사로가 꼭 부활되어야 될 인물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부활이시면 그것으로 족한 겁니까? 마르다는 오빠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치란 단지 오빠의 가치를 되돌려 놓는 것에 있는 겁니까? 과연 그러합니까?

 

사람이란 나름대로 꼬깃꼬깃 감추어놓은 자기의 의와 가치를 절대로 남들에게 안 빼앗길려고 애씁니다. 심지어 하나님에게도 안 빼앗기려고 합니다. 이런 정신상태로 사망을 논하고 부활을 논하니 예수님의 부활관과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자... 나사로가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될까요? 먼저 예수님의 경우부터 봅시다. 마태복음 16:21에 보니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즉 예수님은 자신은 죽임을 당하고야 부활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베드로는 주장하기를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아니된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왜 저지에 나서는 겁니까? 그것은 가치있는 분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된다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예수님은 인간들의 이런 잘못된 가치관을 뒤엎기 위해 소위 그들 보기에 가치 있게 보여지는 자신조차 정말 무가치한 죽음으로 사라져 버리려 하신 겁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볼 때 '가치있음'은 잘못된 '가치있음'이기 때문에 차라리 사라지고 그 가치성을 무가치함으로 부서져 버려야 그들의 가치관을 전복시킬 수 있는 겁니다. 마르다가 보는 오빠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는 이런 예수님의 새로운 가치관 전복을 위해 그는 졸지에 병으로 횡사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과 여동생의 잘못된 부활관과 잘못된 예수님 관의 교정을 위해서 말입니다. 죽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오빠를 주님께서 일부로 죽도록 방치하시는 것은 그저 오빠의 가치만 중요할 줄 알았고 또한 그 가치를 위해서 예수님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잘못된 신앙들을 수정해 주기 위함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시편의 이야기나 다니엘의 예언은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있음에서 오는 큰만족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큰 만족이란 바로 예수님의 가치성만을 바라보는데서 오는 큰 만족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25-26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게 계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즉 오빠 살아나기만에 관심두거나 거기에 관련된 예수님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 자체가 곧 구약 예언의 완성인 그 상태인 것을 생각하면서 관심갖고 또한 대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을 미래의 일로 넘기지 말고 지금 너희 눈 앞에 부활 그 자체이신 분이 있기에 만족하라는 겁니다.

 

불신자들이 이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게 되면, 장례식장에서 왜 신학 토론이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산자나 죽은 자나 예수님과 사귀고 있는 자라면 어느 상태와 관계없이 구약의 부활 예언의 완성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행여 마르다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의 가치가 혹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기대하는 것들을 획득하는데 써먹으려고 한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결코 예수님 그 자체만으로 만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잘못된 부활관과 영생관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잘못을 수정할 생각은 안하고 막무가내로 내 뜻만 성취되기를 간구한 적은 없습니까? 그저 예수님이 부활하고 생명인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