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1:11-16 / 예수님과 죽음 (예수님의 일) 본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71754.mp3
|
이근호
예수님과 죽음 2002년 7월 17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1:11-16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천국의 아름다움은 모든 세상이 끝날 때에 비로소 전체적으로 덮쳐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천국 활동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수시로 천국의 요소가 발생됩니다.
그런데 인간 세계에서는 이러한 천국의 현상에 대해서 제멋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벌리신 일에 대해서 제자들은 엉뚱하게 해석하게 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대해서 예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1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이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전에 나사로에게 찾아가서 나사로가 죽기 전에 살려내고자 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제자들에게 위해서 더 낫고 기쁜 일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맏음'이 무엇인지 분명해지기 때문이랍니다. 만약 나사로가 죽기 전에 달려가서 그를 죽음에 이르지 않게 했다면 그것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 이상하게 들리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면서 어떤 점이 기뻐할 만한 일이냐 하면, 기존의 모든 사고방식을 내팽개치고 오로지 예수님만 믿는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기존의 모든 사고방식을 안버리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할 때는 전혀 예수님에게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기쁨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황당하기 짝이 없고 난처하기 짝이 없이 일이 자꾸 유발되는 겁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비로소 주어진 것과 생길 수 있는 것만을 고수할 때, 이 때만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 새롭게 주어진 것과 생길 수 있는 것은 결코 인간이 이미 알고 있는 바와 섞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의 것을 챙겨봐야 하나님은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자신의 것을 안 버리려고 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원하시는 기뻐하는 믿음의 상태라 볼 수 없지요.
이러한 고집과 마음 가짐이야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기에 예수님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제대로 된 믿음을 갖고자 시도하시는 겁니다. 우선 예수님은 인간과의 개별적인 관계를 제자들 앞에 제시하게 됩니다. 그 개별적인 일이란 다름아닌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는 죽여버리는 일입니다.
즉 죽음이야말로 참으로 개별적인 일의 극치입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무리지어 집단화 된 채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을 하나님이 개별적으로 죽이신다고 한다면 이웃에 있는 그 어느 누구가 그 죽음을 가로막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인간들의 사회상이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협동적입니다.
빌딩을 세운다든지, 도로를 만는다든지, 전쟁을 치른다든지, 학생을 교육한다든지 무슨 일을 해도 혼자서 할 수 없고 협력해서 하게 됩니다. 이 협력 정신이 인간에게 뿌리 깊게 박혀있습니다. 가정이라는 집단과 "아~대한민국"라는 국가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서의 윤리와 도덕이란 항상 인간과 인간간의 교제와 협력과 협동을 증진시키는데 유리한 방향으로 정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와중에서 누구 하나가 죽는 사건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누가 과연 도와줄 수 있습니까? 일가 친척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정한 가족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비로소 인생이란 철저히 개별적 위치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위의 사람들이란 그저 죽고 난 뒤에 그 개별적인 신체를 흙 속에 파묻을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 개인을 개별적으로 죽여나가므로서 인간 체제의 한계성으로 폭로시키십니다.
즉 집단 속에 '나'가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개별적인 죽음이 찾아오게 되는 그 관계야말로 진정 인간의 뿌리요 근원입니다. 누가복음 13: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인간 사회에는 죽음 문제를 집단적인 입장에서 보려고 합니다. 즉 "이 집단에서 대다수의 인원들은 살아남았는데 왜 저 소수의 인물들은 운 없이 죽었는고? 그들은 필시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기에 우리들 하고는 차별되게 죽었을 것이다"고 해석하는데 이것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망대가 무너져 죽은 18명은 개별적으로 볼 때에 살아남은 자들의 인간과 결코 차이나는 점이 없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즉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흔히 죄값으로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고 간주하는 존재같이 취급받는다는 겁니다.
교회가 커지고 모여든 교인들로 교회 분위기가 흥청거릴 때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개별성을 잃게 마련입니다. 교인끼리 서로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될 수 있기를 생각하게 되지, 결코 개별적인 죽음으로 각 개인을 다루시는 그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 안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믿음'이 없는 자가 되고 '예수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지 못합니다. 아마 교회 부흥을 통해 인간들 자기들 끼리는 기분 좋을 겁니다. 그게 망하는 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를 일부로 죽게 방치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나 '집단'이 주는 안정성을 믿고 의지하고 유지하려는 생각을 버리게 하고 예수님의 진정 이 땅에 나타나신 의의를 되찾기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나사로의 개별적 죽음 사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끌고 들어가시려고 하는 겁니다. 믿음이란 이처럼 그 중심에는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통과하려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은 개별적으로 다 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죄 씻음 받은 채로 죽게 되느냐 아니면 죄 씻음을 받지 못한채 그대로 죽게 되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죄 문제가 죽음 문제보다 더 다급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단순히 개인적으로 죽음을 지연시켜 주거나 목숨 연장 책이 예수님의 일의 초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처형받으실 때에 십자가에 같이 죽었던 강도를 생각해 보세요. 그에게 있어 죽음문제 보다 앞서 예수님이 행하신 죄 씻는 문제를 우선했습니다. 그랬더니만 천국에 가지 않았습니까. 이 강도의 경우가 역시 우리의 경우로서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우리에게 찾아들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사로의 죽음은 그저 나사로 개인에게만 국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될 12제자들 모두의 신앙문제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가 죽음을 극복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k? 로마서 10:9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하나님의 구원방침은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각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기껏 배운 것은 이것입니다. "죽으면 인생 실패작이고 무조건 낭패스러운 일이다"라는 철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실패도 아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인간 각자에게 있는 것을 아느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중요한 것과 인간들이 중요시하는 것이 만날 때 여기에 대 충돌이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21:4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이 돌은 역시 예수님 뿐입니다. 나를 깨어지게 하시는 돌로서 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우리가 믿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면서 "깨우러 가겠다"고 나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어 쉬는 상태를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운다'의 의미와 제자들이 생각하는 '깨운다'는 의미가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었던 의미가 포기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22에서도, 소녀가 죽은 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잔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진정 깨어나야 할 사람은 실제로 죽은 나사로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안믿는 우리들이 진정한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기존의 생각을 다 버리고, 아니 예수님에 의해 다 깨어지고 예수님 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는 전도란 사실상 남을 "깨우는" 일입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다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과연 이 무리 가운데 누가 개별적으로 깨어날 자입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시고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그 빈 자리에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만 채워지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한복음 11: 32- 44 / 예수님의 능력 (0) | 2013.12.28 |
|---|---|
| 요한복음 11:17-27 / 예수님과 부활 (죽음과 믿음) (0) | 2013.12.28 |
| 요한복음 11:1-11 / 영광을 위한 죽음 (0) | 2013.12.28 |
| 요한복음 10:31-39 / 참 신 (0) | 2013.12.28 |
| 요 10:19-30 / 양 (목자의 음성) (0) | 2013.12.28 |
